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차례의 초기 박해들
1. 네로(Nero) 통치하의 첫 번째 박해, AD 67년
교회에 가해진 첫 번째 박해는 A.D. 67년 로마의 제6대 황제 네로가 통치할 때 일어났다. 이 독재자가 벌인 일들 가운데 유명한 것이 바로 로마 시를 불태운 일이었다. 황제의 위용을 자랑하던 로마가 불길에 휩싸였을 때, 네로는 마케나(Macaenas)탑에 올라가 하프를 켜며 ‘불타는 트로이’를 노래했고, ‘내가 죽기 전에 모든 것이 다 폐허가 됐으면 좋겠다’고 공개적으로 외쳐댔다. 한마디로 마귀 들린 미치광이 군주였던 것이다.
웅장한 건축물과 수많은 궁전들과 가옥들이 잿더미가 되었다. 수천만 명이 불길에 타죽거나 연기에 질식되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무너진 건물더미 아래 파묻혔다. 이 가공할 대화재는 9일 동안이나 그 불길이 꺼질 줄 몰랐다. 그런데 네로의 소행에 대해 막대한 비난과 맹렬한 증오가 빗발치자, 네로는 그 모든 원인을 무고한 그리스도인들에게로 돌리기로 결심했다. 화재에 대한 책임을 면함과 동시에, 자신의 마귀적 성품을 즐겁게 해줄 또 다른 잔악극을 실컷 구경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길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를 계기로 첫 번째 박해가 일어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자행된 짐승 같은 소행이 어찌나 끔찍했던지 그것을 바라보는 로마인들조차 끓어오르는 연민을 감출 수가 없었다. 네로는 잔인함의 극치를 보이며 극악무도하기 짝이 없는 상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온갖 처형 수법을 고안해 냈다. 어떤 이들은 짐승 가죽에 꿰매어 넣고 숨이 끊어질 때까지 개들에게 물어 뜯기게 했다. 또 어떤 이들은 밀랍을 먹인 딱딱한 속옷을 입혀서 마차 차축에 단단히 고정시킨 후 자신의 정원에서 불태워 야밤의 칠흑 같은 정원을 대낮처럼 환하게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로마 제국 전반에 걸쳐 총체적으로 일어난 이 잔혹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믿는 기독 신앙은 오히려 더 강성하게 되었고, 그러는 중에 사도 바울이 순교했다. 순교자에는 바울 외에도 고린도 재무관인 에라스토(Erastus)와 마케도니아의 아리스타코(Aristarchus), 바울을 통해 회심한 에베소인 드로비모(Trophimus), 바울의 동역자요 보통 바사바(Barsabas)라고 불리는 요셉(Joseph), 다마스커스 감독 아나니아(Ananias) 등이 있었다.
2. 도미시안(Domitian) 통치하의 두 번째 박해, AD 81년
도미시안 황제는 날 때부터 잔인함이 몸에 밴 인물로, 처음엔 친형제와 로마 원로원 의원 몇을 죽이더니 급기야 그리스도인들에게 박해의 손길을 뻗쳤다.
이 박해 때 순교한 셀 수 없이 많은 사람 가운데 예루살렘 감독으로 십자가에 처형된 시므온(Simeon)이 끼여 있었다. 사도 요한은 끓는 기름에 넣어졌다가 밧모 섬으로 추방당했다. 특히 로마 원로원 의원 딸인 플라비아(Flavia)가 본도(Pontus)로 유배당한 일이 계기가 되어 다음과 같은 특별 법령이 제정되었다. “그리스도인이 재판에 회부되어 호민관 앞에 섰을 때, 그 누구도 신양을 버리지 않고는 처벌을 면할 수 없다.”
도미시안 통치 기간에는 그리스도인들을 못살게 굴 목적으로 날조된 이야기들이 가지각색으로 난무했다. 기근과 전염병, 지진 같은 것들이 로마 지배 하의 속주(屬州) 어느 곳에 스치기만 해도 그 모든 원인이 그리스도인들에게로 돌려졌다. 그리스도인들 사이로 불어 닥친 박해들로 믿음 없는 내부 밀고자들의 수가 증가했고, 돈에 눈먼 거짓 고발자들이 무고한 생명들을 사라지게 하는 일이 한두 건이 아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떤 그리스도인이든 집정관 앞에 서면 어차피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법정 선서가 제안되었는데, 재판을 원치 않아 그것을 거절해도 사형이 선고되고, 설사 선서한 후에라도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면 사형이 언도된다는 선서였다.
많고 많은 사람들이 이 박해 기간에 순교했지만, 단연 두각을 나타낸 인물들은 다음과 같았다.
헬라 문학을 섭렵한 뒤 천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이집트로 여행을 떠났다가 우리 구주께서 십자가에 처형되시던 바로 그 시각에 일어난 엄청난 규모의 “초자연적” 일식을 관찰하게 된 아레오바고(Areopagus) 사람 디오누시우스(Dionysius)는 그 입술에 배인 거룩함과 몸에 젖은 순결함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강력한 호감을 사 아테네 감독으로 임명되었다가 그 후 순교했다.
이름이 잘 알려진 마음 따스한 그리스도인 니고데모(Nicodemus)는 도미시안 박해 기간의 들끓는 격분 속에서 로마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프로타시오(Protasius)와 거바시오(Gervasius)는 밀란(Milan)에서 순교했다.
사도 바울의 제자요 영적 아들로 불린 디모데(Timothy)는 에베소 감독이었고 A.D. 97년까지 열심을 다해 교회를 섬겼다. 이 박해 기간에 카타고기온(Catagogion)이라는 우상 축제를 거행하려는 이교도들의 가두 행렬과 마주쳤는데, 그들의 허황된 우상 숭배를 강력하게 책망하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이교도들은 끔찍하게 곤봉으로 그를 사정없이 내리쳤고, 디모데는 그때 얻은 부상으로 이틀 후 숨을 거두고 말았다.
3. 트라얀(Trajan) 통치하의 세 번째 박해, AD 108년
학식 있고 이름 높던 플리니 2세(Pliny the Second)는 이 세 번째 박해 때 통치자 트라얀에게 서한을 띄웠는데, 이유인즉,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로마법에 저촉되어 박해받을 만한 이가 한 사람도 없음에도 하루에도 수천 명씩 대학살을 당하는 것을 보고서 끓어오르는 연민을 누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안디옥 감독 이그나티우스(Ignatius)가 바로 이 박해 때 고난을 당했다. 붙잡혀 서머나에 당도한 그는 순교하여 그리스도 예수를 얻도록 해 달라는 편지를 로마에 있는 교회에 띄워 순교에 대한 열망을 드러내었고, 그 후 맹수의 우리에 던져 넣으라는 형을 선고받고서 사자들의 울음소리가 귓전에 들려오자 “오, 나는 그리스도의 밀알이라. 순결한 빵으로 발견되기 위해 맹수들의 이빨 사이에서 부서지려 하노라”고 말한 후 맹수들에게 뜯겨져 순교했다.
