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길박사의 과학이야기
1. 창조와 물 (1)
인류에게 내린 최대의 자연축복
지구 표면적의 72% ... 극심한 온도변화 막아
생물 생존 유지 . 생태계 역동적 순한 가능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
환경 오염에 대한 관심이 우리들 주변에서 가장 큰 이슈가 된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물은 우리의 생명과 가장 밀접한 물질이므로 사람들은 물의 오염에 대해서 어느 것보다 민감하게 반응하여 왔다. 최근 우리 사회는 물의 오염으로 인하여 거듭되는 소동을 겪고 있는 중이다.
물, 도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오염에 대한 아무런 해결책은 없는 것일까? 또 성경적으로는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물은 화학적으로만 본다면 어떤 의미에서는 비교적 단순한 화합물이다. 수소와 산소의 공유화합물로 순수한 상태에서는 냄새도, 빛깔도, 맛도 없는 투명한 액체이며 동.식물체의 70 ∼ 99%를 차지하므로 생존하는 데 없어서는 안되는 필요불가결한 물질이다.
이 단순한 화학물이 신기하게도 1기압에서는 100oC에서 끓기 시작하고 4oC 때 최대의 밀도가 되며 0oC이면 얼기 시작하는 등 외부 조건에 따라 다양하게 변신한다.
물의 고체상태인 얼음은 물보다 비중이 작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강이나 호수가 바닥에서부터 얼지 않고 표면에서부터 얼게 된다. 또한 얼음은 물위에 떠서 단열을 해 주므로 수중의 생태계를 보호해 준다. 만일 얼음의 비중이 물보다 무겁다면 얼음은 계속 가라앉아 수중의 생물들은 살 수 없을 것이다.
물은 또한 열용량이 커서 온도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이러한 성질을 가진 물은 지구 표면적의 약 72%를 덮고 있어 지구의 극심한 온도 변화를 막아준다. 하나님께서는 생물이 살 수 있는 육지를 더 많이 만드시지 왜 바다를 그렇게 넓게 만드셨냐고 다소 엉뚱한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모든 물질 중에서 이렇게 비열이 가장 큰 물이 넓은 바다에 존재하므로 밤낮의 기온차가 너무 크지 않도록 조절하고, 지구의 온도가 생물이 살기에 적합하게 항상 일정하게 유지되는 것이다.
더불어 물은 증발과 응결과 강수라는 3단계 순환과정을 거쳐 지구상의 자연계를 주도하기도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현재의 지구상에 있는 물의 비율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킨다면 지구 생태계는 극심한 피해를 입을 것이다.
지구를 수(水)행성이라고도 부르는데 이것은 지구의 풍부한 물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하나님의 지구 창조사역에 있어 물만큼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물질은 없을 것이다.
물 한 분자는 산소원자 한 개와 수소 원자 두 개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데 기이하게도 수소 두 원자는 대칭적으로 산소에 결합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비대칭적이며 그 사이각은 약 104o31'이다. 따라서 물은 약한 양전하와 음전하를 동시에 띠고 있어 무기물과 각종 유기물의 좋은 용매가 된다.
이것은 물의 구조상 산소는 음전하를 띠므로 양이온의 물질을 잡아당기고, 음이온의 물질은 양이온을 띤 수소를 둘러싸서 전기적으로 중화시켜 결정 구조로부터 분리해 내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이렇게 물분자들에 의해 둘러싸인 이온은 물에서 자유로이 이동할 수 있게 된다. 즉, 물에 녹게 되는 것이다.
실은 물은 고체 뿐 아니라 기체까지 거의 모든 물질을, 이와 같은 성질을 이용해 많든 적든 간에 녹일 수 있다. 그래서 물을 '만유 용매'라고도 부른다.
생명체 내에서는 체액으로 존재하면서 산소 영양 호르몬 등을 공급하고, 탄산가스 따위의 노폐물을 걸러 모으며 혈액의 주요 구성 성분으로 이용된다. 혈액은 또한 세균의 침투에 저항하거나 식균(食菌)작용을 가능케 하기도 하는데 물은 혈액의 성분들을 운반하는 용매의 역할을 한다. 물은 또 배설 기능의 주요 매체이기도 하다. 이것은 생명체 내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생화학 반응이 예외 없이 모두가 '만유 용매'인 물 속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듯 참으로 단순하면서도 생물의 생존을 유지시키며 자연계의 역동적 순환을 가능케 하는 무한정한 자연조화의 매개체이기도 한 물은 하나님이 주신 최대의 자연축복인 것이다.
2. 창조와 물 (2)
창조 수행의 원동력이자 생명수
고체.액체.기체로 변환 ... 성삼위일체 조화
생태계 파괴는 묵시적.종말적 예언 일깨우는 교훈
물은 태초에 천지창조시부터 주님의 창조 수행의 원동력이기도 하였다(창 1:2). 그러므로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처럼 생물학적 생명이 있는 곳에서는 반드시 물이 존재한다.
물은 물질의 세가지 기본 형태인 고체, 액체, 기체 어느 것으로도 변환될 수 있는 성질을 지닌다. 이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속성과도 묘한 조화를 이룬다. 물론 물이 하나님의 영적인 어떤 모습이라는 의미는 전혀 아니지만 적어도 그 신비한 속성은 닮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물은 현대 천문학과 우주여행을 통하여 적어도 달과 타 혹성, 타 천체에서는 지구와 같이 완벽한 삼위일체적 조화를 이루는 물의 존재가 결코 발견된 적이 없다. 이 지구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완벽한 생명의 고향인 것이 분명하다.
이런 사실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을 칼뱅이었지만 그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지구야말로 하나님이 생명을 주신 유일한 고향인 것 같다고 시편 주석에서 기록하고 있다.
표준상태에서의 물의 밀도가 다른 물질의 비중을 계산할 때 비교의 기준이 된다는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포함되어 있다고 봄이 타당하다.
그러기에 옛사람들은 물을 공급하시는 분도 당연히 창조주 하나님으로 생각하였다. 성경은 특히 영원한 영적 생명에 필요한 물이라는 뜻으로 생명수(생수)를 하나님의 복음에 여러 번 비유하고 있다(렘 2:13, 계 22:17).
창세기 대홍수를 통하여서 물은 심판과 생명의 물로서 동시에 표현되는데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일치한다.
물은 또한 작물의 경작과도 밀접한 상관관계를 지닌다. 성경을 통하여 보아도 물의 관리권은 토지 경작자와 경영자들 사이의 분쟁의 주요 원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창 4:2).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영적으로 가장 메말라 있을 때, 물에 관한 불평으로 일관한 것이나(출 17:1-3) 모세가 영적 생수에 관한 무지 때문에 자신의 분노를 앞세워 결국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출 17:6)이 바로 물 때문이었음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물은 본질이 단순하고 깨끗하므로 쉽사리 오염이 가능하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는 사랑과 실천의 모범을 통하여 영생을 소유한 자(죄 씻음을 받은 자)들에 대한 영적인 비유를 표현하셨다. 오염(죄악)과 씻음(회개)과 물(영생의 도구)은 성경의 빈번하고도 명쾌한 비유 중의 하나라 하겠다.
이처럼 소중한 위치를 점하는 물이지만 오늘날에는 무의식적으로 그 중요성이 간과되거나 묵살되는 경향이 있다. 현대의 식수나 하천 오염의 심각도는 창조 이후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영적인 오염과 자연의 오염이 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 스스로 딜레마에 빠진 현대 과학을 통한 생태계 파괴의 아이러니는 묵시적, 종말적 예언과도 같은 교훈을 준다.
사람의 태아의 경우 97%가 물이며 신생아는 77% 정도인데 성인이 되면 60% 정도가 되며 나이가 들수록 신체에 대한 물의 비율은 감소해서 마침내 노년기에는 50% 미만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최근 물이 건강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많은 학자들이 연구하고 있고, 또 물의 음용을 통한 건강법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늘어나고 있음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라도 경제적 어려움이 없이 치료받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는데 우리 인류는 경제적 필요에 의해 보다 복잡하고 번거롭게 하나님의 방법과는 멀리 의학을 발전시켜 왔는지도 모른다. 성경은 물과 관련하여 너무도 많은 치유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레 15:13, 요 5:2-4, 요 9:6-7).
