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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예술과 문화의 죽음

(Modern arts & the death of a culture)

 

한스 로크마커 저, 김유리 역, IVP, 1993년 4월 25일 초판 발행, pp. 334, 7000원

(2008년 7월 25일 읽음)

 

서평 : "그리스도인 예술가들이 어떤 생각과 자질을 가져야 하는가?" 역사 발전 과정에 따라 미술사를 정리했는데, 이 시대의 문화 가운데 활동하는 사람들이 꼭 알아야 할 문화의 사조들을 잘 정리했다. 꼭 예술을 하는 사람 뿐 아니라 예술 가운데 살 수 밖에 없는 모든 기독교인들이 문화에 관심을 가지는 차원에서 읽었으면 좋겠다. 그런 견지에서, 몇 년 전에 앞부분만 읽었던 것을 다시 꺼내어 전부를 읽었다. 앞부분은 그렇다 치더라도 마지막 장인 "신앙과 예술" 부분은 기독교인의 교양 차원에서 꼭 읽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Underline>

제1장 매체를 통한 메시지 전달

 

- 이 책의 목적은 현대 예술을 논하면서 그 의미와 오늘날의 문화 영역 전반에 대한 그 관계를 알아보는 데 있다. 현대 예술은 어쩌다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곧 두 세기 남짓 동안 세상을 뒤바꿔 놓았던 '이성의 시대'의 정신적 가치들에 대한 골 깊은 반역의 결과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대 예술이 얼마나 혁신적인 것이며 왜 그런 류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가를 이해하려면 그 중대한 변혁이 시작되기 이전 시대의 예술과 비교 고찰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 몇 작품을 선정하여 그 의미와 내용과 내포된 영적 메시지 등을 살폈다.

<화보 목록>

- 두치오 "성모자", 루벤스 "성 리비누스의 순교", 렘브란트 "엠마오 도상의 그리스도", 얀 반 고이엔 "풍경", 푸생 "아테네로부터 운구되는 포키온의 시체", 얀 스테엔 "성 니콜라스제의 전야", 타치아노 "비너스와 음악"

 

 

제2장 현대 문화의 뿌리

 

- 17세기의 문화 예술 방면은 화란에서 보급된 칼빈주의의 영향이 지대했다. 그러나 그러한 성과의 일면은 속 빈 강정이나 다름없다. 기는 기독교가 그만큼 예술을 장려하지 않은 데 기인한다.

- 당시 유럽의 정신적 문화적 주도 세력은 쇠퇴기에 접어든 로마 카톨릭교와, 한창 왕성하게 부상하는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였다. 여기에, 결코 덜 중요한 세력이라고 할 수 없는 신비주의가 있었다.

- 청교도만 해도, 성경을 모든 신학적 사유와 일상생활의 근거로 여겨, 그것에 깊은 외경심마저 돌린 것은 개혁주의적 유산 때문이었다. 반면 세속적이고 육적인 소욕을 일소시키려는 노력에서 율법적이고 정신주의적으로 거룩을 추구한 것이나, 모종의 주관주의적 성향이 짙었던 점 등은 신비주의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 이러한 신비주의적 풍조로 인해, 좁은 의미에서의 소위 '영적이고' '종교적인' 영역 밖의 모든 것들은 종종 평가절하 당해야 했다. 음악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허용하는 편이었으나, 칼빈주의와 청교도주의는 사실상 미술(fine art)에 대한 식견이 전무했던 것이다.

-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술 및 문화의 제반 추세를 외면한 채 부동의 자세만 취하는 데는 책임 추궁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술 문화가 철저한 세속화로 치달아 급기야 반기독교화 되게끔 방임한 데 대한 책임이다.

 

<기독교와 문화>

- 그들은 예술 속에 강력하게 표출되어 있는 그 시대의 정신과 영적인 전투를 벌여야 했고, 또 많은 이들이 이 전투에서 죽어 가야 했다.

- 새로운 비기독교적 사고방식을 유포시키는 데 각별히 선도적 역할을 한 주범은 바로 예술이었다. 비기독교적인 영성을 탐색하는데 단연 타 분야를 앞질렀던 것이다. 왜? 그리스도인들이 그만큼 오랜 동안 예술 토론이나 활동에서 발을 뺀 탓이다.

※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 : (1) 그리스도인은 주변의 비기독교적이고 세속적인 문화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2) 과연 어떤 식의 문화가 기독교적인 삶의 방식의 결정체로서 형성되어야 하는가?

 

<영지주의와 신비주의>

- 신비주의의 후기 사조를 배후에서 다각적으로 조종한 세력은 영지주의였다. 이 영지주의는 성경 사상에다 이교적 신비 종교와 신 플라톤주의를 종합시킨 결과였다.

- 초기의 신비주의자들 : 혹독한 고행을 통해 물질계를 초월해 있는 영적인 영역을 다스리시는 신께 이르려 하였다.

- 14세기 독일 미술 : 신비주의적 취향이 역력하여 지나치게 영적인 미를 강조했다.

- 신비주의 발아의 싹은 칼빈주의 안에 확산된 예술에 대한 관심의 결핍이었다.

- 칼빈주의가 실현하지 못한 정수적 원리 : 믿음이란 단지 천상적 구원과 관련된 종교나 영혼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인격의 구원과 관련된 것으로, 인간 생활의 모든 면에 영향을 끼치는 사고 및 생활방식의 문제다.

