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현대적 적용 분야(계속)
B. 통일한국을 위한 비전의 초석: 지대조세제(Land Value Taxation)
이제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토지법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통합하는 기초와 모델을 제공한다는 것을 다루고자 한다. 다시 한 번 “공의”의 문제를 생각해보자. 우선 미가서 6장 8절을 생각해보자.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사람의 세 가지 요소를 말씀한다. 그것은 율법의 기본 정신은 의와 인과 신이다. 그 세 가지 요소란 ; 공의, 사랑, 그리고 하나님과의 동행이다. 이 땅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그러나 위의 세 가지 요소를 균형 있게 받아들이고자 노력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드물다. 사람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려는 경향이 있다. 먼저 사회운동만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사랑에 대해 느끼지 못하며 또 무릎 꿇어 기도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있다. 그들은 행동을 강조하면서 기도하지 않는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반면 사랑만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열심히 구제도 하고 전도도 한다. 그러나 이 땅위에서 벌어지는 각종 불의, 부정, 구조적 갈등에 대해서는 귀와 마음을 닫아버리고 침묵한다. 그리고 사랑의 행위만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과 밀접하게 교제하는 것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반면, 기도원에서 기도만 하려하고 세상의 아픔들을 대신 짊어지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또는 사랑도 알고 하나님과도 동행하고자 하는데 공의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한 신자들도 많다. 우리는 이들 세 부류 가운데 어디에 속하였는가? 우리 복음주의 교회 안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바로 이 ‘공의’에 대한 무지라고 할 수 있겠다. 공의에 대한 무지는 고의적인 무시로 나아가며 결국 공의사역을 천대하거나 멸시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개인의 영혼구원에만 국한하지는 않는다. 복음은 전인적인 것이므로 복음을 전하는 자는 마땅히 사회의 구조적인 불의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개인과 교회를 향해서만 말씀하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사회와 나라와 민족을 향해서도 말씀하고 계시는 분임을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 사회와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사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외쳐야 하지 않겠는가?
한때 한국교회는 사회의 존경받고 영향력 있는 리더들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 성경적인 관점에서 명석한 분석과 대안을 제시하는 리더들을 오늘날 교회가 배출하고 있는가? 개인의 복과 영혼구원, 그리고 개교회의 성장에만 집중한 결과가 아닌가? 그래서 교회에 다니는 친구들은 막상 세상 친구들과 만나면 이 세상문제에 대한 기독교적인 대안들을 제시하지 못한다. 교회는 그들로부터 “너희들은 나약한 자들”이라고 손가락질 당하고 있지 않는가? 필자는 이데올로기의 문제로 고민하던 때에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 때 세상은 교회는 왜 사회에 대해서 무관심한가? 교회는 왜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 침묵하는가? 라는 세상의 핀잔을 종종 들었다. 물론 지금은 더 이상 이데올로기가 우리의 고민이 되지 않는다. 지금은 개인주의, 향락주의, 세속주의가 각 사람을 주도해나가는 듯하다. 고민을 하더라도 공동체에 관련된 것은 하지 않는 것 같다. 다른 사람의 아픔은 더 이상 나의 문제가 아닌 시대가 되었다. 나만 성공하면 된다는 식의 논리가 우리 시대의 우상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저마다 개인의 문제에 얽매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교회는 오직 성장만을 외치는 것 같다. 필자에게는 이것보다 더 심각하게 보이는 것은 없는 것 같다. 이러한 개인주의는 우리 교회에 있어 가장 큰 적이 되고 있다. 지금의 교회는 공의에 대해서는 침묵하기로 작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더 이상 이 공의에 대해서 침묵해서는 안 된다. 