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돈의 맛’의 정치경제학
The Political Economy of ‘The Taste of Money’
조흡, 동국대학교 영상대학원 교수
대한토목학회지 제61권 제5호(통권 398호), 2013. 5. pp.133-135
지금이야 자본의 규모가 천문학적이고 지구 단위로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그 실체를 추적하기가 거의 불가능하지만, 신자유주의 경제가 정착되기 이전에는 자본의 움직임을 파악하기가 상대적으로 쉬었고, 그런 만큼 그 권위가 대단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실물경제의 물리적 존재감을 쉽게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자본, 특히 돈의 의미는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거래가 이루어지는 것쯤으로 여기는 추상적인 개념으로 변질된 지 오래다. 이런 변화와 함께 자본의 아우라는 경제 규모가 확장된 것에 비례해서 상승하지 못하고, 역설적으로 추락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대다수가 자본의 위력을 일상적으로 실감하고 있지만, 자본에 대한 경외감이나 존경심 대신 이를 공포와 비판의 대상으로 대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와 궤를 달리 하지만 결코 무관하지 않은 얘기로, 20세기 들어서 거의 세기말에 이르기까지 사회과학의 핵심 개념은 절대적으로 물질적인 것이었다. 세상의 이치를 깨우치기 위해서는 누가 공장을 세워 상품을 생산하고 유통시키는지, 한마디로 누가 자본을 움직이는지를 파악했어야 했고, 이는 곧 세상 돌아가는 현편을 가장 잘 이해하는 일이라 믿었던 것이다. 자본은 세상을 떠받드는 토대였던 것이다. 자본이 그렇게 중요하게 제시된 결과, 문화란 경제에 전적으로 예속된 개념으로 취급되기도 했다. 즉 사람들의 생각과 언어 그리고 라이프스타일은 자본을 움직이는, 보다 정확하게는 공장을 지배하는 사람들의 생각 그 자체에 종속된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생산수단과 자본을 소유한 사람의 아이디어가 곧 문화였던 것이다.
이런 관점이 뒤집히는 시기는 신자유주의가 태동한 시점과 맞물려 있다. 미국의 레이건과 부시의 공화당 정부 그리고 영국의 대처와 메이저의 보수당 정권에 이르기까지 198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정보, 통신, 문화로의 산업구조 조정은 그때까지 제조상품을 중심으로 한 공장의 중요성이 약화되고 이제까지 무시됐던 종속적 개념의 언어가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자본의 혁명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공장에서 상품을 생산하는 것보다, 예를 들어 컴퓨터 언어를 통해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일이 훨씬 더 경제적이며 자본축적에 유리한 일이라 판단한 것이다. 이제 문화가 경제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 문화 그 자체가 경제가 된 셈이다. 경제와 문화의 위상변화는 바로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이뤄진 것이다.
실제로 현재 우리가 몸담고 있는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문화를 접미어로 사용해 가능하지 않은 분야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선거문화’, ‘경영문화’, ‘노사문화’, ‘여성문화’가 좋은 예이다. 문제는 문화가 신자유주의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유지하는 핵심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말해 문화가 경제적 부를 창출하기 위해 소환됐음에도 불구하고, 문화가 때로는 자본의 원칙에 정면 도전하거나 그 가치를 훼손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문화의 특징 중 일부러서 비판기능의 속성이 내재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다(바흐찐 2001). 문화와 경제의 관계는, 따라서 결코 원인과 결과라는 단선적인 것으로 파악할 수 없으며, 상호모순의 갈등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조합으로 보아야 마땅한 것이다.
