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길
현대의 복음주의가 6일 창조에 관하여 타협을 하는 혼란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가르치고자 하는 사람들은 고립되어 있다.
Ken Ham 글, 이종헌 역, Creation ex nihilo Vol. 19, No. 2
어떤 목사님 사모님이 나에게 전화를 해서, 그녀의 말대로 표현하자면, ''창세기에서 비본질적인 요소''에 관한 우리의 견해를 가지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이간시키지'' 말라고 항변을 했다. 그녀는, 그녀의 남편이 자기 교회 사람들을 우리 세미나에 보내서 창조에 관한 메시지를 듣게 하고 싶어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우리는 문자 그대로의 6일과 젊은 지구 등을 주장하기 때문에, 진화에 반대하는 우리의 견해에는 동의하더라도 우리의 세미나를 지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녀는 외쳤다! ''단지 본질적인 요소만 의견이 일치하고 이러한 분열 없이 함께 일할 수는 없을까요?''
''본질적인 요소란 무엇인가요?'', 내가 물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계속해서 말한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거듭난다면, 그가 창세기의 내용을 당신이 믿듯이 믿고 있지 않은 경우라도 그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지 않으세요?''
내가 대답하기를,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거듭났다면, 내가 창세기에 대해 믿는 바와 똑 같이 그들이 믿고 있지 않더라도, 그들은 분명히 주님과 함께 영생을 누릴 것입니다. 그러자 그녀는 불쑥 이렇게 말했다. ''보세요, 당신이 창세기에 대해 믿고 있는 것은 본질적인 요소가 아닌 것입니다 - 믿어야 할 본질적인 내용은 예수님과 부활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그때 나는 매우 중요한 질문을 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나요?''
''우리의 죄들을 위해서요,'' 라고 그녀가 대답했다.
내가 말하기를; ''''죄''라는 단어의 뜻이 무엇인지 설명해 보세요.''
그녀의 대답; ''음, 죄란 하나님에 대한 반항입니다.''
내가 계속하기를;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 이 반항의 기원은 무엇입니까?''
그녀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이렇게 외쳤습니다. ''당신이 무엇을 의도하는지 알겠어요!''
나의 대답; ''예, 물론이지요. 창세기에 기록된 바대로 문자 그대로의 사람과 뱀, 과일 등이 있었던 실제의 동산에서 역사적인 사건이 없었다면 죄에 대한 기원은 없다는 것을 당신으로 하여금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나는 계속했다. ''사람들이 거듭나서 천국에 가게 되더라도, 궁극적으로 "원죄"를 믿는 것이 본질적인 요소인가요 아닌가요?''
요즈음 교회에서는 모든 사람들의 신앙에 관용을 베푸는 것이 점점 강조되고 있습니다. - 우리는 불일치 되는 모든 영역을 묻어버리고 같이 일할 것을, 교회의 지도자들이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요청 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매력적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그것은 단지 사소한 교리상의 차이를 치워놓으라는 요청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중요하고 근본적인 영역에 있어서 교회가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심하게 멀어지고 있다고 항의하는 것에 대항하는 데에 이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의 창세기에 입각한 몇 가지 교리를 일견하더라도 이것이 기독교인들에게 ''사소한 논점''이라는 생각을 쉽게 잠재울 수 있습니다.
십자가 처형과 부활.(고전 15:21-22) 예수님(''마지막 아담'')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전적인 이유는 (문자 그대로의) 첫 번째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성(罪性)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육체적인) 죽음으로부터 일어나심으로, 성경에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26절)라고 말한 (육체적) 죽음을 정복하셨다. 긴-시대 이론이 옳다면, 하나님은 수십억년 동안의 죽음과 고통을 인정하신 것이 된다. 그렇다면 죽음이 어떻게 해서 ''원수''가 될 수 있는가? 또한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가 거기에 없어서는 안될 요소라면 어떻게 해서 하나님이 그분의 창조를 ''심히 좋다''(창 1:31)고 하실 수 있었겠는가?
