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화산과 다음 대 가뭄
글/변희룡, 부경대학교 환경대기과학과 교수
출처: 한국방재학회지 2011년 봄호, 제11권 제1호, pp. 15-23
초록
백두화산의 재 폭발 후에 발생할 재해에 대해 검토한 결과, 화산의 풍하측에 낙하하는 화산재에 의한 피해보다, 폭발 후 수년간 이어질 지구 냉각과 장기 가뭄 그리고 이로 인한 사회격변의 위험성이 더 큰 것으로 검토되었다. 근거로 10세기 전후 백두화산이 폭발하던 시기에, 지구냉각과 연속 대 가뭄의 재앙이 발생했으며, 후백제와 후고구려의 건국과 멸망, 신라의 발해의 멸망 등 대규모 사회격변 현상들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백두화산의 다음 폭발시기, 그리고 이 재 폭발과 한반도의 극대가뭄이 동시에 발생할 가능성 등도 검토되었다. 결과로서 백두산 재 폭발이 한반도의 극대가뭄의 주기(124년)와 연관되어 동시에 발생할 가능성이 없지 않으며, 이 경우, 2025년이 재앙의 정점이 될 것으로 추론되었다.
Key words: 백두산, 화산, 다음 가뭄, 가뭄주기
I. 서론
백두산에서 화산이 폭발할지도 모른다는 설은 2009년부터 국내에서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에 한중일 삼국의 민심은 이 방면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여왔다. 그러나 이 제 폭발설은 아직은 증명되지 못하여 가설인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연구로 보이고 있다. 몇가지 재 폭발을 입증한다는 증거가 제시되긴 했다. 가스 분출이나 지진 현상 등이 그것인데, 전에도 이런 현상들은 가끔 있어왔기 때문에 이들도 증거로서 충분하지 않다. 또한 재 폭발이 가까웠다는 주장들도 구체적 시기를 지적하는 일은 피하고 있다. 한 예로, 2014년이나 2015년에 폭발할지도 모른다는 보도가 있었지만 근거를 따져 들어가면 그런 발언을 책임지는 연구자는 없고 언론의 과대포장이었단 설명만 남는다. 한편 북한은 김일성 3대를 신격화하는 측면에서, 그리고 김정은으로 넘어가는 정권세습을 유연하게 시행하려는 의도에서, 백두 화산의 재 폭발 가능성을 외면하고 있다. 백두산 혈통이라 불려온 세습정권의 정체성이 훼손되는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두화산 폭발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그 폭발이 초래할 영향력이 워낙 대단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10세기 전후 백두화산이 폭발했던 시기의 사회현상이 조사되었다. 백두화산은 10세기 초에 폭발을 시작하여 대략 100여년 계속된 것으로 추측되나 여러 가지 학설이 분분하여 정확한 연대 추정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태이다. 또한 그 폭발로 인하여 생긴 재해에 대한 연구 결과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간혹, 화산재가 어디까지 떨어졌다는 정보만 등장하며 이 때문에 재 폭발 한 후에도 화산재가 낙하하는 직접적 영향에만 주로 관심들을 기울인다. 한반도 남부와 중부지방은 백두화산의 풍하측이 아니라서 직접적 영향은 없을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여론을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그 즈음에 냉해와 가뭄이 빈번했고, 그와 함께 국가가 건국되고 멸망하는 등 사회적 격변이 있었다는 사실은 특별히 조명된 적이 없다. 최근에 화산으로 인하여 냉해와 가뭄이 생긴다는 연구결과가 가끔 등장하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직접 백두화산과 연결시켜 조사한 결과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는 당시 한반도 중부와 남부 지방을 지배했던 신라에서 냉해와 가뭄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후삼국이 난립하게 되는 사회적 혼란이 심하게 발생하였음이 분명하다. 이에 본 연구는 백두화산 폭발전후에 있었던 사회현상과 재해발생이 화산과 어떤 연관을 가지는지에 관심을 가진다. 그리고 화산으로 인한 가뭄 발생이 한반도의 가뭄주기와 어떤 연관을 가지는지에 관심을 가졌다.