아무튼 생명력의 상징인 물의 비율이 연령과 비례하여 이렇게 감소해 간다는 것은 우리에게 영적인 생명력에 관하여서도 많은 교훈을 준다.
성경은 이외에도 물과 관련하여 놀라운 계시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전도서 1장 6-7절에 보면 지구 생태계의 물의 순환에 관한 놀라운 언급이 기록되어 있다.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3. 창조와 물 (3)
인간 탐욕 다스리는 "영생의 생수"
대책 없는 환경 파괴 산성비로 응답
노아의 홍수는 1차 경고 ... 외면 땐 종말 자초
지금부터 3천년 전에 이와 같은 현대과학적 언급이 성경에 기록될 수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권위를 나타내준다.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는 이와 같은 물의 순환에 따라 응결된 물방울에 존재하다가 강우와 함께 육지의 토양으로 내려온다. 이럴 경우 어느 정도 수분은 산성을 띠게 되는데 이때 내려온 물은 땅속의 알칼리성 광물질을 녹여 물을 안정화시키고 생물에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하게 된다. 즉, 약한 산성의 비는 생태계를 유지하는 데 오히려 필요하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인가!
그러나 오늘날 산업이 발달하면서 강한 산성을 띠는 아황산가스나 이산화질소 등이 공장들에서 배출되면서부터는 이들 기체가 빗물에 녹아 강한 산성을 띠는 황산이나 질산이 되어 강한 산성비를 뿌리게 되었다. 이것이 생태계에 다양한 피해를 준다는 것은 이제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밖에도 사람들이 만든 합성세제, 공장폐수의 중금속, 영양염류, 농약 등은 하나님께서 생명의 유지를 위하여 만들어 놓으신 생태계의 순환에 오히려 악순환을 만들어 내고 있다.
어떤 학자는 환경의 오염을 생태계의 암과도 같다고 하였는데, 지금까지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창조세계가 이토록 파괴되고 방치되어 왔는데도 우리 기독교인들이 별다른 대책 없이 지내왔다는 것은 크나큰 잘못이 아닐 수 없다.
지금부터라도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들을 지키고 보존하는 일에 적극적 관심을 가져야 한다. 물이야말로 그 바로미터와 같은 것이기에 더욱 지켜야 한다.
또 한가지 물의 속성은 하나님의 사랑처럼 열린 곳이라면 어는 곳에나 들어가 채우며 무조건적이다. 그러나 물의 속성이 무조건적이듯 홍수와 같은 물의 재난도 일방적이기에 피할 길은 없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외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최종 심판은 노아의 홍수 때와는 다를 것이다. 빛과 수분으로 무지개를 연출한 노아 당시의 심판은 어떤 의미에서는 생명의 심판이었다. 그러나 영원히 소멸하는 불의 심판이 우리 인류에게는 남아 있다(벧후 3:10-13). 이것이야말로 창조주 되시는 주님의 공의로움이다.
우리는 십자가상의 예수님 최후의 말씀 가운데 "목마르다"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요 19:29). 목마르다는 것은 죽음의 기로를 표현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물리적 사형 집행의 결과는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의 {피와 물의 완전한 쏟음}이었다. '영생의 생수'임을 증거하던 그가 십자가상에서의 죽음의 결단(목마름과 옆구리의 마지막 한방울까지의 생명의 피와 물의 쏟음)을 스스로 자청한 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어느 누가 인류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그와 같은 수치를 자청하고 극한 사랑의 표현인 십자가 대속의 값어치를 자청하여 지불할 수 있겠는가?
나무에 달린 이와 같은 죽음의 영적 의미를 바울은 신명기 21장 22-23절을 이용하여 갈라디아서(3:13)에서 표현하고 있다.
전혀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물처럼 예수님이 죄를 전혀 알지도 못하는 분으로서 이렇게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다고 증거한다. 그분이 연출한 그 이상의 물리적, 비유적, 영적 사랑의 극치의 표현이 있을 수 있을까?
수가성 우물가 여인의 이야기는 다시금 그 대답이 될지도 모른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다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0-15).
오늘날 교회들이 마치 눈에 보암직한 것과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것이 주님의 축복인양 전하는 것을 보면, 육체의 생수는 잘 알지만 영적인 생수는 전혀 모르는 세상 사람들과 전혀 구별이 되지 않는다.
인간의 탐욕이 물의 오염과 생태계의 파괴를 가져왔듯이, 지극히 겸손한 섬김의 모습으로 오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주님을 따르는 진실된 제자의 삶이 아닌 욕심에 가득 찬 교회라면, 그것은 오히려 영적 생수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리는 일일 것이다.
아무튼 물은 생명의 도구일 뿐 아니라 참으로 우리들에게 여러모로 교훈을 주는 물질임이 분명하다.
4. 종류대로
교배 가능한 '종류대로' 창조
창세기 1장서만 10차례 반복 눈길
현대생물학의 종.속.과에 해당 ... 진화론 부정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육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24-25).
지금도 그러하지만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과거부터 늘 성경의 비역사성이나 과학적 모순을 지적할 때 창세기 1장을 거론하고는 했다. 그렇다면 만일 현대과학자들을 총동원하여 창세기 1장을 과학적으로(?) 서술하고 약 1백년 후쯤 그 글을 다시 한번 검토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여러 가지 모순과 비과학적인 내용들로 가득 차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과거 과학자들이, 그들이 살던 당시의 과학수준으로 성경의 창세기를 비판한 적이 있었지만 오늘날에 와서 그 내용들이 터무니없는 것으로 밝혀진 적이 여러 번 있기 때문이다.
경험으로 볼 때, 간단한 과학적 논문은 짧은 지면 안에 필요한 모든 말을 기록하여야 하므로 훨씬 더 쓰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창세기 1장은 가장 간략한 언어로 전 인류 역사를 통하여 모든 인류에게 창조의 사실을 알리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창조에 관한 논문과도 같다. 이 짧은 창조의 계시는 수천 년 동안 모든 인류에게 조금도 가감이 없이 그대로 전해져 왔지만 지금도 아무런 부족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 얼마나 놀라운 계시인가!
그 놀라운 창조의 섭리를 짧은 창세기 안에 모세의 손을 빌려 사람들이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절제된 언어를 사용하여 우리들에게 계시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창세기 1장에 기록된 다양한 창조기사 가운데 [종류대로]라는 구절은 특별히 강조되고 있어서 매우 관심을 끈다. 창세기 1장에서만 10회에 걸쳐 반복적으로 강조된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무언가 특별히 전하고자 했던 각별한 메시지임이 분명하다.
현대인류학은 유연관계가 있는 것끼리 일정한 분류체계를 정하여 놓고 이것을 진화의 계통도나 생물의 외형적.생리적.화학적 비교에 응용하고 있다.
이 생물의 분류체계를 최초로 확립한 인물은 스웨덴 사람으로 목사의 아들이었던 칼 폰 린네(1707-1778)였다. 그가 생물의 종류에 대한 분류에 관심을 가지게 된 처음의 동기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물을 창세기에 말씀하신 그 종류대로 나누어 보려던 것이었다.
이 린네의 분류체계가 발전하여 오늘날에는 거꾸로 진화론적 생물분류체계로 바뀌어져 버렸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창세기에서 말하는 '종류대로'라는 말은 교배가 가능한 범위를 말하는 것 같다. 이 말은 현대생물학이 종(種: species)이라고 부르는 것에 속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속(屬: genus) 또는 과(科: family)에 해당된다.
종(種)은 기본이 되는 단위인데 대체로 같은 형질을 나타내므로 같은 종 사이에는 교배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집고양이와 들고양이의 경우에는 같은 속에 속하지만 다른 종이면서도 교배가 가능하다.
가끔 서로 다른 속 사이에서도 교배가 가능할 수도 있다. 즉, 어떤 종류의 곡물류는 목초류와 교배시킬 수가 있는데 이 경우에는 성경에서 말하는 종류가 과(科)에 적용될 것이다.
