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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판의 모든 글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선교하시는 김광락 목사님의 글입니다.

2009.12.28 23:20

이신칭의2-본론(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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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본 론

 

먼저, 칭의교리에 대한 프로테스탄트와 로마 카톨릭의 차이점을 서로 비교해보자.

 

(1)프로테스탄트

 

1. 칭의(稱義)는 의롭다고 간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2. 칭의는 그리스도의 의(義)의 전가(轉嫁)로 이루어진다.

3.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를 받으실 만하게 하며, 하나님 보시기에 기쁘시게 한다.

4. 인간은 오직 믿음을 통하여 칭의 된다.

5. 하나님께서는 아직 구원받지 못한 신자를 칭의 하신다.

6. 칭의는 그리스도의 인성 속에 있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무죄선언이다.

7. 죄인은 하나님의 전가된 의에 의해서만 칭의 된다.

8. 칭의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마치 의인처럼 취급하게 하신다.

9. 신자는 대속자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 의롭게 드러나셨기 때문에 의롭다고 선포된다.

10. 칭의는 인간의 자리에 대신 서신 예수께서 의롭다는 사실에 대한 선언이다.

11. 칭의는 하나님께서 신자의 심령에 중생과 성화(聖化)를 가져오게 하신다.

12. 죄는 칭의와 중생 후에도 인간의 본성에 여전히 남는다.

13. 신자는 하나님의 가능케 하는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선행에 대해서 어떠한 공덕도 주장할 수 없다. 선행은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의 중보를 통해서만 받으실 만하며,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는 신자의 선행에서 나타나는 모든 인류의 행함의 부족을 충족시킨다.

 

(2)로마 카톨릭

 

1. 칭의는 의롭다고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2. 칭의는 은혜의 유입(주입)으로 이루어진다.

3. 신자 속에 있는 성화케 하는 은혜는 신자를 하나님께 받으실 만하게 만든다.

4. 인간은 자신의 실질적인 의에 의해서 칭의 된다.

5. 하나님께서는 오직 중생한 자만을 칭의 하신다.

6. 칭의는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중생 시키는 행위이다.

7. 죄인은 전가된 의에 의해서만 칭의 될 수 없고, 그의 심령 속에 부어진 의에 의해서만 칭의 될 수 있다.

8. 칭의는 죄인이 실제로 의롭게 만들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9. 신자는 은혜의 성령께서 신자를 의롭게 만드셨기 때문에 의롭다고 선포된다.

10. 칭의는 인간 자신 속에 있는 실재성에 대한 선언이다.

11. 중생케 하는 은혜는 하나님께서 신자를 의롭게 하도록 한다.

12. 성화케 하는 은혜는 신자 속에 있는 것과 함께 연합하여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선행을 행한다.

14. 성화케 하는 은혜는 신자 속에 있는 것과 함께 연합하여 신자를 하나님께 받으실 만하게 만든다.

 

이렇게 비교해보면 서로의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혹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문제는 사실 강조점의 차이가 아니다<9>. 차이는 강조점의 차이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근본 인식의 차이다. 진리는 그 성격상 두 가지가 있을 수 없다. 진리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리고 진리에 대한 서술 역시 상호 충돌해서는 안 된다. 진리와 진리에 대한 서술 역시 구별되어야 하지만 분리될 수는 없다. 진리는 우리로 하여금 어느 한쪽의 진술을 버리도록 강요하고 있다. 이제 서로의 입장을 자세히 설명해보자.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카톨릭과 기독교의 교리적 차이점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각각의 상이한 주장이 서로 화해할 수는 없다. 분명 하나는 참된 복음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복음이다.

 

첫째, 죄인을 의롭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칭의에 있어서 ‘오직 믿음으로’냐? 다른 행위가 필요한가?

둘째, 하나님의 의가 믿는 신자들에게 전가되는가 아니면 주입되는가?

 

 

1. 칭의교리에 대한 복음적 프로테스탄트의 견해<10>

개혁자들은 새로운 교리를 창안한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오래도록 말하고 있는 옛 진리를 재발견한 것이다.