오늘 이 문제를 우리나라의 통일문제에 한번 거창하게 적용해보자. 10년 후에든지 아니면 50년 후에든지 우리나라가 통일되리라는 기대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일각에는 영원히 통일이 되지 말고 이 대로 양국체계로 굳어지기를 바라는 것 같기도 하다. 지불해야 할 대가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문제는 통일이 되느냐 안 되느냐는 더 이상 우리에게 의미가 없다. 교회는 지구상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 있는 이 사회에 대안을 제시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주지하듯이 서독과 동독이 통일이 되자 그것을 보고 한국의 정치가들은 소위 북방외교를 강조했다. 서독이 막강한 자본주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통일에 성공하자 그것은 우리 정치가들에게 열등감을 심어주게 된 것이다. 그러나 통일 독일이 점차 인플레와 실직증가, 물가불안, 부채상승 등 사회적 문제를 보이게 되자 한국에서는 조심스럽게 통일 배격론까지 거론하기에 이르렀다. 김영삼 대통령은 흡수통일은 반대한다고 천명까지 하였다. 그러나 역시 대안은 제시하지 못하였다. 교회는 통일문제에 대해서 기도 외에는 달리 침묵하고 있다. 자 어떤가? 독일의 경우처럼, 자본주의 체제에 근거하여 통일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공산주의 체제에 근거하여 통일되어야 하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우리의 대안은 그 둘 다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통일에 대해서 환상을 품고 있다. 그것은 의로운 통일이 아니라 잘사는 통일을 희구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손해 보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항상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어떻게 하면 공의에 기초한 성경적 체제를 제시하고 준비할 수 있을까라고 고민하는 모습을 찾아보기는 힘든 것 같다. 한국교회는 의로운 통일보다는 잘사는 통일을 우선 바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대안을 제시할 수 없다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대안을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문제에 대해서 전적으로 무감각하다는 것이다. 성경을 가지고 세상 안에서 고민하지 않으려 하는 모습이야말로 우리 젊은이들의 가장 큰 문제이다. 오직 개인의 복, 개교회의 성장에만 지대한 관심을 가질 뿐이다. 그들은 예리한 감수성으로 사회에 대해서 비판을 가할지 모른다. 하지만 성경에서 대안을 찾고 개혁하고자 하는 몸부림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회의를 나타낸다. 이것이 세속주의와 개인주의에 영향 받은 교회의 모습이 아닌가?
구소련의 붕괴를 생각해보자. 페레스트로이카, 즉, “인간적 민주적 사회주의”를 외치며 스탈린 체제의 타도를 부르짖으며 개혁을 주도한 고르바초프의 노력은 볼셰비키 체제의 붕괴를 가져왔다. 그것을 지켜본 많은 한국인들은 자본주의 체제가 공산주의를 이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자본주의 세계 내에서도 빈부의 격차가 심각해지고 비인간적인 소외현상이 나타나는 등 심각한 문제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지 않는가? 진보가 될수록 빈곤은 더 깊어만 간다.(헨리 조지가 쓴 [진보와 빈곤](무실출판사)을 반드시 읽어보기 바란다) 자본주의가 가장 성공했다고 하는 미국사회가 빈민에 대한 문제로 골치아파하고 있다. 우리 서울이라는 도시를 한번 바라보자. 등잔불 밑이 어둡다는 속담처럼, 자본주의가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자본주의의 그림자에 가리어진 곳에서는 그야말로 소외되고 비인격적이고 비참한 현실을 찾아볼 수 있지 않는가? 국민소득은 만 불 대로 올라가고 OECD에 가입한 것을 자랑하고 있지만 10년 전에 비해서 삶의 질이 얼마나 나아졌는가? 그때보다 노숙자들과 실업자들, 그리고 과도한 부채와 빈곤을 비관하여 자살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나지 않았는가? 이것은 자본주의가 막다른 골목으로 향하여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필자는 현재의 공산주의도, 자본주의도 다 하나님의 말씀에 바탕을 두지 않은 체제라고 믿고 있다. 이 체제 안에서는 우리가 아무리 경건하게 살고자 하더라도 한계가 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교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새로운 삶의 체계를 배워야 한다. 우리의 고민은 여기서 시작되어야 한다. 이 사회에 제시할 수 있는 우리의 비전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교회는 이러한 사회에 희망찬 대안을 제시할 수 없단 말인가? 성경에서는 어떤 빛을 던져주고 있는가?
