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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에이지와 창조신앙 (1) 현대과학과 뉴에이지

 

제가 대학교에 다닐 때의 일입니다. 지금은 아마 논쟁거리가 안될지도 모르는 이야기인데, 친구들끼리 이야기 하다가 여자가 담배 피우는 문제에 대해 토론을 하게 되었습니다. 거의 모든 친구들이 여자가 담배 피는 것에 대해서는 관대했지만 자기 여동생이 피운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는 전부가 안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일관성이 없는 것을 싫어합니다. 상황윤리 같은 것도 마찬가지이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든 내 가족에 대해서든 가치판단의 기준을 같게 잡아야 내 자신도 보호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한달쯤 전 신문에서, 미국 무역센터 건물의 테러사건에 대해 모 동물학자가 쓴 글을 보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생각이 다를 수 있고, 각자의 생각을 존중해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를 하지만, 이번 글의 실마리를 연다는 의미에서 그분의 글을 조금 인용하겠습니다.

 

{지난 수천년간 우리 모두가 그토록 소중하게 쌓아온 생명 경외, 인간 존엄, 민주주의 따위의 '문화 허례'들이 한 순간에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던 그 소리가 자꾸만 또렷하게 들려온다. (중략) 자연계를 통틀어 동반자살을 할 줄 아는 동물은 개미나 벌 같은 이른바 사회성 곤충들과 인간뿐이다. (중략) 인류가 침팬지의 조상과 헤어져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600만 년 전의 일이다. 결코 짧은 기간은 아니지만 46억년의 지구의 역사를 12시간으로 환산하면 1159분을 훌쩍 넘긴 때였다. 현생인류가 탄생한 것은 그보다도 훨씬 최근인 15만년 내지 23만 년 전의 일이고 보면 인간은 그야말로 순간에 창조된 동물이다. 그 짧은 순간에 아프리카의 열대림을 빠져나와 두 발로 걸으며 지극히 정교한 언어를 구사하고 농업혁명과 산업혁명을 일으켜 오늘날 이렇게 엄청난 기계문명을 이룩한 우리 인간은 누가 뭐라 해도 성공한 동물이다. (중략) 그 끔찍한 잔인함과 엄청난 파괴성도 엄연한 인간의 본성이다. (중략) 헌혈 행렬의 아름다운 나눔도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데 희망을 걸어본다.}

 

이 글에 대한 제 생각의 차이를 다 말하자면 한이 없고, 다만 여기서 사고의 모순점을 한 가지만 짚어보겠습니다. 인간이 동물로부터 진화되었고, 그 동물은 미생물로부터, 그것은 또 무생물로부터 진화되어왔다면 결국 인간의 뿌리는 무()입니다. 사실이 그렇다면 왜 인간에게서만 도덕성이나 윤리를 요구하는 것일까요? 위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언급하였듯이 잔인함과 파괴성도 본성이라면 왜 그것은 억제해야 하고, 아름다운 나눔의 본성만 강요하는 것일까요? (참고로 말씀드리면, 이제 진화론에서는 인간이 침팬지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것은 옛날에 주장하던 틀린 가설입니다. 그리고 지구의 나이가 46억년이 되었다는 것이 지질 과학적으로 증명된 적이 없고, 현생인류의 출생에 대해서도 확증된 학설은 하나도 없습니다. 최근의 DNA 연구에 의하면 인간의 염색체와 가장 닮은 것은 생쥐입니다.)

 

1859년에 시작한 가설인 진화론이 불과 150년 만에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서, 하나도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 없이 다만 신념으로 믿어져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기독교인들조차도 진화가 과학적 사실인 줄 아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화론과 함께, 현대의 거의 모든 문화 분야에 스며있는 뉴에이지와 관련하여 우리가 어떻게 창조신앙을 가져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서구 사상을 이해하고자 할 때 맨 먼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생각해야 합니다. 플라톤이 갖고 있었던 세계관은 이원론적 사고였습니다. 그가 갖고 있는 세계관은 궁극적인 세계와 궁극적인 모든 것의 실체는 이데아(Idea)의 세계라고 보았습니다. 그 이데아의 세계를 궁극적인 실체로 보고 지금 보이는 모든 현상들은 가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이 이데아의 세계에 도달해야 되겠다는 것이 그의 세계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면에서 생각한다면 사실 동양사상과 불교나 힌두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교나 힌두교의 사상도 핵심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브라만'의 세계가 있습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즉 아무것도 없는 세계입니다. 그 세계가 궁극적인 실체입니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아트마'라고 합니다. 아트마가 궁극적인 실체 브라마를 만나게 될 때 우리는 해탈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이런 면에서 볼 때 동양사상은 플라톤적 사고와 맥락을 같이 합니다.