 

(1) 칭의(justification)란 믿는 죄인들을 의롭다고 간주하시는 하나님의 법정적 선언이다.

칭의의 내용에는 죄용서 하심과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imputation)하심이다. 칭의는 하나님 앞에서의 올바른 신분과 지위에 대한 하나님의 선포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의로운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의로운 사람으로 선언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의’는 주입되거나 내재된 의가 아니라 ‘전가된 의’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은 성경에서 여러 가지로 증명되고 있다.

①“그의 의로 여기신다”는 동사는 법적 선언이다.

②구속이라는 단어는 ‘덮는다’는 어원을 가지고 있다.

③칭의에 대한 그림언어로서 ‘옷’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창3, 눅15)

④범죄에 대한 결과로서 사람은 ‘헐벗음을 깨닫고 부끄러워’ 했다는 사실이다.

⑤그리스도의 옷입음(롬13:14)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전가된 의라는 것을 보여준다.

⑥언약의 대표성 원리는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된 것을 입증한다.

⑦구약의 희생제사제도는 ‘전가의 원리’를 충분히 증명한다. (제물에게 안수함)

⑧고엘제도는 대속의 성격을 잘 설명하고 있다.

⑨그리스도의 희생제사가 단번에 완성하셨기 때문에 ‘법정적 선언의 의미’는 성경적이다.

 

(2)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소유하게 된 이 법적 위치는 완전히 그리스도 구속사역의 결과이다.

칭의는 우리의 의로운 어떤 행동(행위)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죄가 그리스도에게 ‘전가’(위임)되고, 그리스도의 흠 없는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에 근거하고 의롭다고 선언된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아들은 일체의 허물도 없는 전혀 무죄한 분이지만 우리의 불의함으로 인해 부끄러움과 욕을 친히 담당하시고 그 대신 우리에게는 순결로 옷 입혀 주셨다”고 말했으며, 루터는 “주 예수여, 당신은 나의 의이시며, 나는 당신의 죄가 되었습니다. 당신은 내 것을 당신 것으로 취하셨으며, 당신의 것을 내게 주셨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아닌 모습을 취하셨으며, 내게 나의 것이 아닌 당신의 모습을 주셨습니다.”라고 말했다.

 

(3)개혁자들은 또한 죄인들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칭의의 근거는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이며, 믿음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을 통해서 얻어지는 은총이다.

 

(4)개혁자들이 칭의에 있어서 선한 행위가 아무런 공헌을 할 수 없음을 강조했지만, 그들은 선행이 신자의 생애에 있어서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를 잘 보여주었다.

즉, 신자들의 선한 행위는 공로적인 것이 아니라, 칭의의 결과적인 열매(증거)다. 그러한 행위는 결코 구원에 공헌하지 못하며, 심판의 날에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 칼빈은 “성자들이 하는 행위는 어느 하나라도 그 자체로 볼 때 공정한 보상으로서 수치를 받아야 할뿐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종이 평생 한 일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선한 일을 볼 때도 부패한 냄새를 맡을 수 있다”고 말했다. 신자들의 칭의 이후 선행에 의해 주어지는 상급조차 ‘공로’에 의한 보상이 아니라 은혜다. 우리는 우리의 할 일을 다 한 후에 단지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5)개혁자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에 의해 인정되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인의 확신은 자신의 능력이나 확신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데서 생겨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보는 카톨릭은 칭의의 근거 혹은 수단을 칭의를 얻으려는 인간 자신의 행위에 두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속임수’나 ‘경건치 못한 착각’이라고 여긴다.