같은 속에 속하면서 다른 종인 말과 당나귀는 서로 교배시켜 노새를 생산할 수 있는데 노새는 생식력이 없다.
따라서 이 두 종은 종류라는 말의 한계에 가깝다. 이것을 통하여 볼 때, 생물계의 재생산 영역에는 한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성경은 이들 종의 근본적 변천을 주장하는 진화론을 부정하고 있다.
즉, 하나님은 일정한 종류의 기본 생물들을 창조하시고 그 종류 내에서는 환경에 따라 적응하여 변천할 수 있는 기본 형식을 정하셨다고 보겠다.
이것을 소진화라고 한다. 진화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종 내에서의 변이를 의미한다.
그 대신 종과 종 사이로의 변이는 대진화라고 말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종류대로]라는 말은, 바로 이 대진화는 하나님의 창조원리가 아님을 말하고 있다.
오늘날 학자들은 제각기 약 1백만 종에서 2백만 종 가까이 생물의 종류가 존재한다고 추정하는데 이와 같은 성경적 원리로 보면 그 종류는 상당히 줄어들게 된다.
이중에서도 성경은 생물학에 있어서의 생물의 분류체계와는 달리 동물과 식물을 좀더 명확히 구분하고 있다.
5. 생명의 피
동.식물 구별 ... 육체엔 "생명의 피"
인간의 자유의지는 커다란 축복
성경적 윤리규범 어길 땐 타락의 씨앗 돼
성경에서 말하는 생물학적인 생명은 네페쉬(nephesh)를 소유하는 것으로 표현되는데, 이 단어는 구약에서 영혼을 뜻하는 단어로, 때로는 생명으로 번역되기도 하고 문맥에 따라서 성경 가운데 다양하게 번역되어 있다. 노아의 홍수 당시 육지에 있어 코로 생물의 기식을 호흡하는 것은 다 죽었더라(창 6:22)고 한 말씀은 바로 이 네페쉬를 소유한 생물의 멸망을 표현한 것이다.
이 네페쉬는 하등동물이나 식물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사람과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셨다고(창 1:29-30) 하신 의미는 바로 네페쉬를 소유한 생물과 그렇지 않은 식물 사이에는 커다란 구별이 존재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사람은 그 중에서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드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하여(창 2:7), 네페쉬를 소유한 생물 가운데서도 사람은 영적인 존재로 분명히 다르게 창조하셨음을 알려주고 있다.
진화론자들은 식물도 동물과 한 뿌리의 조상으로부터 진화하였다고 주장하지만 이렇게 성경은 동물과 식물을 엄격히 구별하고 있다. 이것을 통하여 볼 때 식물에도 정령이 존재한다는 등, 식물도 영적 존재라고 주장하는 일부 신비주의자들의 주장은 성경적이라고 볼 수 없다.
미 텍사스주에 있는 에이 앤 엠 대학의 딜론 교수는 "사람은 동물이 아니고 식물이다"라고 참으로 엉뚱한 주장을 하는데, 사람의 염색체 수가 동물과 달리 일부 식물과 오히려 유사하다는 등의 이유를 들고 있다.
성경은 오히려 하나님의 창조섭리가 피조물인 우리 사람이 생각하는 일반적 논리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며 또 하나님께서는 지구라는 단일 환경 가운데서 살아가야 하는 모든 생물에게 동일한 사랑의 배려를 하신 것으로도 해석된다.
물론 지금도 동물과 식물의 구별에 관하여는 여러 가지 이론이 많지만 성경적으로 보면 식물은 동물들처럼 혼이나 영을 소유하지 못한 것이 분명하며(창 1:29-30),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다(창 9:3-6, 레 17:11)는 말씀처럼 생명을 뜻하는 피를 소유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식물체에 존재하는 물관, 체관 등의 통도 요소에 있는 체액을 동물의 피에 비유하여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도 일부 있다. 그리고 단순한 무척추동물의 경우도 흔적만 남아 있는 순환계를 가지고 있으므로 성경적인 의미의 생명을 나타내는 피를 가지지 못한다고 할 수도 있다. 이런 쉽지 않은 문제들은 좀더 연구되어야 하겠지만 분명한 것은 성경은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동물과 식물 사이에 명확한 구별을 하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생명에 있어 이와 같이 구별된 위치에 관하여 성경 레위기 19장 19절은 네 육축을 다른 종류와 교합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이러한 지혜를 깨달은 랍비들은 말과 나귀를 다른 종류로 간주하여 교배를 금지하였다고 한다. 성경의 말씀에 그대로 따른 것이다.
레위기 19장의 말씀은 하나님이 설정하신 자연계의 순리에 대응하는 인간의 올바른 자세와, 이방인과 구별하여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성별된 삶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에 주시는 이중의 교훈으로 생각된다.
이렇듯 창조의 세계에서 인간이 준행하여야 할 일단의 규범을 주신 하나님은 인류에게 또 다른 사랑의 표현으로 자유의지도 주셨다. 이 축복된 권리는 인류 타락의 씨앗도 되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컬하다.
하나님은 자연의 법칙과 순리에도 이 의지를 적용하신다. 인류는 하나님이 주신 이 자유의지로 말미암아 자연을 상당할 정도로 개선할 수 있을 문턱까지 도달하였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우리 인류의 올바른 의지의 진행방향은 과연 어디일까? 계속적으로 성경적 윤리의 기준을 거부하는 세상에 그대로 동참만 할 것인가?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로마서 1:28).
성경은 과학적으로 모자이크 할 수 있는 책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연세계에 대하여도 인류가 올바른 의지를 사용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윤리적 경고를 하신다고 생각된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도 그러한 유가 아니었는가?
'종류대로'라는 성경의 구절과 오늘날 유전공학의 빠른 발전은 이 자유의지에 관하여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고전 15:38-39).
영적인 법칙이 있듯이 자연 세계와 생명의 육체에도 하나님께서 주신 일정한 법칙이 반드시 있다. 지식은 같되 올바른 지혜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하겠다.
6. 성경과 과학
성경은 과학으로 입증된 진리
결정적 오류.수정된 내용도 없어
누가복음 17장 말씀은 지구의 자전 암시
수천년 역사이래 인류는 그 잘못된 해석과 견해로 인하여 여러 생각들을 수정하여 왔다. 그 중에서도 물질과 우주의 기원에 관한 생각은 참으로 여러번 수정을 거듭해야만 했다.
그러한 오류를 바로잡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바로 과학이었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여러 문제가 많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 몇가지를 성경과 과학을 중심으로 알아보자.
과거 인류는 모르는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다양한 방법을 강구하곤 했다. 그리고 그것들 중 정설화되는 것들은 바로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는 했다. 이 학문 안에서도 오류는 늘 존재하였다. 그런데 중세기 이후에는 그러한 것들이 간혹 성경과 마찰을 빚는 경우도 생겨났다.
중세기까지도 지구는 움직이지 않고 고정되어 있으며 우주의 중심이라는 생각이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성직자들의 생각도 당연히 이것을 신봉하였다.
과거 애굽 사람들은 세계가 다섯개의 기둥으로 떠받쳐져 있다고 보았는데, 네 모퉁이마다 기둥이 한개씩 있고 한 가운데 나머지 하나가 있다고 하였다. 헬라인들은 이 세상을 아틀라스라는 이름을 가진 엄청난 거인이 그의 큰 어깨와 등으로 받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힌두교를 믿는 고대 인도의 학자들은 지구는 거대한 코끼리가 등으로 떠받치고 있고, 또 그 코끼리는 커다란 바다 거북이가 받치고 있으며 이 거북은 우주의 바다를 헤엄치고 있다고 하였다.