트라얀을 뒤이어 아드리안(Adrian)이 등극했고, 그 역시 지독한 가혹함으로 이 세 번 째 박해를 이어나갔다. 로마 감독 알렉산더(Alexander)가 그의 두 집사와 함께 순교했으며, 퀴르누스(Quirnus)와 헤르네스(Hernes) 그리고 그들의 가족뿐 아니라 로마의 귀족 제논(Zenon)과 10,000명에 육박하는 다른 그리스도인들도 죽음에 넘겨졌다. 아라랏 산에서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본떠 수많은 사람들이 가시 면류관이 씌워지고 창으로 옆구리가 찔려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특히 유스타치우스(Eustachius)라는 로마 지휘관은 그의 몇몇 전승을 축하하기 위한 우상 희생제에 참가하라는 황제의 명령을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중히 거절했고, 이에 화가 치민 배은망덕한 황제는 이 노련한 지휘관의 공로를 잊고서 그와 전 가족을 몰살시켜 버렸다.
파우스티네스(Faustines)와 조비타(Jovita) 그리고 브레스키아(Brescia)의 형제들과 시민들이 순교당할 때에는 고난에 대한 그들의 인내에 감탄한 칼로세리우스(Calocerius)라는 한 이교도가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은 위대하시도다”라고 탄성을 질렀다가 체포되어 함께 죽임을 당했다.
A.D. 138년, 아드리안이 명을 다하자 순한 성품의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가 뒤를 이었고, 이로써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가 잠시 중단되었다.
4.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Marcus Aurelius Antoninus) 통치하의 네 번째 박해,A.D. 162년 - (1)
A.D. 161년경 왕위에 오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그리스도인들에게 독기를 품고 사납게 굴던 이 자에 의해 네 번째 박해가 시작되었다.
어떤 순교자들은 이미 까발려진 발바닥으로 가시, 못, 뾰족한 조개껍데기 같은 것들 위를 지나가야만 했고, 다른 이들은 그들의 근육과 핏줄들이 살갗 밖으로 튀어나올 때까지 채찍으로 얻어맞았는데, 그래도 부족한지 인간이 고안해 낼 수 있는 가장 극심한 고문들로 살을 도려내는 고통을 맛본 후 소름끼치기 짝 없는 죽임을 당했다.
젊고 신실한 그리스도인 게르마니쿠스(Germanicus)는 맹수들에게 넘겨질 때 맹수들을 비웃듯 담대한 믿음을 지켰고, 이를 지켜보던 몇몇 이교도들이 확고부동한 그의 믿음을 보고서 주님께로 회심했다.
서머나의 덕망 있는 감독 폴리캅(Polycarp)은 지방 총독 앞으로 끌려가 사형을 언도받고 시장 바닥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저주하라, 그러면 널 놓아줄 것이다. 그리스도를 비난해 보란 말이다.” 총독의 이 타협안에 폴리캅은 “내가 주님을 섬긴 지 86년이 흘렀어도 그분은 한 번도 나를 부당하게 대하신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찌 내가 날 구원해 주신 나의 왕을 모독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응수했다. 화형틀에 홀로 묶인 그를 나뭇단에 지핀 화염이 아치 모양으로 휘감았지만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는 것을 본 총독은 칼로 찌르라는 명령을 내렸고, 칼로 찌르자 불길을 꺼뜨릴 정도로 많은 피가 쏟아졌다.
큰 담력으로 말씀을 전파했던 주님의 일꾼 메트로도루스(Metrodorus)와 수차례에 걸쳐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탁월하게 변호했던 파이오니우스(Pionius) 역시 불살라졌으며, 카포(Carpus)와 파필로(Papilus)라는 두 훌륭한 그리스도인과 독실한 믿음의 아가도니카(Agathonica)라는 여인도 아시아의 퍼가모폴리스(Pergamopolis)에서 순교했다. 로마 명가의 귀부인 펠리시타티스(Felicitatis)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슬하에 일곱 아들을 두었다. 그 중 장남 재누아리우스(Januarius)는 채찍에 맞은 후 육중한 추들에 눌려 압사했고, 밑의 두 동생 펠릭스(Felix)와 필립(Philip)은 곤봉에 맞아 뇌가 터져 나왔으며, 넷째 실바누스(Silvanus)는 절벽에서 떠밀려 추락사했다. 철없는 알렉산더(Alexander)와 비탈리스(Vitalis)와 마셜(Martial)은 참수 당했고, 어머니도 그 어린 것들의 피가 묻은 칼에 목이 베어졌다.
진리를 끔찍이도 애찬하던 박식한 학자 저스틴(Justin)은 원래 철학에 심취한 철학자였지만 A.D. 133년경 서른 살에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이후 처음으로 진리의 참맛을 알게 되었다. 이교도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심히 가혹하게 대하자 그들을 위한 첫 번째 변호서를 작성하게 되고, 거기에 배인 뛰어난 학식과 천재성에 손을 들어 버린 황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리한 칙령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사회의 모든 기성사실을 멸시하고 세상을 비꼬며 비뚤어진 눈으로 보는 퀴닉학파의 크레센스(Crescens)와 잦은 논쟁을 벌이던 중 그의 비위를 거스르게 되는데, 이에 저스틴을 죽이기로 작정한 크레센스는 저스틴이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두 번째 변호서를 작성했을 때 황제를 부추겨 그를 싫어하는 마음을 갖게 했고, 결국 저스틴과 그의 여섯 동료는 그 글로 인해 체포되고 말았다. 우상들에게 제물을 바치라는 명령을 거절한 그들에게 채찍형과 함께 참수형이 선고되었으며, 그들은 혀를 내두르게 하는 온갖 가혹한 형벌로 죽음을 맞이했다.
이 시기에 몇 사람이 주피터(Jupiter) 형상에 제물 바치기를 거절한 이유로 참수형을 당했는데, 거기에 스폴리토(Spolito) 시의 집사 콘코두스(Concordus)가 포함되었다. 그는 집사의 직분을 잘 섬긴 사람답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 안에서 큰 담력으로 죽음을 맞이했다(딤전 3:13).
4.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Marcus Aurelius Antoninus) 통치하의 네 번째 박해,A.D. 162년 - (2)
로마의 네 번째 박해 기간에 열욍기상 18장의 “엘리야와 바알의 선지자들의 대결”을 연상케 하는 사건이 있었다. 로마로 인해 마음 편치 못해 하던 몇몇 북쪽 나라들이 로마를 대항해 무장하고 일어서자 황제는 그들과 교전키 위해 출전했다. 그런데 그만 적군이 매복하고 있는 곳으로 빠져들었는데, 첩첩산중 어딘가에 적들이 포진하고 있는데다, 또 타는 듯한 갈증으로 죽을 지경이 돼 버린 그들은 이교도 신들에게 간절히 구해 보지만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도대체가 묵묵부답이었다. “그들이 받은 송아지를 가져다가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그들이 그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더라”(왕상 18:26).
이처럼 전의를 상실하고 있을 즈음,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듯 민병대, 즉 그리스도인들로 이루어진 ‘뇌성 군단’ 대원들에게 “그들의 하나님께” 구조를 요청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왕상 18:36,37). 아니나 다를까 기적적인 구원이 그 즉시로 뒤따랐다. 폭포수 같은 빗줄기가 쏟아져 내려 부대원들이 만들어 놓은 도랑을 가득 채웠고, 그로 인해 때 아닌 놀라운 구원이 찾아들었으니, 자신들의 면상에 불어 닥친 불가사의한 폭풍으로 너무도 겁에 질려 버린 일부 적들이 로마 군대로 투항하고, 그렇지 않은 나머지는 패배의 쓴잔을 맛보게 되어 반란을 일으켰던 모든 속주들이 평상을 되찾은 것이다. “참으로 크도다 그의 이적이여, 참으로 능하도다”(단 4:3).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왕상 18:39).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은 위대하시도다!