 

<자연과 은총이라는 이중 구조>

- 스콜라철학은 철저한 로마 카톨릭적 사상 체계로서 바른 성경적 사고를 저해하는 가장 교묘하고 위험한 적으로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 세상에 대한 그들의 이원론적 구조 : 이 세상은 그 자체로서는 선하나 자율성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영역인데 반해, 신앙과 은총 곧 종교의 영역인 저 세상은 신의 계시가 지배하는 보다 고상한 영역이다.

 

<개혁주의적 견지>

- 그리스도인이 일상 생활과 자신의 학문적 창조적 활동의 장에서 어떻게 살며 행동해야 하는가? 기독교와 문화를 완전히 분리된 두 개의 실재로 보는 것은 우리의 통상적인 오류이다.

- 문화란 하나님께서 설정하신 구조 내에서 인간의 창조적 활동이 그 산물로서 나타난 것이다. 그만큼 우리의 신앙과 별도로 취급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노동으로 빚어지는 '문화'는 우리의 '믿음'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문제로 남는 것은 그 출발부터 비기독교적이기 일쑤인 주변 문화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 직접적이고 의식적인 경건 활동과 '일상적인' 활동을 굳이 이원화 시켜, 모든 인간의 삶이 제한된 의미에서의 경건 활동에만 바쳐져야 한다는 인식이 그리스도인 사이에 편만해 있는데, 이는 성경이 분명히 금하고 있는 인식 태도인 것이다. 신실하고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일수록 삶의 전 영역을 하나님의 통치 아래 두고자 할 때 이러한 이원론적 사고틀 때문에 씨름해야 했다.

 

<계몽주의 이전>

- 17세기인들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들의 사실성에 대해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이들도 성경의 기록들을 사실로 인지했다.

- 17세기 문화, 특히 예술과 과학 분야에서 돋보이는 그 위대성과 보편성, 철학적 이해의 깊이, 그 부요한 문화적 자산과 효력 등을 인간적 노력의 결과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복이요 선물인 셈이다.

- 17세기인들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과 다를 바 없었다. 자신들의 지혜와 뛰어남이 하나님의 은사였음을 망각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 기독교도 같은 식으로 무력해져 갔다. 하나님을 믿노라고 고백하는 이들은 날로 늘어갔지만, 하나님의 약속대로 행하는 일 따위는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사람들은 그 자신의 힘으로 도덕적이고자 했다. 그리고 그들은 실패했다. 그 와중에서 세력을 넓힌 것은 인문주의였다.

- 계몽주의의 목표는 달성되었다. 한 사조를 창시한 철학자의 연구에서 출발한 것이 오늘날은 전 서구세계의 지성과 마음에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의 예술 또는 그 예술이 표상하고 있는 현 인류의 전반적인 견해를 숙지하려면 개략적으로나마 이 운동을 이해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과학>

- 신적인 질서에 반기를 든 것으로 벌 받을까봐 늘 위협을 느꼈던 고대 과학자들과는 반대로,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우주를 통치하신다는 이해를 견지하는 동시에 자유로운 과학 탐구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다.

- 그때까지 사람들이 과학적인 문제에 관심을 쏟지 못하도록 거침돌 노릇을 한 것은 세상과 기독교의 관계에 대한 신비주의적 관념이었다.

- 17세기의 많은 과학자들이 사실상 헌신된 기독교인이었으며 그들의 연구 활동이 그들의 신앙을 저해한 일은 결코 없었다.

 

<이성의 시대>

- 18세기의 계몽주의 운동은 어떤 양상을 띠었는가?

- 계몽주의는 인문주의적 원리의 부활이었다. 인문주의적 지반 확보를 용이케 한 초기 인자는 인간의 삶을 주도하는 두 영역, 즉 신앙과 본성에 관한 과거의 유사 기독교적 견해였다. 그것은 신스콜라 신학의 형태로 부활하였다.

- 신앙은 문화 전반의 현안과는 별개의 것으로 사적인 의의를 지닌 것에 불과할 뿐, 실제적으로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되어 버렸다.

- 이성의 시대로 알려진 이 신문화운동의 주역들 : 데카르트, 홉스, 로크, 흄

- 이들에게 오직 과학적 사실만이 실재할 뿐이다. 그 외의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감각 인식에도 부합치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란 개념은 삭제되어야 했다. 인간과 그의 이성만을 전제로 했을 때 하나님뿐만 아니라 기타 다른 요소까지도 인간의 세계관에서 배제되어야 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진화론에 입각하여 이 새 과업을 감당하게 된 과학이야말로 최종적인 입증자인 듯 싶었다.

- 그래서 인간은 '자연적' 존재가 되어버렸고, 우주 내에 있던 그의 특별한 지위도 상실하고 말았다.

 

<상자 속의 인간>

- 과학주의가 거의 새로운 종교로 대두됨에 따라 인간은 기타 동물이나 식물, 그밖의 물질 등과 실제로 전혀 다를 바 없는 존재로 전락했다. 더욱이 다윈은 여기에 최종적인 증거를 보태는가 싶었다. 인간이 실제로 무엇이며 무엇이 될 수 있는가를 진화론의 입장에서 설명한 '자연선택'(또는 자연 도태) 이론을 들고 나온 것이다.