모세가 살던 당시 애굽의 학자들은 이 우주가 알에서 나왔으며 그 알은 날개를 가지고 있어 훨훨 날아다녔다고 믿었다. 그러다가 알이 분열하여 이 세계가 부화하였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모세 당시의 최신 과학 이론이었다. 과학을 동원한 이론이라는 사실만 다르지, 오늘날의 우주진화에 관한 대폭발이론과 너무도 흡사한 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과학은 자연현상을 관찰하고 그 관찰한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론을 만들고, 그 이론을 가지고 관찰한 것을 설명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과학자들은 이와 같은 의미의 과학의 시초는 기원전 600년경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당시 그리스 사람들은 지진이 일어나도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이 화가 나서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당시 학자 탈레스는 천둥, 번개, 지진 등을 관찰하고 자연현상 그대로 설명하려고 하였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우주와 물질의 근원에 대해서도 설명해보려고 하였는데,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하였으며 아낙시만드로스는 인간의 조상은 물고기라고 오늘날의 진화론과 매우 유사한 주장을 폈다.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를 물질의 근원으로 보았고, 헤라클레이토스는 불이라고 보았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유명한 플라톤과, 플라톤의 수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많은 현상들을 학문적으로 잘 정리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생각한 우주의 체계는 지구가 고정되어 있고 그 주위를 태양과 달과 행성과 항성들의 천구가 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후 2000년 가까이 지난 중세에 와서도 기원전 4세기에 살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학자들에게 있어 가장 우세한 이론이었다. 대표적인 것 중에 하나가 세상은 물과 흙, 공기, 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지구는 가장 무거운 원소인 흙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느냐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이렇게 사람의 생각이 다양하게 수정되어 왔으니 온갖 기원에 관한 서술이 있는 성경은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공격을 받아 왔겠는가? 그럼에도 성경에 결정적인 오류가 있다거나 그 내용이 수정된 적은 전혀 없다.
욥기 26장 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땅을 공간에 다셨다}고 분명하게 언급한다. 이사야서 40장 22절에 보면 {그는 땅위의 궁창에 앉으시나니}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궁창이라는 말은 히브리어의 쿠그를 번역한 것으로 그 본 뜻은 지구가 원형임을 나타낸다. 잠언 8장 27절에도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으로 해면을 두르셨다}고 하여 하나님께서 바다의 표면을 둥글게 하셨음을 분명히 알려준다.
누가복음 17장 34-36절은 과거 많은 성경비판론자들의 표적이 되었던 구절이었다. 어떻게 지구상에서 동시에 낮과 밤에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느냐가 그 비판의 요지였다. 지구의 자전을 모를 때의 이야기이다.
코페르니쿠스와 케플러,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주장하였지만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확인한 것은 19세기에 들어와 영국의 천문학자 허셀이 증명하였으니 겨우 지금부터 100년쯤 전에야 과학적으로 증거된 것이다. 그런데 이 누가복음 17장의 말씀은 지구의 자전과 잘 조화된다.
1861년, 프랑스 과학원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51가지 과학적 사실을 자신 있게 발표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중 10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 와서 과학적 사실로 인정된 것은 하나도 없다. 과학서적이 아닌 성경이 이렇게 과학과 전혀 모순 없이 잘 조화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7. 별자리
별자리엔 놀라운 복음 계시 담겨
성경이전 말씀 내용 길잡이 역할
점성술 변질.맹목적 경배에 대해선 경고
별들이 과연 무엇이고 그 기원은 또한 무엇인지, 오랫동안 인류에게는 신비와 경이의 대상이었다. 또한 사람들은 언제부터인지 이 별들에 여러 가지 이름을 붙여 불러왔으며 별자리도 만들어 왔다.
유태계 로마의 고대 역사학자였던 요세푸스는 아담의 셋째 아들 셋이 별자리의 이름을 붙였다고 기록하였지만 아담이 각 생물의 이름을 지었으므로(창 2:19) 별자리 이름 또한 하나님이 주신 계시와 지혜로 아담이 처음 그 이름을 불렀을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별들을 다 이름대로 부르신다(시 147:4)고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그 이름들을 알려주었을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영광 받으시기 위하여 이 별들을 창조하셨다고 기록한다(시 19:1). 별들은 그 밝기와 색깔과 크기가 다양한데, 성경은 그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다(고전 15:41)고 표현하고 있다.
별의 밝기와 크기를 나타내는 과학의 체계가 처음으로 고안된 것은 1603년으로 투한 베이어에 의해서였다. 그는 희랍문자를 사용하여 별의 밝기를 표시하고 그 뒤에 필요에 따라 라틴어 이름을 붙였다. 성경에는 오늘날 우리들이 하늘에서 보는 가장 밝은 24개의 별 이름이 거의 대부분 언급되고 있다.
욥기 38장 3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폭풍 가운데 욥에게 나타나셔서 직접 {네가 열두 궁성을 때를 따라 이끌어 내겠느냐?}고 별자리를 12가지로 구분하였음을 분명하게 알려준다. 이들 열두 궁성은 일년 열두달을 따라 나타나니 일년이 열두달로 이루어졌음도 결코 우연이라고 보기 어렵다.
점성술에서는 이 12궁도를 왜곡하여 왔으나 오히려 별자리에는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놀라운 복음의 계시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 1800년대 프란시스 롤리스톤(1863년)이나 요셉 사이스(1884년), 벌링거(1893년) 등은 별의 이름에 담긴 어원을 조사하여 별자리에 담긴 복음의 메시지를 찾으려는 연구를 하였다. 이 해석에 의하면 본래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별자리에 창조로부터 인류의 범죄, 예수님의 탄생과 부활, 구원과 영생 등을 이미 계시해 놓으셨다는 것이다.
밤하늘에서 가장 밝은 별인 큰개자리의 시리우스를 한번 보자. 시리우스의 어원은 왕자라는 의미의 'Sur'에서 나왔는데,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에 관한 예언을 하면서 '평강의 왕'(사 9:6)이라고 묘사할 때 바로 같은 어원인 히브리어의 'Sar'를 사용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이름도 왕비라는 의미를 가진 이 어원의 여성형에서 왔다. 오늘날 영어에서 위엄과 존경을 표현하는 단어 'Sir'도 같은 어원에서 왔다.
초봄의 남쪽 밤하늘을 빛내는 가장 크고 희며 아름다운 시리우스는 바로 메시아에 관한 예언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관하여는 여러 논란이 남아 있다. 그러나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시 19:1) 광명으로 징조와 일자와 사시와 연한을 이루게 하셨다는 말씀(창 1:14)으로 보아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복음의 메시지를 하늘에 기록해 놓으셨을 수도 있다. 이 경우 별들은 성경이 사용되기 전 말씀의 내용을 알도록 도와주는 길잡이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를 사람들에게 명확히 알려주게 되면서 별들의 이야기는 조금씩 잊혀져 갔으며,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 의하여 왜곡되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자세한 메시지를 찾기 위하여 별들을 연구하라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오히려 별들을 신뢰하는 일에 관하여 경고하고 있다. 별자리가 나타내는 상징은 이미 우리가 그 진실을 알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변해버린 것이 사실이다.
고대 바벨론 시대에 이미 십이궁은 점성술로 변질되어 있었다. 이 점성술은 오늘날까지도 신비주의자들의 미혹의 도구가 되어 있다. 성경은 점성술이나 하늘 자체에 대한 경배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단 1:20, 2:27, 신 4:14-19).
오늘날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신비롭고 오묘한 별들에 관하여 너무 무관심해져 버린 이유는 바로 이와 같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 같다. 그 동안 우리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성품과 관련된 일에는 관심이 많았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솜씨에 관하여서는 너무 무관심해져 버린 것이 사실이다.
오랜만에 하루쯤 시간을 내어 야외로 나가 별자리를 한번 유심히 바라보는 것은 어떨까?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솜씨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8. 대폭발이론 (1)
'대폭발이론' 창조섭리 위배
창조 첫째날 모든 우주.생물 만들어
지구는 하나님의 '자기 백성' 향한 영적 관심
예수님이 탄생하기 1백50 년 전 당시의 천문학자들은 별의 수를 세어보기도 하고 하늘을 구역별로 나누어 세밀히 조사한 적이 있다. 이들은 하늘에 있는 별을 약 3천여개쯤으로 계산하였다.
