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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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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판의 모든 글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선교하시는 김광락 목사님의 글입니다.

2009.12.29 06:44

이신칭의2-본론(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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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믿음과 행위의 관계 / 바울과 야고보

 

여기서 우리는 ‘믿음’과 ‘행위’에 대한 가장 오래된 논쟁을 다시 생각해보고자 한다. 성경에서 바울의 주장과 야고보의 주장이 서로 대치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점에서 바울의 “오직 믿음으로”라는 말을 ‘논쟁적 상황’ 혹은 ‘민족적 상황’으로 국한시켜버림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들이 있어왔다는 것은 앞서 지적한 바 있다. 이 문제는 서로 상충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왜냐면 바울은 칭의에 관해서 말하고 있고, 야고보는 칭의의 열매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과 ‘행위’는 유기적인 관계로서 뿌리와 열매의 관계와 같다. 루터는 의롭다 함을 받는 믿음을 가리켜서 ‘살아있는 믿음’(fides viva)이라고 잘 정의했다. 믿음은 개념적인 인식이나 지적인 동의나 혹은 자기 신념이 결코 아니다. 믿음은 인격과 인격의 살아있는 관계에 대한 말이다. 야고보가 말한 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했을 때 그 말은 “행함을 낳지 못하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뜻이지,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야고보는 분명 칭의의 방법이라는 문맥에서 말하고 있지 않다. 야고보는 칭의의 진위라는 문맥에서 말하고 있다. 야고보는 ‘개념적인 인식’이나 ‘지적인 동의’ 혹은 ‘신념’으로서의 믿음을 이해하는 것을 대적하고 있다. 야고보는 분명 선행이나 열매를 강조하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오직 참 믿음으로’ 가능해지는 것을 분명 전제하고 있다. 그래서 야고보는 “행함으로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고 요구할 수 있었다. (약2:18) 행위를 통해 참 믿음이 입증되는 것이지, 행위를 통해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야고보는 행위가 따르지 않는 믿음에 의한 칭의를 자랑하려는 모든 반율법주의를 대적하고 있다. 야고보의 진술은 참된 행위를 필연적으로 낳게 하는 믿음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바울의 진술과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 종교개혁자들 역시 행위를 수반하지 않는 죽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가르치지 않았다. 그들도 선행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그것이 카톨릭과 다른 것은 선행의 위치에 대한 것이었다. 분명 카톨릭은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야고보의 의도를 분명 오해했다. 그래서 칭의의 도구는 믿음이 아니라 세례와 성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세례를 통해 칭의의 은혜가 주입되고, 고해를 통해 칭의의 은혜가 회복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믿음이 없으면 세례나 성사도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다. 세례나 성사로 칭의가 임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임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여기서 칭의의 근거와 수단에 대해 분명한 이견이 있다. 개혁자들은 칭의의 근거를 그리스도의 의로, 칭의의 수단을 오직 믿음으로 분명히 구분하지만 카톨릭은 칭의의 수단을 믿음이 아니라 고해성사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카톨릭과 기독교의 차이점이자, 동시에 우리를 혼란케 하는 것은 ‘으로’라는 전치사의 개념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성경본문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은 칭의의 수단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 첫째, 최초로 ‘칭의’를 말하고 있는 창15:6을 보자. 카톨릭은 이 구절을 ‘은총의 힘으로 선행을 함으로써 칭의를 얻는다’고 주장해왔지만 본문을 아무리 보아도 선행이나 공로를 찾아 볼 수 없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로 여김을 받았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창15:6을 인용한다. 사도의 의도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을 온 마음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믿음이 아브라함에게 의를 전가시키는 수단이자 방법이었다는 것이다. 이 본문에서 행위가 칭의의 이유가 된다는 암시는 전혀 없다. 그런데 카톨릭은 약2:21절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라고 한 말에 주목한다. 그러나 그것은 창15장이 아니라 한참 뒤에 일어난 22장의 문맥이다. 즉, 15장에서 이미 ‘칭의’가 발생했고, 22장에서 아들을 제단에 드림으로써 15장에서의 칭의가 더욱 분명하게 증명되었다는 뜻이다. 이미 의인으로 간주된 아브라함은 자신의 믿음을 순종의 행위로 입증했다. 엄밀히 말하면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순종의 행위를 한 것이다. 분명 순종의 사건 이전에 칭의 사건이 먼저 발생했다는 것이 확실하다. 이것은 이어지는 약2:22에서 분명히 밝혀진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것은 행함이 믿음의 필연적인 열매라는 개혁자들의 주장과 모순되지 않는다. “행함+믿음⇒칭의”가 아니라, “믿음⇒칭의+행함”인 것이다. 야고보는 어디에서도 아브라함이 행위를 근거로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야고보는 믿음과 행위를 유기적인 관계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야고보는 ‘오직 믿음’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생산하지 못하는 믿음만으로 이루어진다는 생각을 부인하는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지만 그 믿음은 반드시 순종의 행위를 생산한다. 그 순종의 행위는 믿음이 진실하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러나 그 순종의 행위 때문에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아니다. 믿음의 열매는 칭의와 필연적인 관계에 있지만 칭의의 근거는 아니다. 칭의는 모든 인간의 자랑을 배제시키고 하나님의 은혜에 속하기 위해서 오직 믿음으로 되어진다. 둘째, 갈3장과 롬4장에서 보면 창15:6에 사용된 히브리어가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고 번역되고 있다.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자신의 의가 아니라 그에게 전가된 다른 이, 즉 그리스도의 의라는 것을 명백히 하고 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선언)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롬4:4-8) 셋째, 로마서 4:5,9,22과 같이 신약성경에 사용된 전치사 “에이스”(eis)라는 단어는 한번도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하게 하신 그리스도의 공로와 희생에 관련된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공로에 대해서는 언제나 ‘안티’나 ‘휘페르’(--대신에)라는 전치사가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안티’나 ‘휘페르’라는 전치사는 단 한번도 우리의 믿는 행위와 관련되어 사용된 적이 없다. 왜냐면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그리스도의 완전한 복종을 대신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시지 않기 때문이다. 