 

성경시대 이후의 사고의 흐름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도시대 때에는 무슨 신학적인 문제가 생기면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면 그것이 권위였습니다. 사도들의 권위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데 그 사도들이 다 돌아가신 다음에 이제 그 외에 무슨 신학적인 문제가 생겼을 때에는 이제 속사도들이 "우리 사도께서 말씀하시기를,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라고 하는 것이 교회에 정통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속사도 중에는 그때 당시 로마의 핵심사상인 헬레니즘, 즉 헬라 사상에 정통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 헬라 사상은 크게 두 가지 부류로 갈라져 있었는데, 하나는 플라톤적 사상과 다른 하나는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적 사상이었습니다. 이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생각이 전혀 달랐습니다. 이데아의 세계는 궁극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는 예수님이 곧 오실 줄 알았습니다. 재림 사상이 아주 강했습니다. 이 세상에 보이는 것들은 잠시이고 곧 예수님이 오신다 라는 생각들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플라톤의 사상과 같이 할 수 있는 접촉점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는 거의 플라톤적인 경향을 띠게 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사상과 새하늘과 새땅이라는 사상이 있었기 때문에 플라톤의 사상과 거의 접목되어 집니다. 이것이 교회사의 주류로 죽 흘러 내려옵니다.

 

그러다가 동서로마 제국의 분리는 서구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 사망 후 두 나라로 나눠지는데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동로마제국은 언어를 옛날 로마가 쓰던 대로 헬라어를 사용했습니다. 이후 동로마제국은 약 1000년 정도 지속이 되는데, 서로마제국은 곧 멸망하고 그 핵심에 로마교회가 서게 됩니다. 그런데 로마교회는 언어를 라틴어를 사용했습니다. 언어를 라틴어를 쓰느냐 헬라어를 쓰느냐에 따라 사상적인 중심이 크게 달라집니다.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로마제국의 교회의 경향은 플라톤적이라고 볼 수 있다면, 헬라어를 사용하는 동로마제국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사상이 매우 깊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동로마제국이 무너지고 이슬람 세력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됩니다. 그 때 이슬람세력은 동로마제국에 있는 문화유산들을 그대로 받게 됩니다. 그러면서 동로마제국이 갖고 있던 헬라적인 사상들도 이슬람 세계에 그대로 전파됩니다. 그와 함께 동로마 제국이 갖고 있던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사상을 이슬람이 그대로 전수하게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집대성한 사람이 아베스트로라고 하는 학자입니다.

 

과학은 플라톤적이기 보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사고관을 가질 때 발전합니다. 지금도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관을 우리가 실험실에서 그대로 행하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관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관은 먼저 자연의 관찰을 통해서 어떤 규칙을 발견합니다. 그 규칙을 계속 보면서 거기서 원리를 찾아냅니다. 그것을 반복 실험해서 그것을 확정합니다. 그것이 확정되면 그것을 법칙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관이라고 합니다. 자연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과학이 발전합니다. 그래서 이슬람 세계와 서로마 제국의 영역을 비교할 때, 당연히 이슬람 세계의 과학이 훨씬 발전하게 됩니다.