그밖에도 고대의 천문학자 톨레미는 1천56개, 중세의 유명한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는 7백77개라고 주장했다. 카톨릭 교도였던 브라헤는 아마도 하나님께서 완전수의 3위1체인 7백77개를 만드셔서 하늘에 징조로 주셨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유명한 천문학자요 개신교도였던 케플러도 1천5개라는 주장을 폈다. 그 이후에도 여러 사람들이 하늘에 있는 별을 세어 보았지만 그 숫자는 많아야 3천개일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었다. 이처럼 별의 수에 관한 정보는 한동안 정확하지가 않았었다. 케플러와 거의 동시대 사람이었던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망원경을 발명하면서부터 별의 개수에 관한 사람들의 인식도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성경은 {하늘의 만상은 셀 수 없으며}(렘 33:22)라고 분명히 별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음을 알려준다. 창세기 22장 1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별들과 바닷가의 모래를 같은 의미로 비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많은 별들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과학자들은 여러 이론을 세워왔다.
소위 빅뱅이라고 하는 대폭발이론은 오늘날 우주의 진화에 관한 가장 유행하는 이론이 되어 있다.
우주에서는 약 1백 50억 년 전 대규모의 에너지 폭발이 있었다고 추정하였다. 오늘날 이 연대는 여러 과학자들에 의하여 7백억년까지로 확장되고 있다.
이 폭발로 인하여 강력한 방사선이 밖으로 퍼져 나갔고 수소와 헬륨 원자가 생기게 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약 1백억 년 전쯤에는 온도가 조금씩 낮아지면서 가스가 뭉쳐서 최초의 별들이 생기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성과정을 통하여 은하계와 또 다른 은하들이 생겨났다고 가정한다. 이들 별이 나이가 들면 그들 중 일부는 폭발하여 초신성이라는 것이 되어 소멸된다. 초신성의 존재는 오늘날 관찰되고 있으나 이것이 대폭발이론과 관련된 별들의 진화에 관한 증거로 볼 수 있는 근거는 없다. 이들 폭발로 부서진 별의 조각들은 다시 모여서 새로운 별이 되고 또다시 해체되는 과정을 반복하게 된다고 추정한다.
일부 진화론을 신봉하는 크리스천 과학자들은 오늘날 대폭발이론이 천문학에 있어서 주된 이론이라는 이유 때문에 대폭발 자체를 하나님의 창조섭리로 해석하여 타협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경의 창조와 대폭발 사이에는 일치되지 않는 부분이 상당히 많이 있으므로 타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폭발이론에 의하면 원소 중 수소와 헬륨이 먼저 만들어지고 서서히 나머지 원소들이 우주 진화과정에서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나 성경은 창조의 첫째날 이미 지구가 만들어졌으며 그러므로 모든 원소들이 동시에 만들어졌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대폭발이론에 의하면 지구는 항성들이 생기고 나서 한참 후에야 생성되었다. 성경은 태양도 지구가 창조된 다음에 만들어졌다고 말하므로 대폭발이론과는 그 생성된 순서가 맞지 않는다.
대폭발이론이 하나님의 창조방법이 아니었겠는가 하고 타협하려는 사람들이 있으나 성경은 세상의 창조에 대하여 어떠한 폭발도 말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또한 성경과 대폭발이론은 연대상에도 많은 불일치가 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다면 굳이 하나님께서 수백억 년의 우주 진화과정을 필요로 하셨겠는가 의심이 가는 것은 당연하다. 성경은 창조주간에 하나님께서 모든 우주와 생물을 만드셨음을 선포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직접 십계명중 4계명인 우리의 안식일을 만드신 목적이 창조의 일주일 동안 창조의 모든 사역이 완료되었음에 근거(출 20:11)하고 있음을 알려주신다.
대폭발이론에 의한다면 지구도 일개 진화된 혹성에 불과하니 우주의 작은 한 장소일 뿐 물리적으로 그다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우주의 한 장소라고 보기는 어렵다.
지구가 물리적으로 우주의 가장 중심에 놓여 있고 또한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한 적이 물론 있었다. 바로 천동설도 그와 같은 이론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드시기 이전에 지구를 먼저 만드셨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지구가 우주의 물리적 중심이라는 의미보다는 하나님의 관심의 중심이 아닌가 생각된다.
우주의 물리적 중심이 어디인지는 오늘날 과학자들도 전혀 모른다. 만일 우주의 범위가 무한하다면 실제의 중심지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한계를 정하셨다면 존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향하신 영적 관심(요 3:16)이 바로 이곳 작은 행성 지구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이 아닐까?
9. 대폭발이론 (2)
태양계 기원은 아직도 수수께끼
대폭발설 등 각종 이론 가설 불과
성경 시편 "태양이 지구의 에너지원" 시사
대폭발(빅뱅) 이론에 의하면 태양계는 약 50억년 전쯤에 먼지와 가스의 구름이었다. 이 태양 성운이 어디로부터 왔는지는 정확히 설명하지 못한다. 다만 중력으로 인해 가스 구름이 응축되어 행성들을 이루는 성운이 만들어졌으며 그 다음에는 소용돌이치는 구름이 응축되어 태양과 여러 행성이 만들어졌다고 추측한다.
이와 같은 일이 가능하려면 응축된 가스가 빠른 속도로 회전하여야만 된다. 그러나 오늘날 관측되는 성운들은 그러하지 못하다. 우주 공간에서 발견되는 가스 구름은 변화가 없고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뿐 응축되지 않는다. 보통 구름의 경우 안쪽으로 잡아당기는 인력보다 바깥쪽으로 향하는 가스의 힘이 더 세다. 무엇이 이 태양 성운을 회전하게 하였는지는 추측일 뿐 역시 아무도 모른다.
다른 한가지 가설로는 포획설이 있다. 이 가설에 의하면 태양이 중력에 의하여 물체를 포획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항성들은 거리적으로 매우 떨어져 있어서 태양처럼 커다란 질량을 가진 가스를 포집하는 일은 결코 간단하지가 않다. 오늘날 태양계로부터 가장 가까운 별은 켄타우르스 알파 성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거리가 빛의 속도로 간다고 하여도 4-5년에 이른다. 그 사이에는 원소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의 태양의 중력으로 볼 때 우주의 가스 구름을 그렇게 포획하였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다른 견해로는 분리설이라는 것이 있다. 옛날 태양이 우연히 지나치던 다른 어떤 별들과 부딪혀서 태양으로부터 거대한 물체의 덩어리들이 떨어져 나왔다는 것이다. 이 이론도 오늘날 과학자들은 정설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이처럼 태양계의 기원 문제는 아직도 과학자들에게는 수수께끼일 뿐이다.
이밖에도 태양계의 별인 태양은 과연 어떤 형태로 열에너지를 방출하고 있는 것인지 과학자들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태양은 핵융합반응을 하면서 타는 불덩어리로 알려져 있다. 그럴 경우 태양은 시간이 지나면서 지속적으로 팽창할 것이다. 그런데 태양의 에너지는 핵융합이 아니라 중력이 붕괴되면서 에너지를 방출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과학자들도 일부 있다. 이 가설에 의한다면 태양은 거꾸로 지름이 조금씩 수축하고 있다는 결론이 된다.
이들 완전히 서로 상반된 두가지 견해는 오늘날까지도 뚜렷한 과학적 결말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태양은 그 중심의 온도가 섭씨 수천만도나 되며 표면은 약 6천도에 이른다. 크기는 지구의 33만2천배에 달하고 평균 밀도는 지구의 약 4분의 1정도 된다. 태양은 태양계 전체 질량의 99.9%를 차지한다. 그 직경은 지구의 약 1백9배이고 부피는 약 1백30만배나 된다. 태양에서 지구까지의 평균 거리는 약 1억5천만km로 태양빛이 지구에 도달하는 데는 약 8분20초가 걸린다.
