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 판타지와 영화 장사술의 겉도는 결합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과 <원초적 본능 2>
유지나, 동국대학교 영화영상학과 교수
영화평론가, 파리7대학 문학박사(영화기호학전공), 이화여대 불어불문학과 졸업
대한토목학회지 제54권 제4호(통권 312호), 2006. 4. pp.101-103
영화에서 성적 판타지를 제거하면 남는 게 뭘까? 과연 남는 게 있기나 할까? 어두운 극장에서 불켜진 스크린을 쳐다보는 훔쳐보기라는 영화관람의 속성은 시선의 권력 속에서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은밀하게 자극하는 욕망담을 끈질기게 탐구한다. 스피노자가 간파했듯이 인간의 본질이 욕망이라면, 영화의 본질은 바로 이런 인간의 욕망 탐사란 점에서 대중성을 상업적 이익으로 환산해 내는 최초의 복제예술 상업성의 전범이다.
문화산업의
전모와 대중 영향력을 집중적으로 탐구했던 이 분야의 선구자인 프랑크푸르트 학파에서도
영화의 그런 특성과 폐해를 두고 대조적인 두 가지 견해를 낸 바 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맏형격인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막스 호르크하이머는 '문화산업·대중적
기만으로서의 계몽'이란 글에서 영화는 결국 소수 자본가의 이익을 위해 다수 관객에게
원초적 재미를 주는 요소들로 조립되는 공장 제품처럼 기계적으로 만들어져 관객을
아편처럼 마취시킨다는 비판론이다.
반면 이
학파에서 가장 독특하고 자유분방한 사유를 피력한 발터 벤야민은 이에 앞서 '기계복제
시대의 예술'이란 선언적 글에서 영화의 대량복제성을 찬양한다. 원본 필름이 감상의
가치에 전혀 문제가 안되는 예술, 즉 원본의 아우라가 없는 수많은 대중용 복제예술로서의
영화 매체에서 부르주아 전유물로서의 고급 예술론을 벗어난 희망을 읽어내는 것이다.
이들이
문화산업의 대표주자로 영화를 논한 시대가 40년대 중반이라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그리하여 문화 막시스트인 벤야민이 주로 보고 찬탄한 영화가 스타 배우가 아닌 다수의
기층민들이 혁명의지를 드러내는 소비에트 흑백영화인 점을 감안한다면, 벤야민의
낙관성을 믿고 싶더라도,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비판론이 스타, 장르영화판인
현대 영화상업론에 더 적합하다'라는 생각도 든다. 갈수록 이전보다 자극적인 섹슈얼리티와
폭력성을 탐험하며 우리의 은닉된 욕망을 탈주시키라고 유혹하는 영화들을 보면서
여전히 이들의 상반된 영화 비판, 찬양론이 떠오른다.
사회적
존재이기에 아주 개인적인 본질적 욕망을 통제해야 하는 우리들에게, 일상에서 무감해진
비판적 현실인식보다 두 시간의 스트레스 해소를 원하는 관객들에게 영화는 속삭인다.
어두운 극장 속, 불켜진 스크린에서 당신의 억압된 욕망을 탈주시켜보라고, 최근
연달아 개봉한 <남자들이 모르는 은밀한 것들>,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
<원초적 본능 2> 등이 그런 영화들이다.
'은밀한
원초적 본능'을 멋진 여자들이 탐색해 주겠노라고 꼬드기는 이런 영화들은 정작 보고
나면, 아니 보는 중에도 김이 빠지곤 한다. 이런 영화들이 기본적으로 섹시함으로
무장한 여배우들을 내거나 일단 남자가 아닌 나는 소외감을 느끼는 게 당연하다는
기본적인 조건도 장애물이지만, 분열된 여성 관객성을 인정하고 남성의 마스크를
쓰고 본다 한들 이런 이미지들이 은밀하거나 원초적이기에는 너무 부자연스럽거나
상투적인 것들이어서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이 극장료 생각 안나도록 나름대로
애써 더 자극적인 유혹의 이미지를 조립해 내느라 너무 애쓴 나머지 이 이미지들을
꿰는 줄인 이야기의 자연스러운 흐름과 긴장감을 놓쳐버려서 지속적인 영화보기의
쾌를 보장해주지도 못한다.