이번 사건으로 인해 얼마간 박해가 누그러졌다.
그러나 박해는 곧이어 프랑스 특히 리용(Lyons)에서 맹위를 떨쳤다. 거기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당했던 고문들을 말로 표현하자면 아예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지경이다. 이 순교자들 중 단연 으뜸인 이들 중에는 베티우스 아가투스(Vetius Agathus)라는 파릇파릇한 청년, 그리스도를 믿는 가냘픈 몸매의 숙녀 블란디나(Blandina), 시뻘겋게 달아오른 놋접시를 신체의 가장 연한 부위에 대고 있어야 했던 비엔나(Vienna)의 집사 생투스(Sanctus), 일전에 한 번 그리스도를 부인한 적이 있는 약골의 여인 비블리아(Biblias)가 있었고, 버가모(Pergamus)의 아탈루스(Attalus)와 리용의 덕망 있는 감독인 아흔 살의 포티누스(Pothinus)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블란디나로 말하자면, 그녀는 자신과 다른 세 챔피언들이 원형극장 안으로 처음 이끌려 들어온 날 땅바닥에 고정되어 있는 말뚝에 묶여 맹수들의 먹잇감으로 노출되었다. 그녀는 그때 간절한 기도로 다른 이들의 힘을 북돋아 주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어떤 맹수도 그녀만은 건드리려 하지 않는지라 그녀는 도로 감옥에 남겨지게 되었다. 그녀가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다시 원형극장으로 끌려나왔을 때, 그녀 옆에는 폰티쿠스(Ponticus)라는 열다섯 살의 소년이 함께 하고 있었다. 그들의 믿음이 지닌 굳은 지조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군중들은 그들을 성적 노리개로 하여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해 고문하고 처형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소년은 블란디나로부터 힘을 얻어 죽기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었고, 그녀 또한 갖은 고문을 잘 참아낸 후 결국 칼로 죽임을 당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땅 위의 박해와 땅 밑의 기도”로 점철되었다. 그들의 삶은 로마의 원형경기장 “콜로세움”과 지하묘지 “카타콤”으로 대변된다. “카타콤”은 로마의 땅 밑에 파 놓은 굴들인데, 교회당과 무덤을 겸해 사용되었다. 초기 로마의 교회는 일명 “카타콤 교회”였던 것이다. 로마 부근에는 약 60개의 카타콤이 있으며, 지금까지 그 안에서 600마일 정도의 지하 통로가 발견되었지만 아직도 더 추적해 들어가야 할 부분이 남아 있다. 이 지하 통로들은 높이가 약 6피트, 폭이 3-5피트 정도로, 각 측면 벽에는 수평선처럼 길고 낮게 움푹 들어간 부분들이 선박의 층계식 침대들처럼 위아래로 차곡차곡 만들어져 있다. 이것들 안에는 시체들이 안치되어 있었고, 앞면이 한 판의 대리석이나 회반죽으로 이어 놓은 몇 개의 커다란 기왓장으로 봉입되어 있었다. 이 대리석 판들이나 기왓장들 위에는 묘비명이 새겨져 있거나 어떤 상징들이 그려져 있다. 이교도들과 그리스도인들 모두 그들의 죽은 자를 이곳 지하 묘지들에 묻었는데, 그리스도인들의 무덤을 열어젖히면 그들의 뼈들을 통해 그들이 얼마나 참혹하게 죽었는지를 알 수 있다. 머리들이 몸에서 잘려진 채로 발견되는가 하면, 갈비뼈들과 견갑골들이 부서져 있고, 또 뼈들은 종종 불태워져 이산화탄소가 제거된 생석회(生石灰)가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들을 통해 무시무시한 박해 기사를 읽어 나갈지 모르나 그 비면(碑面)들에 새겨진 비문(碑文)들은 우리에게 평안과 기쁨과 승리의 입맞춤을 보내고 있다.
“마르시아(Marcia)가 평안을 꿈꾸며 이곳에 고이 잠들어 있도다.”
“로렌스(Lawrence)가 천사들의 품에 안겨 떠나간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아들에게 바치노라.”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히 승리했도다.”
“부르심을 받고서 평안히 갔노라.”
5. 세베루스(Severus)와 함께 시작된 다섯 번째 박해,A.D. 192년
심한 병으로 몸져누워 있던 세베루스는 한 그리스도인의 도움으로 병상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이후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호의를 보이는 사람이 되었지만, 무지한 군중들의 편견과 광분에 못 이겨 그리스도인들을 대적하는 법령을 실행토록 하고야 만다. 기독 신앙이 눈에 띄게 활기를 얻자, 이에 놀란 이교도들은 우연발생적인 재난들의 원인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리는 그 옛날의 중상모략을 재개하는데, 때는 A.D. 192년이었다.
그러나 박해가 아무리 날뛴다 해도 복음은 찬란히 빛났고, 그 어떤 내침에도 끄덕 않는 바위처럼 원수들의 사납고 거친 공격들을 훌륭히 이겨 내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한꺼번에 로마 제국에서 빠져 나간다면 제국이 심각한 인구 부족을 겪었을 정도로 그리스도인들의 수는 늘어만 갔다.
로마 감독 빅터(Victor)는 세 번째 세기가 시작되던 해, 그러니까 A.D. 201년에 순교했다. 라이스(Rhais)는 펄펄 끓는 새까만 역청을 머리에 뒤집어쓴 후 그녀의 어머니처럼 화형에 처해졌다. 언니 포타이니에나(Potainiena) 역시 라이스와 같은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런데 그녀의 형 집행을 맡은 바실리데스(Basilides)라는 장교가 그녀로 인해 회심하는 일이 벌어진다.
바실리데스는 이후 군 장교로서 응당 해야 할 특정 서약을 요구받자 그리스도인이기에 로마 우상들의 이름으로 맹세할 수 없노라고 딱 잘라 거절했다. 그 말을 믿지 못하겠다던 사람들 앞에서 거듭 굳은 결심을 표명하자, 즉시 재판관 앞으로 끌려가 감옥에 넘겨져 그 후 서둘러 참수되었다.
이제 박해의 불길은 아프리카로 옮겨지고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지구의 그쪽 모퉁이에서 순교를 당했다.
페르페투아(Perpetua)는 스물두 살 가량의 기혼녀였다. 합께 고난당한 이들은 만삭으로 배가 부른 펠리시타스(Felicitas)와 이제 갓 신앙을 갖게 된 노예 레보카투스(Revocatus)였다. 다른 수감자 명단에는 사투르니누스(Saturninus), 세쿤둘루스(Secundulus) 그리고 사투르(Satur)가 있었다. 처형 당일 그들은 원형극장으로 끌려 들어갔고, 사투르와 사투르니누수, 레보카투스를 ‘사냥꾼들’ 사이에서 태형에 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래도 죽지 않을 시에는 그들을 맹수들에게 넘기는 것이 관례였다. 사냥꾼들이 두 줄로 늘어서자, 그들은 사냥꾼들 사이로 뛰어들어 지나가면서 가혹하게 난타를 당했다. 펠리시타스와 페르페투아는 발가벗겨진 채 미친 황소에게로 던져졌는데, 그 미친 소는 페르페투아를 들이받아 기절시킨 뒤, 쏜살같이 펠리시타스에게 돌진해 무참히 받아 버렸다. 그 일로도 죽지 않은 그들을 사형 집행인이 칼로 숨통을 끊어 버렸다. 결국 레보카투스와 사투르는 맹수들에 의해, 사투르니누스는 참수형으로, 세쿤둘루스는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이 일들은 A.D. 205년 3월 8일에 집행되었다.