태양은 빛과 열을 발산하여 식물의 탄소동화작용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하는가 하면 더불어 생물에 해로운 고주파 방사선도 방출한다. 지구의 모든 생물은 태양에 어떤 식으로든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시편 19편 6절은 태양이 지구의 에너지원임을 시사한다. 그런가 하면 놀랍게도 욥기 38장 24절은 태양이 지구 위에서 부는 바람의 근원임을 밝히고 있다.
만일 태양의 위치가 조금만 변하면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태양이 정말로 핵융합을 하고 있다면 그 내부는 아마도 고온과 수천억 기압하에서 수소와 수소가 결합하여 헬륨으로 바뀌고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것은 일종의 수소폭탄 반응이다. 언젠가 이 모든 수소가 헬륨으로 변해버리면 핵융합 반응은 멈춰버리고 태양은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른다면 태양이 종말을 맞기 훨씬 이전에 지구의 생명은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태양이 만일 수축하더라도 지구 생명의 종말은 마찬가지 결과이다.
이렇게 태양은 지구와 관련해서는 아주 특별한 별이다. 그렇지만 우주 전체로 본다면 태양도 아주 평범한 별 중의 하나에 속한다. 전갈자리에 있는 안타레스별이나 오리온 자리의 베텔큐스와 비교하면 크기가 겨우 수백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우리에게는 지극히 중요한 별이 우주에서는 하나의 작은 별일뿐이다.
하나님께서 지구를 태양보다도 먼저 창조하셨으면서도 태양의 주위에 두시고 우주의 한 점처럼 지극히 작도록 하신 이유는 과연 무얼까?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피조물인 우리와는 전혀 생각이 다르신 분이다(사 55:8-9). 이 모든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류가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 앞에서 참으로 겸손해지기를 요구하시는 것은 아닐까?
{해 돋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시편 113:3).
10. 복음의 핵심: 창조와 구원
진화론 등장이후 창조론 설 땅 잃어
과학 맹신주의.무지 극복...성경적 해석 절실
기독교에는 두가지 복음의 핵심이 있다. 하나는 창조이며 또 하나는 구원이다.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선포하신 말씀은 창조였다. 사실 기독교의 창조라는 것은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구별해 주는 가장 중요한 존재요 사실이다. 다른 어느 종교에서도 기독교에서 말하는 창조를 찾아볼 수 없다.
기독교는 창조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창조가 있기 때문에 구원이 있는 것이다. 구원의 참된 의미는 잠시의 어려움에서 우리가 구출된다는 것이 아니고 창조가 된 원래의 상태대로 회복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실 때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고 사망이 들어왔다. 그러므로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 구원받게 된다는 것은 새 생명, 영원한 생명을 지닌 본래의 창조되었던 상태로 회복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찌된 일인지 교회에서 구원에 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듣지만 하나님의 창조 사실에 대해서는 그렇게 많이 듣지를 못한다. 왜냐하면 세상의 학교교육을 통해서 창조론이 아닌 진화론을 배우기 때문이다.
그렇게 진화를 과학으로 믿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성경에 아무리 창조라는 말이 있어도 창조의 사실을 용감하고 자신 있게 믿음을 가지고 선포하지 못한다.
오늘날 일부 사람들은 과학이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믿으며 과학적 증거가 있어야만 신뢰하려고 드는 과학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과학적인 증거가 없다면 아무리 성경말씀이 진리라고 하여도 잘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것이다.
또 그와 반대로 일부 기독교인들은 과학을 무조건 무시하려고만 든다.
1839년 영국의 맥밀란이라는 사람이 페달로 된 자전거를 처음으로 발명하였을 때 일부 성직자들은 이것이 사탄의 발명품이라고 하여 한때 대부분의 성도들이 자전거 타는 것을 거부한 적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수고하고 일하라고 두 다리를 주셨는데 어떻게 편하게 그런 괴물처럼 생긴 도구(?)를 탈 수 있느냐는 이유였다. 오늘날 교회로 몰려드는 차량 행렬을 본다면 그들 성직자들은 과연 무어라고 말할까? 과학에 관한 무지는 오늘날도 이와 같은 오류를 거듭할 수 있다.
과학을 단순히 하등학문이라고 외면하고 잘 알지 못하면 오늘날 과학과 관련된 환경문제나 인공수정 및 인공임신중절, 건강, 핵문제, 컴퓨터, 유전공학 등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고 기독교적으로는 어떤 입장을 취하여야 하는 것인지 우리 기독교인들이 자전거 에피소드와 같은 실수를 언제든 범할 수 있는 것이다.
어느 때보다도 과학이 빠르게 발전하는 오늘날(단 12:4),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주셨다는 성경적 관점에서 과학을 해석할 필요성이 절실해지고 있다.
오늘날 사탄은 기독교의 복음을 깨뜨리고 방해하며 못 믿게 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기독교의 복음의 기초가 되고 핵심이 되는 창조를 공격하고 있다. 창조가 사실이 아니라고 해버리면 기독교와 다른 종교는 차이가 없어지게 된다. 오히려 다른 종교만도 못해진다. 기독교에서 창조를 제거하면 고층건물에 1층이 없는 것과도 같다. 마치 큰 교량이 있는데 교각이 없는 것과 같다.
기독교의 복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찰스 다윈이 진화론을 제시하고 이 진화론을 사람들이 과학적 사실이라고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 후 1백50년이 지난 오늘날은 마치 진화론을 믿어야만 과학자이고 창조론을 믿으면 과학자가 아니라고 사람들은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사실 중세의 갈릴레이나 케플러, 뉴턴과 같은 유명한 과학자들은 거의 대부분 창조과학자였다.
당시 과학자들은 하나님의 창조 사실을 의심 없이 믿었으며, 과학하는 태도에서도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갈릴레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 권의 책을 주셨는데 하나는 성경이고 또 하나는 자연이라는 책"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자연이라는 책을 자세히 연구하고 조사해 보면 하나님의 솜씨를 자연이라는 책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1859년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이라는 책을 통하여 진화론을 소개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기계론적이며 유물론적인 진화론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진화론과 창조론은 과학적 논쟁이라기보다 영적인 싸움으로 볼 수 있다. 사탄은 진화론이라는 가설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창조의 사실을 희미하게 희석하려고 한다. 오늘날 과학하는 사람들은 마치 창조론을 믿으면 과학자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오해를 한다.
결코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과학자는 하나님이 주신 창조세계 안에 있는 질서를 가지고 과학이라는 도구로 그 질서를 주신 설계자의 오묘한 진리를 사람들에게 좀더 가깝게 알려주는 사람일뿐이다.
사실 천지만물 모든 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증거하고 있다(롬 1:20, 시 198:1-5).
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우리들에게 직접 알아보라고 명령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사 40:26).
11. 전도하기 전 창조섭리 설명하라
바울의 이방인 복음화 전략 큰 효과
무신론 물든 사회주의 국가 선교에 큰 활용을
사도행전을 통해 보면 사도 바울은 매우 담대하고 변론도 잘 하며 상당히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전도방법은 우리에게 훌륭한 모범이 된다.
이런 바울이 상대에 따라서 전도의 방법을 달리하였다는 것은 참으로 우리들의 관심을 끈다. 사도행전 14장에 보면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전도하면서 그냥 회당에 들어가 말씀을 증거했다고 되어 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널리 알려진 사건이었다. 성경은 바울의 전도에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은 반면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도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사도행전 17장을 보면 아덴에서는 바울이 방법을 달리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늘날 그리스의 아테네에 해당하는 아덴은 당시 온갖 우상이 난무하였으며(행 17:16), 반면에 문화와 학문도 융성한 곳이었다. 바울이 이때 유명한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과도 열띤 토론을 벌인 것으로 성경은 기록한다.
그런데 그들 철학자들이 바울이 말하는 복음에 대하여 무슨 이야기인지 도무지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행 17:18-21). 이때 바울은 그들에게 명쾌하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아덴 사람들이 찾고 있는 신은 무슨 형상이나 교훈이 아니라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맨 먼저 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 그분이 생명의 주인이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우리를 자녀 삼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전한다. 그러면서 회개를 촉구하며 심판이 다가옴을 알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다.