믿음 그 자체는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들이시는 근거가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의에 관심을 갖게 만드는 수단(도구)일뿐이다. 넷째, 비슷하게도 성경에서 ‘믿음으로’라고 할 때 사용된 전치사 ‘디아’는 항상 수단, 도구이자 방법을 가리키는 말이지, 근거로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면, ‘으로’라는 말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By로 번역할 것인가, 아니면 Through라고 번역할 것인가? 만약 by라고 번역하면 믿음이 근거라는 뉘앙스가 될 것이다. NIV 성경에서는 “믿음으로”라는 말을 “through faith"라고 번역함으로써 믿음이 근거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ex.엡2:8)<15> 성경 어디를 보더라도 믿음이 칭의를 얻는 공로나 근거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믿음으로’라고 할 때 ‘~으로’에 해당하는 ‘디아’라는 전치사는 목적격을 지배할 경우에는 ‘~을 근거로’ 혹은 ‘~ 때문에’ 라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믿음이 공로가 되어버려서 믿음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 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서 ‘믿음으로’에서 사용된 ‘디아’가 목적격을 지배하는 용도로 사용된 적이 없고 단순 여격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그것은 믿음은 근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을 오해하지 않도록 번역하려면 ‘~통해서’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믿음 때문이 아니라, 오직 믿음을 통해서(Through) 그리스도의 의(=은혜)에 의해서(By) 죄인을 칭의 하신다. 믿음은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아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의만을 바라보는 눈과 같으며 그리스도의 의만을 붙들게 하는 손과 같다.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라고 할 때 오해하기 쉬운 것이 첫째로 그 ‘믿음’을 신념이나 지적 확신으로 간주하는 것과 둘째, ‘믿음+행함’으로 생각하는 것, 셋째, 믿음만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신앙지상주의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그것은 도덕폐기론과 선행을 부정하게 하며 힘을 다하여 수고하는 것을 폐지하고 부도덕한 삶을 정당화하게 하는 함정으로 인도한다. 그러한 함정에 빠지는 것은 칭의 교리가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칭의 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칭의에 필요한 믿음이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믿음과 믿음의 도에 대해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신칭의의 교리에 동의함으로써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 복음 안에서 ‘다른 의’ 곧 ‘그리스도의 의’를 제공하시는 ‘의로우신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주어진다. 성경이 말하는 ‘산 믿음’은 인격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한 신뢰를 뜻한다. 우리는 ‘산 믿음’이 없이도 교리적인 지식만을 수용할 수 있다. 즉, 믿음 없이 믿음의 도를 가질 수 있다. 반대로 믿음의 도가 없이도 믿음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참으로 건강한 것은 믿음이 있는 자는 믿음의 도를 위해 힘써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것은 ‘이신칭의’라는 믿음의 도(道)이다. 우리는 ‘이신칭의’를 이해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의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그러나 믿음과 믿음의 도를 구별할 수 있지만 결코 분리할 수 없다. 둘의 분리는 교회와 개인에게 결코 유익하지 못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참 믿음은 생명을, 참 믿음의 도는 개혁을 결정짓는다. 그러면 믿음이 무엇인가? 칭의에 필요한 ‘오직 믿음’은 어떤 것인가? 이 믿음은 조건이 아니라 수단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우리는 믿음이 칭의의 유일하고도 중요한 수단임을 인정하지만 믿음 자체에 고유한 가치를 부여하려는 유혹을 물리쳐야만 한다. 그래서 필자가 믿음 그 자체에 대해 자세히 분석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려고 하는 이유는 우리의 믿음의 대상인 그리스도의 의의 영광이 상대적으로 흐려질 가능성 때문임을 분명히 한다<16>. 만약 인간이 자신의 힘(의지)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면 알미니안주의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존 오웬은 알미니안 주의에 대해 “이것은 마치 소경 된 자에게 앞을 본다면 많은 돈을 주겠다고 약속하는 것과 같다”고 풍자했다. 우리는 믿음 혹은 믿는 것 때문에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는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믿음은 늘 불충분하며 늘 모자람을 느낀다. 우리는 언제나 신앙에 있어서는 경건치 못한 죄인이다. 그리스도의 의(義)외에는 우리의 최고, 최선의 의(義)는 항상 ‘더러운 옷’이다. 우리의 믿음은 설령 그것이 매우 강할지라도 자격도 아니며 근거도 아니며 조건도 아니며,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공로 외에 모든 허식과 자신의 의나 행위를 내세우려는 모든 시도를 전적으로 포기하는 행위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의에 비하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 전혀 없다! 하나님은 믿음 자체에 가치를 두고 계시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많은 사람이 구원의 참된 근거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 채 자신의 믿음에 그 근거를 두려고 시도하기 때문에 언제나 절망하고 넘어진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믿음에 구원(혹은 칭의)의 근거를 두려는 경향에 경계해야 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도무지 기쁘시게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 때문에 기뻐하시는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의 믿음 그 자체는 항상 불완전하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기뻐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약한 믿음이라도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를 충분히 구원한다. 아무리 강한 믿음이라도 그리스도의 의가 없이는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 우리는 구원하는 것은 우리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시다. 믿음은 ‘구걸하는 불쌍한 빈손’이며 ‘애처로이 바라봄’이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힘과 영광을 온전히 주목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장 잘 드러내는 수단이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오해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구원의 조건을 만족시키는 죄인의 자유의지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은 ‘영접’의 본래 의미를 오해하는 것이다. 영접이란 그리스도의 의라는 은총을 거저 받아들이는 행위일 뿐이다. 믿음 보다 더 중요한 것이 믿는 대상이다. 믿는 대상 앞에서 믿음은 결코 자랑할 것이 못된다. 그리스도의 의를 모르고서 자기의 의지로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없다. 