스페라투스(Speratus)와 다른 20명도 역시 목 베임을 당했다. 프랑스의 안도클레스(Andocles)도 마찬가지였다. 안디옥의 감독 아스클레피아데스(Asclepiades)는 숱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었다.
로마 명가 출신의 숙녀 세실리아(Cecilia)는 발레리안(Valerian)이라는 산사에게 시집을 갔다. 그녀는 그녀의 남편과 동생을 주께로 인도했고 그 둘 모두 참수를 당했는데, 그들의 형 집행을 담당한 장교가 그들로 인해 회심하게 되어 그도 동일한 운명을 맞이했다. 세실리아는 물이 펄펄 끓는 욕조에 알몸으로 담궈졌고, 꽤 시간이 지난 뒤 칼로 목 베임을 당했다. 이 일은 A.D. 222년에 일어났다.
로마 감독 칼리스투스(Calistus)는 A.D. 224년에 순교했으나 어떻게 죽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로마 감독 우르반(Urban)도 A.D. 232년에 동일한 운명을 맞이했다.
6. 막시무스(Maximus) 통치하의 여섯 번째 박해, A.D. 235년
A.D. 235년은 막시무스가 통치하던 때였다. 갑바도기아(Cappadocia)에서는 그곳의 총독 세레미아누스(Seremianus)가 갖은 노력을 다 기울여 그 지방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모조리 없애 버리려 하였다.
이 통치하에 죽은 주요 인물들에는 로마 감독 폰티아누스(Pontianus)와 그리스 사람으로 그의 후계자며 순교자들의 행적들을 수집하러 다니다 정부의 미움을 산 안테로스(Anteros), 로마 원로원 의원 팜마치우스(Pammachius)와 퀴리투스(Quiritus), 그리고 그들의 전 가족과 다른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고, 또 원로원 의원인 심플리시우스(Simplicius)와 티베르(Tyber)로 추방당한 주님의 일꾼 칼레포디우스(Calepodius), 고귀하고 아름다운 처녀 마르티나(Martina), 거칠게 날뛰는 야생마에 줄로 매달려 숨이 끊어질 때까지 땅바닥에 끌려다녔던 주의 종 히폴리투스(Hippolytus)가 있다.
막시무스가 일으킨 이 박해 기간 동안 수도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재판정에 서 보지도 못한 채 죽임을 당한 후 그들의 시체가 무더기로 쌓이며 매장되었다. 어떤 때는 죽은 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도 없이 한꺼번에 오륙십 명씩 구덩이에 던져 넣어졌다.
날마다 썩어가는 육신이 죽어 이토록 가치 없이 내버려졌다 해도, 주의 성도들의 죽음은 죽음 그 자체로 가치 있고 아름다운 일이었다.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시 116:15). 이제 곧 구속받은 몸으로 부활하면, 그 날 박해받던 성도들의 죽음이 주님 보시기에 참으로 아름다웠다는 것을 온 천하 만물 앞에 입증하게 되리라.
7. 데시우스(Decius) 통치하의 일곱 번째 박해, A.D. 249년
이번 박해는 그리스도인으로 여겨지던 선왕 필립에 대한 데시우스의 증오와 교회들의 왕성한 성장에 대한 그의 시기가 뒤엉켜 일어났다. 데시우스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바로 그 이름을 뿌리째 뽑으려 했다. 설상가상으로 교회 안으로 수많은 오류가 유입되었고, 성도들은 하나가 되어 사랑을 해도 어려운 판국에 분열되어 다양한 분파를 만들고야 말았다. 이런 상황에 이교도들은 황제의 칙령을 받아 그리스도인을 한 명이라도 더 죽여서 그것을 자신들의 공적으로 돌리고픈 마음으로 불타고 있었다.
시실리아(Cicilia) 태생의 줄리안(Julian)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독사와 전갈이 우글대는 가죽 부대에 넣어진 후 그대로 바다에 던져졌다. 피터(Peter)라는 청년은 비너스에게 제물 바치기를 거절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당신들이 악명 높은 여인에게 제물을 바친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그녀의 방탕에 대해서는 당신들의 역사가들도 기록하고 있고, 그녀의 삶은 당신들의 법이 처형하기로 규정해 놓은 것들로 얼룩져 있으니 이 어찌 놀랄 일이 아닌가! 난 결코 할 수 없다. 오히려 주님께서 기뻐하실 찬양과 기도의 제물들을 참되신 하나님께 바칠 것이다.” 아시아의 총독 옵티무스(Optimus)는 이 말을 듣자마자 그를 형차(行陣) 위에서 찢으라고 명령했다. 이로 인해 모든 뼈가 산산이 부서져 버린 청년은 이후 다른 곳으로 보내져 참수 당했다. 열여섯밖에 안된 처녀 데니사(Denisa)는 한 청년이 믿음을 부인하는 것을 지켜보다 갑자기 이렇게 소리쳤다. “오 불행하고 가련한 사람아 왜 너는 한순간 편안하여 영원히 비참해지려고 하는가!” 이 말을 들은 옵티무스는 그녀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고, 데니사는 자신도 그리스도인임을 분명히 밝힌 후 참수 당했다.
순교자 니코마쿠스의 두 친구 앤드류(Andrew)와 폴(Paul)은 A.D. 251년에 복되신 구세주를 부르며 돌에 맞아 순교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더와 에피마쿠스(Epimachus)는 ‘죄’라고 불리는 그들의 믿음을 부인하지 않았고, 그리하여 몽둥이로 두들겨 맞고 갈고리로 찢긴 후 결국 불태워져 죽었다.
두 명의 사악한 이교도 루시안(Lucian)과 마르시안(Marcian)은 솜씨 좋은 마법사들이었으나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열변을 토하는 설교자들로 변모하여 수많은 혼들을 주님께로 인도했다. 그들은 산 채로 화형 시키라는 형을 선고받고서 주님의 이름으로 순교했다.
트루포(Trypho)와 레스피시우스(Respicius)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까닭으로 체포되어 니스(Nice, 프랑스 남부의 피한지)에서 투옥되었다. 두 발에 못들이 박히는가 하면, 길거리를 끌려 다니고, 채찍질 당하고, 쇠갈고리로 갈기갈기 찢기며 불붙은 횃불로 지져지다가 A.D. 251년 2월 1일에 목이 베어졌다.