II. 화산과 기후의 관계
인류사의 격변기에 화산활동이 있었다는 기록은 흔하다. 그러나 화산폭발 후에 지구가 냉각되고 그로 인해 대 가뭄이 발생한다는 이론은 최근에 등장하였다. 둘을 이어 보면 화산폭발 후에 생기는 대 가뭄이 기근을 초래하면서, 그로 인한 식량 부족이 사회의 혼란을 초래하고, 이로 인해 국가의 흥망 등 역사적 사건이 발생한다는 순서로 유추된다. 식량부족이 사회혼란을 초래한다는 역사관은 상식에 가깝다. 2011년 민주화운동으로 격변을 겪고 있는 이집트, 시리아의 격변도 2010년 중국, 러시아, 남미 등지의 곡창지대의 가뭄이 직접적 도화선이 되었다고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화산폭발 후 대 가뭄이 생긴다는 논리는 아직은 소수의견이다. 화산의 규모, 화산의 지구상의 위치 등과도 연관을 지어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화산과 가뭄의 연관성은 인류 시작 시기의 신화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인류는 20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7만년 전, 토바섬에서 화산이 폭발한 후, 인류가 급속히 줄기 시작하여 지구상에 약 2000명 정도까지 감소하였다. 화산에 의한 직접적 피해 즉, 화산재나 용암으로 인한 생존환경의 파괴는 인근 지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지구 전체의 인구가 감소한 것은 화산 후에 생긴 가뭄과 냉해 등으로 인해 전 지구적 재앙이 발생했으리라고 보는 것이다. 당시 간신히 멸종위기를 넘긴 인류는 다시 번성하여 오늘에 이른 것으로 설명된다.
1996년 이전에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화산은 1815년 인도네시아의 탐보라 화산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 폭발로 화산재가 지구전체를 떠돌아다녔기 때문에, 유럽에 미니 빙하기와 대 기근이 왔다. 그런데 1996년 중국서 열린 국제 지질학회에서는 10세기에 발생한 백두산 화산이 지금까지 발생한 어떠한 화산보다 더 규모가 컸다는 주장이 나왔다. 여기서 분출된 화산재는 지금도 함경도에, 홋카이도 등에 두껍게 쌓여있다. 이래서 백두화산 재 폭발은 더욱 관심을 유발시켰다.
화산이 폭발한 후에 빙하기가 도래한다는 학설은 필리핀의 피나투보 화산(1991) 이후에 다시 등장했다. 이 화산재로 인하여 성층권에 검은 띠가 생겨 태양열의 유입이 차단되었으며<그림 1>, 다음 해인 1992년은 전 지구에 저온 현상<그림 2>이 나타났고, 많은 지역에서 가뭄을 겪었다(Hegerl and Solomon, 2009)는 것이다. 이때 동아시아에서는 1996년까지 국지적 가뭄이 빈번하였다. <그림 3>은 대구지방의 가뭄지수(EDI, Effective Drought index, Byun and Wilhite, 1999)의 월별 시계열이다. 1991년 이후 점차적으로 가뭄강도가 강화되어 1996년까지 지속되었다가 복원된 사실을 보여준다.