만약 그리스도의 의와 상관없이 그리스도를 자기 의지로 영접했다고 한다면 그가 영접한 그리스도는 성경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신이 지어낸 망상이며,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대상에 대한 참된 신뢰가 없이 다만 대상에 대한 지식만을 얻음으로써 믿음이 있다고 주장할지 모르나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영접하는 믿음’이 아니다. 오늘날 기독교 집회에서 복음에의 초청으로 “예수님을 나의 마음속에 영접합니다”라고 고백하게 하는 일에 성공함으로써 영혼을 구원했다고 착각하고 있는데, 이것은 진정한 복음에의 초청이 아니다. 왜냐면 성경은 죄인에게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참된 복음의 초청은 홀로 죄인들을 위해 단번에 희생제사를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의를 바라보라고 한다. 죄인은 단지 믿고 신뢰할 뿐 거기에 다른 행위를 더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소극적으로 재판장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신에게 전혀 ‘의’가 없음을 발견하고서 자신의 상태에 대해 절망하며 슬퍼하며 하나님의 처분에 겸손히 자신을 맡기는 것이며, 적극적으로 믿음은 그리스도의 의를 간절히 원하는 것이다. 즉, 믿음은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아는 참된 지식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단지 강요와 분위기에 못 이겨 ‘나는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구세주로 영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인가? 아니다. 자신의 전적 불의와 함께 오직 그리스도의 의(義)만을 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 의에 대해 절망해야 하고 자기 의를 전적으로 포기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를 자기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와 공로 외에 자신의 벌거벗음을 인정하며, 자신은 하나님의 의 심판으로 받아 마땅한 사실을 인정하며, 자신에게 아무런 공로가 없음을 깨닫고,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무상으로 수여하실 하나님의 긍휼만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주의해야 할 점은 이러한 참 믿음을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에 집어 넣어주신다고 함으로써 하나님의 주권을 잘못 오해하는 것이다.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인가?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믿음은 분명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그러나 우리 속에 집어 넣어주시는 것으로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믿음을 집어 넣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참 믿음을 갖도록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자신의 음성으로 들려주시는 ‘효과적인 계시’를 주시는 일이다. 하나님은 죄인에게 계시를 주시고, 죄인은 계시에 대해 믿음으로 반응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정직한 반응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10:27)고 하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믿음을 하나님이 죄인에게 ‘주입하시는’ 어떤 은총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믿음은 계시에 대한 정직한 반응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믿음’을 강조하되, 그것이 믿음 때문에 구원 얻는다는 식으로 믿음에 근거를 부여하는 것과 함께 믿음은 하나님이 전적으로 주신다는 식으로 믿음을 이해하는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참 믿음은 자신에게 전혀 의가 없는 비참한 상태와 아울러 ‘그리스도의 의’를 온전히 주목하는 것이지 그 자체에 다른 특별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이러한 참 믿음은 반드시 참 행위를 낳는다. 행위는 참 믿음과 칭의의 진위를 가려줄 뿐 칭의에 아무 것도 기여하지 않는다. 믿음과 행위는 유기적인 관계에 있다. 행위를 낳지 못하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그러나 행위로 구원(칭의)을 얻는 것이 아니다. 또한 믿음과 행위가 서로 협력해야만 구원받는 것도 아니다. 또는 믿음 때문에 구원 얻는 것도 아니다. 또 신앙을 통해 성령의 증거나 행함의 열매를 맺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받는 것도 아니다. 또 믿음 없이 단지 예정만으로 칭의를 얻는 것도 아니다. 또 믿음은 실제로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도 아니다. 참 믿음은 참되신 그리스도를 참으로 아는 것이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한번 균형의 도를 강조해야 한다. 온전하지 못한 지식은 무식한 것보다 더 위험하다. 즉, 칭의의 목적으로서 성화를 아울러 강조해야 한다.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사도 바울이 “심는 대로 거두리라”(갈6:7)고 말했을 때 ‘행위로 말미암는 칭의’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는 것은 갈라디아서 전체의 문맥을 볼 때 분명해진다. 이 말씀을 할 때 사도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교리에서 시작해서 그것이 도덕폐기론으로 오해할 위험성을 지적하기 위해 균형을 잡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칭의의 문맥을 떠나 그 구절만을 강조하게 된다면 그 구절의 참된 의미를 상실할 위험에 처하게 된다. 칭의는 우리의 ‘심는 행위’에 전적으로 달린 것처럼 되어버리고 그것은 카톨릭의 공적 사상과 일치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온전한 진리는 균형 잡힌 진리이다. 균형을 상실하면 진리는 사악한 자들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 우리가 삶을 강조하지만 칭의의 문맥을 떠나게 되면 행위주의가 되어버린다. 또한 삶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칭의만을 강조한다면 신앙주의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두 위험을 경계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교리→실천] 혹은 [칭의→성화]의 순서를 잘 유지해야 한다. 로마 카톨릭은 자신들은 오직 믿음이나 오직 은혜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는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침으로써 진리의 순서와 균형을 상실하고 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은혜로 말미암는 행위가 아니라, 행위를 낳는 산 믿음(sola fide)이다. 즉, 성화를 근거로 하는 칭의가 아니라, 칭의를 근거로 하는 성화인 것이다. 칭의에 있어서 행위는 전혀 아무 것도 기여하지 못한다. 그러나 칭의는 행위에 모든 것을 기여한다. 행위는 참 믿음을 입증할 뿐이지만 참 믿음은 건강한 행위를 출산한다. 행위를 낳지 못하는 산 믿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야고보가 말한 대로 행위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행위를 낳지 못하는 믿음’이며,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와 결코 상호 모순되지 않는다. ‘오직 믿음’은 ‘행위의 공로가 없이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봄’이지, 믿으면 다 된다는 식의 신앙주의는 결코 아니다. 우리는 행위를 부정해서도 안 되며, 또한 행위를 어떤 의미로서든지 공로로 인정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이것을 롬8:30을 기초로 하여 다음과 같은 도식으로 설명함으로 결론짓고자 한다<17>: 예정→그리스도의 의(계시)→부르심→믿음→칭의→행위→상급. 이것을 구원의 서정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예정→구원의 사건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의→효과적 부르심(복음전도와 성령의 감동)→[믿음→칭의→양자→중생(회심)<18>]→성화→영화.

