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기독교와 십자가의 도
열린말씀 컴퍼런스, 열린말씀, 2009년 8월 17일 초판 발행, pp. 237, 12000원
(2009년 11월 28일 읽음)
4. 파워기독교와 물질
한성윤(나성남포교회 담임목사)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돈을 바라보기
- 구약에는 우리가 보듯이 부자들이 등장하고 또 부자들이 부를 누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증거로 등장한다. 하나님 말씀을 잘 지키면 이 땅에서 부해지고 건장하고 장수할 것이라는 약속이 등장한다.
- 구약을 오늘날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해버리는 것과 같다. 따라서 구약의 내용을 적용하려면 그 약속들이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고 성취되었는가를 살피고 현재 우리의 삶에서 성경 말씀을 들어야 한다.
- 우리가 구약의 약속들을 적용할 때 대부분 '하나님이 주시는 이 땅에서의 복'에 집중하다보니까 말 그대로 복 줄 분은 생각도 안하는데 김칫국부터 마신 꼴이 되고 말았다. 심지어 우리가 복의 근원이라고 부르는 아브라함조차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약속한 가나안에서 영원한 도성을 바라보며 나그네처럼 살았다고 하는데(히 11:9-16 참조), 우리는 아브라함을 부자의 표본이며 복 받는 모범처럼 보고 있다면 뭔가 중요한 사실을 놓친 것은 아닐까?
- 구약의 재물이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복을 보여주는 표상이었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이 재물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 나라의 상징으로 나타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예수가 바로 우리의 재산이요 돈이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부요하다고 말한다.
* 판단의 기준 - 돈이냐 하나님이냐
-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돈이 있느냐 없느냐로 판단하면서 돈에게 판단의 자리를 내어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우리 판단의 기준이라고 고백해야 한다. 예를 들어 백화점에서 아내와 함께 사고 싶은 물건을 발견했을 때 가격을 물어보니 너무 비싸다. 나와 아내의 결정은 "사지 말자"였다. 이유는 비싸기 때문이다. 아마 가격이 낮았다면 구입했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실까 하는 생각이나 성경이 말하는 삶의 원리는 끼어들 틈이 없다. 돈이 결정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무서운 사탄의 전략이다. 있으면 사고 없으면 참는 것이 마치 절약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돈이 판단의 기준이 되는 상황이다. 우리가 가진 것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아느냐를 물으시는 것이다.
* 청부와 청빈 그리고 자발적 가난
- 재물을 거론하면서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눅 16:9)는 예수님의 비유를 놓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재물은 맘몬이고 불의는 불법을 행하는 모습을 뜻한다. 결국 불법으로 모은 재산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불의한 재물이라는 번역도 가능하다. 이 경우 재물 자체가 세상에 속한 재물을 뜻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말은 세상의 재물을 써서 친구를 사귀라는 말이다. 즉 세상에서 그 재물을 써라. 영원한 처소를 위해 불법적이고 불의한 돈을 써야 한다고 말한다. 영원을 준비하려면 세상의 돈은 세상에서 다 쓰라는 것이다.
* 돈, 어떻게 대할 것인가? - 돈 버리기
<돈 버리는 방법>
- 돈의 힘을 빼기 위해 우리는 돈의 흐름이 약하고 어려운 곳, 즉 사회의 약자에게 돈을 주어야 한다. 재투자와 저축으로 더 큰 힘을 만들려고 하지 말고 베풀고 주는 것이다.
* 악순환에 대한 대안 - 돈이 바른 방향으로 흐르게 하는 일
- 우리가 가진 돈은 물론 노동의 대가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부요만을 추구한다면 그 돈이 우리를 소유하게 될 것이다. 오히려 믿는 자는 하나님을 우리의 힘으로 붙들고 가진 것을 베풀어 가난해지므로 세상의 경제원칙을 부끄럽게 하고 세상을 당황하게 해야 한다. 이 일을 가까운 곳에서 지금 시작해야 한다. 우리의 신앙공동체부터 이 일을 실현해야 한다. 그리고 그 물꼬가 세상을 향해 트이게 해야 한다. 세상을 변화시키겠다고 이름과 슬로건을 내걸기보다는 우리가 가진 돈의 힘을 빼는 훈련을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한다. 믿음의 분량대로 어려운 자를 위해 내놓은 예수를 믿는 자의 삶이 곧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자신을 회복하며 사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