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칭의교리에 대한 타협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금 우리는 다음과 같은 연합운동을 살펴보면서 개혁자들이 파문 당하고 목숨을 잃는 위협 속에서도 소리 높여 외쳤던 복음의 진수가 위협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1)복음주의와 로마카톨릭의 연합
1994년 복음주의권은 “복음주의 신자들과 로마카톨릭 신자들의 연합: 3천년시대의 기독교선교”란 일치 문서를 내놓았다. 여기에 서명한 복음주의자들로는 찰스 콜슨, 제임스 패커, 오스 기니스, 마크 놀, 빌 브라이트를 포함한 12명이었다. 이 문서에서 선언하기를 “복음주의자와 로마카톨릭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를 주와 구주로 고백하는 동일한 믿음을 나누는 형제자매들이며 그리스도 때문에 믿음으로 말미암는 은혜로 의롭게 된 자들”이라고 분명히 선언했다<14>. 그들은 서로를 개종시키는 일과 양을 도적질하는 일 등을 정죄했다. 그들은 사회 문화적 사업 및 선교사업에 공동으로 협력하고 보조를 같이 하기로 했다. 이 문서에서 칭의교리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기인한 믿음을 통한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고 믿는다. 살아 있는 믿음은 사랑 안에서 역동적이며 그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그러나 카톨릭교회와 프로테스탄트 사이를 분리시켰던 ‘칭의’교리와는 다르다. 문제의 핵심은 “오직”이라는 단어에 있다. 모든 차이점들은 ‘오직’이라는 단어가 은혜, 믿음, 그리스도, 성경에 포함시키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 문제는 이것이다: “오직”이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빼버린 “믿음”이 복음의 진정한 본질인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만일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진술이 성경에 명백하게 있고, 그것이 구원에 본질적이라면, ‘오직 믿음’을 정죄한 로마카톨릭은 기독교의 본질적인 진리를 거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콜슨과 패커같은 복음주의자들이 말하듯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이신칭의 교리”는 21세기의 문화 및 선교사역에는 중대한 문제가 아니며, 카톨릭과 기독교는 조금 다른 교단 정도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정당한가? 복음의 본질보다는 양보하고 타협하더라도 협력과 화해와 일치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단 말인가? 만약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이 복음의 본질이라면 이는 매우 심각한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음’이 복음의 본질이라면 이러한 연합은 분명 복음에 대한 중대한 배반이 아닐 수 없다.
(2)루터교와 로마카톨릭의 연합
미국 루터교와 로마카톨릭은 6년간의 토론 끝에 1983년에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라는 제목으로 공동문서를 발간했다. 그들은 이신칭의 교리를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 서로간의 차이점들이 존재하지만 실제적으로 그들 모두 하나의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들은 칭의에 대해 “버림받음과 불의로부터의 은총과 하나님 면전에서의 의로의 변환(transition)을 의미하는 칭의는 완전히 하나님의 사역이며, 칭의로 말미암아 우리는 의롭다고 선언되어지며 실제로 의로워진다. 그러므로 칭의는 법적인 의제가 아니며, 하나님은 의롭다 하심으로 그가 약속하신 것에 영향을 행사하신다. 그는 죄를 용서하시며 우리를 정말로 의롭게 만드시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불의한 자를 하나님 면전에서 즉시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법정적 선언행위를 칭의라고 보았던 루터의 칭의개념을 스스로 포기하고 말았다.
(3)성공회와 로마카톨릭의 연합
[제2차 성공회-로마카톨릭 교회 국제위원회]가 개최되어 3년간의 토의를 거쳐 1987년에 합의문서를 발간했는데 칭의교리를 성화의 정황 속에서 논의하고 있다. 그들은 성경적 근거로 고전6:11에서 찾는다. “너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하심을 얻었느니라.” 그러나 문맥상 거룩함과 의롭다함을 얻었다고 할 때(이것은 분명히 완료시제다!), 점진적인 성화가 아니라, 법적인 지위(신분)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할 뿐 아니라 우리를 실제로 의롭게 만드신다”고 말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의와 우리의 선행이 그리스도의 의와 그리스도의 믿음과 혼합되어 버리고 말았다. 급진 카톨릭 신학자인 한스 큉 역시 믿음을 단순한 동의로 생각하고 구원에 있어서 행위와 성사의 준행이 반드시 필요한 일이며, 믿음과 세례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 문서는 면죄부와 같은 사안에 대해서는 그냥 외면하고 있다.