이 가뭄기간 중 특히 1994년의 가뭄은 여름에 발생하여 한반도 남부지방에 큰 피해를 초래했다. <그림 4>는 이 해 가뭄이 한반도 남부 지방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아시아 전체에 걸쳐 띠 모양으로 발생하였음을 보여준다. 신뢰성을 얻기 위해선 추가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성층권을 부유하는 화산재 또는 그로 인한 가스들이 이런 현상을 초래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낳게 한다. 이 시기가 9월인데 제트류가 지나가는 방향을 따라 가뭄이 발생하였다. 화산은 열대에서 폭발했으나 성층권에서의 유영은 제트류를 따라 집중되는 것으로 보인다. 제트류와 함게 하기 때문에 폭발 후 수년간 성층권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가벼운 물질이라도 강풍이 없으면 몇 년 동안 성층권에 잔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림 3>과 <그림 4>는 아시아 가뭄감시시스템에서 실시간으로 방송되고 있는 자료인데, 대구지방 외에도 동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대구와 유사한 시계열을 보여주고 있으며, 해안지방에서는 다소 큰 차이를 보이는 경향이 있다. 강수는 지구 전체의 대기 순환의 영향으로 주로 발생하지만, 국지적으로는 해륙풍이나 산곡풍 등에 의한 소낙성 강수의 영향도 많이 받는다. 이 중 산곡풍보다는 해륙풍의 영향이 더 크다. 대구는 해륙풍의 영향을 적게 받는 내륙이어서 1991년 이후의 가뭄의 발달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Park and Schubert(1997)은 이 해의 한반도 내의 가뭄 현상을 분석하고 그 원인을 동아시아의 대기 순환에서 찾은 바 있다. 장마전선이 한반도 상공에 오락가락하면서 비를 뿌리는 것이 장마철인데, 열대기단이 충분히 온난화 되지 못하여 장마전선을 한반도까지 밀어 올리지 못하다가 갑자기 북상하였기 때문에, 한반도는 장맛비를 얻지 못하여 가뭄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 지적도 화산의 폭발 후에는 지구의 냉각이 발생하며, 그 후 가뭄이 동반된다는 사실과 대체로 맥을 같이 한다. 따라서 화산폭발 후에 지구 냉각과 가뭄이 발생한다는 사실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게 된다. 그러나 백두화산이 폭발되기 전에 특정한 사건이 생겨 냉해와 가뭄이 화산폭발보다 먼저 발생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이에 관하여는 본 연구 후반부에서 시기를 비교하여 분석한다.
III. 백두산 화산 폭발에 관한 역사적 검토
III-1 백두화산 폭발에 관한 역사적 검토
백두화산의 폭발시기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마치다(일본)는 915년에서 1334년까지라고 하였다. 지자코프(러시아)는 1054년부터 1349년까지라고 하였다. 류뤄신(중국)은 1215년이라 하였다. 시작 시기만 보면 910년부터 1054년까지 144년이나 차이가 있다. 백두산에 화산이 폭발한 증거는 없다는 주장도 없지 않다. 직접적인 목격 기록이 없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혹자는 일본에 떨어진 화산재가 일본에서 발생한 화산재와는 전혀 성분이 다름을 확인하여, 백두산에 화산이 폭발한 증거로 제시하기도 했다. 이들은 모두 각 지방에 낙하한 화산재를 동위원소 추정법으로 조사한 결과로서 몇 개의 지점을 분석했는가 하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지구 전체에 흩뿌려진 화산재를 모두 분석하여 종합한 결론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 10세기 초부터 11세기에 걸쳐 백두산에서 화산이 폭발했음은 인정될 만하고, 14세기까지 지속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남는다. <그림 5>는 백두산 화산폭발의 영향 일부를 보여준다.