여기서 성경 레위기 25장 23절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본문에서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땅의 영원한 매매를 금지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을 소위 ‘희년법’이라고 하는데 이 희년법은 고대근동아시아에는 없었고 오직 이스라엘에만 있었던 법이었다. 이 희년법에 의하면 온 땅의 주인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선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땅의 매매가 무조건 금지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49년을 넘지 못하도록 제정되었다. 바로 이 희년법의 원리야말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성경의 대안이이요 통일한국의 사회경제체계의 근간이 된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실제로 뉴질랜드, 호주, 홍콩, 대만, 싱가폴 같은 나라들이 이 법의 원리를 경제사회제도에 도입함으로써 사회복지가 발전하는 등 상당히 좋은 효과를 가져왔다고 한다. 현행 공산주의는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을뿐더러 나라의 상당한 재산과 땅을 소수의 당이 독차지하고 있다. 반면 자본주의는 사유재산소유권에 대하여 문을 너무 크게 열어놓은 나머지 재물이 사람들을 다스리는 하나의 신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신학자들은 그 재물의 신을 ‘맘몬’(MAMMON)이라고 표현한다. 그렇다. 돈이 없으면 이제 아무것도 못하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이다. 그것은 돈이 신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형식적인 자유는 보장받았어도 실제적인 자유는 박탈당했다.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선언을 하였어도 자기 땅이 없는 흑인들은 다시 옛 주인에게로 가서 종노릇했다. 톨스토이가 말했듯이 오늘날에도 노예제도는 현존하고 있다. 돈이 사람을 지배하고 있으며 그 배후에는 땅에 대한 독점권이 배경을 이루고 있다. 재물이라는 현대의 신은 많은 사람들을 비참하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 자기를 하나님보다 더 섬기도록 만들고 있다. 우리는 황제숭배를 강요했던 로마제국과 같은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돈의 숭배를 강요받고 있다. 지금 북한과 남한은 너무나도 그 체제가 다르다. 어느 한 체제를 중심으로 통일될 수도 없고 또 되어서도 안 된다. 두 체계는 너무나 상극이어서 이대로는 통일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어느 하나의 체제를 중심으로 통일을 시도하는 것은 서로 간에 큰 상처를 주고받게 될 것이 뻔하다. 두 극단적인 체계를 아우르고 피해를 최소화하는 대안체계를 마련해놓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필자는 공산주의도 비성경적이지만 토지에 대한 독점권을 인정하는 자본주의는 더더욱 비성경적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희년법의 원리를 도입해야만 한다. 그것을 통일정책에 반영해야만 한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사회주의로의 회귀로 볼 수 도 있지만 하나님의 토지법은 토지에 대한 독점적 소유를 제한할 뿐 자신의 사유재산이나 노동에 의한 정당한 부의 축적을 금지하지 않는다. 그렇게 보면 노동 가치에 대한 세금은 성경적이라고 할 수 없다.
성경은 모든 땅의 주인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보여준다. 사 5:8, 합2:6-7, 시 24:1 등을 한번 보라. 그러나 이스라엘은 역사가 계속 진행되면서 이러한 신앙고백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래서 바알과 맘몬이라는 탐욕의 신을 이방나라로부터 수입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바알을 섬기면 풍성한 수확을 보장받는다고 믿었다. 또 힘있는 자는 누구나 땅을 차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토지에 대한 신앙고백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하나님이 나누어주신 기업의 땅을 더 이상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자기의 것으로 삼기 위해서 부동산투기를 하게 되었다. 이방토지법이 이스라엘에 들어오게 된 것에 대해 왕상 21장의 이세벨의 이야기가 잘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은 더 이상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돈과 부동산을 우상으로 섬기며 살아가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돈을 사랑하는 자’라고 성경은 말하게 된 것이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부자들은 희년법을 무시하고 돈을 우상으로 섬기며 부동산투기를 하며 불로소득으로 부를 축적하며 부동산권리를 이용하여 가난한자들을 착취하던 사람들이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들 중 대개가 성경과 율법에 정통했다고 하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었다는 것이다. 오늘날도 그렇지 않을까? 성경을 안다고 하면서도 불로소득으로 부를 쌓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가 예수님이 핍박당하신 이유를 생각하자면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우선 그분께서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시했고, 성전을 비판했고, 바리새인들을 비판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핍박당하신 요인을 사회적으로 보자면 이 희년법의 실천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눅 4장에서 예수님은 이 희년법의 종말론적 성취를 위해 오셨고 이를 위해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선언하신다. 그리고 자신을 따라오는 제자도로서 ‘소유포기’, ‘재물포기’, ‘권리포기’라는 것을 중요한 전제조건으로 말씀하셨다.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사실은 맘몬(MAMMON)을 섬기고 있다고 하셨다. 땅에 대한 소유권을 버리지 않는 한 결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셨다. 그리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귀신들린 자와 병든 자에게 실질적인 희년을 선포하시게 되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다. 이것은 사실 당시 부당하게 땅을 소유하면서 불로소득을 누리던 부자, 특히 지주들에게 상당히 위협적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희년이 완성되면 자신의 땅과 재물과 노예들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면 예수님께서 지주(地主)들을 공격하시고 하나님의 소유권을 주장했기 때문에 핍박을 받으셨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누구든지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게 된다고 사도바울은 말씀하였다. 이것은 인간역사에 있어 어느 때나 통하는 만고불변의 원칙이다. 또 이것은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모든 제자들에게 공통된 것이다.