이때 바로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바울의 말을 듣던 사람들이 다양한 의견으로 갈라져서 웅성거리기 시작하였으며 몇몇은 바울의 이야기를 곧바로 믿고 따르기 시작하였는데 성경은 그 사람들 중에는 법관과 여자와 보통사람들이 섞여져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바울의 그러한 시도가 남녀노소, 지식과 빈부의 격차와 아무런 관계없이 평등하게 적용되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방인인 아덴 사람들에게 무작정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고 우주의 창조주가 계시며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외친 바울의 전도방법은 성령께서 주신, 바울의 복음을 전하는 지혜를 엿보게 한다.
로마서는 기독교 교리의 핵심을 잘 전해주는 책이다. 이 로마서도 이방인들을 위하여 바울이 쓴 책인데 여기서도 그가 이방인들에게 어떤 순서로 복음을 전하고 있는지 잘 나타난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기 전에 먼저 창조주 하나님이 이 우주를 창조하셨으며 그것을 우주만물에 분명히 알도록 계시해 놓으셨다고 증거한다(롬 1:20).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않고 감사치도 아니한다고 했다. 즉 이것이 바로 죄의 근본이다. 우리는 보통 불의나 추악, 탐욕, 시기, 질투 등을 죄라고 말한다. 물론 이것이 죄의 열매이기는 하나 그 자체가 죄의 근본 원인은 아니다.
이렇게 죄의 근본 원인을 명확히 밝히고 나서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고 있다.
유대인들에게는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의 존재가 너무나도 분명하여 그들에게는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선포가 필요 없었기 때문에 바로 말씀을 증거하였고, 이방인들의 마음속에는 잡다한 우상들이 많았기 때문에 먼저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선포하고 복음을 증거하였다고 볼 수 있겠다.
사실 우리 민족도 한때는 복음의 이방인이었다. 그런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우리의 가까운 이웃에는 아직도 그와 같은 복음의 이방인이 많이 남아 있다. 바로 북녘 땅과 일본, 북방의 사회주의권 나라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사명을 우리에게 명령하시고 재촉하시는지도 모른다. 복음은 때론 바울처럼 지혜롭게 전하는 일이 필요할 때도 있다.
우리보다 복음이 먼저 들어가고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고 시도한 일본의 복음화가 별다른 열매를 맺지 못함은 바로 아덴과도 같이 8백만개 우상을 신으로 섬기고 종교성이 풍부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지혜도 필요한 것은 아닐까?
무신론적 유물사관에 젖어있던 북방의 사회주의 국가들에도 이것은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바울이 전도의 방법 가운데 하나로 이방인에게 우선적으로 전한 이와 같은 창조 사실의 선포는 오늘날 무신론과 진화론에 젖어있는 이들 국가에 복음을 전할 사명이 있는 우리들에게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12. 분자생물학으로 창조 신비 캔다
유전인자 추적 통해 인류의 조상 뿌리 캐
창조과학 매도 유감 ... 과학적 접근 아쉬워
미국의 유명한 주간지 '뉴스위크'는 1988년 1월 11일 '아담과 이브를 찾아서'라는 제목의 아주 흥미 있는 과학기사를 표지의 특집기사로 다룬 적이 있다.
과학기사가 일반 주간지의 표지 특집기사로 선정되는 경우란 거의 없다. 지구촌 곳곳에서 다양한 사건 사고가 빈발하는 오늘날 독자들의 시선을 끌만한 여간 흥미를 지닌 기사가 아니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사실 이 기사는 그보다 1년전인 1987년 1월 26일 뉴스위크지와 경쟁 관계에 있는 주간지인 [타임스]에 먼저 실렸던 적이 있는 기사였는데 특종을 놓친 뉴스위크지가 1년이 지난 후 더욱 크게 표지의 특집기사로 다루게 된 것이다.
그 내용이 화제가 되었던 이유는 진화론에서는 지금까지 진화는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서 천천히 이루어졌으며 인류의 진화도 수백만년에 걸쳐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졌다고 주장되어 왔으나, 이 기사에 소개되고 있는 몇몇 학자들은 현재 살아있는 모든 인류는 약 14만년 전쯤에 아프리카에서 살던 한 여자를 공통 조상으로 하여 시작되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브'(여기서 이브는 이들이 성경을 믿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아님)라고 불려진 이 여성은 오늘날 모든 인류의 조상이 되는데 검은 머리에 검은 피부를 지녔으며 먹을 것을 찾아서 아프리카의 초원을 떠돌아다녔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아마도 그녀는 세계적인 여자 테니스 선수였던 나브라 틸로바처럼 남자와도 같은 강한 근육질의 몸에 강인한 체력을 소유하였으며 짐승을 맨손으로 잡아먹고 석기를 다룰 줄 아는 여자였을 거라고 상상한다.
물론 이런 상상은 모두 진화론자들의 상상일 뿐 성경적인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연구 결과가 우리들의 흥미를 끄는 것은 이들이 최신의 분자생물학적 방법으로 이끌어낸 결론이 기존의 인류진화론자들이 주장하던 진화의 연대를 모두 허물어뜨릴 뿐 아니라 우리 인류가 한 조상으로부터 왔다는 명백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당시 지구상에 살던 유일한 여성은 아니었으나(이것도 물론 성경적이 아니다) 오늘날의 모든 여성들에게 자신의 일정한 유전정보를 유전시킬 수 있었던 출산력이 왕성하였던 매우 재수 좋은(?) 유일한 여성으로, 우리 직계로 계산하면 1만대조 할머니라고 이들은 주장하였다.
과거에는 전통적인 인류진화론자들이 어떤 화석을 발견할 경우 그것을 인류의 화석이라고 제시하고 그 화석의 연대를 수만년에서 수백만년 등 제멋대로 주장하여도 특별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단지 터무니없게 제시된 몇몇 화석류나 이빨들만이 논란이 되거나 창조론자들만이 반론을 제시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 '이브의 이론'은 아프리카에서 무슨 화석을 발굴하여 이론을 세운 것이 아니라 실험실 안에서 분자생물학자들에 의하여 우리 모든 인류의 조상이 한 여자로부터 왔다는 것을 유전인자의 추적을 통하여 주장하였기 때문에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 논쟁에 있어 역시 가장 큰 논란은 앞서 말했듯 지금까지 진화는 매우 천천히 오랜 기간에 걸쳐서 진행되어 왔다고 모든 진화론자들이 믿고 있었는데, 이 최초의 여성은 약 14만년에서 28만년전쯤에 아프리카에서 시작되었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이들이 주장하는 연대도 반드시 성경적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이것만 가지고도 기존의 인류진화에 관한 모든 연대가 허물어져 버리므로 그 동안 학생들이 교과서에서 배워왔던 모든 인류 조상의 화석이라는 것들을 무용지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주목되지 않을 수 없다.
진화론을 신봉하는 유명한 인류학자인 리처드 리키는 지난 1977년, 현대 인류가 시작되었다고 인정할만한 특별한 장소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단언한 적이 있다. 그런데 또다른 유명한 진화론 고생물학자인 하버드 대학의 스테판 굴드 교수는 '이브의 논쟁'이 인류가 한 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고 고백하고 있다.
미국 테네시 대학의 진화론 고생물학자인 프레드 스미스 박사는 이같은 곤혹스러운 입장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분자생물학적인 방법을 통하여 유전인자로부터 얻어낸 '이브'에 관한 자료는 너무도 확실하고 과학적이므로 우리 고생물학자들을 그저 무능하고 못난 구식의 사람들로 만들어버렸다"
문제는 왜 이번 사실들이 국내에서는 크게 보도도 되지 않고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고 있느냐는 점이다.
얼마전 모 주간지에는 한 진화론 옹호자가 이 고정란을 포함하여 창조과학회를 마치 광신자들의 단체인 것처럼 감정적으로 매도하는 글을 게재한 적이 있는데, 스미스 박사처럼 자신의 이론과 다르더라도 과학적 사실을 겸손히 긍정하는 자세가 아쉽게 느껴진다. 그 글을 쓴 사람은 과학자도 아니었다. 과학자도 아닌 사람이 어떻게 과학자들의 단체를 과학적으로 잘못되었다고 과학이 아닌 개인의 감정만으로 매도할 수 있을까. 과학적 논리를 가지고 토론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그럼 '이브'에 관한 연구로 큰 파문을 일으킨 장본인들이 어떤 방법으로 이런 결과를 얻게 된 것인지 좀 더 추적해 보고, 성경적으로는 이 이론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 간단히 다루어 보고자 한다.