III-2 10C의 백두화산 폭발시의 날씨
10세기 초에, 신라에서 905년 4월에 서리가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김연옥, 1981). 양력으로는 5월경이 되니 당시 농업의 피해는 막중했을 것이다. 신라에서 그 이전에 늦서리가 내린 기록은 828년 5월이다. 그 사이에 4월 이후 서리가 내린 기록은 없으니 77년만에 발생한 냉해이다. 그러나 905년 이후는 늦서리에 관한 기록이 많은 편이다. 908년에는 3월에, 912년과 913년에는 여름에, 914년에는 3월에, 906년과 907년에는 여름에 비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여름이란 기록이 몇 월인지는 추정할 길이 없으나, 5월로 추측함이 타당할 것이다. 또 921년에는 8월에 서리가 내렸다는 기록이 있어 이 시대에 냉해가 잦았음을 추측케 한다. 828년 이후 특별히 냉해가 없었는데, 화산폭발과 비교되는 시기, 905년 이후에는 냉해가 두드러지니 이 냉해를 박두산 화산폭발의 영향으로 추측하는 것이다. 당시 백두산만 화산이 폭발했는지, 아니면 백두산 외에도 열대지방에서 화산이 폭발한 적이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으나, 함께 폭발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늦서리의 경우들을 비교적 기록이 자세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들과 비교해 보았다. 조선왕조실록에서 5월 서리는 1414년, 1417년, 1436년 등이 한 집단을 이루고, 1520년에 한번 나타났으며, 1631년, 1647년, 1669년이 또 한 집단을 이루고 있어, 3회의 한랭기가 있었다. 뒤에 설명되듯이 이들은 한반도 극대가뭄의 주기의 축에서 발생한 냉해이다. 4월 서리는 21회 기록이 있어 약 30년에 한번 정도 발생했다. 따라서 905년과 912년의 4월 서리는 비정상적인 냉기임을 의미한다. 905년의 4월에 내린 서리를 백두산 화산으로 생긴 냉기의 영향이라고 본다면 백두산 화산은 905년 이전에 폭발을 시작하여 상당히 장기간 지속되었다고 추측된다. 당시 인근 지역에 국가가 흥망하는 사건이 6번이나 있었으니, 이 화산폭발의 첫 시기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더구나 탐보라 화산이나 피나투보 화산이 폭발한 다음 지구상 많은 지역이 냉해와 가뭄을 엮은 것과 마찬가지로 백두산 화산폭발 이후도 큰 재해가 있었을 것임이 명확해 보인다. 냉해와 가뭄이 발생하는 지역이 화산재가 낙하하는 지점이 아니라는 점에 큰 관심이 간다. <그림 4>는 피나투보 화산 발생 후 가뭄생성역이 역시 화산재의 낙하지역이 아닌 점을 보여주고 있다. 탐보라 화산폭발 후에도 냉해와 가뭄이 생긴 지역은 화산의 풍하측이 아니었다. 화산 관련 입자들이 집중과는 곳과 그 주변, 그 지점 지표에 냉해와 가뭄이 더 심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백두산 화산 이후 화산 분출물에만 관심을 두기 보다는 그 후 수년간 발생할 냉해와 가뭄이 더 중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림 5>에 보이듯이 아직도 우리 사회는 화산재의 직접적 영향에만 관심을 두는 경향이 있다. 관공서에서는 "정밀 제조업 분야에 타격을 받고 호흡기 질환자가 증가하는 등 화산재의 간접적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진단을 내어 놓고 있다(조선일보 2011.3.2). 지구의 냉각과 뒤이어 가뭄이 발생하리란 생각은 안하고 있는 것이다.
III-3 10C의 백두화산 폭발전후의 한반도 정세
식량부족이 사회 격변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예는 허다하다. 전한(前漢, ~7), 신(新, 9-25), 명(明, 1644)은 가뭄이 지속되어 유민이 많이 생겼으며 이들이 반란군에 가담하게 되어 멸망했다는 학설이 있다. 또 당(唐, 618-907)도 가뭄으로 멸망하여 5대 10국(907-960)으로 분열되었다. 앙코르와트의 멸망시기에 있었던 측백나무 36그루의 나이테 분석에서 1415-1439년에 대 가뭄이 있었음이 증명되어 이것이 멸망의 원인이었다고 추정된다. 마야문명(750-950) 마지막 시기에도 극심한 가뭄이 있었음이 증명되고 있다.