하나님의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어떻게 가볍게 여길 수 있는가? 십계명에 기록된 도적질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겠는가? 그것은 남의 소유권을 침범하고 나의 소유권으로 주장하는 것이 아닌가? 마찬가지로 모든 땅의 주인이 하나님이신데도 불구하고 내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부동산투기를 하며 불법으로 외국인 근로자를 영입하거나 노동법을 어기는 등 부당한 방식으로 노동력을 착취하며 불로소득을 축적하는 것은 명백히 도적질 행위가 아닌가? 레 25:23에서 땅을 영구히 팔지 말라고 하신 것은 땅에 대한 사람의 소유권을 부인하신 것이다. 사람은 단지 땅을 관리하는 청지기권만 있는 것이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고 사람은 땅 위에서 나는 가치들을 잘 관리하여야 한다. 이 청지기 사상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대안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장사하여 자기를 위해 이익을 저축하는 것을 부정하셨다고 해서는 안 된다. 토지매매는 일시적으로 허락하셨다. 그리고 장사하여 자본을 저축하고 다시 재투자하는 것을 인정하셨다. 그러나 불로소득과 정당한 노력에 의하지 않은 소득은 가난한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불로소득은 내 것이 아니다. 그거은 공동의 것이어야 한다.
바로 이러한 원리가 우리 사회의 세제(taxation)에 적용되어야 한다. 필자와 성토모의 주장은 이것이다. 지대조세제의 관철과 실현이야말로 통일한국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대안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유는 대부분 입법자들이 불로소득으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고 지주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는 여기서 포기해야 하는가? 아니다. 사회적으로 볼 때, 우리는 그러한 청지기 의식을 가진 사람들을 우리의 입법자로 뽑도록 투표권을 잘 사용해야 한다. 청지기적 의식이 있는 사람을 우리의 대표로 뽑아야 한다. 무엇보다 그 전에 이러한 하나님의 토지법에 대중에게 전파되도록 힘써야 하겠다. 교회는 하나님의 토지법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는데 매우 중요한 기관이 되어야 한다. 토지법에 대한 지식이 보편화되고 그 가운데 의식 있는 자가 민의의 대표자가 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너무나 어둠에 익숙해져 있으므로 빛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싫어한다. 마찬가지로 토지사유제에 오랫동안 노출되었고 익숙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토지법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불행하게도 성경을 읽고 연구한다는 사람들에게서조차 마찬가지다. 따라서 하나님의 토지법이 실현되려면 교회가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토지법을 이해하고 그 중요성을 파악하는 것은 성령의 조명이 아니면 거의 불가능하다. 성령의 감동이 아니면 탐욕에 눈먼 사람들이 목숨 걸고 반대할 것이 틀림없다.