6. 칭의교리에 대한 현대 수정주의 흐름
현대에 들어와서 칭의교리를 어떻게 해서든지 수정해보려는 시도들이 많이 있어왔다. 그 중에 중요한 두 가지 흐름만 지적하고자 한다.
(1)칭의에 대한 실존주의적 해석-맥그라스의 견해
성공회 복음주의자인 알리스터 맥그라스(Alister E. McGrath)는 바울에 의해 사용된 칭의 개념(concept)과 교회에 의해 형성된 칭의 교리(doctrine)을 구분시킨다. 그에 의하면 칭의개념이나 사상은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를 묘사하는 것인데 반해, 신학자들에 의해 발전된 칭의교리는 프로테스탄트뿐만 아니라 로마카톨릭신학에도 역시 의미를 부여했는데, 그것은 성경적 의미와는 아주 다른 의미-즉, 칭의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수립되는 수단--로 발전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자신의 저서인 [이신칭의의 현대적 의미](Justification by Faith: What it means to Us Today?, 1988)에서 그는 이신칭의의 근본적 성경사상을 16세기의 언어가 아니라 현 세대의 필요에 맞게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신칭의가 변혁의 경험을 의미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즉, “칭의는 우리를 변화시키며 우리를 변화시키는 역동적 능력을 제공하는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부여하며, 칭의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성전 삼으사 영주하신다”고 말한다. 그러나 맥그라스는 이신칭의 교리의 중요성을 실존적, 윤리적, 경험적, 윤리적 측면으로 설명하고 있다. 칭의가 소외된 인간의 진실한 실존의 회복이라는 그의 주장이 과연 적절한가? 그는 자신의 주장을 성경의 구절에 근거하여 설명하지 않고 있으며, 실존주의와 경험주의로 설명하고 있으며, 칭의의 법정적 개념보다는 관계적인 면에 더 비중을 둠으로써 분명 진리를 약화시키고 있다.
(2)칭의에 대한 민족주의적 해석-라이트의 견해
복음주의 신학자 중에 영향력 있는 신약학자인 라이트(N.T.Wright)는 기독교나 천주교 모두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했다고 보는 흐름을 선도하고 있다. 라이트에 의하면 바울의 칭의교리는 1세기 유대교의 세계에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바울 시대의 유대교는 선행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얻으려고 했다는 시각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다. 율법은 언약 안에 들어가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언약 안에 머무르는 방법이라고 한 것이다. 즉, 은혜에 대한 응답이지 의를 얻기 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1977년에 저술어 신학계에 큰 영향을 준 샌더스(E.P.Sanders)의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주의](Paul and Palestinian Judaism)의 결론에서 출발하고 있다. 샌더스의 주장은 1세기 유대교는 ‘행위’의 종교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샌더스의 말 자체에서 볼 때도 언약 안에 머무르는 방법이라는 말속에서 행위의 공로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바울에 의하면 언약에 들어가는 일과 언약에 머무는 것 모두 모두 은혜로 말미암지 공로가 아니라고 했다.(갈3:3참조) 그러나 샌더스가 인용한 많은 고대 유대문헌 속에서도 구원할만한 가치가 ‘경건’의 행위에 있다고 하는 구절들을 찾을 수 있다. 즉, 샌더스는 유대교에 대한 편견을 교정하려고 하다가 구원과 의를 얻으려고 노력하는 모든 시도가 인간 본연의 본성임을 망각하고 단지 서구세계의 특징이라고 성급하게 단정하게 되었다. 사실 하나님의 일에 조력하거나 하나님의 인정을 얻기 위해 인간의 선행을 구하는 것은 세계 어느 곳에나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는 인간의 본성이 아닌가?. 존 스토트는 샌더스의 글을 읽고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나는 아마 그가 인간의 마음에 대해서 아는 것보다 팔레스타인 유대교주의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계속 자문하였다.”(존 스토트의 로마서 주석, IVP) 행위에 대한 바울의 강조점은 그 어떤 선행도, 심지어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위치를 갖도록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가능하지 않지만 만약 율법을 완벽히 지켰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바울이 대적하는 것은 공로신학이다. 즉, 행위는 칭의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칭의는 하나님께서 ‘불경건하고 사악한’ 사람들을 향해 거저 주시는 은혜의 행동이다. 믿음에 행위를 첨가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갈라디아 교회에게 바울은 “무릇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갈3:10)고 선언했다.
