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를 위로하라
남아프리카 선교연구 공저, 목양, 2010년 7월 15일 초판 발행, pp.408, 12000원
(2010년 8월 4일 읽음)
중남부 아프리카 한인선교사회에서 선교사대회를 가지고 그 결과로서 일부 선교사님들의 글을 모아 펴냈다.
선교라는 이름으로 침략을 하고 현지인들을 노예로 삼았던 유럽의 선교로 인해 상처받았던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로하라는 의미의 제목이다. 그들을 강도 당한 이웃의 시각으로 보았다.
한때 기독교가 전성을 이루던 북아프리카 지역이 지금은 활발한 모슬렘 지역으로 바뀐 것을 돌아보며, 모슬렘 사역을 위한 헌신자와 후원자와 활발한 활동을 기대하는 것으로 결말을 맺어간다.
동아프리카 이슬람의 전파를 드높인 중요한 요소는 연합의 정신과 분파가 없었다는 것 그리고 인종차별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슬림 상인들은 숨겨진 정치적 의도를 갖고 있지 않았으며 아프리카 국가들을 정치적으로 지배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주로 기술적인 조언가로 그들 각자의 전문분야에서 쓰임받았다. 그들은 정치적인 힘을 가지거나 구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부를 나누었지 독점하지 않았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무슬림 이웃을 향하여 우리의 신앙적 태도와 행위의 일치부터 분명히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나눠주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남아공 내에는 기독교인의 숫자가 80%를 육박한다고 하지만 그들은 명목상의 신자일 뿐, 통계적으로 실질적인 기독교인과 구별을 해 놓은 많은 자료들이 포함되어 있다. 유럽의 선교사들이 이루지 못한 선교의 열매를 한국인 선교사들이 효과적으로 이룰 수 있는 이유들이 있다. 지금이 바로 우리 한국인 선교사들이 남아공의 진정한 복음화를 위해 큰 몫을 감당할 때이다. 이런 시점에서 중남부 아프리카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들이 모여 의미있는 활동을 한다는 것은 그 의의가 크다.
아프리카의 흑인 목회자들이 신학교 근처에도 가보자 못한 사람들이 많다는 점에서 그들에게 한국인 선교사가 운영하는 신학교가 필요하다는 데에는 공감이 간다. 다음은 '한국 교회의 준비'라는 절의 한 내용이다. "우리는 20세기를 대한민국 교회의 위대한 세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복음을 받은 지 100년 만에 세계 선교를 시작하여 이제 21세기에 들어가면서 우리는 세계 두 번째의 외형적인 선교국가를 이룩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외국인들을 그리스도 교회의 지도자로 양육한다는 엄청나게 영광스러운 일을 논의하고 있다."
유럽 출신의 선교사들이 실패한 일을 바로잡기 위해 한국인 선교사가 나설 때이다. 남아공은 1948년 화란 개혁교회 목사 출신으로 수상이 된 Daniel Francois Malan의 주도하에 인종차별의 법적인 근거가 되는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시작한다. 그것은 진실된 기독교인이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차별정책이 선교라는 이름으로 그 땅을 밟았던 사람에 의해 자행되었다. 그런 그들의 신학이 남아공 흑인 목회자들에게 받아들여지기가 함들다. 더군다나 유럽인들의 신학교에는 흑인이 입학하는 것이 극히 제한적이었다.
한국인 신학교는 훈련받지 못한 교회 지도자들에게 훈련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뿐만 아니라, 각 지역에서 교회 지도자들을 훈련시킬 수 있는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연합 신학교 사역에 우려가 있다. 근본적으로 구원에 대한 교리는 같을지 몰라도 종말론이나 은사론 등 신학교적으로 교리가 다른 부분을 아프리카 연합 신학교에서는 어떻게 다룰 것인지 궁금하다.
사소한 용어의 사용으로 보여질지 몰라도 결코 사소하지 않은 것도 있다. 154쪽에 이런 표현이 있다. "선교사의 전략회의도 이런 논의를 통해 서로의 사역 전문성을 심화시켜 주는 단계로까지 진화되어야 선교사간의 네트워크를 활성화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선교사가 과학 용어를 몰라도 된다고 변명할지는 모르나, 진화는 일부 전문가만 사용하는 극히 과학적인 용어라기보다는 우리 기독교인이 알아야 하는 창조의 반대 개념이자, 기독교 신앙을 무너뜨리려는 자들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다. 그 진화라는 단어를 뜻에 맞지 않게 자연스럽게 사용하게 된 데에는 비록 의도적인 뜻은 없었겠지만, 그 영향을 깊숙이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 예일 뿐, 연합신학교에서 해결해야 할 일이 분명히 있다. 그렇다고 신학교 사역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연합하기에 앞서 각 교단별로 다른 신학의 차이를 어떻게 극복할지 먼저 의논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