결혼(막 10:6-9) 예수님은 - 수백만년 이후가 아니라 창조의 시작으로부터 - 문자 그대로의 아담과 하와의 창조를 인용하신다.
회복(행 3:21; 계 21:4, 22:3) 긴 지질학적 시대의 관점에서는, 죽음과 고통이 죽 있어왔다. 최초의 장소에 죄가 없고 죽음이 없는 세상이 결코 없었다면 모든 사물은 그런 세상으로 다시 회복될 수 없다.
성경의 신뢰성. 최고의 히브리 학자들은, 창세기가 정확히 우리 창조과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을 전달하기 위해 쓰여졌다는 데에 만장일치이다.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들을 수천년간 잘못 인도했다는 이 비난을 거부했던 그들이 아닌가?
오늘날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창조과학 운동과, 문자 그대로의 6일 및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죽음이 없었다(따라서 지구는 젊다) 등등의 견해에 반하는 말을 거리낌없이 한다. 그들은 성경적인 논점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창조과학자들을 편협하고, 쓸 데 없이 ''불화를 일으키는 사람들''이라고 치부한다.
슬프게도, 이런 공격 중의 몇 가지는 스스로 공언하기를 ''진화론에 반대하는 창조주의자''라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예를 들어, Hugh Ross 박사는 진보적인 창조주의자로서, ''빅뱅''을 믿고, 노아 시대의 홍수가 국지적인 것이었으며, 죄가 들어오기 전에 수백만년 동안 죽음과 피흘림이 있었고, 아담과 하와 이전에 인간을 닮은 다양한 ''혼이 없는'' 존재가 있어서 자기들의 시체를 묻었고 동굴 벽화를 그렸다고 믿고 있다. ''창조와 시간/Creation and Time''이라는 그의 책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1세기의 교회가 할례 때문에 분열되었던 것처럼, 요즘의 세기에는 창조의 연대에 관한 논점이 교회를 분열시키고 있음을 본다. 할례가 복음을 왜곡시키고 복음주의를 방해하였듯이 요즘에도 젊은-지구 창조론이 그러하다.''
그런데, Answers in Genesis(역주: 호주 창조과학회)와 같은 사역이 급격히 성장하는 주요 이유 중의 하나는 사람들이 거기서 복음주의의 유효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은 역설적이다. 수년간 창조과학 사역을 진행하면서, 하나님이 창세기에 관한 우리의 견해를 사용하셨기 때문에 예수님께 돌아온 여러 계층의 사람들로부터 수없이 많은 편지를 받아왔다. 그 중에는, 그들이 (죄를 짓기 전에 죽음과 고통이 있었다는 긴-시대의 개념을 성경에 끼워 맞추려는 기독교인들에게) 들었던 해답이, 성경을 왜곡하여 현존하는 통설에 끼워 맞추려는 시시한 시도였기 때문에, 이미 기독교를 포기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교회 안에서건 밖에서건, 창세기의 창조를 믿는 사람들의 평판을 나쁘게 하는 유용한 방법 중의 하나는, 오늘날 그들에게 달라붙어 있는 ''근본주의자''라는 딱지를 이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한때는 기독교의 ''근본''을 믿었던 사람들에게 붙여진 명예로운 용어였다. 그런데 대중매체가 ''이슬람 근본주의자''와 테러행위 및 광신과 연합함으로써, 이제는 그것이 극단주의 및 편협된 신앙을 의미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는 의미가 이렇게 바뀌어 버렸으므로, 차라리 나는 역사의 하나님이 그분의 말씀인 성경 안에 진리를 말씀하셨다는 것을 믿는 ''계시 신봉자''로 불리고 싶다.
심지어 카톨릭 교회에서도 그런 활동에 동참하고 있다. 1994년의 AP 연합통신 보고서는 이렇게 시작된다: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에 관한 새로운 바티칸 문서는 근본주의자의 접근방법이 왜곡되고, 위험하고 인종차별로 이끌 수 있다고 비난한다.'' 교황직속의 성경위원회가 쓴 그 문서는 이렇게 말한다. ''근본주의는 실질적으로 사람들을 일종의 지적 자살로 유도한다. … 근본주의자적 접근은, 성경이 인생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이미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에게 흥미를 돋구므로 위험하다.''