이런 복잡하고 모순적인 문화와 경제의 관계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예가 영화 ‘돈의 맛’이다. 이 영화는 섹스, 마약, 청부살인을 소재로 한국 재벌의 치부를 드러낸 임상수 감독의 작품이다. 이전에도 ‘하녀’를 통해 한국 최상류층이 가진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속살을 드러낸 바 있는 임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본격적으로 그들이 살아가는 방법과 사고방식을 해부한다. 이전 작품과 다른 점이 있다면, 보다 직접적인 방법으로 재벌의 가치와 충돌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들은 뉴스를 통해 관객이 한번쯤 보고 들었을 법한 이야기여서 영화의 허구성을 주장하기에는 너무나 사실적이다. 한국 재벌의 어지러운 단면들을 모아 대표적인 모델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박진성 높은 상세한 묘사가 뛰어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영화의 압권은 금고 문을 열자 금고 대신 거대한 창고가 보이고 돈뭉치가 말 그대로 산더미를 이루고 있는 장면이다. 한 재벌가가 보관하고 있는 돈의 양이 한국은행이 국가의 화폐정책을 펼치기 위해 쌓아놓은 돈의 분량과 맞먹는 수준이다. 자본 축적의 과잉이 가히 외설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러나 영화는 어떻게 그런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됐는지에 관한 설명을 생략하고 있다. 돈이 넘쳐나 1조원의 뇌물을 기꺼이 갖다 바칠 수 있는 그 공간에서는 그저 섹스와 마약 소비와 청부살인이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을 뿐이다. 현대 자본주의가 바로 이런 매춘과 마약거래 그리고 청부살인과 같은 ‘감성노동’ 또는 ‘비물질 노동’, 즉 ‘서비스 산업’으로 구축되고 있다는 주장(Hart and Negri 2001)을 상기해 보면 영화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쉽게 이해되지만 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의문이 생긴다. 영화제작을 위해서는 막대한 자본이 필요하고 그 자본을 조달하는 회사가 이 영화에서 묘사된 재벌과 크게 가치관이 다르지 않을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영화 제작을 위한 펀딩이 가능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이 영화는 40억이라는 순제작비가 소요됐고, 이 비용을 롯데 엔터테인먼트에서 제공한 것으로 보도됐다. 드러난 현상으로만 보면 롯데라는 재벌이 거액의 자본을 투자해 자신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영화를 제작한 셈이다. 얼핏 모순적으로 보이는 이 불가사의한 사건은, 그러나 문화정치학적으로 쉽게 풀어낼 수도 있다. 자본의 장기적 헤게모니를 위해 단기적 손실을 감수함으로써 일종의 예방주사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설명이 가능한 것이다(임영호 1996).
그러나 이는 영화제작 현실과 동떨어진 설명이기가 쉽다. 영화산업을 비롯해서 거의 모든 문화산업은 자본가의 막대한 투자를 바탕으로 가능한 이유에서 대체로 보수적 기업환경을 선호한다. 대기업 영화사는 다른 재벌 기업과 마찬가지로 노사관계나 규제 그리고 이익의 분배에서 매우 보수적인 가치를 지향하기가 쉽다는 얘기다. 하지만 문제는 기업의 이런 성향이 작품에 직접적으로 반영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보다 큰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이 분야의 전문가인 작가와 감독에게 전적으로 작품생산을 의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투자와 무관하게 생산과정에 개입하거나 통제가 쉽지 않은 이유가 원천적으로 내재해 있는 것이다. 기업이 고작 할 수 있는 일은 작품 완성 이후 유통과 상영과정을 엄격히 통제하는 것뿐이다.
따라서 문화 창작자에게 자율성을 허용해야만 작품생산이 가능한 문화선업의 구조에서는 권력을 남용하는 자를 비판하고 지배적인 가치에 정면도전하는 내용의 텍스트가 생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강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보다 약자의 억압과 설움을 어루만져 주는 일이 대중으로부터 호응을 받기가 쉽고, 그래야만 더 많은 이익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인들을 포함해서 문화 종사자들 중 다수가 정치적으로 진보적 성향을 띠고 있는 것은 어쩌면 문화산업의 구조에서 부분적으로 연유한 현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다 더 분명한 역설적인 사실은 자본이 자본의 이익에 반하는 담론생산에 막대한 자본을 쏟아 붓고 있다는 점이다. 이 모순적 상황이 모두 자본축적이라는 거창한 목표 아래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 기이하지 않은가?
참고자료
1. ‘스튜어트 홀의 문화 이론’ 임영호 편역, 한나래, 1996.
2. ‘프랑스와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미하일 바흐찐 저): 이덕형 옮김, 아카넷, 2001.
3. Hardt, Michael and Antonio Negri, Empire, Cambridge: Harvard Univ. Press,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