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보다 중요한 것 성별
복음 전파 사역보다 더 소중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상 사역을 마치고 승천하시기 직전에,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여 주님의 증인이 되라고 명령하셨다(행 1:8, 막 16:15). 예수님께서는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헤매시는 분이다(눅 15:4). 한 죄인이 회개하면 하늘에서 큰 기쁨이 있다고 말씀하셨다(눅 15:10). 참으로 천하보다 귀한 한목숨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죽으셨다. 그러므로 참다운 전도, 즉 구령하는 것은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그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있다. 구령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구령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심지어 성경의 모든 말씀들을 구령에 맞춰 가르치고 설교하는 사람이 있지만, 성경은 구령만을 위해 쓰여지지 않았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상으로, 그분의 재림과 그분의 왕국에 대한 예언이 훨씬 많다. 그리고 그 예언들을 뒷받침해 주기 위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하심이 항상 강조되어 있다. 성경의 모든 위대한 인물들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선포하며 영적 전쟁을 수행했다. 그리고 그 이면에 깔려있는 사상은 “성별의 정신”이다.
다니엘을 예로 들어보자. 다니엘은 멸망한 왕국의 포로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방 왕이 먹고 마시는 음식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성별의 믿음을 지켰다(단 1장). 그의 세 친구들도 느부갓넷살의 우상 앞에서 경배하지 않음으로 성별을 행했다(단 3장). 비록 그 일로 큰 고난을 받기도 했지만 결국 위대한 승리를 나타내 보였다. 그때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의 하나님이 가장 위대한 신이라고 몇 번이나 선포했었다(단 2:47; 3:29; 4:37). 하지만 느부갓네살은 결코 “개종”하지 않았으며, 자기 신을 버리고 여호와만을 섬기는 일을 행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이교도였고 결국 멸망했다. 그렇다고 다니엘이 느부갓네살을 구령하지 못했다고 해서 영적 전쟁에 실패한 것인가? 아니다. 다니엘은 절대자와 같았던 이방 왕 앞에서 주 하나님을 드높이는 승리를 거둔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드러났고,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셨다. 그리고 이 일은 성별의 신앙으로 이뤄낸 일이었다.
구약의 모든 율법 조항들은 성별의 신앙을 강조한다.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서도 그 땅의 이방인을 멸하라고 하셨는데, 이는 그 이방을 따르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은 비판하고 있지만, “기독교 신앙의 붕괴의 우려”는 정당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의 붕괴를 우려하셨다. 신약에서도 그리스도인에게 요구하는 세상에 대한 자세는 “성별”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우리 앞서 갔던 모든 믿음의 선배들도 이 성별의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했다. 육신을 위한 타협은 고사하고 복음 전파를 빙자한 타협도 행하지 않았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 중 A.D. 5-6세기경 북아프리카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던 “도나티스트”(Donatists)라는 그룹이 있다. 그들은 교회 내에 죄악이 만연하자 그 죄인들을 처리함으로써 교회를 성결케 하기를 요구했고, 그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들 스스로가 성결케 되기 위해 카톨릭을 떠나 성별했다. 당시 그들과 대립했던 자로서 히포의 감독이었던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us, 354-430)은 주장하기를 어차피 교회 안에는 선인과 악인이 있으며 선인에 의해 악인도 교화되니 그대로 놔둬야 한다고 하며, 성별을 이유로 교회를 떠나는 것은 어머니 교회를 찢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로써 도나티스트들은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타협하지 않았다. 구령할 기회를 얻는다는 미명하에 그 거짓된 교회 안에 남아 있지도 않았다. 이것은 도나티스트 이후 모든 성별주의 그룹들, 즉 폴리시안, 알비겐스, 카타리, 왈덴스, 재침례교도들 등에게도 동일한 기준이 되었다.
오늘날 복음 전파를 빙자하여 거짓 교회나 세상에 타협하는 자들이 있다. 그리스도인이 술마시는 친구를 구령할 기회를 얻는다는 미명하에 그와 술잔을 기울인다 치자. 그는 그 자체로 간증을 잃어버린 것이다. 혹여 나중에 그 친구를 구령했다손 치더라도, 세상과 타협했다는 것은 변함없다. 가족을 구령할 기회를 얻기 위해 가족의 비위를 맞추는 그리스도인도 있다. 그가 믿지 않는 가족과 세상적인 것을 함께하느라 경배를 드리지 않거나 하나님의 일에 소홀히 한다면, 그가 혹 나중에 가족을 구령한다 하더라도 성별의 관점으로 그는 분명 패배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우리 하나님을 비방하고 욕하고 비웃는데도 “온유함”으로 참기만 하기도 한다. 나중에 구령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라고 변명하지 말라. 상대방은 그 사람을 제 주인이 비난받는데 가만히 있는 비겁자로 알게 될 것이다. 우리 주님이 비난을 당하는데 참고 있는 자가 그리스도인인가? 다윗을 보라. 골리앗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비난할 때 다윗은 의로운 분노를 내었다. 이 경우는 우리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증거 하는 것이 승리하는 것이다.
분명 복음 전파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성별된 삶을 산다고 복음 전파를 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헛된 일이다. 하지만 복음 전파를 빙자하여 세상에 타협한다면 그 역시 결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성별을 요구하신다. 세상에 물들지 않는 삶, 세상에서 비난받고 욕을 먹는다 해도 믿음을 지켜내는 삶, 모든 관계가 단절되어 당장은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는 것 같아도 성별의 신앙으로 의연히 주님만을 따르는 삶, 그것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인 것이다.
오늘날은 세상적인 삶을 살면서도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자신이 성별하지 못했기 때문에 복음 전한 사람들에게도 성별을 가르치지 못한다. 그래서 과거에는 술집 주인이 구원을 받으면 술집 문을 닫았지만, 오늘날은 술집 주인이 교회 다니게 되면 그 술 판 돈으로 십일조를 내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과거 성별의 신앙을 지키다가 목숨을 바친 그리스도인들이 일어나서 이 광경을 본다면 “뭐 이런 그리스도인이 다 있나?”하고 개탄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별의 신앙,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모든 행위에 앞서 행해야 할 가장 귀중한 그리스도인의 영적 덕목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