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역사는 전진한다
출처: 최**SKS(인터콥본부장) 글/개척정보 2013년 10월호, Vol. 307, pp. 1-4
1. 위기의 세계교회
지금 세계교회는 한계상황에 직면해 있다. 근대에 세계교회는 비서구권으로 확장되면서 양적 성장은 지속했으나 중세교회 시대를 암흑시대로 규정하고 출범한 세속주의 및 인본주의 기조의 계몽주의로 인해 서구교회는 세속화되어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걸어왔으며, 서구문명의 팽창주의와 이에 따른 서구의 세계화 및 글로벌 세속화의 영향으로 세계교회의 질적 타락은 계속됐다.
계몽주의자들은 빛은 성경이 아니라 이성에서 온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이성에 의한 인권신장과 과학의 발달로 민주주의를 확산하고 경제적 번영을 구가함으로써 이 땅에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바야흐로 위대한 인간이성의 시대가 전개된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며 400년 전에 영국 사상가 베이컨은 “지식은 힘이다!”라고 선포했다. 지식권력이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4백년동안 생명 없는 지식권력은 현대교회를 집요하게 공략하며 무참히 짓밟았다. 이러한 지식권력은 교회 안에도 횡행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영과 진리로 예배하고 성령의 권능으로 사역하는 사역자는 현대적인 고등신학 및 전문 지식을 가진 자들에 의해 권위를 빼앗기고 주변부로 밀려나게 되었다. 또 한편으로는 사회권력 및 경제권력이 교회에 침투하여 교회의 사역기조를 지속적으로 변질시켜 왔다. 결국, 교회는 문명화되어 갔고 영적 리더십을 상실하고 종교집단화 되어 갔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땅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는 사역자가 되는 것이다. 새로운 신약시대는 성령의 권능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병든 자를 고치고 마귀의 세력을 제어하는 성령의 권능과 역사는 저급한 기독교인들의 행태로 취급되고 있다. 음부의 세력을 이기는 천국의 권세를 상실한 기독교는 성찰과 도덕의 종교로 전락하고 있으며 한편으로 사회봉사가 사역의 중심부를 장악함으로 말미암아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선교는 ‘공격적인 선교’라며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편 아프리카 교회는 지난 30년 놀라운 양적 성장을 구가하고 있으나 천박한 기복주의와 뿌리 깊은 타자 의존성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영적 리더십을 회복하지 못한 채 자기 한계에 갇혀 있다. 남미 교회는 최근 살았다 하나 죽어버린 카톨릭의 종교적 권위와 전통을 극복하고 새로운 부흥을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열정적으로 예배하나 복음의 능력과 십자가의 헌신이 없는 천박한 감성주의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유럽교회는 복음화율이 4%로 전락하여 5%로 급속히 성장한 이슬람에 주도권을 빼앗기고 있으며, 미국교회는 아메리카니즘과 기독교 정신을 혼동하여 ‘하나님의 나라’ 미국을 추구하다가 청교도 정신을 강탈당하고 자본주의 및 자유주의 이념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제 세계교회의 새로운 리더십은 아시아교회, 특히 한국교회와 중국교회로 이전되고 있다. 지난 반세기 이상 공산주의 체제의 잔인한 핍박을 이겨내고 일어나 1억 5천만 중국교회는 머지않아 미래 세계교회의 영적 리더십을 가지고 하나님의 도성 시온을 바라보며 주님이 오시는 왕의 대로를 구축하며 신속한 세계 복음화를 이루어 갈 것이다.
한국교회는 1988년 이후 급속히 세속화되어 마이너스 성장을 거듭하고 있으나 일제 핍박시기와 6.25 동란 그리고 60-70년대 가난과 사회적 불안정 속에서 복음운동, 기도운동, 성령운동에 헌신하며 한국교회의 폭발적인 부흥을 이루어온 1세대가 아직도 살아있으며 그 영적 유산이 한국교회에 잠재력을 지닌 강력한 에너지로 남아있다.