시칠리아(Sicily)의 숙녀 아가사(Agatha)는 그녀가 개인적으로 가꾸어 온 자질도 자질이지만 신앙 또한 이에 못지않게 눈에 띄었다. 너무도 수려한 그녀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어버린 시칠리아 총독 퀸티안(Quintian)은 그녀의 순결을 빼앗으려고 갖은 시도를 다 해 보지만 번번이 실패하기 일쑤였다. 그는 그 정숙한 여인을 아프로디카(Aphrodica)라는 음탕하기로 악명 높은 여자의 손에 넘겨 그녀를 매춘시키기 위해 갖은 수작을 다 부려 보았지만, 모든 수고가 물거품이 되었다. 퀸티안은 자신의 계획이 좌절된 데 대해 끓어오르는 격분을 누를 길이 없었고, 그녀가 그리스도인임을 알자 그의 정욕은 분노로 바뀌어 그녀에게 앙갚음하기로 결심했다. 그의 명령에 따라 그녀는 채찍질당하고 시뻘겋게 달궈진 인두로 지져지고 날카로운 갈고리들로 살점이 툭툭 뜯겨져 나갔다. 이 고문들을 꿋꿋하고 훌륭히 잘 참아 낸 그녀는 이번엔 뾰족한 유리 파편들이 섞여 있는 뜨겁게 달궈진 석탄 위에 발가벗겨진 채 눕혀졌다가 다시 감옥에 넣어졌으며, 그곳 감옥에서 A.D. 251년 2월 5일 숨을 거두었다.
이외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증인들의 피는 박해의 손길이 닿는 모든 곳에 넘실거렸다. 박해의 괴수 데시우스가 성도들의 모임을 들여다보고파 하는 것을 거절했다가 세 제자들과 참수당한 바빌라스(Babylas)와 혹독한 감옥 생활로 생을 마감한 예루살렘 감독 알렉산더, 낙타 등에 묶인 채 가혹하게 채찍질당한 후 불구덩이에 던져져 한 줌의 재가 된 노인 줄리아누스(Julianus)와 크로니온(Cronion), 투옥되어 채찍질당하다 불살라진 안디옥의 40명의 처녀들, 에베소에 이교 사원을 세운 황제가 우상들에게 제물을 바치도록 명령했을 때 정중히 거절하고 황제가 원정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 어느 동굴로 몸을 숨겼다가 돌아온 황제가 입구를 봉하는 바람에 굶어죽은 친위대원 막시미아누스(Maximianus), 마르티아누스(Martianus), 조아네스(Joannes), 말쿠스(Malchus), 디오니 시우스(Dionysius), 세라이온(Seraion),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가 있었다. 그리고 세쿤디아누스(Secundianus)가 병정들에 의해 감옥으로 끌려갈 때 “지금 그 무고한 사람을 어디로 데려가는 중이요?”라고 물었다가 체포되어 함께 고문당하고 교수형에 처해진 후 목이 잘린 베리아누스(Verianus)와 마르셀리누스(Marcelinus)가 있었다.
이뿐 아니라 이 시기에 빼놓을 수 없는 참으로 아름다운 성도들의 사랑 이야기가 있다. 데오도라(Theodora)라는 아리따운 숙녀가 로마의 우상들에게 제물 바치기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매춘굴로 보내지자 디두모(Didymus)는 로마 병정 군복을 입고서 매춘굴로 위장해 들어가 그녀를 자신의 군복을 입고 도망가게 하였다. 후에 자신은 발각되어 사형이 선고되었는데, 자기를 구해 준 그가 사형에 처해지려 한다는 소식을 들은 데오도라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곧장 판사에게로 달려가 그의 발치에 몸을 던진 채 디두모의 죄는 자기가 질 테니 그를 놓아 달라며 애걸복걸 울먹이며 매달렸다. 그러나 매정한 판사는 그녀에게도 사형을 선고해 버렸다. 두 사람은 먼저 목이 베였다. 그 후 시체가 토막이 났으며, 그리고 불살라졌다.
이 순교 이야기는 남녀 간의 애정보다도 깊은, 지극히 숭고한 성도의 사랑을 보여 준 것이다. 연인이 아닌 성도로서,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사랑을 실천했다. 성도를 위해 자기 생명을 아까워하지 않은 그들은 그 사랑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배우고 실천한 하늘 아래 둘도 없는 아름다운 사람들이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요 15:12-14, 벧전 1:22).
8. 발레리안(Valerian) 통치하의 여덟 번째 박해, A.D. 257년
이 박해는 A.D. 257년 4월, 발레리안 통치 때 시작하여 3년 반 동안 계속되었다.
한 부모 슬하에서 자란 루피나(Rufina)와 세쿤다(Secunda) 자매는 둘 다 미모가 출중하고 교양이 넘치는 여인들이었으며 돈 많은 귀족들과 약혼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임을 자처하던 두 신랑은 박해가 닥치자 재산을 잃을까 두려워 믿음을 저버렸고, 약혼녀들을 설득하지 못하자 언제 사랑했느냐는 듯 밀고해 버렸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붙잡힌 두 여인은 로마 총독 쥬니우스 도나투스(Junius Donatus) 앞으로 끌려가 A.D. 257년에 자신들의 피를 인주 삼아 순교의 도장을 찍었다.
로마 감독 스테펜(Stephen)도 그 해 참수 당했다. 그 즈음 뚤루스(Toulouse)의 경건한 정통파 감독 사투르니누스(Saturninus)는 우상들에게 제물 바치기를 거부함으로써 황소의 꼬리에 발이 묶였다. 박해자들은 황소를 사원 계단 아래로 내몰았고, 그 짐승이 격분하여 콧김을 내뿜으며 내달리는 바람에 그 훌륭한 순교자의 뇌가 터져 나오고 말았다. 스테펜의 뒤를 이은 로마 감독 섹스투스(Sextus)는 로마 정부 재무관 마르시아누스(Marcianus)가 황제를 꼬드겨 로마의 모든 감독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아낸 일로 인해 그의 여섯 집사들과 258년에 순교했다.
로렌스(Lawrence)는 성례(침례와 주의 만찬)를 주관하고, 교회의 자산 분배를 도맡고 있는 사역자였다. 폭군 발레리안은 로렌스가 교회재산을 어디에 간수해 두었는지를 추궁했는데, 이는 교회 성도들의 재산을 갈취한 뒤 박해하기 위해서였다. 로렌스는 3일 여유를 주면 그것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곳을 만천하에 공개하겠다고 약속했다. 로렌스는 그 사이 수많은 가난한 성도들을 불러 모았고, 답변의 날이 이르자 가난한 성도들 위로 두 팔을 벌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들이 교회의 소중한 재산입니다. 주님께서 그 안에 거주하시겠다고 악속하신 이들보다 그리스도께 소중한 보석들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에 그 폭군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성난 멧돼지처럼 게거품을 물면서 소리쳤다. “장작에 불을 붙여라! 채찍으로 후려치고, 막대기로 가랑이를 찢고, 주먹으로 때려눕히고, 곤봉으로 머리통을 부숴라. 이 역적이 감히 황제를 우통해? 불에 달군 부젓가락으로 살을 쥐어틀라. 시뻘겋게 달군 쟁반들로 살을 문질러라. 가장 튼튼한 쇠사슬과 불갈퀴와 쇠격자 침대를 꺼내고 침대 위에 불을 지피라. 그리고 역적의 손발을 묶고 침대가 뜨겁게 달궈졌을 때 놈을 그 위에 올려놓고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어 구워 버려라. 오, 고문 집행자들아 일을 어설프게 했다가는 네 놈들이 그 꼴이 될 줄을 알라.” 이 명령은 즉시 그대로 실행되었다. 로렌스는 수많은 잔인한 손길에 처참하게 놀아난 뒤 벌겋게 달궈진 쇠침대에 눕혀져 순교했다.