땅 문제야말로 우리 사회의 근본문제이다. 그것은 또한 인간역사의 근본문제이기도 하다. 종교적인 문제 때문에 분쟁을 일으키는 서남아시아나 아프리카의 지역을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아도 사실은 토지문제가 보다 근본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단지 3 %의 사람이 우리 국토의 60 % 이상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그 땅을 비싸게 구입하였기 때문에 그 위에 세워진 공장이나 회사에서는 부당한 방법으로 노동력을 착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땅을 가진 사람들이 불로소득을 얻으면 그것을 어디에다 투자하냐면 다시 부동산투기와 향락사업에 투자하게 된다. 여유돈은 항상 땅으로 흘러간다. 왜냐면 땅값 상승에 대한 기대심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은행 역시 이것 때문에 과도하게 대출해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경제거품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이것이 모든 개인과 나라의 경제위기의 주범임을 왜 모르는가? 이러한 경제거품이 꺼질 때 오는 엄청난 후폭풍을 모든 국민들이 고스란히 떠안게 될 것을 왜 모르는가? 이러한 거품은 사람의 성품에도 영향을 주어서 근면 성실이란 성품을 앗아 가버리며 순간적인 쾌락과 게으르고 손쉬운 방법으로 안녕을 누리는 일에 골몰하게 만든다. 그 증거로 불로소득이 모이는 곳에 퇴폐산업도 모이는 현실을 보고 있다. 땅과 향락은 죽마고우다. 그래서 7,80년대 부동산 투기가 절정에 다다랐을 때 퇴폐향락산업이 번창하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국회의원, 재벌가, 대기업, 정치가, 지방 유지들이 그렇게 만든 地主들이다. 그러나 그러한 불로소득은 도적질인 결과다. 그것은 마땅히 땅을 가지지 못한 가난한 자들에게 돌아가야 할 몫이었다. 얼핏 보면 정치가들만이 문제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들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이러한 지주들(landlords)이라는 사실을 당시 사회운동가들은 간과하고 있었던 부분이었다.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 전혀 무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비단 우리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 공인받은 기독교의 문제였다. 이세벨이 가져온 이방 페니키아 토지법은 로마법의 근간을 이루었고 이 로마법은 지금 서양사회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것을 자본주의체제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러분이 성경을 좀 더 잘 알면 알수록 자본주의는 성경의 원리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토지독점은 하나님의 주권을 대항하며 도적질하는 커다란 죄악이다. 자본주의는 이 도적행위를 정당화시키는 체제이다. 그러나 카타콤에서 예배를 드리던 초대교회가 두더지가 밖에 나오면 행동을 잘 못하듯이, 콘스탄틴 황제에 의하여 공인을 받게 되자 기득권이 되고 말았고 그래서 그만 눈이 멀고 말았다. 지하활동에 지친 나머지, 복음전파우선이라는 구실로 로마법을 인정하게 되었다. 로마의 많은 지주들과 부호들이 교회에 토지와 돈을 기부하게 되자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교회재산은 날로 늘어나기만 했다. 그것이 바로 중세 시대라는 영적 흑암의 서곡이었다. 중세시대는 어느 때보다 교회가 많았고 종교적인 신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공의, 사랑, 하나님과의 동행이라는 균형 잡힌 그리스도인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사회에 공의를 외치는 참된 선지자는 점점 사라져갔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사실은 돈이라는 귀신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 공의의 문제를 간과하게 될 때 우리는 맘몬우상과 하나님을 구분하지 못했던 저 고대 이스라엘, 엘리야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던 이스라엘사람들, 영적분별력을 상실하게 된 소경이 될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정신을 차려야 한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물과 공기와 태양빛과 같이 토지란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위한 필수조건이기 때문에 독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주연한 [토탈리콜]이라는 영화를 보았는가? 거기에 보면 화성에 우주인이 공기를 생산할 수 있도록 공장을 만들었는데 그 비밀을 안 어떤 사람들이 그것을 이용해 사람들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모습이 나온다. 주인공은 그들과 싸워 결국에는 화성전체에 신선한 공기를 퍼뜨리는데 성공하는 것으로 끝난다. 아이러니한 것은 웃지못할 이런 불의가 오늘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다는 것이다. 땅도 마찬가지다. 땅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인데도 일부 사람들이 그것을 독점하고 있다. 법은 그 일부사람을 위한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현행법제도는 지주들의 이익을 변호하기 위한 도구로서 존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왜 농어촌 선교가 어려운가? 그것은 이러한 대지주와 소작농사이의 구조적 문제에 봉착하기 때문이다.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가 말한 대로 아무리 도덕적인 사람이라도 비도덕적인 사회 속에서는 도덕적일 수 없다. 오늘날 연말연시가 되면 부자들이 TV에 얼굴을 내밀면서 거액을 기부하는 것을 본다. 