 

 

2. 칭의교리에 대한 로마카톨릭의 입장

지금의 로마카톨릭이 칭의교리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수정한 적이 있었는가? 16세기 이후로 한번도 없었다. 로마카톨릭이 16세기 트렌트 종교회의(The Council of Trent)<11>의 선언이래 지금까지 한번도 철회하거나 수정한 적이 없었다. 로마카톨릭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함정이 있다. 첫째, 그들은 ‘오직’(sola)이라는 단어를 빼버린다. “오직”이란 단어 때문에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개혁주의가 갈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카톨릭은 ‘오직 믿음’이라는 단어가 성경에 전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개혁자들의 주장은 ‘창안된 교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나중에 살펴보게 되겠지만 얼마나 성경에 대해 무지한지를 스스로 드러내는 무식의 소치에 불과하다. 둘째, 그들은 칭의를 단회적/법정적 선언이 아니라, 점진적 ‘과정’으로 본다. 즉, 지금 즉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심판의 날에 선포될 마지막 선언에서 끝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칭의’의 법정적 성격을 부정함으로써 칭의가 하나님의 은혜에 협력해야 하는 신자의 행위에 달린 문제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지금 즉시 의롭다 함을 얻는다. 셋째, 그들은 ‘오직 믿음’이란 교리를 가르치는 자들에게 저주와 파문을 선언했다. 구체적으로 칭의에 대한 그들의 교리는 다음과 같이 세부적으로 서술된다.

 

(1)로마카톨릭은 칭의가 죄인의 내성을 변하게 만드는 성령의 사역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칭의 그 자체가 우리 내부에서 아무런 일을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칭의는 우리의 신분, 지위에 대한 하나님의 법정적 선포행위다. 로마카톨릭은 칭의와 성화를 혼동함으로써 선한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종교의 문을 모든 사람들에게 활짝 열어 놓고 있는 것이다.

 

(2)트렌트 공의회는 신자에게 전가되는 ‘그리스도의 독립된 의’라고 루터가 칭했던 자신의 외부로부터 오는 그 의(the righteousness)에 기초하여 죄인이 의롭다고 선언되어지는 종교개혁자들의 입장을 정죄하였다.

그들은 칭의가 ‘전가된 의’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카톨릭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오는 하나님의 의를 말하고 있다 할지라도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의 공로가 신자에게 적용된다는 것은 부인한다. 결과적으로 로마카톨릭은 신자의 칭의가 오직 그리스도의 사역의 충분함에 기초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의로워지기 위해서는 인간의 행위와 선행의 중요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전가 교리’를 부인하는 것이 위험한 이유는 그리스도의 의를 믿는 믿음만으로는 칭의에 충분하지 못하며 그 믿음에 ‘적절한 행위’가 더해져야만 비로소 온전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함으로써 결국 그리스도의 공로가 죄인들에게 충분하지 못하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죄인들로 하여금 더욱 절망하게 하거나 혹은 자기 의지로 칭의를 얻을 수 있다고 하는 헛된 망상에 사로잡히게 만들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의 입장이 전가된 의인데 반해서 카톨릭의 입장은 주입된 의를 강조한다. 그래서 ‘오직’이라는 말을 생략한다. 또한 ‘믿음에 의한’ 즉, 칭의의 수단으로서 믿음이 아니라 세례와 성사를 가르친다. 세례와 고해성사를 통해 의가 주입되고, 선행을 통해 의가 증가된다는 것이다. 카톨릭은 믿음은 칭의의 도구가 아니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믿음과 칭의가 상실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분명 여기서 카톨릭은 칭의의 수단과 근거를 혼동하고 있으며, 믿음은 단지 출발에 불과하다고 가르침으로써 행위에 의한 구원이라는 다른 종교를 제시하고 있다. 로마카톨릭은 칭의가 믿음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의가 내적으로 주입된다고 가르침으로서 칭의가 믿음에 의한 것이라고 인정하지만 그리스도의 의의 주입이 우리의 칭의를 즉각적으로 완성하지 않기 때문에 (세례와 고해성사를 통해 완성되어야 하며) 따라서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트렌트 공의회에서 교회 법규 제 11조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오직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의해서나 단지 죄의 사면에 의해서만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하거나 우리를 의롭다 하는 은혜만이 오직 하나님의 선한 뜻이라고 하면 그는 저주받을지니라”고 단정하고 있다. 신학적인 논제를 던졌던 개혁자들은 ‘오직 칭의’만이 하나님의 선한 뜻의 전부라고 가르치지 않았지만 이러한 카톨릭의 결정과 공포를 보면서 분명 카톨릭은 바른 복음을 거부하고 있다고 단정하게 된 것이다. 칼빈은 카톨릭의 이런 공식적 결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의롭다 하는 것은 오직 믿음뿐이지만 독자적인 믿음이 의롭다 하는 것은 아니다. 마치 땅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 오직 태양의 열만은 아닌 것과 같다. 왜냐하면 태양열은 언제나 빛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생의 전체 은혜를 믿음과 떼어놓지 않지만 의당 의롭게 하는 능력과 기능을 전적으로 ‘오직 믿음’에게 돌린다. 그러나 이 트렌트 교부들은 우리를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을 저주하고 있다. 이 바울 덕택에 우리는 사람의 의가 죄 용서에 있다는 정의를 가질 수 있는데도 말이다”