유티카(Utica)에서는 그곳 총독의 명령에 300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불타는 석회 가마에 빙 둘러 세워졌다. 숯불 위에서 향이 살라지고 있는 접시가 준비되자 주피터에게 제물을 바치든지 가마 속에 던져지든지 택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들은 하나같이 제물 바치기를 거절하고 담대하게 그 가마 속으로 뛰어들어 질식해 죽고 말았다.
프루끄뚜오수스(Fructuosus)라는 스페인의 따라곤(Tarragon)의 감독과 그의 두 집사 아우구리우스(Augurius)와 율로기우스(Eulogius)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화형에 처해졌다. 맥시마(Maxima), 도나띨라(Donatilla), 세꾼다(Secunda), 즉 뚜부르가(Tuburga)의 세 처녀는 그들에게 주어진 쓸개즙과 식초를 들이킨 후 심하게 채찍질당하고, 효시대(梟示臺, 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아 뭇 사람들에게 경계하라고 본을 보여 주는 교수대)에서 고문을 당하고, 석회로 문질러지고, 달궈진 석쇠로 지져지고, 맹수들에게 물어뜯기고, 결국 목이 베어졌다.
9. 아우렐리안(Aurelian) 통치하의 아홉 번째 박해, A.D. 274년
이 아홉 번째 박해 때 로마 감독 펠릭스(Felix)는 A.D. 274년 로마 관구로 파견된 뒤 심술 사나운 아우렐리안에 의한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다. 그는 동년 12월 22일 참수 당했다. 또 자신의 사유지를 팔아 생긴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던 젊은 신사 아가페투스(Agapetus)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고문당한 후 로마에서 하룻길인 프래네테(Praenete) 시에서 참수 당했다. 이 통치 기간에 순교당한 이들에 관한 기록은 이들에 관한 것이 전부인데, 이는 황제가 비잔티움(Byzantium)에서 신하들에게 살해되는 바람에 박해가 일찍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타시투스(Tacitus), 프로부스(Probus), 카루스(Carus), 카르니오우스(Carnious), 누메리안(Numerian)이 왕위를 이었고, A.D. 284년 디오클레시안(Diocletian)이 황제 자리를 꿰차고 앉았다. 그는 처음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대단한 호의를 보여 주는가 싶더니, 286년에 막시미안(Maximian)과 한패가 되어 대대적인 박해를 일으키기 전부터 몇 몇 그리스도인들을 죽음에 내어주기 시작했다. 그들 가운데는 펠리시안(Felician)과 프리무스(Primus)라는 두 형제가 있었고, 마르쿠스(Marcus)와 마르셀리아누스(Marcellianus)는 기둥에 묶여 발에 못 박힌 채 주야를 매달려 있다가 창에 몸이 꿰찔려 순교했다. 조에(Zoe)는 이 순교자들을 지키던 간수의 아내였는데, 그들을 통해 회심하고서 발밑에 볏짚단이 타오르는 나무에 매달려 순교했다.
A.D. 286년에 매우 진기한 사건이 발생했다. 오로지 6,666명의 그리스도인 보병으로만 구성된 테반 군단(Theban Legion)이 전원 순교했기 때문이다. 이 군단은 모든 병사가 테비아스(Thebias)에서 자랐기에 테반 군단이라 이름 붙여졌다. 로마 제국 동편에 자리 잡고 숙영하던 그들은 부르군디(Burgundy) 반군을 대항해 자신을 도우라는 황제 막시미안의 명령을 받고서 골(Gaul, 고대 켈트 사람의 땅으로 지금의 북이탈리아, 프랑스, 벨기에 등을 포함함)을 향해 진격했다. 그들은 덕망 있는 사령관인 마우리티우스(Mauritius), 캔디두스(Candidus), 엑수페르니스(Exupernis)의 지휘 하에 알프스 산맥을 넘어 골 지방의 황제 군대와 합류했다. 그들이 당도할 즈음 막시미안은 전군이 참여하는 대대적인 희생제를 명령해 놓았고, 테반 군단 역시 충성을 선서하고 골에서 기독 신앙을 근절하는 일에 조력할 것을 맹세해야 한다고 명령했다. 이에 테반 부대는 전원 절대 거부 의사를 표시하고 희생제물을 바치지도 규정된 선서를 하지도 않았다. 이에 막시미안은 열에 한 명씩 뽑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 피비린내 나는 명령이 수행되었음에도 살아남은 이들이 여전히 꿈쩍도 하려 하지 않자 그중 매 열 번째에 해당하는 이들이 또다시 죽음에 넘겨졌다. 그러나 두 번째 잔혹한 처사에도 효과를 보지 못하자 전 군단을 몰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다른 군단 대원들이 그들을 칼로 토막냄으로써 6,666명 모두가 286년 9월 22일 한날에 순교했다.
이외에도 영국의 첫 번째 순교자 알반(Alban)과 프랑스의 아끼떼인(Acquitain)에서 그리스도를 섬기던 여인 페이뜨(Faith), 골에서 순교한 퀸틴(Quintin)과 루시안(Lucian)이 이 기간에 순교당한 주님의 거룩한 성도들이었다.
10. 디오클레시안(Diocletian) 통치하의 열 번째 박해, A.D. 303년 (1)
“순교자들의 시대(the Era of the Martyrs)”라고 일컬어지는 이 열 번째 박해는 디오클레시안의 양자인 갈레리우스(Galerius)의 증오가 한몫 단단히 거들었다. 그는 완악하기 그지없는 이교도 어머니의 부추김을 받아 횡제를 끊임없이 설득하여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려는 목적을 이루었다.
A.D. 303년 2월 23일은 테르미날리아(Terminalia)를 기념하는 날이었다. 잔인한 이교도들은 그날 기독 신앙을 뿌리째 뽑아 없애기를 원했고, 박해는 니코메디아(Nicomedia)에서 시작되었다. 그날 아침 시 관원들은 장교들과 병력을 대동하고서 교회에 들이닥쳤고, 문을 떠밀어 부수고 들어가 성경이란 성경은 모두 모아 불태워 버렸다. 이 모든 만행의 현장에는 디오클레시안과 갈레리우스가 함께했는데, 그들은 이 일로 만족하지 않고 교회 건물을 산산이 부숴 버렸다. 이후 다른 모든 교회들과 성경들도 부수고 소각하라는 칙령이 선포되었고,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모든 법적 은전(恩典)과 보호를 박탈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 즉시 순교가 뒤따랐다. 이는 한 담대한 성도가 그 포고문을 벽에서 뜯어내어 찢어 버리고 황제의 이름에 욕설을 퍼부었기 때문이다. 이교도들은 그를 붙잡아 처참히 고문한 후 산 채로 불살랐고 모든 그리스도인을 붙잡아 투옥시켰다.
오로지 “그리스도인이라는 그 이름이 이교도들을 지독히도 역겹게 만들었기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중상에 희생되었다. 수많은 가옥이 불살라지고 주님을 믿는 가족 구성원들 모두가 불길 속에서 몰살당했는가 하면, 다른 이들은 목에 돌덩이를 매달고 한데 묶여진 채 바다로 내몰렸다. 박해는 로마 제국 도처에서 10년 동안 대대적으로 지속되었기에 순교자들의 수와 만행의 방식을 일일이 열거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불가능한 일이다.