- 한 가지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 있다. 그것은 인간은 항상 인간으로서 남아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스스로가 자신을 어떻게 보건간에 인간만의 고유한 피조성 마저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피조계라는 전체 구조 속에서 인간에게 매겨진 지위도 박탈당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제아무리 그 자신의 철학적 신조로는 그 탈출의 가능성마저 부인한다 해도, 인간은 인간인 한 현대 사회에 만연된 인간성 말살 풍조와 그것을 고착화시키는 제반 체제에 항거할 수밖에 없다.

- 바로 이러한 인간의 처지를 심각하게 숙고한 당사자가 20세기의 실존철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상자 밖으로 뛰어나올 것을 종용했다.

- 이에 상응하는 여러 가지 요인들로 해서, 기술관료주의의 상부에 위치하거나 그것과는 완전히 절연되어 있는 실존적, 또는 비이성적 질서를 계시하는 역할을 도맡아 온 것이 바로 예술이었다.

 

 

제3장 현대 예술의 첫 단계

 

- 계몽주의가 종교적 진리의 영역에까지 가지를 뻗자 그와 관련된 영적 문제들은 뿌리채 흔들리기 시작했다. 더욱이 창조주요 입법자로서의 하나님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린 소치로 인한 연쇄 반응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예술 분야도 어쩔 수 없이 변화의 물결에 휩싸여야만 했다.

- 계몽운동이 야기 시킨 인식론적 의문은 이 세상과 그것을 지배하는 법칙이 무엇인지 우리가 과연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예술가들은 새삼스레 무엇을 그릴 것이며 무엇을 관찰해야 하는가로 고심하기 시작했다.

 

<그저 사실일 뿐...>

- 고야 등, 궁극적으로 그가 그려낸 것은 합리적으로 보이는 이 세상의 비합리성이었다. 그의 그림에는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그 이상의 사실은 없다.

 

<풍경과 실재>

- 낭만주의의 등장 : 우리는 어떻게 눈으로 볼 수 있는 이상의 것을 형상화시킬 수 있는가? 그 답은 '화가는 모름지기 상상력으로써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낭만주의의 전형적인 어투로서, 상자 안에 갇혀있을 수만은 없는 인간성에 대한 재확인에서 비롯되었다. 낭만주의는 18세기를 주도했던 합리주의에 반기를 든 가장 중요한 사조로서, 비이성적이고 별스러우며 신비스러운 것들을 찬미했다.

- 풍경화에 상당한 비중을 두기 시작한 것도 낭만주의 시대였다. 이 당시에 싹튼 풍경에 대한 연구는 과학적 관측에 필적할 만한 치밀도를 지닌 것이었다.

 

<주제의 사멸>

- 예술의 격변은 기법 뿐 아니라 제재 면에서도 일어났다.

<자연주의적 실재>

<현대 예술을 향한 또 다른 첫 걸음>

- 현대 예술은 딱히 규정짓기 힘들 정도로 복잡하다. 그럼에도 계몽주의의 결실이요, 그 기본 원리들이 터뜨린 꽃봉오리이다. 그러나 자연주의에 기초한 과학과 이성주의에 대한 반작용이란 우리 시대의 또 다른 양상도 현대 예술을 논할 때 빠뜨려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그 반작용은 분명 반작용이기는 하되, 자신이 튕겨져 나온 그것에 의존적이다. 자연주의와 그에 기초한 과학적 진리를 사실상 수긍하고 들어간다는 점에서 분명 그렇다.

 

<이상화된 도피주의>

- 낭만적이라 일컬어진 또 다른 화풍은, 풍경화 및 풍속화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었던 화가들과 존 마틴에 의해 일구어졌다. 그들은 한결같이 현실과는 동떨어진 나른한 꿈의 세계를 이상화했다.

 

<기독교 미술>

- 이성의 시대 개막과 더불어 고삐가 풀려진 반기독교, 혹은 비기독교 세력들 앞에서 기독교 예술은 과연 어떻게 대응했는가?

- 기독교의 대각성 운동에도 불구하고 정통적인 복음적 집단은 미술계에서 눈을 씻고 보아도 찾아보기 힘든 실정이었다. 계몽주의가 확산됨으로써 치명적인 비기독교화가 진행 중인데도 그 사실을 알아차린 그리스도인이 극소수에 불과했다. 적당히 타협한 이들, 교리적 정통성을 내걸고 전도에 몸바친 이들, 어느 쪽을 막론하고 자신이 몸담은 분야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영적 적대 세력과 맞서 사우는 데 실패하기는 피차 일반이었다.

- 기독교 미술은 철저하게 살롱 계열을 따른 것이었고, 자유주의적인 로마 카톨릭계 화가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계몽주의로부터 시작된 발전 도상에서 그 원칙들에 취해 거나해진 상태로 비틀거리면서도 기독교도임을 내세우는 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믿는 기독교, 그것은 이미 어떤 지고 지대한 확신일랑 버거워진, 그래서 적당히 희석된 기독교였다.

- 지난 수세기 동안,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예술과는 아예 담을 쌓다시피 지내온 것이 사실이다. 그 결과, 본래 그들이 지녔던 예술 전반에 대한 바른 식견과 비판 능력이 상실되고 말았다.

- 예술의 중요성을 과소평가 하기는 복음주의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뇌리엔 성경적 그림이란 곧 성경 속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형상화한 것이란 등식이 박혀 있었다.