(3)이신칭의 교리를 현대적 감각으로 수정하는 것이 초래하는 위험성
그러면 이렇게 이신칭의 교리를 현대적 감각에 맞게 수정하는 것이 왜 위험한가? 그렇게 개혁자들의 주장을 거부하려고 몸부림치는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가? 그것이 진정 복음을 전하려는 충정에서 비롯되었는가? 여기에 사탄의 깊은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① 죄에 대한 부적절한 견해의 위험성
현대의 모든 신학이 죄에 대한 심각성을 고려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선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영혼들을 세우고자 했던 개혁자들의 몸부림이 서구적 편견으로 무시될 수 있는가? 죄에 대한 피상적인 태도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다. 죄의 심각성과 그 비참한 결과와 심판주 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서야할 인간의 운명에 대한 강조를 꺼려하고 회피하는 현대의 경향은 다분히 인본주의사상에서 나왔음이 분명하다.
② 하나님의 용납과 은총을 얻기 위한 인간 자신의 노력을 신뢰하는 인간성에 대한 경시의 위험
사도는 갈라디아서 3:3에서 은혜로 시작했다가 행위를 의존하는 율법주의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종교적 헌신과 열심을 통한 자아만족과 인간의 성취에 대한 교만은 모든 세대 모든 타락한 인간의 전형적인 본성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③ 이신칭의를 구원의 정황보다 교회의 정황으로 제시하려는 위험
이신칭의에 대한 현대적 수정흐름은 하나님 앞에서의 죄인된 인간신분을 강조하는 대신에 근본적으로 교회 안에서 죄인의 용납을 가능하게 한다. 즉, 칭의 사상을 개인의 구원문제와는 상관이 없고 오직 공동체 안에서의 하나님의 선언이라고 주장함으로써(라이트) 결국 카톨릭이 환영하게 되었다. 성경은 공동체에서 소외된 인간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배반하여 거역함으로 하나님에게서 소외된 인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싫어하는 이런 경향은 어디서 나왔단 말인가? 성경이 말하는 칭의는 공동체 회원됨에 대한 것이 아니라, 분명 하나님 앞에서의 개인적인 신분에 대해 말하고 있다.
④ 이신칭의를 법정적 측면보다 관계적 측면으로 제시하는 위험
이것은 칭의를 언약적 구조로 보는 현대적 인식에서 출발하는 가장 위험한 시각이다. 칭의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강조함으로써 창조주 하나님과 그에 반역한 피조물 사이에 존재하는 심판자-죄인의 상황을 모호하게 하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칭의는 언제나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형벌과 지옥의 실재성에 대한 두려운 사법권을 전제하고 있다. 이신칭의는 우리 위에 놓여진 하나님의 진노가 옮겨지는 것과 관계되는 것이다.
⑤ 새롭게 정의된 이신칭의의 신분에 그리스도의 생애의 전가된 의가 자리할 곳이 없는 위험
라이트를 비롯한 카톨릭은 그리스도의 의가 신자에게 전가된 것(옮겨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고전1:30에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의로 말하고 있으며, 성경은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는 것으로 칭의를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를 강조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의 의의 중요성이 약해지고 인간의 의지가 더 강조되고 만다. 사탄은 어떻게 하든지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의 의지와 인간의 행위를 부각시키고 그런 것들에 가치를 부여하게 함으로써 죄인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풍성함을 보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⑥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복음적 중요성을 무시하는 위험
만약 칭의가 언약공동체의 회원 자격으로 묘사된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의 화목제사적 본질은 더 이상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되지 못할 것이다. 현대 신학자들은 우리 죄를 위해 그리스도께 보복적 형벌을 당하셨다는 것을 인정하기 꺼려한다. 즉, 그들은 죄속함을 강조할 뿐, 하나님의 진노를 만족시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기 싫어한다. 그들은 화목이 아니라 대속만을 믿으려고 한다.