백두화산이 폭발할 즈음인 9세기말부터 10세기 초까지 한국에서는 여러 가지 역사적 격변이 발생했다. 후백제가 892년에 일어나서 937년까지 지속되었다. 후고구려는 901년부터 918년까지 지속했다. 926년에는 발해가 멸망하였으며, 936년에는 신라가 멸망했다. 이 사건들이 이 시기에 큰 가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근거로 작용한다. 백제, 고구려가 멸망한지 약 250년이 지난 다음에야 후백제, 후고구려란 이름으로 새 왕조 탄생이 시도되었다는 사실, 그것은 사회에 큰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지, 백제, 고구려에 충성을 바친 사람들의 정성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신라의 기록에 이 시대에 늦봄 또는 여름에 서리가 내리는 냉해 현상이 빈번하였다. 가뭄이 있었음을 지적하는 기록도 없지 않으나, 특별히 강했다고 지적하기에는 마땅치 않아 소개를 생략한다.
이 중 특히 중시되는 것은 발해의 멸망이다. 거란의 침공을 받은 발해가 불과 한달 만에 무너졌으며 특히 수도인 상경에서는 반격도 저항도 하지 않아 전투 한번 없이 종전되었다. 백두산 화산이 폭발하여 냉해가 거듭되면 농사가 순조로울 수 없고 이로 인해 외침에 저항할 능력을 잃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실제로 요사(遼史)에는 이심(異心)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자연재해를 당한 발해인의 민심이 동요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가뭄 때문이었다는 기록은 없으니 가뭄 때문으로 추측하는 것은 무리한 추측이나 추가연구의 필요성은 제기하고 있다.
IV. 백두산 화산과 한국 가뭄의 연관
IV-1 한국 가뭄주기
가뭄주기에 관한 연구들은 공통적인 단점이 하나 있다. 주로 강수량이나 가뭄지수를 이용하여 파워 스펙트럼 또는 푸리에 함수 등을 이용하여 분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가뭄주기를 뽑는 것이 아니라, 연 강수량의 연도별 변동성을 계산하는 것이다. 강수량이 적은 해가 몇 년마다 발생하는지를 따지는 것이 가뭄주기인데, 강수량이 몇 년마다 많아지는 것도 함께 계산하였으니, 이것은 가뭄주기가 아니라 단순히 강수량의 변동성인 것이다. 이점에 대해 미처 고려하지 못한 연구가 많다.
가뭄은 수자원이 평균보다 부족하여 생태계의 교란을 초래한 경우만을 의미한다. 따라서 강수량이 평균이거나 평균보다 많은 해인 경우는 고려 대상이 되어서는 안되고 더구나 평균보다 얼마나 많은지는 계산에 포함되면 안되는데, 이를 함께 계산해 버리는 것이다. 가뭄주기는 가뭄이 발생한 해가 몇 년 간격으로 발생하는지를 따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6년마다 한번 작은 가뭄이 발생한다고 보았을 때 가뭄해는 1년이고 비가뭄해는 5년이다. 5년의 강수량 자료가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 계산이 정확할 수가 없다. 강수량이 아닌 가뭄지수로 파워 스펙트럼 계산을 해도 같은 오류를 범하게 된다. 가뭄지수가 가뭄을 나타내지 않는 해까지 가뭄주기의 계산에 포함되어 버리는 것이다.
가뭄지수 자체의 문제점이 없지 않다. 흔히 계산하기 쉽다고 하여 많이 사용하는 SPI는, 계산 기간을 고려하지 않고 1개월, 3개월, 6개월, 12개월, 48개월 등 5개의 기간을 계산하여 임의로 결정하기 때문에 다섯 개중 어느 것이 정확하게 가뭄을 표시하는지를 분별하려면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데 그마저도 수작업이기 때문에 객관적이라 하기 어렵다. SPI를 계산할 때, 언제부터를 가뭄으로 취급하라는 규정이 없기 때문이다. 흔히 많이 사용하는 PDSI는 미국 대평원을 주 대상으로 한 계산법으로 산악지방에서 적용하기 곤란한 것이며, 하천유량, 토양습기 등 자연현상이라고 보기 어려운 요소들을 포함하며 이들마저 관측치가 아니라 추정치를 사용하기 때문에 더욱 문제가 된다. 다른 많은 가뭄지수들이 비슷한 문제점을 가진다. 많은 가뭄지수들이 등장하였다가 금방 사라지곤 했다. 가뭄기간에 대한 고려가 없이 가뭄강도를 계산하였기 때문이란 것이 첫 이유이다. 다른 이유도 몇가지 더 있지만, 본 연구의 초점에서 벗어난다. 본 연구는 EDI에 의존하여 가뭄지수의 선정에서 생기는 문제점을 해결하였다.