 

동로마와 서로마의 영역은 따로따로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서로 간에 교류가 없었는데, 그 교류를 시작한 것이 십자군 원정이었습니다. 십자군들이 이슬람 세계와 싸우면서 이슬람 세계의 문화를 서방에 자꾸 전수하게 됩니다. 마치 우리가 미국여행을 다녀오면 미국을 소개하는 것처럼. 십자군의 17차 원정을 통해서 이슬람 세계를 서구에 계속 전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보니까 거기에 놀라운 과학이 있습니다. 화약도 훨씬 먼저 발명되고, 다른 여러 가지 과학이 많이 발전된 것을 그들에게 알리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들에게 신학적인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어떻게 과학의 부분에서 더 발전할 수 있을까 라고 하는 신학적인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러다가 동로마제국이 무너지면서 동로마 제국에 있었던 많은 학자들, 즉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에 입각해 있던 많은 학자들과 성직자들이 서로마제국 영역으로 넘어가면서 그들이 세운 것이 대학입니다. 대학이 그들에 의해서 세워집니다. 그래서 빠리대학도 서게 되는데, 이 빠리대학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빠리대학의 총장이었던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학을 정립하는데 이렇게 신학을 정립합니다. '이방인들에게 있는 이 이성의 빛, 그것을 통해서 아름다운 선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성은 타락하지 않았다' 라고 하는 신학적인 체계를 잡습니다. '모든 것이 타락했는데 이성만은 타락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이성에 날개를 달아주게 되었습니다. 그 이성에 날개를 달아주자 금세 그 이성은 하나님의 은총의 영역을 침범하기 시작합니다. 이성은 타락하지 않았으니까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모든 것은 다 완전한 선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수준의 선에 이르게 됩니다.

 

대학에서 그런 운동이 일어나고 자연신학이 발전하면서 이성이 존중되고 르네상스가 일어납니다. 16세기에 큰 혁명이 있다면 하나는 종교개혁이고 다른 하나는 르네상스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의 사상이 현대 사상을 이끌게 됩니다. 대학들이 발전하고 16세기에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과학혁명이 일어납니다. 뉴톤과 케플러와 갈릴레오에 의해서 과학혁명이 일어납니다. 그 과학혁명으로 인해서 놀라운 과학의 증거를 보게 됩니다. 그 이전의 과학의 발전보다 16세기 과학혁명을 통해서 일어난 엄청난 과학을 보고 모든 사람들이 다 깜짝 놀랐습니다. 이성의 힘이 이렇게 크구나 하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과학을 통해서 이제 서서히 이성이 신의 영역을 침입하게 됩니다.

 

그림의 경우를 보면, 예전에는 성모마리아의 그림 뒤에다 후광을 붙이고, 모나리자 같은 아름다운 그림들을 그렸습니다. 이성이 발달되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영역을 침해하는데 왼쪽 가슴을 드러낸 마리아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옛날에는 있을 수도 없던 일이었습니다. 왼쪽 가슴을 드러낸 마리아인데 그 마리아가 누구냐 하면 그 당시 교황의 정부입니다. 그 정도로 신의 영역에 도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계몽주의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과학 하는 사람들에 있어서 이제는 더 이상의 신화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이신론이 등장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한 것을 내가 믿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연법칙과 모든 것들로 완전하게 창조하시고 하나님은 이 세상을 떠나셨다. 더 이상 이 세상에 관여하시거나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보았습니다. 그 당시에 가장 발전된 기계가 시계였는데 이 우주의 모든 삼라만상은 다 시계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군가가 시계를 잘 만들어 놓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만든 사람이 필요 없이 태엽만 감아주면 시계는 돌아갑니다.) 모든 것들이 자연법칙과 어떤 인과율에 의해서 움직인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들도 다 그렇게 이루어진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것이 계속 발전되면서 자연주의로 넘어가게 됩니다.

 

성경에서 지혜의 최고 대명사가 솔로몬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쓴 전도서에 보면 이런 고백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전도서 2:10-11). 그는 자기 마음의 만족과 즐거움을 위해서 거리낌 없이 모든 것을 다 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그가 지식으로 궁구하기 시작합니다. 모든 사물들을 관찰하기 시작하면서 궁구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그가 첫 번째 헛되다고 느끼는 것이 무엇이냐면, 이 우주는 영원한 것 같은데 인간은 유한하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그가 좌절을 느끼고 이 무한한 자연에 대해서 경외감을 갖는 것을 보게 됩니다(전도서 2).