 

그러나 로마 카톨릭은 칭의(justification)와 성화(sanctification)을 뒤섞어버리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 둘의 경계선이 명확하다. 복음의 본질은 이 경계선이 선명해질수록 잘 드러나게 마련이다.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한편으로 의롭지만 또 한편으로는 죄인이라는 루터의 진술은 항상 로마카톨릭에게 장애물이 되어 왔다. 최근 카톨릭 내 영향력 있는 신학자인 한스 큉(Hans Kung)은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려고 시도했으며 트렌트 공의회가 이 교리를 어느 정도 왜곡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칼 바르트(Karl Barth)는 트렌트 공의회의 칭의에 대한 교훈을 ‘다른 복음’이라고 강하게 정죄한 바 있다.) 사실 칭의와 성화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은 기독교의 특징이다. 루터와 칼빈은 이 둘(신적 선언의 사건으로서의 칭의와 중생의 과정으로서의 성화)을 명확하게 구분했다. 칭의와 성화는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왜냐면 칭의 없이 성화는 불가능하고, 성화를 전제하지 않는 칭의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칭의와 성화는 분리될 수는 없지만 별개의 독특한 교리로 구별되어야 한다. 이 구별이 사라진다면 그곳에 행위가 칭의와 관계되게 되며 복음은 왜곡되어 진다. 반면 로마 카톨릭은 마지막 심판 날에 우리 구원의 기초로서 그리스도의 의를 주장하지만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의만이 아니라, 세례, 미사, 고행, 자선행위, 고해성사를 지키는 행위를 부가함으로써 상대적으로 그리스도의 영광과 의를 가리우고 있다. 로마 카톨릭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불충분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 개혁자들은 성화의 중요성을 과소평가 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들은 성화를 칭의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열매로 파악했다. 그리고 거룩과 성장에 대해서도 루터는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 자신의 개인적 노력과 의지와 선행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선한 행위에 좌우되는 죄인이라고 강조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오늘날 현대교회가 칭의와 성화를 얼마나 균형 있게 가르치는가에 대해서는 매우 회의적으로 보인다. 칭의을 지나치게 강조할 경우 도덕폐기론과 신앙지상주의로 전락하기 쉬우며, 성화를 강조할 경우 율법주의, 금욕주의, 형식주의, 알미니안주의, 펠라기안주의 등과 같은 위험성에 빠지기 쉽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 루터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죄인으로서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그러한 거룩에 대한 열망을 조심하라. 그대는 오직 그대 자신과 그대 행위에 철저히 절망할 때에만,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평강을 얻게 될 것이다. 더욱이 그대는 그리스도로부터 그대를 받아주신 사실을 배우게 될 것이며 그대의 죄를 그리스도에게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를 그대의 것으로 전가하여 주신 사실을 배우게 될 것이다.”