1990년대 들어와서 자신들이 속해있는 한국교회를 타자화 및 대상화하며 한국교회의 성숙을 촉구해온 기독교지성주의자들의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어설픈 개혁운동으로 인해 한국교회는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을 현저히 상실하며 예전보다 더 천박해졌다. 어설픈 기독교지상주의자들이 ‘온전한 복음’을 외치며 한국교회에게 사실상 세상과 화친조약을 촉구하며 한국교회의 세속화를 부추겨 왔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아직도 오직 복음의 능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진정한 복음주의자들과 오직 성령의 권능을 사모하며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나라에 절대 헌신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이 아직도 한국교회 사역 현장 곳곳에 무수히 살아있다. 이러한 교회와 성도들은 어설픈 기독교지성주의자들이 그럴싸하게 포장한 화려한 음녀의 유혹을 거부하고 한국교회 부흥을 위해 투쟁하며 ‘영원한 복음’과 함께 고난 받기를 주저하지 않는 주님의 교회, 주님의 제자들이다. 바로 이들이 미래 한국교회 부흥과 세계선교를 이끌어 갈 것이다.
2. 그러나 역사는 전진한다
예수님의 오심과 죽으심, 부활과 승천, 성령강림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는 선교라는 절대 명령으로 시작되었다. 이제 역사는 모든 민족을 향한 ‘선교’의 사명을 성취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이 사역이 완성될 때 마감될 것이다. 따라서 역사는 구원의 역사를 이루며 종말을 향해 달리는 이른바 종말론적 구속사이다.
이런 의미에서 선교는 여러 사역 가운데 하나의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경영의 중심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선교사를 역사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history makers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한편 하나님의 세계경영의 단위는 언어문화 종족이다. 성경은 지구촌 복음화의 ‘접근 단위’가 개인 혹은 국가가 아니라 종족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구원의 각 개인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성취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교접근 단위는 개인이나 인종 또는 국가가 아니라 종족이다. 모든 민족으로 가야 한다. 한 민족이라도 복음이 증거되지 않으면 역사는 완성되지 않는다. 따라서 교회의 선교사역은 복음이 증거되지 않는 민족과 종족을 향해서 집요하게 추진되어야 한다. 미전도종족 개척선교가 선교사역의 기조를 이루어야 한다.
그러면 한 종족(민족)이 복음화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 종족집단의 몇 %가 복음화될 때 복음화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는가? 이 주제는 별개의 것이며 사실상 정확히 정의하기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바울 사도 사역과 성경의 증언으로 볼 때 지금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15장에서 고린도교회에서는 더 이상 일할 곳이 없어서 오래전부터 서바나로 가려고 했다고 말하고 있다.
당시 고린도지방의 복음화율이 몇 퍼센트였기에 그는 “일할 곳이 없다. 이제 다 됐다”고 말하는가? 고증하지 않더라도 당시 정황을 고려할 때 우리는 당시 크리스천이 인구의 1%도 되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바울 사도는 끝없이 땅끝을 향해서 전진하였다.
또한, 역사적으로도 한 민족의 복음화율이 20%가 넘으면 민족교회는 급속히 세속화하기 시작하여 쇠퇴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의 중심축은 새로운 변방으로 이동하였다. 이것이 지난 2천년 교회사와 세계사의 증언이다. 어떤 크리스천은 “나는 우리 민족이 100% 주님을 영접할 때까지 목숨 바쳐 사역하겠다!”고 다짐한다. 그 각오는 가상하고 칭찬할만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약속을 하신 적이 없다. 바울 사도의 고백처럼 우리가 우리민족교회의 부흥을 위해 자신을 제물로 드리기를 주저하지 않아야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증거(중언)’ 되기를 원하셨으며 그렇게 역사와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기를 원하셨다(마 24:14, 마 28:18-20, 행 1:8).
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상황과 처지에서도 주님의 지상명령을 따라 신속한 세계복음화를 위해 절대 헌신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와 선교단체의 선교정책 기조는 복음을 받지 않은 전방개척지역 미전도종족을 지속적으로 지향하는 것이 마땅하다. 세계교회가 어렵고 한국교회도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어차피 충성된 소수를 통해서 이루어 가신다. 한국교회의 세속화가 20/80의 한계선을 넘지 않는 한, 즉 충성된 성도 20%가 남아있는 한, 여전히 한국교회의 영적 생명력과 운동성은 살아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20%가 80%를 살리는 것이지 80%가 20%를 살리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충성된 주의 종들과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역사는 전진해 왔다. 이것이 지난 2천년 교회사의 증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