그리움의 유효기간 한달
아내가 캐나다에 있는 아들 집으로 간 지 36일째입니다. 106일의 일정으로 갔으니까 이제 약 1/3이 지났습니다. 평일에는 혼자 있고 주일에는 손자들이 와서 점심을 같이 먹습니다. 나의 사정을 아는 많은 사람들이 걱정을 하며 물어보는 말은 “밥은 잘 해 먹고 있는지?”입니다. 그때마다 나의 대답은 “아내 없이 밥 해먹고 살림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먹고 싶은 반찬이 있으면 사먹든지 인터넷을 찾아보고 얼마든지 만들어 먹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외로워서 옆구리가 시리다는 것입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처음에 아내를 인천공항에 데려다 주고 집에 와서는 보고 싶어서 울고 싶을 지경이었습니다. 처음 얼마간은 face talk라는 것을 통해 얼굴을 보고 대화를 나누는데도 혼자 남으면 외로움이 나를 에워쌌습니다. 전파를 통해 대화를 나누고 화상으로 얼굴을 볼 수 있다 하더라도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 굉장한 허전함으로 남습니다.
그런데 그 애틋함의 유효기간이 한 달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30일 정도 지나니까 이제 이성적인 위로가 나에게 먹히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아직 영원히 떨어진 것이 아니다. 조금 기다리다보면 다시 만나서 다시 이전과 같이 함께 산책하며 함께 밥상을 차리고 함께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생각이 나를 위로합니다. 이제 못 견디게 그리운 감정이 참아집니다. 한 달 정도 지나 마음의 평정이 찾아진다는 것이 참 다행입니다.
이전에 딱 20년 전에 아들을 미국으로 유학보낼 때도 그런 감정이 있었습니다. 그때의 일기의 한 구절이 이랬습니다. “네 방에서 너의 냄새를 맡는다. 방안 가득 차 있는 너의 냄새가 삼투압처럼 몸을 짓누른다. 네가 만지던 물건들, 네가 하던 말들, 너의 스타일 … 모든 것들이 정으로 다가온다.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한가지 한가지 네가 이곳에서 살았던 방식 그대로 따라하고 싶다. 내 가슴에 네가 이렇게 크게 자리할 줄은 몰랐구나. 네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기대감을 갖게 하더니, 밤중에 자다가 깨어 우유병을 물리던 기억 같은 것들이 차곡차곡 주마등처럼 다가오는구나.”
그때도 한 달 정도는 혼자 울음과 그리움을 참아냈습니다. 그때 아들 방에서 눈물을 참아내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런데 그때도 한 달 정도 지나니까 물리적 거리가 현실로 다가오고 가끔 국제전화를 통해 소식을 주고받는 것이 선물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가끔 보내오는 사진을 통한 소식이 삶의 활력으로 여겨졌습니다. 이제는 아내와 아들 둘을 한 곳에 두고 가끔 소식 듣는 것이 기다림에 대한 선물처럼 여겨집니다.
애틋한 그리움의 유효기간이 한 달이라는 것이 감사로 다가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감정을 그렇게 창조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냄새에 적응하는 코의 유효시간이 불과 몇분이어서 처음 화장실에 가면 냄새가 심하지만 조만간 그 냄새에 익숙해서 불편함을 잊어버리는 것처럼, 우리에게 그리움의 유효기간을 한 달 정도로 정해주셔서 억누를 수 없는 그리움을 이성으로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 참 다행입니다. 다시 만날 때까지 매일이 쓰리다면 견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내가 보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다시 만날 기약을 가지고 일상을 유지하며 기다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직 사별을 하지는 않았으니 그때의 감정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생각이 나를(또는 아내를) 몇 달이고 사로잡지 않기를 원합니다. 천국에서 다시 만나는 소망이 그리움의 유효기간을 한 달 정도로 만들어주기 원합니다. 감정을 가진 인간이기에 헤어지고 나면 못 견디게 그리울 사람이 있겠지만 지금 사별한 사람이든 앞으로 사별할 사람이든 너무 깊은 슬픔에는 잠기지 않기 원합니다. 슬픔보다는 천국에서의 소망이 더 크게 다가오기 원합니다. 우리에게 그런 소망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202206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