 

 

8. 이신칭의 교리의 요약

 

이제 지금까지 논의한 이신칭의 교리를 요약해보자.

 

(1)칭의란 무엇인가? (칭의와 비교하여)

칭의는 하늘의 법정에 소환되어 의로우신 하나님의 면전에서 그분의 진노에 직면하여 두려워 떨면서 자신에 대해 완전히 절망하고 있는 죄인이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고 바라볼 때에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의를 그에게 값없이 전가하심으로써 율법의 모든 요구가 충족되었다고 최종적으로 판결하시는 은혜로우신 행위이다. 따라서 칭의의 성격은 본질적으로 법정적인 선포(선언)로서 우리의 신분과 관련되어 있다. 성경이 말하는 칭의의 진정한 개념은 불의한 자를 의로운 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불의한 자가 실제적으로 의롭게 되어서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다<19>. 칭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에 대한 책임을 면제해주지만 죄에 대한 영향은 제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크신 자비에 의해 칭의를 받았다고 주장하더라도 스스로 ‘죄 없다’ 주장하는 자에게는 진리가 거하지 않는다. 왜냐면 칭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 죄 없다고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칭의는 죄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덮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행위다. 칭의는 죄의 영향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책임을 면제한다. 칭의를 얻었다고 죄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즉, 칭의는 죄인의 신분에 영향을 주지, 조건이나 상태를 변화시키지 않는다. 칭의는 죄용서와 함께 은혜로운 관계의 회복에 대한 선언이다. 그러면, 칭의가 성화와 어떻게 다른가? 첫째, 칭의가 죄책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과 그 신분에 속한 모든 복된 권리를 회복하는 것이라면, 성화는 죄의 부패를 제거하며, 죄인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점차 새롭게 된다. 둘째, 칭의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죄인의 외부에서 일어나며 내적 생활을 변화시키지 않는 반면에, 성화는 인간의 내적인 삶에 일어난다. 셋째, 칭의는 단번에 일어나 완성되며 반복될 수 없으며 차등이 없는 반면, 성화는 지속적인 과정이며, 현세에서는 완성될 수 없다. 넷째, 칭의와 성화 모두 그리스도의 공로를 근거로 하고 있지만 칭의는 성부 하나님의 사역이며, 성화는 성령의 주된 사역이다.