 

<새로운 자연주의와 부르주아적 태도>

- 부르주아지는 현실 보장과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입술은 하나님을 읖조릴지 몰라도 마음은 온통, 보다 '실질적인' 기반 다지기에 쏠려 있다. 그들은 도덕적이고 진실되고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고자 했다. 그러나 정작 그러한 삶을 다질 기반이 그들에겐 없었다. 왜? 그들은 진정한 기독교를 거부하고 일제히 자유주의로 전향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신진 사상가들은 한술 더 떠, 인간은 본래 동물일 뿐으로 인간의 사랑이란 것도 사실상 성욕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던 터라 부르주아지들은 충격에 몸을 떨었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이 육체를 가졌다는 사실, 특히 성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은닉하거나 삶의 가려진 구석에 쳐박아 두기 시작했다.

- 그러한 토양 가운데 싹튼 것이 이른바 '낭만적 사랑'의 개념이다. 그러나 낭만적인 사랑이란 허구일 뿐이며 새빨간 거짓말임이 드러났다.

- 그리스도인들이 그토록 낙관주의적이고 인본주의적이며 '낭만적인' 사랑의 환상에 사로잡혔다는 것이 매우 의아스러울 것이다. 그것이 중세 때 인기 있던 헬라 철학에서 도출된 낡은 관념의 잔재였다고 한다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육체를 비천시 하다 못해 죄악시한 반면, 영을 거의 신비적으로 고양시켰던 관념의 부활에 원인이 있었다.

- 계몽주의는 그렇게 세상을 바꿔 놓았다. 그 원리를 신봉했던 사람들은 비애와 기만과 황폐한 삶 가운데 내던져졌다. 성 관념도 빅토리아조의 도덕자연함과 그에 대한 반발로 꽃피워진 외설스러움이 공존하였다. 특히 후자는 낭만주의 문학가들의 작품 속에서 구체화되었던 바 외설문학으로의 전락을 초래했다.

 

<사실주의에 대한 반발>

- 19세기는 빅토리아조의 체면 중시 경향과 외설적인 풍조 외에, '실증주의적 동향'에도 휩쓸려야 했다.

- 바야흐로 작가들은 '예술을 위한 예술'을 들먹이기 시작했다. 예술 작품의 창작에서 윤리 관념일랑 일체 배제시켜야 한다는 취지에서였다.

- 계몽주의가 소개된 18세기이래, 진부한 도덕 원리들의 가치를 깎아 내리는 소위 '정체 폭로' 작업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한때 사회를 주도했던 기독교적 여론이 무참히 붕괴되어 버린 폐허에 남겨졌다.

 

 

 제4장 현대 예술의 제2단계

 

- 인상파 화가들의 활동 : 실재에 대한 지식의 근원이 무엇이냐는 인식론상의 의문과 상통하는 문제와 씨름했다. 우리가 받아들이는 감각 배후에 실체가 있는지의 여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실체란 존재하지 않았다. 감각만이 실재할 뿐이었다.

 

<인상주의로부터>

- 고갱 : 예술가가 인상파와 더불어 자연의 노예로 전락했다고 느꼈다. 필요하다면 과장된 표현일지언정 두려움 없이 채용하여 우리의 예술을 재건해야 한다. 이젤 앞에 선 화가는 그 무엇의 노예도 아니다.

 

<실재에 대한 탐색>

- 반 고흐 : 인상파 화가들을 궁지로 몰았던 문제를 독자적인 방식으로 해결하기에 이른다. 반 고흐는 실재가 있음을 믿었던 화가다. 그러나 심오하고 보편적인 진리에 이르기를 열망하면서도 자신의 개인적인 반응의 차원에 충실하길 고집했다. 더욱이 자신의 그림이 평범한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길 원했는데, 이는 그가 사회주의적 이상에 강하게 매료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종합에 대한 탐색>

- 후기 인상파의 네 명의 화가들(쇠라, 드가, 반 고흐, 세잔느)이 마련한 새로운 방안 : 우주에 관한 지식 획득을 위해서는 감각 인식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과, 인간자유의 회복을 대강령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 다시 말해, 인문주의적인 인간성 주구의 가치를 드높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신비적 - 낭만적인 반동>

- 아르 누보는 비단 영국에만 국한된 운동이 아니었다. 이름 자체가 말해주듯 불란서 또한 그 가운데 휩싸이지 않을 수 없었고 이윽고 브뤼셀, 비엔나, 뮌헨, 토리노를 중심으로 한 유럽 전역에까지 확산되기에 이른다.

- 실내 디자인과 건축 분야까지 총 망라했던 아르 누보의 창조물들은 가우디의 실내장식이 그러하듯 종종 기이하고 과격한 양식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 아르 누보는 후기 인상파의 공을 업고 출발한 신 미술인 셈이다.

 

 

제5장 현대 예술의 마지막 단계

 

- 오늘날 일반적으로 비구상 예술로 칭하는 추상화에로의 활로가 열렸다.

- 19세기의 실증주의에 대한 사무친 반발이 전혀 새로운 유형의 예술, 곧 추상 미술을 탄생시켰다.

- 입체파(피카소)의 등장 : 인격적인 것이란 더 이상 논의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변했다. 인격적인 신의 부재가 부른 당연한 결과였다. 인간이고 동물이고 식물이고 사물이고 할 것 없이 모두가 근본적으로 똑같을 뿐이다. 이에 따라, 그들을 묘사하는 방식상의 기본적인 차이도 불식되어야 했다.