 

(3)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의지는 협동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카톨릭 요리문답서(1994)는 칭의에 대한 믿음의 장소를 묘사할 때 트렌트 공의회와 보조를 같이 한다<12>.

 

(4)로마카톨릭에서 칭의가 취득되는 참된 수단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가 아니라 세례성사를 통해서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칭의가 승인되는 통로와 수단은 세례성사를 통해서라고 주장한다. 칭의는 ‘세례 안에서 수여되는 것’이며, 세례는 우리를 하나님의 의에 합치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카톨릭의 영향력과 비중을 필수적인 것으로 내세운다. 즉, 그리스도의 자리를 교회가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면 카톨릭 교회가 성사를 집행하는 주체이고, 또 성사가 칭의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수단이라면 교회가 구원을 주는 주체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모든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며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시14:3) 고 말한다. 따라서 성사는 믿음으로 이미 받은 은혜의 보증이요 증거일 뿐 칭의에는 전혀 관여할 것이 없다.

 

(5)소위 ‘고해성사’라는 것이 칭의와 관계 있다고 주장한다.

카톨릭은 칭의의 도구(칭의를 얻는 수단)가 믿음이 아니라 ‘세례’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세례 이후에 파멸에 이르는 범죄를 행함으로 세례적 은혜<13>를 상실한 자들을 위해 제정된 것으로서 고해성사는 그들로 하여금 회심하게 하며, 칭의의 은혜를 회복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고해는 회개하고 고백하며 죄를 용서받기 위해 로마카톨릭 사제에게 가야하며, 이것은 죄를 속하기 위해 사람이 반드시 행하여야 하는 것으로 주장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로마카톨릭교회에 완전히 의존적이며 종속적인 상태에 처하게 만들었다. 요리문답서는 “로마카톨릭교회와 화해하는 것은 곧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과 결코 분리되어질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참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자리를 강탈하고 있다. 교회는 죄인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가 될 수 없다. 죄인들에게 의의 복음을 전함으로 중매자가 될 수 있어도, 죄인들에게 의를 수여하는 중보자는 될 수 없다.

 

(6)요리문답서가 면죄부, 연옥, 그리고 공적(공로)의 보고(the treasury of merit)와 같은 다른 비성경적인 주제들에 대해 다루는 것 역시 고해라는 주제 아래서이다.