프랑스
영화예술로 포장된 <남자들이 모르는 은밀한 것들>(장-끌로드 브리소)은 가난하고
매력적인 유혹녀 두 명을 등장시킨다. 그리고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이용해 섹스로
가능한 계급상승담을 보여줘 성 권력의 위용을 과시한다. 그 와중에 공공장소에서의
자위행위나 쓰리썸, 근친상간적 욕망의 실현 같은 이탈적 모습을 그려내고, 이들에게
유혹 당해 파멸해 가는 성공한 대기업 중역의 외도 연애담을 그려낸다. 그러나 그게
은밀하다기 보다는 사회적 금기에 대한 상투적 위반으로 보일 뿐이다.
컬트 코미디격인
한국영화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이하)은 식자층, 특히 여교수의 사생활을
훔쳐본다. 무대는 심천이라는 지방도시, 심천대학 염색과 교수이자 환경운동가인
조은숙(문소리)을 향한 남자들의 욕망담이 회식자리와 섹스장면을 통해 풀려나간다.
이런 남성들을 쿨하게 다독이며 갖고 노는 조은숙의 대응이 엉뚱하면서 우스꽝스러워
보이기도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그런 식이니 이런 재미도 한계에 봉착한다. 여배우로서는
예외적으로 섹시함보다는 연기파로 입지를 굳힌 문소리의 과장된 섹시 자태가 그나마
신선한 볼거리인데, 그것도 '섹시, 섹시'로 지나치게 밀어부쳐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문소리는
몸매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이탈적 교수의 면모를 보여주는 옷을 입고, 한쪽 다리를
절면서도 매우 높은 하이힐을 신어 엉덩이가 심하게 흔들린다. 게다가 야하다고 생각해선지
S자 곡선이 나오도록 포즈를 잡도록 한 인위적인 연출의 작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자태는 스크린 속 남자를 흥분시킬지는 몰라도 객석에선 헛웃음이 나온다.
물론 이
영화는 사실적 재현보다 한국 사회 식자층의 위선을 알레고리로 그려낸다는 명분을
내건다. 그래서 수업이나 환경운동 자체를 일부러 보여주지 않는 선택을 하며 삐딱한
일상을 과장해서 다루는데 집중한다. 교수라는 이들이 집단 연구실에 모여 조은숙을
두고 심리전을 벌이고, 아리따운 여자 조교에 대한 조은숙의 질투도 구경거리다.
연구실 창에 그려진 퇴색한 탁구장 기호는 이게 연구실이 아니라 놀고 먹는 교수란
이들의 놀이터 풍경임을 희화화한다. 그런 점에서 먹물의 섹스 사생활을 통한 희화화를
전경화 하는 홍상수식 영화를 엇박자 코미디로 밀고 나간 것처럼 보인다. 섹스 할
생각에 가득 찬 남자들의 성적 판타지, 그 욕망을 다 파악한 듯 여러 남자를 애타게
하면서 화끈하게 섹스도 해 주고 미련을 갖지 않는 조은숙은 뜬금없이 삼류시를 읊으며
지식인 여성의 '은밀한 매력'을 희롱한다. 여기서 성취라면 몇 차례 거듭되는 섹스
장면이 건조한 느낌을 주는 거리두기 관찰과 장면전환용 배경음악의 독특한 선택이
그나마 거둔 성취이다.
권력을
가진 식자층, 그 중에서도 낮에는 요조숙녀, 밤에는 매춘부인 분열적인 여성을 풍자하는
것은 상투적 접근으로 인해 진부해져 버린 항목이다. 신선함을 위해 연기파 여배우의
색기만발로 컬트적 코믹판을 벌여보지만, 어이없는 헛웃음 사이에 영화의 알레고리
효과는 저 멀리 실종돼 버린다. 그걸 건조한 섹스장면 하나를 보고 확대 해석해 소격효과라고
강변한다면 브레히트도 무덤에서 일어날 일이다.