⑦ 이신칭의는 더 이상 ‘교회가 서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는 조항’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위험
라이트를 비롯한 다수 현대신학자들은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가 교회의 존립을 결정하는 문제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라이트는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이 칭의 교리를 믿음으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주장한다. 사실 우리의 믿음이 교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음과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를 믿음이 서로 엄밀히 구분할 수 있을까? 만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지 않고서 그리스도를 올바로 믿을 수 있을까?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가 분명히 선포되지 않고서 올바른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을까? ‘오직 믿음’이 없이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 수 있는가?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그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어디서부터 나오고 있는가? 그 생각이 성경에서 나오는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교만을 가장한 마귀의 속임수에서 나온다. ‘오직 믿음’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온갖 미신과 위선과 편견과 오해의 늪이 떨어지고 말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주의’란 말은 ‘복음전도’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언제부턴가 전도하는 일에는 교회가 구호를 높이면서 정작 전해야 할 구주의 복음에 대해서는 점점 무지해져가고 있지 않는가? 교회가 복음의 본질을 탐구하거나 혹은 사수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인 적이 언제인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역사적 기독교의 믿음과 교리를 거부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최근에 이신칭의 교리가 위험에 처한 상황을 두고서 복음주의의 위기라고 평가를 내리고 신실하게 대처하려는 몸부림들이 있는 것은 참으로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복음주의 대변자로 잘 알려진 R.C.Sproul의 견해에도 위험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칭의에 관한 복음주의의 견해를 매우 잘 설명했는데, “칭의가 법적인 면에서 볼 때 인간의 본성의 변화를 의미하진 않지만 그것은 분명히 본성의 변화와 관계되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칭의에 대한 경계선을 넘어가고 있다. 칭의는 필연적으로 본성의 변화를 수반한다. 그러나 ‘관계되어 있다’는 표현은 오해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왜냐면 믿음 그 자체는 믿는 대상을 제외하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본성의 변화’라는 개념은 칭의나 칭의에 필요한 오직 믿음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 ‘본성을 변화시키는 은총’에 대해서는 칭의 이후에 다루어야 한다. 필자는 적어도 칭의에 있어서 만큼은 그리스도의 의 외에는 다른 모든 가치를 제외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믿음 그 자체도 믿음의 대상인 그리스도의 의를 벗어난 고유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칭의는 본성의 변화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면 칭의에 필요한 ‘오직 믿음’ 그 자체는 본성의 변화가 아닌가 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칭의 역시 본성의 변화와 아무런 관계가 없듯이, 칭의에 오직 필요한 믿음 역시 본성의 변화와 관계하고 있지 않다고 분명히 말해야 한다. 믿음은 본성의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죄인의 정직한 반응이다. 그런 의미에서 회개를 믿음 뒤에 둠으로써 루터보다 더욱 철저하게 선을 그은 칼빈의 입장에 더욱 동의하는 바이다. 물론 스프룰이 고의적으로 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믿음을 본성의 변화와 혼동하는 것은 로마 카톨릭의 ‘주입된 의’에 기울어지는 것이며 행위에 가치를 부여하는 경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칭의와 성화에 대한 명백한 구별은 지켜져야 한다. 아무튼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 하심에 대한 진정한 개혁주의적인 의미가 약화되고 있다. 요지는 이것이다: 칭의 그 자체는 중생이나 성화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하나님은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인들의 내적인 변화를 통해서 죄인을 의롭다고 하지 않으신다. 즉, “그리스도+내적 변화”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으로”이다. 도덕률폐기론 때문에 이 교리를 수정하거나 타협하려는 모든 시도를 조심해야 한다. 또한 이것을 수정하고 인간의 의지나 노력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복음전도’에 유용하다는 이유 때문에 이신칭의 교리를 수정하거나 타협해서는 안 된다. 또한 화해와 화목(카톨릭과 혹은 알미니안주의자들과)을 명분으로 이신칭의 교리를 수정하고 변경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시듯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의 진술로 동일하게 순결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진리를 타협하면서까지 화목과 연합을 추구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신다. 혹자는 교회의 연합을 위해 이신칭의 교리의 예봉을 무디게 하는데, 그것은 분명 옳지 않다. 진리의 예봉을 희생함으로 얻어지는 화해와 연합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오히려 그것은 진정한 복음의 퇴보를 낳을 것이다. 아무리 동기가 옳다고 하더라도 진리를 왜곡하는 것은 결코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타협함으로 외적으로 많은 것을 얻을지라도 그것은 실제로 모든 것을 잃는 것이며, 사탄의 승리로 귀결되고 말 것이다.
-----<각주>-----
<14>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로 영접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라는 선언은 진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러한 진술은 매우 위험하며 오용될 여지가 다분하다. 왜냐면 몰몬교도들은 예수님을 주와 구주로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기독교는 그들을 이단으로 정죄한다. 왜냐면 그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카톨릭이 예수님을 주와 구주로 영접한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은 문제가 있다. 문제는 그 ‘믿음’이 참된 믿음인가 하는 문제이다. 무엇이 참된 믿음이냐에 대해서 카톨릭과 기독교는 결코 건너지 못할 강을 마주보고 대치하고 있다는 현실을 직시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