- 피카소의 "아비뇽의 아가씨들" : 현대는 비로소 1907년에 그려진 이 작품을 통해 예술의 신기원을 열게 되었다. 그들의 얼굴은 인간성과는 완전하게 절연된 가면에 가깝다. 바야흐로 하나의 과학으로서의 회화가 시작된 것이다. 피카소는 인물을 묘사할 때 표정 자체를 배제시켰다.

- 입체주의 미술은 반자연주의적인 색채가 뚜렷했다. 일반성과 보편성을 추구했던 이 유파는 추상 쪽으로 흐르다 끝내는 악마적인 성격까지 띠게 되었다.

- '인간은 죽었다'는 내용은 실로 현대 예술 공통의 주제이다. 진정 인간은 죽었다. 인간은 기계, 그것도 골치 아플 정도로 복잡하고 엉터리 같은 기계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 세상은 무가치하고 무의미하며 다만 악할 뿐인데다, 신은 이미 죽었기에 인간이 다다르기를 힘슬 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선포한다는 면에서 그렇다.

 

 

제6장 펼쳐진 신기원

 

- 현대 예술에 이르는 세 번째 단계는 세계사에서 새로운 연극, 새로운 드라마에 대한 서곡과 같았다. 이처럼 예술은 전혀 새로운 심성, 새로운 정신을 함양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 하나님이 죽은 예술에서는 인간도 역시 죽어가며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인간성, 즉 인격과 개체성도 상실되고 만다. 이는 인간을 그의 형상대로 만드신 창조주가 부인되거나 경시되자마자 모든 보편적인 것들도 상실된 탓이다. 인간이 자신들의 감각과 두뇌만을 의지하고 그 위에 어떤 실재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인간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두신 역사의 한 시기에서 마음대로 벗어날 수 없으며, 지금 여기에서 그분의 자녀로 살도록 우리에게 부여해 주신 우리의 임무에서 벗어날 수 없다.

- 초현실주의의 등장 : 두 가지 독특한 양식 = 추상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 후자를 통해서 우리는 지나치리 만큼 정확하게 그려진 이미지들을 접하게 된다.

- 초현실주의자들은 악을 자행함으로써 그 악에 대항하고, 또 하나님과 이웃을 미워하라고 우리를 부추긴다. 또한 이 세상의 구속은 오로지 혁명과 테러, 기존의 무질서들을 와해시킴으로써만 가능하다고도 한다. 그들은 부조리가 존재하지 않을 더 나은 세상을 열망했다. 죄와 증오, 잔학성이야말로 진짜 부조리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 하나님이 만드신 대로의 창조계와는 전혀 딴판인 그런 세상을 꿈꿨다. 또 그들은 자유를 갈구하되 인간 자신 안에서, 내적 자아와 무의식을 노출시킴으로써 찾고자 했으나 결과는 오히려 잃어버린 쪽이었다.

 

 

제7장 현대 예술과 20세기의 반란

 

- 현대 예술의 획기적인 발전은 아무래도 1960년 이후에나 가능했고 그 역시 지지세력의 새롭고도 열성적인 활약 덕분이었다. 현대적인 예술 작품들이 전 분야에 걸쳐 영향력을 떨치게 된 배경에는 젊은 세대를 주축으로 한 무정부주의적 경향이 있었다.

- 현대적인 예술 운동의 압승에는 적들의 방심이란 요인도 한 몫을 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전통에만 얽매인 채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하찮은 시비나 일삼곤 했다.

- 계몽주의의 기본 원칙들이 거짓 우상으로 판명 났는데도 대신할 만한 새로운 원리는 내놓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판국은 '참되고 생존하신 하나님마저 죽고 없는 마당에 무슨 …' 하는 식으로 내뱉는 신학자들이 있을 정도였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이 구제 사업에 힘쓰고 구원을 선포하는 면에서 열성적이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우리 문화의 주요 안건들은 해결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정말 중요한 문제점들이었다.

- 20세기 중반까지 조각분야는 몇몇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그런 대로 고전적 스타일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금세기 전반을 지나면서 대대적인 파괴의 물결이 조각 분야를 휩쓸었다.

 

<해프닝과 히피족>

- 해프닝 출현의 한 가지 원인은 미술상들과 그들을 찾는 고객의 속물적 취향에 역겨움을 느낀 예술가들의 반감이었다.

- 이것은 결국, 모더니즘이 승리를 맞게 되는 시기가 무르익었다는 증거였다.

- 히피운동 : '죽음 이전의 삶에 과연 진실된 의미가 존재하는가?'

 

<재즈, 블루스, 비트>

- 남북전쟁 종료 후 몇 년 동안 미국의 흑인 교회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부흥이었든지 아니면 그 성격을 딱히 규명할 수 없는 그 밖의 것이었든지 간에 어쨌든 성황을 이룬 것만은 틀림없다. 이때 새로운 음악이 탄생했으니 남녀 혼성 사중창이나 마할리아 잭슨과 같은 독창자가 주로 불렀던 '가스펠'이다.

 

 

제8장 저항, 혁명 그리고 기독교적 대응

 

- 특별히 시각 예술 분야를 놓고 볼 때 오늘날의 예술계는 다양함 그 자체이다. 기법적인 원리는 16세기로부터 18세기에 이르는 고전 시대의 것을 사용한다.