 

마찬가지로, 이성을 가지고 이 세상을 판단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무한한 자연만 보입니다. 무한한 자연이 전부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때 자연주의가 팽배하기 시작하면서, 이전에는 하나님이 계셨는데 지금은 죽었다고 생각하던 개념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예전에는 살아 계셨는데 이제는 우리에게 전혀 영향을 못 미친다고 생각했었는데, 자연주의로 넘어가면서 이제 "하나님은 없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 "무한한 자연만이 존재했다".

 

그러면서 헤겔의 낙관적인 변증법과 동시에 진화론의 영향을 받아서, 무한한 우주를 보면서 모든 것이 물질에서 시작한다는 유물론 사상이 나오기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성을 존중하고 이성에 의해서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이는 현상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사변만이, 오직 이성만이 최고의 판단기준이라는 것입니다. 데카르트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 보이는 모든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한 가지 아는 것은 "사변하고 있는 나", "생각하고 있는 나"는 틀림없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러면서 이성을 최고의 위치에 올려놓게 됩니다. 이성을 최고의 위치에 올려놓게 되자 인간의 위치가 물질로 전환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진화론의 사상과 더불어 인간은 물질로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인간이 이성을 존중하면 존중할수록 인간의 지위가 하나님의 형상에서 물질로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원숭이로 떨어지기 시작하고 돌로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자연주의가 팽배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자연주의가 필연적으로 낳게 되는 것이 허무주의입니다. 왜냐하면, 내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니까, 나무나 원숭이나 아무 차이가 없다고 생각할 때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참아낼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이 갖게 되는 것이 허무주의입니다. 유물론에 철저하게 되면 도끼로 돌을 치는 것하고 사람의 머리를 치는 것하고 아무 차이도 없어야 됩니다. 그런데 또 이들이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에게 윤리, 도덕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윤리로는 도끼로 돌을 내려치는 것과 도끼로 인간을 내려치는 것이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되면서 동시에 인간이 물질 - , 나무, , 토끼, 원숭이 - 과 같다는 것을 참아낼 수가 없습니다. 그 참아낼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될 때 나갈 수 있는 방향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허무주의요. 다른 하나는 쾌락주의입니다. 보통, 철학자가 허무주의로 갑니다. 철학적이고 사변적이지 않은 사람은 쾌락주의로 흐릅니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그런 것을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세상은 잠시 생명을 유지하다가 생명이 끊어지면 물질로 돌아갈 뿐이다. 이 세상에 남는 것은 그저 즐기고 노는 것이 최고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가지로 가게 됩니다.

 

중세에는 교회가 있었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섬겼는데, 그에 비하여 인간의 이성을 존중하고 인간의 이성에 근거해서 과학을 발전시켰을 때 나온 과학의 power가 너무 비교할 수 없이 컸던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종교개혁을 통해서 과학의 혁명이 오해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과학을 통한 유토피아를 만들겠다는 생각이 늘 있었습니다. 테크노피아, 즉 테크놀로지를 통한 유토피아를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이 면면히 내려오는 현대 사상 속에 노출되어 있고, 현대사상의 여러 가지 것들에 의해 영향을 받고 살아갑니다. 현대에는 지금까지 인류가 생각했던 모든 사상이 그대로 존속하고 있습니다. 한가지 사상이 마감을 하고 새로운 이즘이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계속 연속선상에 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이 나오게 되면 그 새로운 것들이 계속 연속선상에서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과학을 통해서 유토피아를 만들겠다는 사람들, 즉 낙관론적 진보주위가 같이 공존하게 됩니다.

 

공산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산주의도 낙관론적 역사관을 갖고 있습니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공산주의가 오는데 그러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니까 혁명과 투쟁을 통해서 빨리 공산주의를 앞당기자는 것이 공산주의의 혁명투쟁입니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자연스럽게, 누가 의도하지 않아도 공산주의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낙관론적 역사관과 낙관론적 과학관이 조합되면서, 과학을 통한 유토피아를 만들겠다는 사람들, 또 한편으로 쾌락으로 가겠다는 사람들, 또 한편으로 허무주의에 빠진 사람들이 섞여 가면서, 어떤 때는 허무주의로 갔고 어떤 때는 쾌락주의로 갔고, 어떤 때는 과학을 통한 유토피아로 가겠다는 사상이 막 뒤섞이면서 세상이 흘러갑니다.