한국의 가뭄주기는 3-4년, 6-7년, 12년, 38년, 124년 등 여러 개가 보고되었다. 12년 이하의 주기인 경우, 어떤 경우는 잘 지켜지다가 어떤 경우는 없어지기도 한다. 38년 주기의 경우, 두 개가 동시에 돌고 있다(Byun et. al., 2008). 이에 대한 상술은 약한다. 가장 중시되는 것은 124년 간격으로 발생하는 극대가뭄이다. 한반도에서 있다고 추정되는 124년의 가뭄주기는 1901년 극대가뭄(서울의 연 강수량이 374mm)을 기준으로 한 29년의 가뭄과 1777년을 정점으로 한 극대가뭄(서울의 연 강수량이 430mm)의 두 가뭄이 124년의 간격을 가진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1901년에는 서울의 연 강수량이 374mm에 불과하여, 심각한 가뭄을 겪었었다. 당해만이 아니고 전후 29년간 크고 작은 가뭄이 빈발했다.
<그림 6>은 전지구상에서 100년 이상 자료가 축적된 곳을 모아 1901년의 가뭄강도를 점검해 본 것이다. 중국과 인도 외에도 북유럽에 당시 심각한 가뭄이 전개되고 있었지만, <그림 6>에서는 몇 군데만 나타날 뿐이다. 관측치가 충분치 못한 것이다. 이때 중국과 인도에서도 큰 가뭄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림 6>을 봐서 정작 더 큰 가뭄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북유럽에 대해서는 달리 피해의 기록을 찾지 못했다.
1770년 이전에는 정식 강수량 기록이 있는 곳이 지구상에 없다. 1441년 조선에서 측우기가 발명되었지만, 정작 기록은 1770년부터 유효하며, 이는 아직도 세계 최장기간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1770년 이전의 가뭄은 다른 방법으로 찾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역사에 기록된 가뭄이란 단어와 기우제를 지낸 숫자를 연도별로 세어 계산한 것이 <그림 7>이다.
124년 간격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첫 번째 역순이 1653년이 되는데, 이 시기, 1652년을 중심으로 조선왕조실록에 가뭄이란 용어와 기우제란 용어가 집중적으로 많이 나타난다. 이 시기는 Maunder Minimum이라 불리는 소빙하기에 속하는 기간(1645-1715)으로 태양의 흑점활동이 전혀 없었던 기간으로 유명하다. 이 기간 전후하여 5월 서리가 3번이나 내렸으니, 바로 1631년, 1647년, 1669년이다. 음력 5월이니 양력으론 6월이다. 이 서리가 농사에 얼마나 큰 피해를 초래했을지는 쉽게 짐작이 간다. 단지 전국적 현상이었는지 아니면 특정 지역의 현상이었는지가 분명치 않다. 흔히 경신 대기근(1670-1671)이라 칭해지는 극심한 피해년도도 이 시기에 포함된다. 가뭄피해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한해(寒害: 혹한), 수해(水害: 홍수), 냉해(冷害), 풍해(風害), 충해(蟲害), 우역(牛疫, 오늘날의 구제역), 여역( 疫: 인간전염병의 총칭)까지 팔재(八災)가 휩쓸어 "굶어죽은 백성들이 길에 깔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1653년의 가뭄 피해가 계속 연장된 경우로 보이며 혹한과 우역이 겹쳤다는 점에서 2011년 1월의 상황과 비슷하여 섬뜩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두 번째 역순은 1529년이 되는데 이해에도 가뭄 39번, 기우제 5번의 기록이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5월 서리가 내린 1520년이 이 시기이다. 세 번째 역순은 1405년이 되는데, 5월 서리가 내린 해인 1414년, 1417년, 1436년이 이 시기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5월 서리 7번이 모두 이 124년 극대가뭄 주기 축과 가까운 연도이다. 