 

(2)칭의의 근거는 무엇인가?

칭의의 근거는 믿음(또는 회개나 세례, 고백과 같은 등등의 행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로서, 믿음은 우리를 실제로 의롭게 만들어주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여기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의 어떤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것으로 ‘전가’ 혹은 ‘간주’되어지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의 칭의의 근거는 우리 안에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의가 아니라 우리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라고 믿는다. 그 의는 내 것이 아니라 내 것으로 간주된 외래적/외부적 의다. 칭의의 근거는 우리의 의가 아니라 믿음을 통하여(not by but through)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義)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지 않고 우리 바깥에 위치해 있다. 그것은 성경에서 ‘옷’으로 적절하게 비유되고 있다. 우리에게 전가되는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 자신의 것이 결코 아니지만 믿음으로 우리의 것으로 하나님께서 간주하신다. 믿음은 칭의의 근거가 아니라 칭의의 유일한 수단이다. 칭의의 유일한 근거는 죄인이 믿을 때 은혜로이 전가하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공로)’이다.

 

(3)칭의의 시기는 언제인가?

율법폐기론자들은 죄인의 칭의가 영원 전에 또는 그리스도의 부활 시에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우리가 미처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믿기 전에 이미 칭의 되었고, 신앙은 단지 이러한 사실을 우리에게 전달해주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물론 성경은 영원 전에 주시기로 작정한 은혜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칭의의 사건은 믿음에 의해 발생한다고 공통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여기서 개혁자들은 그리스도의 부활 시에 그 백성들을 ‘의롭다 하심’은 객관적인 선언이며, 이것은 ‘오직 믿음’에 의해서 개인에게 주관적으로 적용된다고 가르친다. 롬8:29,30을 보면 칭의는 부르심과 영화 사이에 위치하고 있지 않는가?

 

(4)칭의의 수단은 무엇인가?

성경은 분명히 ‘오직 믿음으로’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말한다.(롬3:25,28,30:5:1;갈2:16;빌3:9) 여기서 ‘으로’라고 번역된 헬라어 ‘디아’(dia)는 ‘~때문에’를 가리키는 목적격으로 사용되지 않고 언제나 ‘~에 의해서’라는 여격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지적한 바 있다. 믿음은 칭의의 근거(~때문)가 아니라 수단(~에 의해, ~을 통해)이다. 믿음은 결코 공로가 될 수 없으며, 행위는 결코 칭의의 조건이나 근거가 될 수 없다. 이점은 성경에서 분명히 증거되고 있다.(롬3:21,27,28;4:3,4;갈2:16,21:3:11) 단적인 예로, 아브라함은 칭의를 얻었을 때 어떤 행위를 했는지 살펴 보라. 아브라함 역시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의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제외하면 믿음 그 자체는 아무런 내용이 없다. 어떤 사람은 복음서와 야고보서의 ‘몇 구절’을 가지고 실천으로 연결되지 않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이신칭의’ 교리와 양립시키려고 하지만 그것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그것은 야고보가 예를 들었던 아브라함의 경우(약2:21)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으며 약2:22에서 명확하게 설명되고 있다. 아브라함은 이미 칭의를 얻었고(창15:6), 그 아들을 제단에 드림으로써 그 믿음이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산 믿음임을 증명했다.(창22:12) 그래서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22절)고 했던 것이다. 그것은 카톨릭이 가르치는 “믿음+행위⇒칭의”가 아니라, 개혁자들이 가르친 “믿음⇒칭의+행위”와 맞다. 야고보가 대적하는 것은 ‘행함을 낳지 못하는 귀신의 믿음’ 즉, ‘단순한 지적 동의’를 믿음으로 간주하고 그러한 믿음을 ‘자기 의’로 대체하려는 위험성인 것이다. 믿음을 ‘자기 의’로 여기는 자들에게 야고보서는 매우 적절한 말씀이다. 그러나 하늘의 법정에서 두려워 떨며, 자기에게 도무지 ‘의’가 없음에 슬퍼하며 재판장의 처분을 겸허하게 기다리는 불쌍한 죄인들에게 ‘오직 믿음’은 유일한 복음이다. ‘오직 믿음’은 그러한 죄인들에게 나타내신 그리스도의 의를 바라보고 열렬히 원하며 자기 것으로 주장하는 ‘빈 손’일 뿐, 믿음 자체는 하나님 앞에 전혀 내세울 만한 공로나 가치는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를 알지 못하고 자기 의를 여전히 붙잡고 있는 자에게 ‘오직 믿음’은 자신의 부도덕함과 거룩하지 못함을 오히려 정당화시키는 위선과 교만을 강화시켜주는 ‘위험한 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공로는 포착한다는 점에서 믿음은 칭의에 앞선다고 볼 수 있지만, 믿음은 칭의를 얻는 방법이라기보다 칭의의 근거로서 오직 그리스도의 의(義)를 얻는 유일한 방법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오직 믿음’을 거부하는 카톨릭의 가르침은 명백히 ‘다른 복음’이라고 분명히 규정하는 바이다. 세례 및 고해성사는 칭의를 인치는 표이지 결코 칭의의 근거나 혹은 수단이 될 수 없다. 또한 믿음은 하나님의 계시의 영이 없이 우리 힘으로 가능한 것도 아니며, 동시에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에 집어 넣어주시는 어떤 것도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일이다.(요6:27~29참조) 이 일(믿음)은 계시와 상관없이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이 전적으로 행하시는 것도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행하신 일과 그러한 것을 계시하시며 부르시는 이에 대한 죄인들의 ‘적합한 반응’ 즉 응답일 뿐이다. 롬8:30을 보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예정이 먼저이며, 그 다음이 부르심의 사건으로서 계시이며, 계시에 대한 죄인의 적합한 반응으로서 믿음이며, 오직 믿음을 통해 은혜로이 죄인을 즉각적으로 의롭다고 선언하시며, 의롭다고 간주하신 그들을 그리스도의 변화된 몸과 같이 영화롭게 만드신다.