다른 장르지만
전편이 거둔 글로벌 성공을 업고 나온 할리우드 특급 <원초적 본능 2>(카이클
카튼-존스)는 돌아온 샤론 스톤의 치명적 유혹 재현에 전력투구한다. 문소리의 배우
자체의 품성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국여성스러운?) 내숭적 억지 섹시미에 비해
샤론 스톤의 그것은 노골적이고 계략적이며 능동적이어서 오히려 화끈하고 시원하다.
아무튼 이 문제는 빤히 속이 보이는 짓이기에 솔직한 게 더 통하기도 하니까. 그러나
'섹시, 섹시'로 모든 걸 돌파하는 이미지 전략에 스릴러의 본질인 이야기의 긴장감이
실종되는 사유는 매우 유사하다. 그러니까 전편이 개척한 '에로틱 스릴러'는 2편에서
'에로틱 에로틱' 장르로 우려내진다. 똑똑한 악녀 소설가에게 여지없이 당하고 마는
정신과의사와 주변 인물들의 연쇄살인극이 추구하는 스릴러다움. 장르에 걸맞는 이야기
구조의 본질은 14년만에 돌아온 샤론 스톤이 여전히 뇌쇄적인 섹시함을 증명하려는
이미지에 치여 맹숭맹숭해지기 때문이다. 전편의 얼음 송곳은 그런 대로 의미가 있었지만,
이번에도 막판에 나오는 그 송곳은 하나도 긴장되지 않는 솜방망이로 보인다. 차라리
이 영화보기의 긴장감은 (특히 샤론 스톤의 팬이라면) 혹시 이 섹시 스타가 나이에
치여 안 섹시해 보이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으로부터 나올 지경이다. 40이라는 중년의
나이가 넘어 진정한 스타로 거듭나는 샤론 스톤의 변혁적 삶을 알기에 <원초적
본능> 이후의 샤론 스톤을 인정하게 된 나 역시 그의 팬이기에 남성유혹용 섹시
이미지에서 고군분투하는 그의 모습에 안쓰럽다 못해 긴장감까지 느낄 정도였다.
은밀한
원초적 본능 그리기에 패를 건 이런 영화들은 과거나 현재나 악마적 유혹녀에게 당하는
남성들의 고통담을 교훈적으로 그려내면서, 그 여자의 '섹시, 섹시함'에 경배를 올리는
이미지의 과잉에서 정체된다. 그나마 달라진 점이라면 과거 남자 홀리기만이 직업인
가부장의 하녀성 섹시녀들에 비해 요즘 섹시녀들은 교수나 소설가 같은 권력이 있어
보이는 전문직 지성녀라는 점이다.
그리하여
에로스 본능이 자기파멸적 타나토스 본능과 뫼비우스 띠처럼 하나가 되어 돌아간다는
프로이드식 명제는 여전히 씨네 욕망담에서 증명된다. 그러나 귀에 닿도록 눈에 박히도록
익히 듣고 보아온 이 명제는 에로티시즘의 은밀하고 원초적인 간지러움이 없다는
점에서 모순되고 비극적이다. 게다가 '섹시, 섹시'가 모토인 유혹녀의 즐거운 게임이
남성의 파멸적 고통담으로 귀결되는 뻔함이 주는 진부함이 지루한 억압이 된다.
다 드러낸
벗은 몸보다 옷깃 속에 가려져 상상력을 자극하는 숨겨짐이 더욱 매혹적이라는 롤랑
바르트의 탁견은 과잉 가시성이 비가시성의 매혹을 날려버린 이미지 포르노화의 비애와
타락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성적 판타지의 은밀한 쾌락이란 여성의 대상화를 넘어
양성소통적이어야 한다는 자연스러운 덕목을 은밀하게 증명하는 욕망담은 씨네마에게
여전히 숙제로 남겨진다. 그 숙제를 해내기엔 영화상품론을 여성상품론으로 실천해온
영화상업성의 관성이 너무나 고질적으로 박혀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