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성별
성경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책이 아니라 믿는 자들을 위한 책이다. 성경이 지상에 있는 책들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 있는 책인 것을 아는 사람은 구원받고 말씀을 매일 묵상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성도들뿐이다. 하나님께서 교제를 허락하신 성도들이 바로 그들이다. 성도들 중에는 구원을 받고서도 세월이 지나면서 영적 침체에 빠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성별하고 섬기며 헌신하여 주님의 사역에 쓰임 받는 성도들도 많다.
주님께 쓰임 받는 종들은 높고 낮은 자가 있는 게 아니라 누가 자기 생애를 전부 드리느냐에 달려 있다.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눅 13:30).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헌신했다면 그것은 진정한 헌신이 못된다.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사역에 뜻을 두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알고 싶어 한다. 이 일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좋은 자세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하는 사람은 먼저 하나님께 헌신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나님의 뜻을 보여 주신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헌신이란 구약 시대의 제물과 같은 성격이다. “주님, 나를 목사로 써 주소서.”라고 했다면 그는 헌신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소원을 이루려는 욕망을 가지고 말씀드린 것이 된다. 헌신은 글자 그대로 “자신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주님께 드리는 일”이다. 이때 드리는 자가 “이렇게 저렇게 써 주십시오, 아프지 않게 배려해 주소서, 절반만 써 주시고 나머지는 세상에서도 알려지게 하옵소서”하는 심정을 지녔다면 그것은 온전한 헌신이 될 수 없다. 성도가 온전히 헌신했다면 주님은 그에게 하나님의 뜻을 보여 주신다. 이때 자기의 뜻을 이루려는 생각이 강하다면 주님께서 그에게 뜻을 보여 주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섬세하시고 우리들의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시기에(롬 8:27) 우리의 심향과 자세와 추구하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누구를 어디에다 어떻게 쓰실 것인가에 의문을 제기할 사람이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이집트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나와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려고 파라오의 궁전에서 모세를 끌어내셨던 경위를 보면 우리가 감탄을 금할 수 없게 되지 않던가! 주님은 그처럼 치밀하시며 한 번 정하시면 그 누구도 그분의 뜻을 좌절시킬 수 없다.
하나님께 헌신하려고 작정한 사람이라면 구약의 족장들, 선지자들을 부르시고 들어 쓰신 주님을 상상하면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말도 잘 못하는 모세에게 나무막대기(출 4:17) 한 개를 갖게 하셨을 뿐이다. 주님은 그 나무막대기로 약 2백 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과 그들에게 딸린 가축들을 데리고 홍해를 마른 땅 같이 건너게 하셨고, 광아에서는 바위를 쳐서 물을 얻게 하셨으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을 가리어 주셨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불을 밝혀 주셨다. 그 후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여호수아를 선두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열두 지파들에게 땅을 분배하게 하시어 젖과 꿀이 나오는 그 땅에서 안주하게 하셨다.
출애굽 이전을 보면 족장 아브라함이 100세 때 얻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게 하시려고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아브라함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했다(창 22:1). 아브라함이 이삭을 묶어서 제단의 나무 위에 올려놓고 칼로 죽이려 했던 그 순간에도 아브라함의 이름을 부르시니 아브라함이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했다(창 22:11).
그 후 이삭이 늙어 에서에게 복을 빌어 주려고 에서를 불렀을 때, 에서도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했다(창 27:1). 하지만 에서는 앞서 간교한 야곱에게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과 바꾼 어리석음을 범함으로 인해 복을 받지 못했다. 그 후 하나님께서 야곱을 시리아 하란으로부터 가나안 땅 벧엘로 돌아오게 하시려고 불렀을 때 야곱은 “내가 대답하기를 여기 있나이다”라고 응답했다(창 31:11). 그 후 야곱이 요셉을 양떼를 치는 세겜으로 심부름 보내기 위해 불렀을 때 요셉은 그 길이 아버지와 헤어지는 것도 모르면서 “내가 그리하겠나이다/Here {am I}(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했다(창 37:13).
이것이 헌신의 자세이다. 어떤 성도가 헌신하는 것을 보신 후 그를 특정한 사역에 심으시려고 부르셨을 때 첫째 반응은 “보소서, 주님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이 말에 함축된 뜻은 “나는 내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기 원하오니 주님 뜻대로 쓰시옵소서”이다.
이때 그의 자세는 어떤 시대적 변형이나, 가정 환경이나, 건강 문제나 금전 문제를 자신이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전지전능하신 손에 맡겨드리는 것이다. 만일 육신적이고 말씀을 공부하고자 하는 열성이 없거나 성품이 게으르거나, 일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헌신을 한다고 고백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헌신은 받으실지라도 시키는 일은 주님께서 정하신다.