 

<인간성을 추구함>

 

<플라스틱 인간>

- 텔레비전은 획일적인 우리 가정의 구심점이 되었다. 그 속엔 실재에 대한 일률적 관점, 일률적 접근이 역시 프로그램화 되어 있다.

 

<물질 너머에>

- 인간성을 되찾고자 하는 일념으로 인간은 도리어 자신의 정체성과 인격의 상실까지도 불사해야 했다.

- 선 사상은 해결하기 어려웠던 현안들의 해답처럼 보였으므로, 서구인들은 마침 새로운 길을 찾아 비틀거리고 있던 순간에 오랜 전통의 지혜를 만나 반가웠다. 이성적인 모든 것들로부터의 탈출을 모색하던 인간은 반이성적인 길로 들어섰다.

- 키에르케고르는 마침내 신앙은 이성으로부터의 비약이어야 한다는 이해에 도달하게 된다.

- 실존주의는 데카르트로부터 출발해서 이성의 시대에 그 토대를 다진 철학 전통의 종점이라고 하겠다.

-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에 대한 확신을 얻고서 그 다음으로 이행한 단계는 신의 존재에 관한 증명의 단계였다. 그리하여 전체 자연계는 그것을 보증하는 신에 의해 인식 가능한 것이 되었다. 결국 신의 존재는 데카르트 주변에서 다시금 확인되었을 뿐이다.

- 그러나 또 다른 시간과 공간의 데카르트적 회의자였던 사르트르는 신은 죽은 존재였다. 현대인인 사르트르는, 데카르트가 신의 기적적인 빛의 인도로 구출되기 전까지 표류해야 했던 그 무(nothingness)의 고통 속에 남아있는 것이다. 사르트르에게 인간 자신의 존재보다 선행하는 본질, 또는 가치의 불변적 구조란 없다.

- 예술가는 이제 실재 저 너머에 있는 의미를 찾는 선지자였다. 계몽시대의 출범이래 예술은 과학과 분리되어 자유와 인간성을 대변하는 영역으로 여겨졌다. 낭만 시대의 예술의 위치는 한층 격상하여 특히 문학과 음악은 인문학 최고의 권좌에 올라, 진리의 심층을 계시하는 역할까지도 도맡게 되었다.

-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인간 본연의 형상마저도 상실한 현대 예술은 다름 아닌 오늘날의 시대적 드라마이다. 거기서 우리는 인간과 사회,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믿음에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본다.

 

<마약 곧 종교>

- 실재를 체험하거나 초월의 경지에 이르는 일은 또 있었다. 마약을 통한 길! 그러나 마약에 대한 보다 결정적인 반대는 그것이 일종의 사이비 종교를 조장하곤 하는 사실과 관련된다.

- 현대인은 그만큼 새로운 신화에 대한 갈망에 사로잡혀 있다. 남녀를 무론한 모든 인간 존재가 진정한 실재, 진정한 삶, 본연의 인간성, 그리고 그것에 딸린 참 자유를 원하나 실제로 인간은 그것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 곧 성경에 계시는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인정하기 싫어하면서 인간의 자율성만을 내세우는 계몽주의의 기본 원칙에 천착하는 한, 그러한 상실 상태는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이다.

- 우리가 알고 있는 살아계신 하나님, 그분의 실재하심을 과연 말뿐 아니라 행동거지, 사고와 지식 체계로 얼마나 증거했던가? 스스로에게 정직히 답변할 때이다. 우리 중 누구도 죄책이 없다고는 못할 것이다.

 

<무엇이 정상인가?>

- 그렇다면 현대인은 무엇을 찾고 있는가? 여태껏 그들이 답이라고 찾았던 것들이 결코 답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아마 그에 대한 답일 것이다!

- 그렇다면 미는 어디 있고 또 진리는 어디 있는가? 그들이 말한 사랑은 결국 성행위에 불과하다는 것과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탈진해 버렸다.

- 극장에서 상영되는 많은 영화들은 어느 정도 도덕성을 깔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영화들은 좋은 것이 못된다. 그것들은 애당초 신의 부재를 기정 사실화한 상태에서 오히려 축소되고 피상적인 세상을 참인양 묘사한다. 이런 유형의 영화들 대부분이 중산층의 감각에 맞으며 반기독교성을 노골적으로 의;도하고 있지도 않다. 그러나 그들은 하늘을 닫는데 조력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영상 밖으로 밀쳐 둔다.

 

<비극적인 저항>

- 그들의 저항은 성 혁명으로부터 전개되었다. 완전한 성개방은 모든 학생 운동의 첫 번째 요구사항이다. 저항의 다음 단계는 모든 체제를 떠나 자유분방한 집시적 생활을 하는 '이탈'이었다. 이들은 새로운 세상, 즉 무정부주의적인 동시에 개인의 절대 자유가 보장되는 세상을 고대하며 살아간다.

- 그러한 세계관 하에서 세상은 철저하게 세속화되었으며 하나님을 부정하는 폐쇄 체계엔 합리성과 불합리성, 자연주의와 신비 사상의 이중성만이 팽배해 있다.

 

<방임적인 사회>

- 비록 혁명 세력들이 제출하는 참신한 이념이 아무리 이상적이고 더 나은 세상을 목적하는 것일지라도 현실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혹 그러한 이념이 실행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단지 우리 사회의 붕괴라는 방향에서 추진된다. 즉, 자유 획득을 위해 자유를 빼앗는다거나, 폭력과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폭력의 사용을 정당화하는 식의 모순을 발견하게 된다.