앙코르와트의 멸망이 1415년에서 1439년 사이의 가뭄 때문이라는 학설이 있으니 이와 비슷한 시기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 가뭄이란 용어와 기우제란 용어의 등장회수를 따지면, 주기에 해당하는 해(4개년도)는 가뭄이란 단어의 기록회수와 기우제란 단어의 기록회수의 평균이 각각 24, 10.3회이며, 이제 직접 해당하지 않는 517년 동안은 각각 6.3회와 2.9회로서 124년 주기에 해당하는 기간에 가뭄이란 용어와 기우제란 용어가 현저하게 많이 사용되었음이 드러난다. 1901년의 경우는 국가가 이미 기울고 있는 상태라 강우량 기록은 있으되 가뭄기록이나 기우제 기록은 적어 통계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계속 역순으로 올라가면 1281년, 1157년, 1033년인데, 크고 작은 가뭄피해가 기록되어 있다. 1281년은 충렬왕 때인데, 1279년부터 1290년까지 가뭄이 이어졌다. 1157년은 예종 때인데, 1121년부터 1173년까지 가뭄이 이어졌다. 가뭄으로 굶어죽은 시체가 뒹굴었고, 사람이 인육을 먹었다는 기록도 나온다. 1033년 주변에도 1017년, 1019-1032, 1036, 1040-1043년을 연속하여 가뭄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 가뭄들이 다른 해의 가뭄들보다 극심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는 어렵다. 기록들이 모두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단지 심했다는 것은 사실인 모양이다.
일곱 번째 역순은 909년이 되는데, 이 시기가 바로 발해멸망(926)과 후백제(892-937), 후고구려(901-918)가 흥망을 보인 기간이다. 신라의 멸망은 935년인데 909년 가뭄주기와 연관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909년의 극대가뭄이 언제부터 시작하여 몇 년이나 지속했는지는 추측하기 어렵다. 1901년처럼 30년 가까이 지속되었다고 본다면, 후백제 후고구려의 건국과 멸망이 모두 이 시기에 포함된다. 발해와 신라의 멸망도 이 시기 장기간의 가뭄으로 인해 피폐해진 민심의 결과일 수도 있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여덟 번째 역순이 661년인데, 백제멸망(660년), 고구려 멸망(668년)과 맞아떨어지는 연대이다. 653년, 657년에 백제에 큰 가뭄이 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더 이상 역순으로 올라가는 시대에서는 특별한 가뭄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고구려의 역사인 신집은 지금 전하지 않는다. 중국역사에서 이 시기 가뭄의 역사를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 요약해 보면,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발해의 멸망, 5월 서리의 발생(3번), 조선의 멸망 등이 모두 124년의 가뭄의 주기축에서 발생하였음이 확인되며 그중 발해의 멸망이 백두화산 폭발과도 연관되어 있음이 보인다.
38년 주기, 12년 주기 등은 주기가 지켜지다가 말다가 한다. 갑자기 변하여 없어졌다가 다시 등장하면서 주기가 아닌 해부터 시작하는 경우도 보인다. 더 단주기로는 6년 주기가 7년으로 변하기도 하고 4년으로 변하기도 하여 종잡기 어렵다. 특정 대기순환이 지속되다가 큰 변동이 생기면 그동안 지속되던 주기가 다 사라지고, 그 시점에서 다시 시작되는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도 10년 이상 가뭄이 없이 지나가는 경우는 발견되지 않는다.