 

그러면서 20세기 초반에 이르러서는, 인간이 이성을 존중했는데 그 이성이 결국 인간을 돼지와 같은 동물과 차이가 없게 만들었을 때 인간이 이것을 견디지 못함으로써 반항적으로 히피문화가 등장합니다. 마약을 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보면, 행복한 가정을 통해서 느끼는 행복감이라는 것을 이 사람들은 물질작용으로 봅니다. 의학적으로도 우리가 약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거나 흥분제를 먹으면 흥분이 되듯이, 그런 식으로 모든 사고의 출원도 결국은 물질과 복잡한 화학반응에 의해서, 생화학 반응에서 일어나는 결과라고 본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행복한 인간관계를 통해서 행복을 얻든, 아니면 마약을 투여해서 물질로 그것을 얻든 그것은 큰 차이가 없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마약을 합니다. 마약을 통해서 행복을 얻든, 진정한 인간관계를 통해서 행복을 얻든 행복을 얻고 그것이 좋다고 느끼는 것은 물질적인 작용이므로 똑 같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약을 하게 되고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허무주의를 그대로 계속 유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본질적으로 선을 추구하는 본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나온 사상이 실존주의입니다. 이제는 이 불합리를 그대로 내버려 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인간의 의지로 해결하려고 하게 됩니다. 사실, 지금은 실존주의적 경향이 가장 팽배합니다. 실존주의적인 사람은 굉장히 성실합니다. 굉장히 노력을 열심히 합니다. 교회 내에도, 회사나, 연구소나 과학자 중에 실존주의의 파워가 가장 강합니다. 그들은 굉장히 humanistic 하면서 굉장히 자기 의지로 성실성을 유지합니다. 그들이 인간을 존중하고 인간 humanity를 가장 고위에 올려놓으면서 인간의 의지로 유토피아를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교회 내에도 그런 경우가 팽배합니다. 그들은 정말 성실합니다. 회사에서 움직이던 대로 움직이면 교회도 뭔가 달라집니다. 실제로 왜 실존주의가 이렇게 파워가 있느냐 하면 결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성장하는 것처럼 보이고 외형적으로 교회가 커갑니다.

 

실존주의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와 유신론적 실존주의 두 개가 같이 갑니다. 심지어 교회 내에도 유신론적 실존주의가 있습니다. 유신론적 실존주의는 이런 것입니다. 어떤 factor가 있는데 그 factor가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인간의 의지로 그것을 받아들이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하나님이 선하시고 온전하시니까 그것이 설화이든 사실이든 상관없이 그냥 받아들이고 교훈을 받으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자유주의 신학사상의 가장 큰 핵심을 이루고 종교 다원주의의 핵심을 이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엔 인간이 있습니다. 실존주의의 핵심은 인본주의입니다. 하나님 없이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뉴에이지 사상도 결국은 그렇습니다. 뉴에이지 사상은 동양사상입니다. 원래 소승불교나 힌두교는 신이 없습니다. 스스로가 해탈해서 신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가장 실존주의의 맥을 이루면서 서구 사상과 동양사상의 접촉점이 되는 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그것이 현대과학과 더불어서 어마어마한 파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과학이 우리 사고체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칩니다. 옛날에는 뉴톤 운동의 제3법칙과 유클리드 기하학으로 모든 것을 다 설명했습니다. 이것을 절대적인 법칙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유클리드 기하학 말고 새로 발견된 기하학이 리만 기하학이라고 있습니다. 리만 기하학은 유클리드 기하학하고 패러다임이 다릅니다. 쉬운 예를 들면, 유클리드 기하학에서는 두 평행선은 영원히 만나지 않는다고 했는데, 리만 기하학에서는 그것이 만난다는 것입니다. 똑 같은 상황을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 놀랬습니다. 철학은 정()과 반()이 반복됩니다. 기존의 A가 있고 그것에 반대되는 B가 나올 때, A는 아니다 그래서 B라고 하는 것을 내세우는 것이 철학의 정통입니다. 새로운 학설이 나오면 그 앞의 것은 틀리고 새로운 것이 맞다는 것이 보통 생각하는 그때 당시 사람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두 개 다 맞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혼돈하기 시작합니다.