문자적 창세기에 대한 또 다른 ''공격''으로, ''창세기: 살아있는 대화''라는 Bill Moyers의 프로그램이 1996년 10월에 미국 공영 TV에서 방영되었다. 이 쇼는 하나님의 속성과 동기에 대해 경멸적인 판단을 담고 있는데, 창세기를 실제의 역사라고 믿지 않는 유대인과 이슬람인, 자유주의 기독교인 및 무신론 주석자들의 의견을 특색으로 삼고 있다.
Moyers 연재물에 관한 Newsweek 기사는 요즘의 기독교 세계에 대해 재미있는 논평을 했다. ''종파에 대한 충성이 사라지고 있다. 한때는 불경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던 이론을 신학교에서 퍼뜨리고 있다. … 미국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하나님의 권위는 거의 절대성을 잃고 있다.''
성경적 창조 운동은 문자 그대로의 창세기를 주장한다. 성경의 절대성을 고수하며, 많은 것들이 문제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교회나 속세의 반응에 상관하지 않는다. 압도적으로 명백한 그러한 분야에서 일단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 없이 주장된 지구의 나이와 같이) 세속적인 이론에 근거하여 재해석되기 시작하면, 성경의 나머지 부분도 재해석하는 문이 열리게 되어, 궁극적으로 모든 진리가 상대적인 것처럼 보이게 된다.
최근에 나의 동료가 영국의 복음주의 기독교를 주도하는 연설가 중의 하나로 여겨지는 매우 영향력 있는 목사에게, 문자 그대로의 창세기를 반대하는 그의 입장에 도전하는 편지를 썼다.
그 목사는 대답하기를, ''유감스럽게도 나는 창세기 1-3장에서 문자 그대로의 해석을 하지 않는 사람들의 논점에 있어서 성경의 권위가 문제가 된다고 하는 당신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 나에게 있어서 그 논점은 태고의 지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 Masterplan[창세기를 취급하는 그의 책]에서 내가 고의적으로 모호하게 표현한 것은, 이 난처한 논점에 관하여 분열된 의견에 복음주의적인 일치를 유지하고자 하는 바램을 반영한 것이다.''
슬픈 것은,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관점을 세속적인 견해와 타협하며, 따라서 ''일치''라는 미명 하에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훼손하려고 준비하고 있는 동안에, 비 기독교인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World 잡지가 보도하기를 Bill Moyers의 창세기 프로그램에 나온 이슬람 교수는 ''그의 믿음을 타협하기를 거절한다. 이슬람은 최소한 그들의 교의적 통일성을 유지한다. 유대교는 끝없는 토론 때문에 곤경에 빠진 것으로 보이며, 기독교는 변증적이며 혼란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서구 문명에는, 기독교와 세상 사이의 단절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절대적인 권위를 고집하는 문자적 창조론자와, 교회의 나머지와 세상을 합한 사람들 사이에 깊게 갈라진 큰 틈이 존재한다!
분열은 항상 나쁜 것인가? 예수님은 누가복음 12:51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하나님 말씀의 빛을 어두운 세상에 비추고자 할 때는 약간의 분열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문자적 창조론자가 오늘날의 보수적인 교회에 있어서까지도 소수파로 여겨진다는 것이 정말로 문제가 되는가?
예수님은 마태복음 13-14장의 구원에 관한 문맥 속에서, 넓은 길로 열려있는 넓은 문은 멸망으로 인도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것을 선호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그의 제자들에게, 소수의 사람들이 찾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과 좁은 길을 택하라고 가르치셨다. 이 중대하고 근본적인 논점에 관하여 교회 내의 많은 사람들이 세상과의 멸망적인 타협 속으로 황급히 돌진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나는 종종 그 말씀을 생각한다. 성경의 진리에 따르는 것은 항상 ''좁은 길''이다.
당신은 진정 어느 길에 서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