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창조과학

오늘:
76
어제:
266
전체:
1,933,581
조회 수 2285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수정 삭제

하나님이 육체를 갖고 계시는가?

창세기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면 ...

Russell Grigg 글, 이종헌 역, Creation ex nihilo Vol. 27 No. 2

 

예술적인 걸작품?

미켈란젤로는 ''아담의 창조''라는 작품에서 성경적인 의인화를 극단적으로 이용하여, 하나님을 족장의 형상으로 묘사했다. 이 작품은 1508년에서 1512년까지 로마의 바티칸에 있는 시스틴 성당의 천장에 미켈란젤로가 그린 33개의 그림 중 가운데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표현해야만 하는가에 대해 기독교인들은 일반적으로 의문을 가질 것이다.

 

최근에 나는 성경협회의 번역자 한 사람과 이야기 할 기회가 있었는데, 거기서 우연히 문자적 창세기에 대한 개념을 언급하게 되었다. 그는 즉시 내게 반문했다. "의인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의인화란 무엇인가? 그리고 사람들은 문자적 창세기에 대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나님과 사람의 특성

 

의인화(anthropomorphisms = <그리스어 anthropos = 사람> + <morphe = 형상>)란 하나님을 인간의 특성과 형상 혹은 인격을 가진 분으로 묘사하는 비유적 표현이다. 그것은 상징적인 표현으로써, 하나님의 속성, 능력, 및 활동을 우리가 실질적으로 알 수 있게 해 준다.

예를 들면 창세기에 다음과 같은 말들이 나온다;

  ''하나님이 가라사대''(창 1:3).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성대를 가지셨다는 것을 의미할까?

  ''하나님의 보시기에''(창 1:4). 하나님이 눈동자와 망막이 있는 눈을 가지셨는가?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창 3:8). 하나님이 다리를 가지셨는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 3:21). 하나님이 손을 가지셨는가?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창 8:21). 하나님이 코와 후각기관을 가지고 계신가?

만약에 우리가 창세기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러한 표현들도 역시 문자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면, 창세기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우리의 주장을 손상시키는 것이 아닌가?

 

저자의 의도

 

이들 질문에 대답하려면 먼저 저자의 의도를 생각해야 한다. 창세기는 하나님의 성령의 지시를 따라 모세가 썼다. 모세의 목적은 이런 경우에 하나님이 하신 일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하려는 것이지, 하나님에 대한 어떤 물리적인 묘사를 하려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위의 예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행동을 그에 상응하는 인간의 행동으로 묘사했다. 즉, 음성, 시력, 교제, 일하심, 만족.

하나님이 창조를 말씀하심으로 그것들이 존재하게 되는 것과 관련하여(예를 들면, 창조의 첫째날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고 하신 것과, 또한 2일에서 6일까지 각각 그와 유사한 형태로 말씀하심),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표현하심으로 창조의 사건이 일어나게 하셨다. 하나님은 이것을 행하실 때, 창조는 우연한 임의의 과정의 결과 같은 것이 아니라, 그분의 발의권 하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명백히 하는 명령의 방식을 택하셨다.

반복되는 구절인 ''그대로 되니라''는 우리들에게, 각각의 창조명령이 즉각적으로 성취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한, 관련된 날이 끝나기 전에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하나님의 객관적인 평가가 있었다. 이것은 분명히, 긴 시대 혹은 점진적인 창조와 유신론적 진화론을 반박한다. 그것은 또한 명백히, ''그리고 그것이 좋았더라''라고 단순하게 언급하는 기록보다 더 어조가 강하다. 덧붙여진 ''하나님의 보시기에''라는 말은 신뢰성 있는 평결을 내릴 수 있는, 자격 있는 권위자에 의한 조심스런 평가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행동을 이런 방식으로 묘사하는 데 있어서 모세의 의도는 분명하다.

창세기 2장과 3장에서는 하나님이 아담과 대화를 나누고 그 다음에 하와와 대화하시는 내용이 나온다. 하나님은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다가, 아담과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시고, 그 다음에는 아담과 하와와 함께 담화하신다. 이 모든 것에 대해 우리는 뭐라고 해야 할까? 어떻게 인간이, 그것도 그들이 죄를 저지른 이후에 하나님을 볼 수 있을까? 죄를 짓지 않은 상태에서라도 마찬가지이다.