팔다리를 잡아당기는 고문대, 채찍, 서슬 퍼런 칼날 단검, 십자가 형틀, 독약 그리고 굶주림이 그리스도인들을 죽이기 위해 각지에서 사용되었고, 무고한 그리스도인들을 고문하기 위한 기구들이 궁리에 궁리를 거듭한 끝에 발명되었다. 대학살을 자행하다 스스로 지쳐 버린 몇몇 지방 총독들은 이와 같은 박해가 적절치 못하다는 주장을 황궁에 올리기에 이르렀다. 이에 사형으로부터는 한숨을 돌리게 되었으나, 대신 귀가 잘리고, 코를 째이고, 오른 쪽 눈만 도려내지고, 관절이 무참히 탈구되어 팔다리를 못 쓰게 되고, 새빨갛게 달궈진 쇳덩어리로 눈에 잘 띄는 신체 부위가 지져지는 바람에 차라리 죽는 것만 못하게 되었다.
저명한 순교자 세바스티안(Sebastian)은 골의 나본(Narbonne)에서 태어나 밀란(Milan)에서 기독교 교육을 받은 후 로마의 친위대 장교가 되었다. 그는 우상 숭배가 만연하는 가운데서도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믿음을 지켰는데, 황제는 이교도가 되기를 거절하는 그를 캠푸스 마르티우스(Campus Martius)라는 로마 근교의 벌판으로 데려가 화살로 쏴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사형 선고는 그대로 집행되었다. 그러나 시신을 땅에 묻으려던 성도들이 그에게 숨이 붙어 있는 것을 알고서 즉시 안전한 장소를 옮겨 극진히 간호했다. 세바스티안은 빠르게 회복했고, 이것은 두 번째 순교를 위한 준비였다. 외부로 돌아다닐 기력을 회복하자마자, 그는 이교도 사원으로 가고 있는 황제를 가로막고 서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저지른 잔혹한 처사들과 상식에서 벗어난 편견들을 꾸짖었다 죽은 줄 알았던 그가 난데없이 나타나는 바람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던 황제는 정신을 가다듬은 즉시 그를 황궁 근처로 끌고 가 때려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시체를 공용 하수구에 던져 넣어서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몸을 회복시키거나 땅에 묻는 일을 못하게 했다. 그러나 루시나(Lucina)라는 여성도가 기어코 시신을 하수구에서 끄집어내더니 지하 납골당인 카타콤에 안치시켰다.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신중히 숙고한 끝에 이교도 황제의 통치하에서 그리스도인을 죽이는 병역에 복무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이로써 파비우스 빅토르(Fabius Victor)의 아들 막시밀리안(Maximilian)이 첫 번째로 참수 당했다.
비투스(Vitus)는 시칠리아(Sicilia) 섬의 명가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주님을 믿으며 자랐다. 부친 훌라스(Hylas)는 이교도였는데 아들이 보모에게서 기독 신앙의 교리를 배운 것을 알아차리고서 다시 이교 신앙으로 되돌리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노력이 실패하자, 결국 A.D. 303년 6월 14일 자기 아들을 우상들에게 제물로 바쳐 버렸다.
빅토르(Victor)는 마르세유(Marseilles)의 훌륭한 가문의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밤이 되면 박해자들의 눈을 피해 자기 재산을 털어 가난한 성도들과 병자들을 도와주었다. 그러나 결국 막시미안의 포고령에 따라 붙잡혔고, 그를 묶어 거리에서 끌고 다니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가 여전히 믿음을 굽히지 않자, 막시미안은 그로 하여금 고문대 위에서 사지가 찢어지는 고통을 겪게 했다. 빅토르는 고문 중에도 두 눈을 주님 계신 하늘나라로 들어 올리고서 인내를 주시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감탄을 자아낼 만큼 조금도 흔들림 없이 고문을 견뎌 내었다. 고문하던 형 집행인들이 녹초가 돼 버리자 그는 이번엔 지하 감옥으로 옮겨졌고, 갇혀 있는 동안 알렉산더(Alexander), 펠리시안(Felician), 롱기누스(Longinus)라는 이름의 수감자들을 주님께로 인도했다. 그러나 이 일을 들은 횡제는 그 수감자들을 참수해 버렸다. 빅토르는 그 후 또다시 고문대에 눕혀져 막대기로 무자비하게 두들겨 맞고서 재수감되었다. 신앙에 관한 세 번의 심문에도 끝까지 원칙을 고수하자 이번엔 작은 제단을 들여와 그에게 그 위에 향을 피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 요구에 타오르는 분노를 감추지 못한 빅토르는 몇 발짝 앞으로 가더니 제단과 우상에게 발길질하여 한꺼번에 넘어뜨려 버렸다. 지켜보던 막시미안은 제단을 걷어찬 그 발을 당장에 잘라 버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빅토르는 제분기 사이로 던져졌고, 맷돌들에 의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으깨어졌다.
다소(Tarsus)에 근무하는 길리기아(Cilicia)의 총독 막시무스(Maximus) 앞에 노인인 타라쿠스(Tarachus)와 프로부스(Probus), 안드로니쿠스(Andronicus), 즉 3명의 그리스도인이 끌려왔다. 고문에 고문을 당해도 믿음을 부인하지 않자 마침내 사형시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원형 경기장에 끌려온 그들에게 대여섯 마리의 맹수들이 들여보내졌지만, 짐승들은 굶주렸음에도 털끝 하나 건드리려 하지 않았다. 지켜보던 사육자가 그날 3명을 죽인 큰 곰 한 마리를 들여보냈지만 고기라면 사족을 못 쓰는 이 피조물도 그들을 건드리기를 꺼렸다. 야수들로 죽이려는 계획이 물거품이 되자, 막시무스는 그들을 칼로 베어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들은 그렇게 순교했다. 이 일은 A.D. 303년 10월 11일에 일어난 일이다.
10. 디오클레시안(Diocletian) 통치하의 열 번째 박해, A.D. 303년 (2)
팔레스타인(Palestine)의 로마누스(Romanus)는 박해가 시작될 무렵 캐사리아(Caesarea) 교회의 집사였다. 그는 그의 믿음으로 인해 안디옥에서 사형을 선고받고서 채찍질당하고, 사지가 찢기고, 갈고리로 몸통이 뜯겨 나가고, 예리한 칼로 살이 도려내지고, 얼굴이 난자당하고, 얻어맞은 이빨들이 빠져 버리고, 머리카락이 뿌리째 쥐어 뜯겼다. 그 후 즉시 명령이 떨어져 A.D. 303년 11월 17일 목 졸려 죽임을 당했다.
로마의 감독 카이우스(Caius)의 질녀 수잔나(Susanna)는 황제의 가까운 친척과 결혼하라는 황제의 압력을 받았지만 눈앞의 영예를 거절하고 목 베임의 길을 택했다. 황실 시종장 도로세우스(Dorotheus)는 죄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려고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고르고니우스(Gorgonius)와 궁정의 다른 그리스도인도 합류해 복음을 전했으며, 그들은 붙잡혀 고문을 당하다가 교살 당했다. 황제의 내시 페테르(Peter)는 석쇠 위에 눕혀져 숨이 멎을 때까지 약한 불로 서서히 구워졌다.