 

결국, 이신칭의 교리는 성경적인가? 아니면 몇몇 개혁자들이 의도적으로 창안해낸 것에 불과한가? 이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명백하다. 우리는 ‘오직 믿음’은 복음에 본질적이며 동시에 기독교 구원에 본질적이며 이 복음의 부인은 명백한 배도(背道)의 행위라고 선언한다.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하여 죄인들에게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의가 ‘오직 믿음’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를 부정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찬란한 영광을 더럽고 냄새나는 자기의 영광으로 가리는 것이다. 따라서 ‘오직 믿음’이 아닌 인간의 행동이 부가되거나 첨가되어야 하며 보완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분명히 바울 사도가 정죄한 ‘다른 복음’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진지하게 복음의 본질에 대해 토론을 제시한 개혁자들을 정죄하고 파문한 결정(1521년 보름스 국회, 1546년 트렌트 공의회)을 취소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그들 스스로 복음의 본질에 대해 문을 닫아놓기로 선언했을 뿐만 아니라 ‘오직 믿음’만을 외쳤던 개혁자들과 그 후손들을 향하여 저주를 선언했기 때문에 우리는 가부간 태도를 분명히 밝힐 수밖에 없다. 만일 우리가 타협하고 온건히 대하면 그들의 저주가 옳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성경적 복음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그들이 내린 저주는 당연히 자기들에게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각주>-----