“공적(공로)의 보고에는 하나님 앞에서 그 자치가 무한하며 심오하며 순결한 마리아의 선행과 기도들, 성자들의 기도와 선행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신자들 혹은 성자들의 선행이 공적으로 언급한 적이 한번도 없다. 개혁자들은 선행이 칭의의 열매(fruit)요 표지(signs)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카톨릭 요리문답은 아직까지도 면죄부의 효과를 인정하고 있다.(요리문답서, 331,333쪽 참조) 즉, 요리문답서가 말로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공적을 언급하지만 실제론 죄를 위한 충분한 만족이나 완전한 만족이 십자가상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트렌트 공의회에서 선언한 것 중에 두 문장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회개한 죄인은 칭의의 은총을 통해 죄책을 용서받게 되었기 때문에 영원한 징벌에서 놓여 이 세상에서나 연옥에서 일시적인 처벌을 당할 필요 없이 하늘 나라에 갈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거든 누구나 파문케 하라” “얻은 의를 선행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보존하고 더욱 향상시켜 나갈 필요가 없고, 선행은 다만 얻은 의의 열매와 표적일 뿐 의를 향상시키는 행위가 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거든 누구나 파문케 하라” 분명히 카톨릭은 ‘오직 믿음’을 전하는 개혁자 그룹을 정죄했다. 그리고 여전히 믿음만이 아니라 믿음과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주장함으로써 결국 은혜를 은혜 되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렸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11:6)

 

(7)사람이 얻은 칭의가 상실할 가능성 때문에 결코 구원의 확신(assurance)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가운데 안식을 얻었던 개혁자들의 확신을 ‘불경건한 신뢰’라고 맹렬하게 비판했으며 복음의 이해가 없는 자들이라고 비판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복음 안에서 구원의 참 소망을 얻고 안식하며 확신 가운데 살았던 사도들과 많은 성도들을 비판한 셈이다. 결국, 칭의에 대한 로마카톨릭의 입장은 철저하게 개인 자신과 로마카톨릭의 사제들에 절대 의존적이다. 로마카톨릭은 칭의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라고 말은 하지만, 그것은 또한  인간의 행위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인간의 공로와도 관계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로마카톨릭교회에 의해 세례를 통하여 처음 시행되는 것이며, 고해를 통하여 다시 갱신되어지는 것이다. 로마카톨릭교회는 자신들이 믿는 교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하나, 사실은 인간의 교만을 자랑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장 교묘하게 가리우고 있는 것이다.

 

(8)칭의에 있어서 믿음만이 아니라 믿음과 행위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칭의를 얻고 유지하며 향상시켜나가는 일에 행위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고 여기시는 분이시며(롬4:4-6), 바울도 칭의에 대해서 분명히 말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의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3:8-9)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3:26-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2:8,9) ‘믿음으로’ 앞에 ‘오직’이라는 말을 넣어 보라. 더욱 의미가 분명하게 살아나지 않는가? 그런데 이것이 어째서 루터가 창작한 것이 된단 말인가?

 

-----<각주>-----

<9>도날드 G. 블러쉬는 개신교와 카톨릭의 차이를 단지 강조점의 차이로 설명하면서 변증법적으로 서로를 이해하고자 했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변증법적 이해는 개혁자들과 카톨릭 둘 다 싸잡아서 비판하는 것이므로 진정한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블러쉬는 말하기를 “종교개혁신학에서 하나님의 칭의는 지배적 동기였던 반면, 카톨릭 사고에서는 강조점이 변화와 인간의 성화에 있었다. 기독교의 이 두 가지 유형 사이에는 절대적 이분법이란 없다는 사실이 인식되어져야 한다. 왜냐면 각각은 모두 하나님의 은총을 위한 자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톨릭과 개신교의 교의학에서 이 두 가지는 동일하게 강조되지 않았다.” 블러쉬가 지적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구원과 분리시키는 것과 그리스도인의 삶을 우리 구원의 기초나 근거로 삼으려는 오류를 피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고 말한 것은 옳았다. 그러나 개혁자들의 주장을 변증법적으로 이해함으로써 통합을 꾀하는 것은 개혁자들의 주장이 당시 시대적 한계상황에 묶여 있는 이른바 ‘교리적 공룡’이었다는 말이 되며, 결국 카톨릭이나 개혁자 모두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진리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개혁자들을 단지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대적 희생자로 몰아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블러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강조한 것은 매우 적절한 것이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의 근거가 되는 ‘오직 믿음’의 가치를 충분히 강조하지 못한 것은 매우 아쉽다.