마법사로 알려진 시프리안(Cyprian)은 안디옥 태생으로, 저스티나(Justina)라는 안디옥의 젊은 여인을 알게 되었다. 이를 알게 된 한 이교도 신사가 저스티나에게 구혼하려고 시프리안에게 손써 줄 것을 의뢰했다 얼마 안 있어 시프리안은 주님을 믿게 되었고, 시프리안의 회심은 이교도 신사에게도 영향을 끼쳐 그도 믿게 되었다. 시프리안과 저스티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었고, 그들 모두 고문으로 고통당한 뒤 목 베임을 당했다.
율라리아(Eulalia)는 견실한 명철이 돋보이는 스페인 처녀였다. 그녀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죄목으로 붙잡히자 이교도들의 신들을 거칠게 비웃으며 손가락질했다. 때문에 옆구리가 갈고리로 뜯겨졌고, 뜬 눈으로 볼 수 없도록 가슴이 불태워졌다. 그리고 A.D. 303년 12월 맹렬한 불길에 삼켜져 숨을 거두었다.
박해가 스페인에까지 이른 304년 떼라고나(Terragona)의 총독 다시안(Dacian)은 감독 발레리우스(Valerius)와 집사 빈센트(Vincent)를 잡아들여 어깨에 쇠짐을 지우고 감옥에 집어넣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을 어찌하지 못하자 발레리우스는 추방하고, 빈센트는 고문대 위에서 사지를 찢어 탈구시키고 갈고리로 살점을 뜯어냈다. 그를 석쇠 위에 눕혀 구웠을 때 석쇠 윗면의 대못들이 그의 몸통을 직통으로 뚫고 들어왔다. 이에 꿈쩍할 그가 아니었다. 죽기는커녕 믿음 또한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그는 다시 수감되어 비좁고 악취 나고 여기저기 날카로운 부싯돌과 유리 과편이 깔려 있는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304년 1월 22일, 그는 그곳에서 생을 마쳤고, 시신은 강물에 던져졌다.
아그라페(Agrape), 치오니아(Chionia), 아이레네(Irene) 세 자매는 박해가 그리스에 이르렀을 때 데살로니가(Thessalonica)에서 체포되었다. A.D. 304년 3월 25일, 그들은 화형에 처해졌고 화염 속에서 순교의 면류관을 받아썼다. 경건한 지성을 소유한 아가도(Agatho)는 카시케(Cassice), 필리파(Phillippa), 유투키아(Eutychia)와 함께 같은 시기에 순교 당했다. 마르셀리누스(Marcellinus)는 카이우스(Caius)를 뒤이어 로마 감독이 되었는데, 디오클레시안을 신으로 떠받들며 경의를 표하는 일에 강력히 반대했다는 이유로 고문을 당하고 324년 순교했다.
빅토리우스(Viclorius), 카르포포루스(Carpophorus), 세베루스(Severus), 세베리이누스(Severianus)는 친형제였다. 그들은 우상 숭배를 소리 높여 반대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납덩어리가 달린 채찍에 맞았다. 형벌이 심히 잔인하게 집행되었기에 형제들은 잔혹함을 견디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모리타니아(Mauritania)의 집사 디모데(Timothy)와 그의 아내 모라(Maura)는 박해로 인해 서로 떨어져 지낸 연고로 3주 넘게 신혼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붙잡혔을 때에야 서로를 가까이서 마주볼 수 있었고, AD. 304년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아시시움(Assisium)의 감독 사비누스(Sabinus)는 주피터에게 제물 바치기를 거부하며 그 우상을 밀쳤다는 이유로 총독 투스카니(Tuscany)의 명령에 손이 잘려 나갔다. 그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총독과 그의 가족들을 주님께로 인도했고, 그들 모두 믿음을 지키다 순교했다. 그들의 처형이 있은 직후, 사비누스 자신도 채찍질을 견디다 못해 죽음을 맞이했다. A.D. 304년 12월의 일이었다.
디오클레시안이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자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와 갈레리우스(Galerius)가 권좌를 차지했다. 이로써 제국은 제국 동편의 갈레리우스와 제국 서편의 콘스탄티우스가 쌍벽을 이루는 두 정부로 나뉘었다. 갈레리우스의 명령으로 순교당한 성도들 가운데 가장 혁혁한 이들은 다음과 같다.
줄리타(Julitta)는 루카오(Lycao) 사람으로 왕족의 후손이었다. 고문대에 눕혀져 있는 동안 그녀의 아이들은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살해되었다. 처형을 마무리 지을 때가 이르자 그녀의 양발에 끓는 역청이 부어졌고 옆구리가 갈고리로 뜯겨졌다. 그녀는 결국 목 베임을 당함으로써 순교의 고통을 끝냈다. AD. 305년 4월 16일의 일이었다.
판텔레온(Panteleon) 집안과 친분이 있던 헤르몰라우스(Hermolaus)는 함께 믿음을 지킨 판텔레온과 갈은 날 같은 방법으로 순교 당했다. 아르미나(Armina)의 총독 서기관 에우스트라티우스(Eustratius)는 붙잡혀 돌아온 몇몇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 안에서 인내하라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가 불타는 용광로에 던져졌다. 로마 제국군 고위급 장교 니칸데르(Nicander)와 마르시안(Marcian)은 참수 당했다.
나폴리(Naples) 왕국에서 대여섯 차례의 순교가 있었다. 특히 베네벤툼 감독(bishop of Beneventum) 재뉴어리즈(Januaries), 미세네(Misene)의 집사 소시우스(Sosius), 또 다른 집사 프로쿨루스(Proculus)와 페스투스(Festus) 그리고 에우투체스(Eutyches)와 아쿠티우스(Acutius)라는 두 성도와 기도서 낭독자 데시데리우스(Desiderius)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맹수들에게 던져졌지만 야수들이 건드리려 하지 않아 목 베여 죽임을 당했다.
시스키아 감독(bishop of Siscia) 퀴리누스(Quirinus)는 총독 마테니우스(Matenius) 앞으로 끌려와 이방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라는 명령을 거부했다가 목에 돌덩이를 매달고 강물에 던져졌다. 형이 집행되는 동안 퀴리누스는 물 위를 떠다녔다. 그는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을 믿으라고 강력히 권고하고서 다음과 같은 기도로 훈계를 매듭지었다. “오 전능하신 주 예수시여, 주님께서 물의 흐름을 멈추거나 사람으로 물 위를 걷도록 하시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옵니다. 주님께서는 주의 종 베드로에게 그 일을 행하셨고 여기에 모여든 사람들도 주의 능력을 제 안에서 보았나이다. 오 나의 하나님이시여, 이제 주님을 위해 이 생명을 내려놓도록 허락하옵소서.” 마지막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그는 돌덩이와 함께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A.D. 308년 6월 4일의 일이었다.
로마 감독 마르셀루스(Marcellus)는 그의 믿음으로 인해 추방당했고, 유배 생활 때의 수많은 고통들로 A.D. 310년 1월 16일 순교 당했다. 16대 알렉산드리아 감독 페테르(Peter)는 동로마제국 막시무스 시저(Maximus Caesar)의 명령으로 A.D. 311년 11월 25일 순교 당했다. 열여섯 실밖에 안된 처녀 아그네스(Agnes)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목 베임 당했고, 디오클레시안의 황후 세레네(Serene)도 동일하게 처형되었다. 감독 에라스무스(Erasmus)는 캄파니아(Campania)에서 순교 당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불어 닥친 열 차례 초기 박해 기사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