단지 규모는 문제가 된다. 한반도에서는 1901년 이후 이만한 큰 가뭄은 발생한 적이 없었다. 따라서 1901년의 극대가뭄을 겪은 경험을 가지고 생존해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또한 그 당시는 국가가 기울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에 기록도 잘 되지 못했다. 왕조실록마저도 기록이 부실하였다. 그래서 한반도에 생존해 있는 사람들은 한반도에서 발생한 극대가뭄에 대한 지식이 일천하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IV-2 백두산 재폭발
백두화산이 다시 폭발할 것이라는 예측은 발해 멸망 시기와 같은 격변의 정세를 초래할 가능성, 그리고 가뭄 주기와 연관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위험성 때문에 중시된다. 비록 작은 실마리라도 풀어서 가능한 한 최대의 정확성을 가진 예측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절박감도 있다. 비록 그것이 기우에 그칠지라도, 만에 하나의 연관성이라도 있다면 찾아내어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록 빈약한 자료일망정 모두 뒤지지 않으면 안되며 여론에라도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부산대 윤성효 교수는 2010년에 백두산 천지(天池)에서 화산 가스로 인한 기포가 발견됐고, 2011년 2월 북한, 러시아 국경지대에서 발생한 규모 6.9의 강진(强震)이 백두산 지하의 마그마(magma)를 자극했을 가능성이 크며, 백두산 천지의 지형이 조금씩 솟아오르는 등 지형변화가 확인됐다는 연구 결과를 들어 "백두산이 가까운 장래에 분화(噴火)할 조짐이 확실하다"고 주장했다(조선일보 2011년 3월 3일). 그러나 2014-2015년에 폭발할 것이라는 보도들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의견이 있다고 보도되었다(한겨례 2010.11.11, 뻥이요 백두화산). 지질학에서 가까운 장래라는 말은 1년이 될 수도 100년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V. 결론: 한국의 다음 대가뭄
백두화산의 재폭발은 그 풍하측 낙하하는 화산재 때문에 두려운 것이 아니다. 폭발에 뒤이어 나타날 냉해와 가뭄이 더 두려운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직은 폭발시 풍하측에 낙하할 화산재만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화산 폭발이 가뭄주기와 합세하는 것은 더욱 두려운 일이다. 한반도에서 가장 두려운 재해는 124년 주기로 나타나는 극대 가뭄인데, 지금까지의 추세로 보면 다음 극대 가뭄은 2025년이 된다. 그런데 당해 연도만 가뭄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인근 연도에서도 발생하여 수년에서 30년 가까이 지속되기도 한다. 이 극대가뭄이 언제부터 시작할 것인가에 대하여는 단주기 가뭄들이 언제 재현되는가로 유추할 수 있는데, 2012년이나 2015년이 될 가능성이 크다. 첫 시작에서 강도가 얼마나 강할 것인가는 유추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 가뭄이 백두산 화산폭발과 연관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둘이 합세하여 동시에 발생한다면 큰 재앙이 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이 방면의 심층 연구와 심혈을 기울인 대비가 절실하다.
화산폭발이 가뭄 주기와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밝히는 것은 다음 과제로 넘긴다. 화산의 폭발 역사를 전부 수집하고 이를 가뭄 발생과 연관지어야 하는데, 자료 모으기가 쉽지 않다. 후인에게 부탁드린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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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Byun H.R., S.J. Lee, S. Morid, K.S. Choi, S.M. Lee and D.W. Kim, 2008: Study on the Periodicities of Droughts in Korea, Asia-Pacific J. Atmos. Sci., 44, 417-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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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Park C.K. and S.D. Schubert, 1997: On the Nature of the East Asian Summer Drought. J. of Climate, 10(5), 1056-10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