 

<묵시>

- 하나님은 죽지도 않으셨고 세상은 닫혀버린 공간도 아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을 향해 열려 있다.

 

<교회의 갱신을 바라며>

- 이곳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적은 누구인가? 그리스도의 적은 바로 그 시대의 교인들, 즉 성경에 대한 지식과 정통성을 자랑하던 바리새인들이었다. 이를 현대적 술어로 표현하면 교회의 부르주아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교회는 도덕적이다 못해 도덕주의적이기까지 하다. 그들 중엔 정통을 고집하는 지독한 보수주의자로 낡은 교리를 율법주의적으로 준수하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급진적이고 자유주의적이며 현대적인 성향의 이들도 있다.

- 현대 예술을 고찰한다는 것은 곧 아방가르드 정신의 산물을 고찰함과 같다. 아방가르드는 하나님도 없고 그 어떤 규범도 없는 세계관을 건설하는데 앞장섰던 이들이다. 그러나 현대 예술의 그러한 정신은 한편, 그리스도인들이 예술 분야를 오래도록 이 세상에만 맡겨둔 결과는 아니던가? 신비주의자인 양 세상으로부터 멀찌감치 물러나 예술은 한갓 속될 뿐이라고, 아니 죄되기까지 하다고 정죄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아니었던가?

-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두뇌로 입증할 수 있는 것만 받아들이는 이성주의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감각 인식으로써 체험 가능한 것만 실제적임을 믿는 자연주의자도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두뇌를 사용하여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고 또, 하나님이 역사와 다른 이들의 삶 속에서 행하신 일들과 이 세상의 세력들에 대한 그분의 통치력을 입증하신 사건들을 토대로 한 믿음이 요구된다.

 

 

제9장 신앙과 예술

 

- 그리스도인은 과연 어떻게 주변 문화와 더불어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

- 첫째로, 인간은 실재의 주어진 구조와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활동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자연법과는 다른 것이다. 세속적 세계관에서 흔히 말하는 '자연적인'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이다.

- 여기서 기독교가 문화에 영향을 끼치는 방식이 정의된다. 그 방식이란 성령의 열매가 결실한 또 다른 열매가 됨으로써, 달리 말하면 세상의 소금이 됨으로써 가능하다. 우리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 창조적 존재로 소명을 받았다. 아울러 이 소명엔, 간혹 그에 따르기도 하는 십자가를 지는 일까지 포함되어 있다.

- 어쨌든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게끔 되어 있다. 그리고 세상을 지금과 같은 죄된 장소로 만드는데 일조를 한 것은 바로 우리의 죄였다.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비록 우리가 관여하지 않았더라도 소금으로서 행하지 않고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지 않았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면책받을 수 없다.

- 악과의 접촉 자체를 초월하려 애쓰는 것은 무의미하다. 악은 우리 안에 존재할 뿐 아니라 우리를 온통 둘러싸고 있다.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대망 한다고 해서 지금의 이 세상에 대해 선택 거부권을 행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또 어떤 것이 선이고 어떤 것이 악인지를 분별하기 위해서라도 이 세상에 대한 지식을 가져야 한다. 단 세상을 심판하고 그것을 무가치한 것으로 낙인 찍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예술의 기독교성>

- 다른 예술과 나란히 견줄 만한 기독교 예술이 있는가? 아니 기독교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사실상 있기는 한가? 예술을 결코 기독교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용도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 반대는 성립된다. 즉, 예술의 정당성은 기독교를 통해 비로소 드러난다.

- 성경적 또는 기독교적 주제를 사용했다 해서 반드시 기독교 예술인 것은 아니다. 피카소가 그린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처형만도 몇 개인지 모를 정도이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의 산물이라기보다 독설의 표출이었다.

- 그러나 예술에서 기독교성을 결정짓는 것은, 채택된 주제가 아니라 거기 담긴 정신이다. 다시 말해, 그 예술이 투사하고 있는 실재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진정 성경적이냐가 관건이다. 그리스도인 됨이 하루 종일 할렐루야를 흥얼대며 돌아다니는데 있지 않고, 그리스도에 의해 거듭난 생명을 진정한 창조력을 통해 드러내는데 있듯이, 그림 속의 인물에 후광이 둘러져 있다거나 할렐루야 소리가 들린다 해서 모두 기독교 회화인 것은 아니다.

- 기독교 예술은 별다르지 않다. 그것은 하나의 건전하고 건강하며 이로운 예술일 뿐이다.

- 기독교의 진수는 삶을 갱신시키는데 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는 예술의 갱신에도 관여한다. 예술은 그 자체가 곧 성령의 열매로서 우리의 정서나 감동, 또 그것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미적인 감각 등을 포함해 기독교적 정신의 한 표출 방식이다.

-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중시하는 일도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달려있다. 그리고 그 일은 우리의 전 존재 영역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예술의 역할>

- 예술의 존재 의의는 인간에게 예술과 미의식을 부여하는 것을 좋게 여기신 하나님의 의도에 기원한다. 그러나 예술이 기독교를 장려하는 한에서만 정당할 수 있다는 식의 발상은 그릇되다.

- 우리가 특별히 기독교적 목적, 즉 교회 장식이라든가 비신자들을 흡수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예술의 활용을 고려한다면 그 예술의 질적 우수성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싸구려 예술은 곧 싸구려 예배 또는 싸구려 메시지로 이어질 수 있다.