<15>이 점에 대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믿음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믿음은 믿는 대상의 인격과 분리된 신념인가, 아니면 인격적인 관계가 뒷받침된 살아있는 믿음인가? 이 부분에 대해 조이스 마이어는 다음과 같이 잘 말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by grace through faith)는 우리 일상생활의 방식이어야 한다. 구원받기 위해 우리가 적용한 것과 동일한 원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임하는 다른 모든 축복을 받는데도 적용되어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그것은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서였다. ‘인하여(by)'와 ’말미암아(through)'는 극히 중요한 차이점이다. 그 차이를 이해하면 은혜와 믿음의 역할 및 기능상의 차이 또한 잘 알게 될 것이다. 수년 동안 우리는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말을 매우 많이 들어왔다. 나는 내 자신이 믿음을 갖는 것, 그리고 여러 가지 영역에서 하나님을 믿는 것에 매우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다. 즉 내 사역에 있어서 획기적인 전기를 갖는 것, 내 등의 치료, 경제적으로 더 풍요해지는 것, 남편과 자녀들이 내가 생각하는 대로 변화되는 것 등등에 있어서 나는 하나님을 믿고자 애쓰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믿었다” 또한 최소한 그렇게 생각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내가 실행하고 있었던 것은 믿음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내게는 마음의 평화나 안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에서는 말한다. “이미 믿는(하나님께 연합하고, 신뢰하고, 의지하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 도다...”(히4:3) 성경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다. 그러나 내게는 안식이 없었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대신 믿음을 믿고 있었다. 즉, 나는 어떤 사물(믿음)을 예배했던 것이지 인격(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이 덫에 걸린 이유는 내가 나의 믿음에 소망을 두었고 나의 주님께 소망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지불하는 값이 믿음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원하고 내가 필요한 것을 나의 믿음으로 획득(get)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정확하지 않은 것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이나 다른 어떤 것으로도 살 수 없고, 오직 받을 수만 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축복을 사는 값이 아니며,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들이는 손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 싶어하시는 모든 것의 값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치르셨다. 우리의 믿음으로 구원을 산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아들의 피를 흘리심으로써 그 값을 지불하셨다.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받고 또 하나님의 축복에 참여하게 된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매일의 삶을 살아가고 그것을 우리 삶의 규칙으로 삼아야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을 누릴 자격을 갖춘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스러운 구원을 값없이 받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다른 여러 가지 축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이유는 우리가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고 난 즉시, 은혜를 인하여 사는 삶으로부터 행위를 인하여 사는 삶으로 전환하는 실수를 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좌절하는 이유는 은혜를 인하여(by) 우리가 누리게 되었고, 또 은혜에 의해(by)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삶을 (오직 믿음을 통해서가 아니라) 행위에 의해(by) 살려 애쓰기 때문이다.  --조이스 마이어,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는 삶](두란노)에서

<16>믿음 그 자체의 성격에 대해 R.C.스프룰은 그의 책 [오직 믿음으로](생명의 말씀사 출판)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이를 테면 믿음의 구성 요소로서, 노티티아, 아센수스, 피두키아,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누어 각각의 요소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들이 유익할 수 있는데 왜냐면 로마 카톨릭과 같이 믿음을 단지 ‘지적인 동의’나 ‘신념’ 정도로만 간주하려는 위험을 피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을 필자가 강조하지 않는 이유는 이러한 설명 역시 믿음의 대상의 가치보다는 믿음 그 자체의 가치를 인정하려는 위험성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믿음 그 자체는 아무런 가치도 없으며, 오직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의 의’만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17>이 순서는 유기적인 순서를 의미한다. 여기서 ‘회개’와 ‘중생’의 위치에 대해 개혁자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있다. 이를테면, 루터는 회개를 믿음 앞에 위치한 반면, 칼빈은 회개를 믿음 뒤에 두었다. 그것은 칼빈이 회개를 하나의 행위로 간주하려는 경향에 대해 부정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우리가 회개하기 때문에 혹은 회개의 행위를 근거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믿음’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도 아니다.) 이점에서 칼빈은 이신칭의에 더 철저한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18>[ ] 표시는 동시적 사건을 의미하며, [ ] 안의 → 표시는 ‘논리적’ 순서를 의미한다. 여기서 분명히 우리는 ‘믿음’ 앞에 우리의 내적 변화를 암시하는 그 어떤 것도 두지 않는다. 만약 중생이나 성화를 ‘믿음’ 앞에 두게 되면 어떻게 하든지 ‘믿음’의 참 의미가 퇴색될 것이다. 만약 중생을 먼저 둔다면 ‘믿음’은 하나님이 전적으로 주시는 것이 되어서 복음전도의 책임이 문제시 될 것이며, 성화를 먼저 둔다면 행위가 ‘공로’가 되어버리게 될 것이다. 공동체 안에서 ‘자신에게 주신 은혜’를 고백할 때 그것이 마치 자신의 불신에 대한 책임을 은혜를 주시지 않는 하나님께 돌리며 자신을 정당화하는 데 오용 당하는 현실에 대해 대단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즉 ‘은혜’를 너무 쉽게 고백하는 것에 대한 위험성이다. ‘나의 믿음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철저히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자신이 무가치함을 깨닫고 자신에 대해 깨어질 때만 정당화될 수 있다. 그것은 주위에서부터 신앙에 대해 존경을 받고 높임을 받을 때인 것이다. 그러나 어린 신자들과 세상 사람들 앞에서는 종교적인 위선으로 들려질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19>로마 카톨릭은 성화에 뒤따른 칭의를, 프로테스탄트는 칭의에 뒤따른 성화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양자는 서로 평행선을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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