헌신에 앞서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이 성별이다. 성별하지 않은 성도는 헌신하지 않는 것이 상례이다.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성별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교회에 다니는가 보라! 그들이 헌신 한다고 해서 받아주시겠는가? 주님께서 성도들의 성별을 얼마나 바라고 계시는지 알 라.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딤전 6:3-5).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롬 16:17).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살후 3:14).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요이 1:10).
이렇게 헌신한 성도가 설교자가 되고 싶다면 다음 사항을 고려하고 그에 합당한 역량을 갖추었는지 살펴야 한다.
첫째, 먼저 거듭난 사람이어야 한다. 스코틀랜드 목사였던 토마스 찰머스(Thomas Chalmers)는 거듭나지 않고 10년간 설교했다. 하슬람 목사는 자기 설교로 거듭났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막 12:30).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5).
셋째, 잃어버린 혼들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야만 한다. 세상에서 할 공부도 없고 일도 없기에 하나님의 사역에 기웃거리는 자세는 안 된다. 생계형 목회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세상의 천직들은 잘하면 어깨너머로 배울 수 있을지 모르나 영적인 일은 어깨너머로 배울 수 없다.
넷째, 성경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학생이어야 한다. 이 말은 과정만 수료하고 학위만 받는 것이 아니라, 신학교 3년-4년 과정을 이수하는 가운데 성경 어디에 어떤 말씀이 있다는 정도는 알아야 하며, 교과서 외에도 많은 책들을 읽고, 성경 구절을 많이 암송하고, 적어도 200편의 설교를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다섯째, 기도의 사람이어야 한다. 이미 기도로 주님과 교제해서 응답받은 경험들이 있어야 한다.
여섯째, 깨끗한 생활을 유지할 자신이 있어야 한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 5:14,15).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요일 2:15-17)을 포기할 수 있는 지 자신을 시험해야 한다.
(1) 영적 은사가 있는가? 설교자로 적합한가?(고전 14:1; 12:3, 딤후 1:6)
(2) 육체적으로 적합한가?(요삼 1:2)
(3) 정신적으로 적합한가?(딤후 1:7)
(4) 교육적으로 적합한가를 점검해야 한다.
옛날 범선들은 바람을 받아야 항해가 가능했었다. 배가 항해를 하다가 무풍지대에 있게 되면 꼼짝없이 망망대해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한 번 상상해 보라. 그 일이 얼마나 지루했겠는가? 그때가 더운 계절이나 많이 추운 겨울이었다면 어쨌겠는가? 그러다가 바람이 불어 항해가 가능했다면 얼마나 기뻤겠는가? 그 배의 선원들은 그 경험담을 그의 생애 동안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가족이나 찬구들에게 이야기해 줬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도 그런 무풍지대처럼 영적 침체가 올 때가 있다. 어떤 사람에게 영적 침체가 오는가?
1.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다른 내외적 환경 때문에 성경을 며칠 동안 못 읽게 되었거나, 기도할 수 없는 기간이 며칠씩 되었다면 그는 성경이 필요 없고 기도가 필요 없는 사람으로 변모된다. 그리스도인은 거듭난 성도이기에 속사람의 생명이 이어지려면, 겉사람이 육신을 위해 음식을 하루 세 끼 먹고 숨을 쉬어야 살 수 있듯이, 말씀을 규칙적으로 읽고 기도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
2. 성도가 세상 친구들이나 직장 동료들과 어울려 세상 풍조에 한 번 젖게 되면 그는 그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 세상과 한 번 타협하면 마귀는 점점 더 많은 기회를 준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3. 오랫동안 자기가 기도했던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취직, 사업, 갈등, 질병, 회복 등) 자기도 모르게 해방감에 취해 영적 침체에 걸릴 수 있다.
4. 그와는 반대로 자기의 역량으로 감당할 수 없는 사고, 질병, 재앙이 닥쳤을 때 자기의 신앙으로 극복하지 못한 채 실의에 빠질 수 있다.
5. 믿음의 본으로 삼았던 성도가 실족하거나 세상적으로 사는 것을 보았을 때, 그가 실행한 모든 것이 믿음의 기반 위에서 이루어진 진리인 줄 알았는데 그게 가짜로 드러났을 때 영적 침체에 빠질 수 있다.
성도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영위한다면 주님께서는 성도와 항상 함께하시며, 버리지도 떠나지도 않으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주님께 쓰임 받는 종은 성별하고 주님께 헌신해야 한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 사람의 생애를 관장하시고 들어 써 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