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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이해하기

왜 하나님이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을 허용하시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Gary Bates , 이종헌 역, Creation ex nihilo, Vol. 35(2013), No. 1, pp. 42-44

 

 

우리들 대부분은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도 우리가 죽어야 할 운명이라는 것을 껄끄럽게 생각한다. 우리 모두가 결국에는 죽을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매우 우울한 전망이다. 그리고 나는 개인적인 결정적 경험에 의해, 이것이 때때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까운 시일 안에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 중의 아무도 죽음을 좋아하지 않는다. 인생을 꽉 차게 살았건 너무 젊을 때죽었건 우리는 그들이 떠나는 것을 몹시 슬퍼한다. 상실의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아마도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인 ?라는 것을 깊이 생각하게 한다. ‘먼지뿐이 아닌 것으로 될 것이라면 우리가 왜 여기에 있는가?’ 그리고, ‘왜 나인가?’ 혹은 아마도 왜 우리인가?’ 내 경험으로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도 이 질문과 싸우고 있다. 우리는 사랑하시고 전능하신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이 왜 그분의 귀한 자녀들이 고통을 겪고, 때로는 번민하다가 결국에는 마지막에 이르게 하시는지 의아해 할 것이다.

 

사실상 그것은 아름다운 그림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나 단순히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무서운 국제적인 재앙을 보고서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비극적인 경우가 있다. 그러나 죽음의 의미에 대한 이러한 투쟁은 기독교인을 포함하여 사람들이 죽음을 (종종 자기가 진화론적인 생각에 젖어있다는 것을 인식하지도 못하는 채!) 진화론적으로 이해할 때 상황은 더 악화된다. 그럴 경우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개념을 포함하여 약간의 틀린 개념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게 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만족스러운 답을 제공할 수 없다.

 

직설적인 해답은 창세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성경은 진화론이 주는 잘못된 이해가 아니라 올바른 역사의 성경적 이해를 제공한다. 더욱이,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의 비참한 처지를 아시고 그에 관해 실제적으로 무언가를 행하셨다는 것을 실감할 때 우리는 커다란 기쁨을 찾을 수 있다.

 

 

진화: 죽음은 단순히 자연적인 것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어느 정도까지는 세상에 관해 진화론적인 오랜 시간의 개념에 영향을 받고 있다. , 모든 생물은 죽음의 곡조에 맞춰 춤을 추었고 수백만년 동안 고통을 겪어 왔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교육, 뉴스, 및 심지어 어린이들의 문학에까지 끊임없이 우리의 삶을 침범하고 있다. 오랜 시간과 죽음이라는 주제는 일종의 교의화 되어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예를 들면 진화론 천문학자인 칼 세이건은 그가 진행하는 매우 유명한 TV 과학 시리즈인 코스모스중의 한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진화의 비밀은 시간과 죽음입니다. 첫 번째 세포로부터 우리에 이르기까지 끊어지지 않은 실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관점은 찰스 다윈의 유명한 책 종의 기원에 관하여에서 보급시킨 것을 단순하게 반향하는 것일 뿐이다. 다윈은 이렇게 썼다. “따라서, 자연의 전쟁으로부터, 기근과 죽음으로부터,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고상한 목적인 더 고등한 동물의 생산이 직접 이어집니다.”

 

다윈의 이론에 대한 그의 동기에 관하여 많은 것들이 쓰여졌다. 그는 자기 자녀 세 명이 일찍 죽은 것으로 고통을 받았다. 그리고 많은 주석가들은 그의 사랑하는 10살짜리 딸 애니의 죽음이 궁극적으로 그가 가졌던 기독교 신앙의 흔적마저 파괴해 버렸다고 말한다. 그는 교회 출석을 그만 두었는데, 이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고 난 후에 그렇게 하는 것을 내가 본 것과 같은 것이다. 다윈은 세상이 한없이 오래 되었으며 최초부터 죽음이 존재해 왔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하나님이 죽음과 고통과 잔인한 괴물의 창시자가 된다. 다윈에게 있어서는 삶과 죽음에 대한 능력을 가지신 분(계시록 1:18)이 아니라 죽음이 왕이 되었다.

 

우리는 이 죽음이 왕이다라는 주제를, 유행하는 영화에서도 본다. 커다란 영향을 준 공상과학 작가 H. G. 웰즈(1866-1946)다윈의 불독인 토마스 헉슬리의 밑에서 훈련받은 맹렬한 진화론자였다. 2005년에 스티픈 스필버그(Stephen Spielberg)가 리메이크 한 H. G. 웰즈의 공상과학이야기 세상의 전쟁’(The War of the Worlds)은 죽음과 투쟁에 관한 진화론적인 교훈에 진정으로 머물러 있다. 그러나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웰즈에게서 반기독교적인 개념을 발견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그 이야기는 (진화론적인 잣대로) 나이가 많고, 따라서 기술적으로 진보된 화성인이 인류를 멸절시킬 목적으로 지구를 공격한다는 착상을 도입한다. 웰즈는 이들 우등한 외계인이 사람을 어떻게 보았는지에 대해 이렇게 썼다: “19세기의 마지막 해에는 사람과 같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사람보다 더 위대한 지성적 존재가 세상을 날카롭게 그리고 자세히 관찰하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이 여러 가지 관심사로 바쁠 때, 그들을 자세히 조사하고 연구했다. 마치 한 방울의 물속에서 떼를 지어 이동하고 번성하는 덧없는 생물을 현미경으로 자세히 조사하듯이 그렇게 세밀하게 사람들을 조사했다.”(강조는 내가 한 것이다.)