 

신의 현현(顯現)

 

하나님은 그분이 원하시기만 하면 그분 자신을 어느 장소에서든, 완전하신 형태를 감하셔서 명백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내 보이실 수 있다. 그러한 일시적인 방문을 신의 현현이라고 한다(theophany = <그리스어 theos = 신> + <phaino = 빛나다>). 이것이 에덴 동산에서 일어난 일이다.

구약의 다른 경우에 이런 식으로 나타난 사람을 종종 ''여호와의 천사''라고 부른다. 때로는 이분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2격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로 언급하기도 한다.

실제로, 그러한 현시는 성육신 때에 하나님의 아들이 완전한 육신의 모습으로 오실 것에 대한 예표였다.

 

역사적으로 사실이며 정확했다

 

그래서 이것이 창세기의 문자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답 :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과 상세에 대한 기록을 주셨다. 기록된 사건은 우화 또는 신학적인 시가 아니며, 또한 수세기가 지난 다음에 작성한 캠프파이어 이야기도 아니고, 역사적으로 사실이며 정확한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모든 신약의 저자들이 항상 그것들을 그렇게 받아들인다.

모세의 목적은 이들 역사적인 사건과 상세들을 기록하는 것이다. 이것을 행함에 있어서, 그는 필요한 경우에 하나님에 관하여 비유적 표현을 사용하여 - 마치 그분이 사람인 것처럼 - 그가 전달하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한다.

흥미롭게도, 교회 지도자들은 일찍이 AD 4세기에 이 문제를 다루었었는데, 그러한 기록들은 ''하나님께 어울리는''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예를 들면, 성 요한 크리소스톰(대략 347-407)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And the Lord God planted a garden eastward in Eden"라는 말을 들을 때, "창설하시고//planted" 라는 단어를 하나님께 어울리게 이해하라: 즉, 그분은 명령만 했을 뿐인데, 그 이후에 나오는 단어들을 보고, 성경에서 지정한 바로 그 장소에 정확하게 동산이 만들어졌다고 믿어라.'' 즉, 창조된 것들에 대해, 그와 거의 동시대 사람이었던 성 바질 대제(329-379)가 말한 것처럼 평범한 의미를 취하라: ''정말로, 성경에서 상식을 수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물이 물이 아니라, 식물 안에서 또는 물고기 안에서 보게 되는 다른 성질로 여긴다. 참으로 엉뚱한 소망이다. 그리고 파충류와 야생동물의 성질을 자기들의 풍유에 알맞게 바꿔버린다. 마치 잠 속에서의 환상이 그들의 인생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으로 설명하는 꿈 해몽가와 같다. 나에게는 풀은 풀이다; 나는 나무, 물고기, 야생동물, 가축 등 모두를 문자적 의미로 받아들인다.''

창세기에서 모세가 사용한 의인화는 저자가 분명히 의도하는 것으로, 즉, 솔직한 역사로 받아들이는 데에 전혀 장애가 되지 않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교회가 대부분의 교회 역사를 통하여 그런 입장을 취한 이유이다. 반면에,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긴 시대 ''과학''과 타협하고 있는 것이다.

 

부록 : 하나님은 영이시다

 

신약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은 영이시니''(요 4:24)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이 물질이 아니시며 육체를 갖고 있지 않으시므로, 그분은 우리의 육체적 감각으로 보거나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인격적이시며, 초월적인 생명과 존재를 가지고 계신다. 이것은 하나님이 물질적인 우주의 한계와 무관하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모든 것들은 인간 이성의 이해력을 넘어선 것이므로 그분에 대해 인간이 뭐라고 묘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사람에게는 그러한 초월적인 신성을 묘사할 단어가 없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의 특성에 관련된 단어들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의인화를 사용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실감하게 해 주며, 그분의 다양한 능력과 관심과 활동들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용은 정당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경에서 그분 자신에 관하여 이러한 방식으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즉, 그분이 그것을 사용하시며 거기에 대해 권위를 부여하신다. 또한 하나님은 그분의 형상(image)과 모양(likeness)대로 사람을 만드셨으므로(창 1:26-27),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약간의 유사성이 있다. - 물론 커다란 차이점도 있기는 하다.

위의 사항들로 볼 때, 기독교인들이 창세기에 관하여 이야기 할 때, (어떠한 해명 없이) ''문자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보다는, ''평범한'' 또는 ''문법적-역사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낫다.

 


© k2s0o1d4e0s2i1g5n.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