<10>필립 입슨, [칭의론 논쟁](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2001), 제 6 장 [칭의교리와 복음적인 프로테스탄트의 입장] 참조

<11>트렌트 공의회는 루터파의 교리를 다루기 위해서 소집된 것으로 1545년 12월에서 1563년 12월까지 간헐적으로 열렸으며 1547년 1월 13일에 개회된 공의회 사역의 첫 시기인 제 4 차 회기에서 칭의교리에 대한 법령이 최종적으로 낭독되었고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이에 앞서 초안을 작성하기 위한 6개월 동안의 긴 논쟁과 토론이 이루어졌다. 이 공의회에서는 루터의 이신칭의교리를 가장 중요한 의제로 간주하였다. 그 결과 로마카톨릭의 공의회 역사상 칭의 교리에 대한 최종 선언에 있어서 가장 공들인 법령이 만들어졌는데, 모두 16장으로 제시되었고, 교회법의 관습에 따라 오류의 신봉자들을 파문하는 일이 뒤따랐다. 이 법령에는 칭의 교리에 대한 33가지 오류들을 제시하였고 고발하고 있다. 제1부(1-9장)는 ‘최초의 칭의’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이 최초 칭의는 세례와 관계되어 있다. 제2부(10-13장)는 ‘두 번째 칭의’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칭의가 진보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제3부(14-16장)는 일상생활의 사소한 죄에 반하는 죽음에 이르는 치명적인 죄로 말미암아 사람이 칭의의 은혜에서 떨어져 나갈 수 있음과, 그것은 고해성사를 통해 다시 회복되어지는 상태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리고 최종 결론으로, 칭의교리에 대한 공의회의 교훈을 ‘신실하고 확실하게’ 수용하지 않는 그 사람은 결코 ‘의로워질 수 없다’고 끝맺고 있다. 그리고 ‘오직 은혜’ 혹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프로테스탄트의 칭의 교리를 수용하는 자는 누구든지 교회에서 파문되고 영원한 지옥형벌의 무서운 저주에 처하게 된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 법령은 1564년 로마교황에 의해 승인되었고, 이때부터 지금까지 로마카톨릭은 공식적으로 칭의교리문제를 재론한 적은 한번도 없다.

<12>자유의지에 대해서는 R.C.스프룰의 [자유의지와 믿음](생명의 말씀사)을 읽어보기 바란다.

<13>카톨릭은 칭의의 은혜가 세례의 행위를 통해서 최초로 사람의 내부에 주입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죄를 범하면 이 은혜를 소멸되는데, 그때 고해를 통해서 칭의의 은혜가 다시 회복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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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부록① - 창궐하는 신비주의에 대한 경고 honey 2009.12.23 1606
140 교리 49. 종말론 - 종말론 정리, 천년왕국 honey 2009.12.23 2053
139 교리 48. 종말론 - 우주적 종말론-재림(2) honey 2009.12.23 1741
138 교리 47. 종말론 - 우주적 종말론-재림(1) honey 2009.12.19 1802
137 교리 46. 종말론 - 개인적 종말론: 죽음 honey 2009.12.19 13970
136 교리 45. 교회론 - 교회의 거룩한 의식(2)-성찬 honey 2009.12.17 1588
135 교리 44. 교회론 - 교회의 거룩한 의식(1)-세례 honey 2009.12.17 1725
134 교리 43. 교회론 - 개혁교회 봉사론 honey 2009.12.08 1741
133 교리 42. 교회론 - 개혁교회 제직론 honey 2009.12.05 2352
132 교리 41. 교회론 - 교회의 조직과 직무 honey 2009.12.05 1642
131 교리 40. 교회론 - 교회의 기능 honey 2009.11.26 3459
130 교리 39. 교회론 - 참 교회의 표지 honey 2009.11.26 1928
129 교리 38. 교회론 - 교회란 무엇인가? honey 2009.11.24 1786
128 교리 37. 구원론 - 성화, 견인, 영화 honey 2009.11.19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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