 

짧게 말해서, 인간이란 덜 진화된 존재로서 더 우등한 종에 의해 멸종될 존재일 뿐이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인간들은 면역이 되어 있는 기본적인 지구상의 질병에 걸려서 화성인이 죽기 때문에 인간이 살아남는다. (웰즈의 영화를 각색한) 그 영화는 이렇게 말한다. “수십억의 죽음의 대가로 인간은 면역 즉, 이 행성의 무한한 생명체 중에서 살아남을 그의 권리를 얻었다. 따라서 어떤 사람도 헛되이 살거나 헛되이 죽지 않는다.” 주인공은 시간과 죽음즉 진화였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에서는 실제로 우리가 헛되이 죽는다. 개인에게는 죽음을 넘어서서 미래의 소망이 아무것도 없다.

 

 

죽음에 관해 대조되는 두 개의 역사

 

진화론적인 관점에 있어서 죽음은 좋은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여기 있으면서 처음에 왜 우리가 여기에 있게 되었는가를 논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진과 쓰나미에 의한 것과 같은 자연 세상에서의 죽음이나 혹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가한 잔학행위에 의한 죽음이든지 우리 주변에 있는 죽음을 볼 때,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그러한 일들이 자연적인우연한 일이며 하나님은 멀리 계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러나 그런 생각에 빠지지 말라.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성경적으로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2:2).

 

그러한 일들을 성경의 렌즈를 통해 볼 때, 이들 나쁜 일들은 이 창조세계에 무언가 비극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강하게 기억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태초에 하나님은 그분이 마치신 창조를 매우 좋다고 말씀하신다(창세기 1:31). 진화와 대조적으로, 성경은 죽음을 궁극적으로 멸망되어야 할 인간의 적으로 설명한다(고린도전서 15:26). 죽음이 하나님의 원래의 인간 창조의 일부가 아니라면 그것이 자연적이거나 좋은것일 수 없다. 성경은 아담과 하와를 통한 인류의, 하나님에 대한 거절 이전에는 죽음과 고통이 없었다고 매우 분명히 말한다(로마서 5:12).

 

 

그것은 죄다!

 

그것이 인간의 동료 인간에 대한 잔학행위이든지 아니면 자연 재해의 멈출 수 없는 날뛰기이든지 근본적인 원인은 같다. 그것은 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 로마서 6:23). 창세기에, 사람 뿐 아니라 모든 창조세계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저주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창세기 3:17). 이것이 신약성경에서 강조되어 있다. 로마서 8:20-22은 말한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런데 이 신약 성경 구절이 말하는 소망은 무엇인가? 그것은 더 이상 죽음이 없는 새로운, 회복된 선한창조를 말한다(계시록 21:4). 무언가를 회복한다는 것은 원래의 조건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왜 우리 주변에 죽음이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줄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강조해 준다. 창세기 역사의 적절한 기초 위에 지어진, 죽음에 관한 올바른 관점을 가지고 있으면, “내가 죽으면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그리고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왜 죽음과 고통이 있는가?” 등과 같은 인생의 큰 문제를 이해할 수 있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에게 답을 해 줄 수 있다.

 

 

신자들에게 - 이제 죽음은 선한 일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것은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분과 영원한 교제를 갖기 위함이었다. 짧게 말해서,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죄가 우리를 망쳤기 때문에 영원히 산다는 것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또한 우리는 그분의 창조의 정점에 있었으며, 지배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창조에 대해 큰 책임이 있었다(창세기 1:28). 우리의 행동이 그분의 창조 전체를 망쳤다.

 

이것이 복음, 즉 전능하신 예수님의 바로 그 희생이 장엄하게 보여지는 곳이다. 하나님이 죽음의 저주를 제정하셨을 때, 그것은 사실상 인간이 이 타락한 세상에서 구출되고 그들의 창조주와 화해할 수 있는 길을 제공하신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창조를 망쳐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창조주 자신이 그분의 영광을 떠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행동에 대한 치욕을 겪으셨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일이 아닌가?

 

코스모스 프로그램의 한 편에서 칼 세이건 역시 이렇게 말했다. “어딘가에 어떤 믿기지 않는 일이 알려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가 얼마나 옳았던가. 그는 실제로 그러한 큰 질문을 숙고하고 있었지만, 슬프게도 죽음에 대한 진화론적인 관점 때문에, 단순하고도 간단한 복음의 진리에 눈이 멀었다. 확실히 그는 무신론자로 죽었으며, 비극적이게도 지금은 불신자로서 둘째 사망을 겪게 될 것이다(계시록 2:11; 20:6; 20:14; 21:8).

 

 

왜 내가 아닌가?’

 

예수님은 하나님이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비를 내리게 하신다고 말씀하셨다(마태복음 5:45). 신자나 불신자 모두 죄로 저주받은 행성을 동일하게 공유하고 있으며, 그 영향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신자에 대한 차이점은 하나님이 사실상 그들의 조건과 이 세상에서의 모든 죽음과 고통에 대해 무언가를 행하셨다는 것이다. 그분이 예수님을 보내셨다!(요한복음 3:16).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우리에게 나타내신 방법이다. 은혜란 공로 없이 얻은 호의라고 되어 있다. 얼마나 맞는 말인가!

 

따라서, (죽음에 대해-역주) “왜 나인가?”라고 묻는 대신에 아마도 우리는 왜 내가 아닌가?”라고 물어야 할 것이다. 끔찍한 죽음의 유산에 관하여 하나님이 진정으로 무언가를 행하셨다는 것을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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