옛날 암브로스라는 유명한 교부는 그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잘 말하고 있다. “너희들은 너희들의 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의 것을 그에게 돌려줄 따름이다.” 이렇게 외치는 사람이 오늘날 교회에 있는가? 그렇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며 사람에게 단지 맡겨진 것이라는 성경의 원리를 우리는 잘 이해해야만 한다. 이것은 교회가 사회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느냐 마느냐의 갈림을 결정하는 문제다. 7,80년대 대학 캠퍼스에서 유행했던 마르크시즘은 바로 그러한 신앙고백적 차원을 상실했다. 막시스트들은 이러한 사회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신앙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계급투쟁론을 내세워 무력으로 모든 소유와 자본을 빼앗고자 했다. 그들은 지주의 힘과 자본가의 힘을 구분하지 못한데서 결정적으로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가난한자들에게 땅과 자본을 나누어주고자 했지만 하나님의 주권에서 출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창조적 이윤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독재정권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즉, 모든 불의는 토지문제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의 의미를 보다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해서 성경을 가지고 몸부림을 쳐야할 때이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 사상에 입각한 경제사회학을 정립해야만 한다. 몇 가지 실천적인 방안들을 제시해보자. (1) 통일을 원한다면 우선 남한도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자본주의체제의 한계를 성경의 희년법 원리로써 극복해야만 한다. (2) 그리고 우리 사회에 보이지 않는 지주의 힘을 약화시키도록 입법안을 만들고 관철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지대조세제와 성경적 토지공개념제도를 적극 도입해야 한다. 연구자료에 의하면 토지가치세만 제대로 매기면 다른 모든 세금들은 전혀 필요 없다고 한다. 지금 당장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토지법을 깨닫고 가르치고 전파하는 일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토지법을 이해하는 입법자들이 일어나도록 기도해야 한다. 거듭 강조하지만 지대조세제가 통일한국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대안이다. 통일을 바라는 교회나 정책담당자들은 지대조세제를 필히 연구해야 하고 적용을 서둘러야 한다. (3) 그러나 우리 교회는 사회운동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가 우선 공동체성을 확립하여 세상에 모델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게르하르트 로핑크는 사회문제에 대한 교회의 최선의 대안은 이 공동체의 회복에 있다고 말했다. 우리가 서로 나눔과 섬김을 실천하는 모습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공동체 교회를 지향해야 한다. 그리고 공동토지신탁제도와 같은 교회의 공동토지관리제도를 교회 내에 도입하면 어떨까? 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라도 저가로 들어올 수 있도록 공동주택개발을 할 필요가 있다. 큰 교회일수록 사랑의 집짓기에 앞장 설 필요가 있다. (4) 그리고 우리는 노동의 가치를 가르쳐야 하며 불로소득에 대해 중대한 심판을 선언해야만 한다. 젊은이들이 3D를 기피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노동의 신성함을 실천해야 한다. 그래서 교회는 저마다 노동학교를 개설할 필요가 있다. 불로소득이 죄악임을 가르쳐야 한다. 청소년수련회나 청년부수련회에서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루는 것이 필요하다. (5)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다. 모든 탐욕을 버리는 것이다. 모든 소유권을 하나님께 이양해드리는 것이다. 특히 토지사유권을 주님께 돌려드리는 것-이것은 제자도에 있어서 기본이다. 이 제자도가 실천되지 않고서 다른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것을 버리지 않고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고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될 수 없다.
만약 (1) 우리나라가 이 희년법의 원리를 이해하고, (2) 교회에서 공동체사회를 지향하고 실천하며, (3) 대사회적으로 이러한 원리들을 입법화해 나간다면, 우리 사회는 통일에 대한 견고한 기초를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토기가치를 개인에게 돌아가는 것을 법적으로 막고 그것을 공동체에 귀속시키고, 토지에 대한 절대적 배타적 사유권을 법적으로 제재하고, 토지공개념에 기초하여 지대조세를 부과하고 대신 기타 소득세와 생산세를 과감히 철폐함으로써 생산경쟁력을 키우고, 불로소득을 최대한 막고, 분배정의를 실현할 때 통일은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은 결코 피안에만 속한 것이 아님을 확신해야 한다. 성령의 능력과 순종과 중보기도와 약간의 역사의식을 가지면 이 세상 안에서 상당부분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것이다. 왜냐면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법으로 땅을 다스리시기 때문이다. 출발점은 항상 성령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하나님의 토지법을 깨닫고 전파하며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