 

그 다음에, 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상대성 이론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만유인력의 법칙이 완벽한 법칙인데 이 만유인력의 법칙이 맞지 않는 영역이 있습니다. Micro 분자세계에서는 만유인력의 법칙이 맞지 않고 상대성원리가 맞습니다. 그런데 상대성원리의 본질보다, relative라고 하는 그 단어가 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더 컸습니다. "상대성이다"라고 하는 개념들이 전 영역에 퍼지기 시작합니다. 종교에도 그렇고, 기독교사상에도 그렇고, 전체에 퍼지게 됩니다. 절대적 진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발표되기 시작하면서 완벽한 진리, 완벽한 수치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확률적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라면서 절대적인 진리에 대해서 회의를 일으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진리가 공격받기 시작합니다. 이제 과학이 최첨단을 가면서 예수님이 물위로 걸었다거나 노아의 홍수, 이런 것들은 믿을 수가 없는 사실이라는 생각이 팽배해집니다. 그래서 성경과 절대적인 진리가 배척당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이 사람들이 결국 도달하게 된 것이 뉴에이지 사상과 포스트모더니즘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초는 이성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들에 대한 반박으로 나온 것입니다. 이제는 이성을 서구사상이 더 이상 신뢰하지 않습니다. 이성을 신뢰하게 될 때 인간을 완전히 동물로 만들었고, 이성에 근거를 둔 과학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생태계 파괴와, 과학을 통해서 인간이 망하게 될 것이라는 위협감을 금세기에 갖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과학을 발전시키면 발전시킬수록 이 과학이 유토피아를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파멸할 것이라고 하는 위기 속에 빠뜨렸고 이 인간이 이성을 존중해서 발전시키면 시킬수록 인간을 정말 가치 없는 존재로 만들었다는 것을 이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이성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이성을 최고의 가치로 보았던 계몽주의의 반발로 나오기 시작한 것들이 뉴에이지와 포스트모더니즘입니다. 이 둘은 뿌리가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생각한다면, 우리의 이성이 완전하지 않다고 하는 우리 기독교 개혁주의 사상하고도 같이 간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서구인들이 이성을 신뢰하지 않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진리가 있을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 회의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꼭 어떤 합리적인 선이 있어야 직성이 풀립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영화 "스타워즈"가 있습니다. 6070년대의 영화인데 모든 컴퓨터의 장비를 다 동원해서 핵폭탄을 우주선 원자로에 집어넣어야 합니다. 컴퓨터를 다 동원했는데도 컴퓨터에 에러가 있습니다. 컴퓨터가 그것을 정확하게 못 집어넣습니다. 그것이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를 대변하는 것입니다. 과학은 정확하기를 바라지만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심리는 그것이 정확해야 합니다. 쏙 들어가서 결국은 폭발해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소망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기()를 사용합니다. 컴퓨터를 다 끄고 기()를 사용합니다. ()를 사용하니까 그것이 쏙 들어갑니다. 그것은 과학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서구 사상은 이성을 완전히 포기했습니다. 논리를 완전히 포기했고 이제 비합리적인 것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비합리적인 것을 통해서 인간이 궁극적으로 채우고자 하는 그것을 채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욕심을 채워야 합니다. 영화를 보아도 결국 끝에 가서는 인간이 승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주인과 싸우는 영화에서도 반드시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간에 인간이 승리해야 합니다. 그것이 과학을 통해서든 동양사상을 통해서든 인간은 승리해야 한다는 해답을 얻어야 합니다. 진화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진화론도 해석이 안되는데 어떻게 해서든지 그것을 해석해서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그래서 무리수를 두게 됩니다. 그들도 이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그걸 통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해석을 내야한다는 숙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리수를 두는 것입니다. 사고의 Jump를 하고, 그들도 논리적으로 체계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냥 밀어부치는 식입니다. 그것은 신앙입니다.(다음에 계속)(2001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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