- 예술과 미는 정당화가 필요치 않으며 각별히 받들 무엇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단지, 사랑과 자유 안에서 영원한 기쁨으로 누려지고 감상되며 실용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위대한 선물일 뿐이다.

 

<예술 가치의 심미적, 도덕적 차원>

- 어떤 사람에게 자신이 창조해 내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비범한 통찰력, 심오한 이해, 그리고 위대한 이상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에게 정작 그것을 적합한 형식으로 현실화시킬 능력이 없다면, 그것은 훌륭한 예술품으로서의 가치는 발하지 못할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통찰력도 변변찮고 드러낼 자기 식견이랄 것도 없는 어떤 이에게 뛰어난 색감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의 작품은 별 볼일 없는 내용에 아름다운 색만 입힌 예술이란 평을 면치 못할 것이다. 미술사적으로 걸작에 꼽히는 작품들의 공통점은 내용표현의 일치라 할 수 있다. 아름다운 심상이 역시 아름다운 방식으로 표현되고 현실화된 경우다.

 

<예술의 규범과 구조>

- 예술의 진실성, 정직성, 품격, 미학

- 예술에서도 가장 큰 규범은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모든 일들을 올바르고 합당하게 처리하며 이웃끼리 서로 돕고 이 세상을 좀 더 아름답고 조화로우며 인간다운 삶에 보다 적합한 질로 만드는 동시에,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사랑과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다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세상으로 만드는 것이다.

- 예술가의 소명은 음율이나 형태나 이야기나 장식 등에 창조의 능력을 발휘하여 인류에게 진정 의미있고 사랑스러우며 기쁨이 될 수 있는 환경을 창출하는 동시에, 인생을 보다 살만하고 가치있게 만드는 데 있다.

 

<그리스도인 예술가>

그리스도인 예술가의 소명은 선을 도모하고, 악과 추한 것과 부정적인 요소들을 타파하며, 의에 주리고 목 말라 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물론, 적재 적소에 단어들을 삽입하며 적절한 음색을 고르고, '마무리 필치' 하나에도 완벽을 기하는 태도까지 포함된다.

- 미를 창출해 내는 은사는 하나님이 보편적으로 시여하신 것으로서 그리스도인에게만 한정된 특권은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존재이므로 이제 그는 인간과 세상을 행한 하나님의 진정한 의도를 인식하고 그 인식의 결과로써 예술을 통해 미를 창출해 낼 수 있는 최적의 자리에 있는 셈이다. 우리가 작업할 때 기도해야 하는 이유도 거기 있다.

- 그리스도인 예술가들로 하여금 성령의 영감에 의존하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의 갱신을 갈구하게 하자. 그리하여 그가 소유한 재능의 출처를 인식할 뿐 아니라, 사랑과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하자.

- 그것이 무엇이든 이 시대에 적실한 것을 성취하고자 한다면 현 세태와 동향에 정통해야 하고, 주변 환경에 대해서도 올바른 이해를 가져야 한다. 더욱이 세태가 망가진 모습이라면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알기 위해 시대 정신을 간파하고 그것에 맞서 싸워 나가야만 한다.

- 우리의 노력은 길고도 험할 것이다. 예술가 개인의 힘으로 성공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를 후원해 줄 공동체가 필요하다.

 

<변화하는 세계 속의 그리스도인>

- 그렇다면 우리의 소명은 무엇인가? 물론 우리 각자의 우선적인 소명은 그리스도인이 되어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이다. 각색 광고, 영화, 텔레비전 등등, 온갖 종류의 유혹이 도사리고 있는 세상에서 그와 같은 삶이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위원회에 참가하거나 상당한 중책이 부여된 위치에 서서 어떠한 의견을 표하거나 무언가를 집행할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과연 무엇을 말하고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우리가 처한 현실 속에서 우리의 소명은 대체 어떤 것일까?

 

(1) 첫째 우리는 자유를 수호하는 편에 서야 한다.

- 우리가 자유를 수호해야 할 이유는 실로 많다. 자유의 상실은 곧 인간성 상실을 초래할 것이고, 자유가 없는 세상이라면 사랑을 위한 여지도 없을 것이며, 그리스도인이 되거나 복음을 전하고 다른 이들을 모임에 초청할 자유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2) 인간성 수호의 책임 또한 우리의 몫이다. '개성'은 인간에게 선사된 크나큰 선물이다.

(3) 이 시대를 비판하는 것 또한 우리 소명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선지자적인 선포를 위해 부름을 받았다.

※ 우리의 소명은 자유와 사랑 안에서 살되, 그 자유와 인간성을 수호하기 위해 죄에 맞서 사우는 것이다.

 

- 바울이 우리에게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이 되고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이 되라고 이른 대로, 그들의 방식과 관습을 헐뜯는 대신 수용하면서, 그들을 편견 없이 만나는 가운데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일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그들의 당면 과제, 그들의 사상을 연구하고 소통하기 위해 그들의 언어를 익혀야 한다.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사실은, 세상은 단순히 우리와 무관하고 별개인 그 무엇이 아니며 우리는 오히려 세상과 닮은 구석이 많고 우리 안에서 세상의 속성을 발견할 때가 많다는 점이다. 세상을 달리 말하면 사람들, 인간 존재들, 인격체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을 돕되, 그들의 특수하고도 구체적인 문제와 필요를 따라 그들 하나하나를 돌보는 입장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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