13. 인류는 한 여자로부터 왔다
미국 윌슨 등 교수 3인 '이브론' 진화론계 파문
미토콘드리아 유전인자 모녀간에만 내림
'행운의 한 어머니'인 조상 '하와' 인정은 꺼려
모든 인류가 한 여자로부터 왔다고 주장하여 파문을 일으킨 당사자들은 미국 하와이 대학의 레베카 칸 교수와 버클리 대학의 윌슨, 그리고 마크 스톤킹 교수였다.
이들은 '이브'를 추적하기 위하여 1백47명의 산모를 설득하여 아이의 태반을 기증 받았다. 이들이 얻은 태반 주인은 미국, 아프리카, 유럽, 중동을 비롯하여 아시아와 호주, 뉴기니의 원주민 여성 등 다양하였다.
보통 사람의 유전인자는 체세포의 핵 안에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이 태반에서 추출한 유전인자는 세포를 유지시키는 거의 모든 에너지를 생산하는 미토콘드리아에 존재하는 유전인자였다.
사실 1960년대까지만 하여도 미토콘드리아 내에 존재하는 유전인자에 관하여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1970년대말 이 미토콘드리아 내에 존재하는 유전인자는 어머니로부터 딸에게로만 전해지므로 혈통관계를 추적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즉 미토콘드리아 내에 있는 유전인자는 핵 안에 있는 유전인자처럼 부모의 유전인자가 서로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세대에 걸쳐 여성에게로만 일정하게 전달되어 온 것이다. 이것이 바뀌려면 돌연변이에 의해서만 가능한데 모든 여성들에게 동일한 것으로 보아 그렇게 많은 유전암호의 재배열이 우연하게 나타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결국 미토콘드리아 내의 유전인자는 하나님이 주신 그대로 보존되어 왔다는 증거이며 사람이 다른 동물로부터 진화되어 왔다는 진화론을 부정하고 있다.
스톤킹 교수는 이것에 대하여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인류의 시작은 생각보다 그리 오래 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타 문화권 사이에 유전적 차이도 거의 없고 미토콘드리아 유전인자의 개념에서 보면 다른 어떤 척추동물이나 포유류보다도 인류 상호간에는 혈통적으로 매우 밀접하다"
또 이들은 어린 유아의 유전인자를 통하여 볼 때, 인류는 아프리카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유전인자는 두 가지 범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현재의 아프리카 사람들에게서만 발견되는 유전인자와 또 하나는 현재의 아프리카 사람들과 다른 지역에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유전인자이다.
그런데 고립되어 있는 어떤 아프리카 사람들의 집단에서 발견되는 유전인자는 좀더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으므로 이 지역이 바로 전세계에 있는 현재 모든 인류의 공동 조상이 되는 여성이 살았던 곳이라는 것이다.
윌슨 교수는 우리의 조상이 된 [행운의 한 어머니]가 있었음에 틀림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 한 어머니가 '이브'로 표현된 것에 대해 성경과 연관하는 것은 극구 꺼리고 있다. 아마도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인류의 본성(롬 1:28) 때문이 아닐까?
그는 이 '이브' 말고도 당시 최소한 수천명의 남녀가 함께 살았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들도 모두 우리의 조상이라는 것이다. 다만 그들 모두는 우연하게도 자손들이 계속 딸을 낳는데 실패하여 결국은 그녀들이 가진 미토콘드리아 유전인자를 '이브'처럼 전하지는 못하였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이브'는 과연 누구일까?
이 이브를 성경의 '하와'라고 말하면 모든 문제는 간단히 풀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연구 결과를 발표한 윌슨 교수 등은 그 점을 인정하는 것은 마음에 내키지 않는 것 같다.
아무튼 한 명의 '이브'가 남게 된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끈질긴 추적을 계속하고 있는 윌슨 교수 팀과 기존의 진화론을 고수하기 위한 진화론자들간의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14. '대홍수'관심서 지질학 태동
화석의 형성 기원 성경에 입각 규명 시도
초기의 과학적 업적 진화론 증거로 왜곡
지질학이라는 학문은 본래 주된 관심사가 성경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는 대홍수 당시에 발생한 지층의 퇴적에 관하여 알아보기 위하여 유럽에서 시작된 학문이었다. 18세기까지 당시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또한 그들 학자는 대부분 신실한 기독교인들이기도 했다.
물론 여기에 대한 반론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반론이 대홍수 자체를 거부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으며 대홍수를 거부하더라도 학문적으로 문제가 될만한 주장은 되지 못하였다. 중세에 들어와 일부 사람들은 화석이 자연적으로 생긴 기형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지층의 화석들이 대홍수로 인하여 생겨났다고 생각했다. 과학을 잘 모르는 사람들 가운데는 화석은 사탄이 인간을 속이기 위하여 암석에 넣은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인간을 시험하기 위해서 암석에 그런 것들을 넣어 두셨다고 생각하였다.
화석이 자연적 동인(動因)에 의하여 생겨났음을 처음 확인한 사람은 16세기초에 살았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였다. 1695년에는 영국 캠브리지 대학의 의학 교수였던 존 우드워드가 성경의 대홍수가 어떻게 지구를 변화시켜 버렸는지 과학적 해석을 시도하였으며, 화석의 기원이 대홍수와 관련된 유기체라는 것을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확신시켰다.
일부 진화론자들은 다빈치의 견해가 대홍수를 거부하고 진화론을 인정한 것이라고 확대 해석한다. 그렇지만 다빈치의 견해는 단순히 사물을 보는 그의 뛰어난 통찰력에 의한 화석 생성에 관한 일반적인 견해를 보여준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그런데 18세기 들어와 조금 더 학문적으로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영국의 제임스 허튼(1726-1797)이었다. 법률을 공부하다가 네덜란드의 라이덴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한 그는 현재는 과거를 푸는 열쇠라는 말로 지층도 현재를 기준하여 보면 과거의 퇴적된 모습을 유추하여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도 그와 같은 동일한 입장에서 해석해 보려는 견해였는데, 화석이 대부분 대홍수에 의하여 생긴 것이라고 당연히 믿고 있던 당시의 기독교인들과 일반인들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견해였다. 만일 대격변이 있었다면 허튼이 말한 현재의 기준만을 가지고는 과거의 지층 모습을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지질학에 있어서의 진화론을 단호히 거부한 대표적인 사람은 프랑스의 유명한 과학자인 퀴비에(1769-1832)였다.
그는 당시 창조와 진화에 대한 토론에도 참석할 만큼 창조론을 철저히 지지하는 창조론자였다. 그는 동물을 4개 집단으로 나누어 그 구조와 기능 사이의 관계를 성경적 입장에서 해석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성경에 기록된 대홍수에 의하여 지구상에 커다란 격변이 있었다고 믿는 천변지이설을 주장한 사람이었다.
오늘날 그는 '현대 동물 비교학의 아버지'라고 불려질 만큼 위대한 업적을 남긴 과학자였다. 또한 화석과 지층에 대한 그의 해박한 지식과 이론은 오늘날 그를 '고생물학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이 모든 생물을 종류대로 창조하셨다고 믿던 철저한 창조론자였던 스웨덴의 린네(1707-1778)가 하나님이 만드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나누어보기 위해 시작했던 분류학이 오늘날 거꾸로 마치 진화를 증거하는 도구로 바뀌어버린 것처럼 퀴비에의 동물비교학이나 고생물학도 오늘날에는 마치 진화론의 전유물처럼 되어가고 있다. 그렇지만 진화의 증거들이 나타남으로써 이렇게 바꾸어버린 것이 아니라 성경에 반감을 지닌 일부 사람들에 의하여 주도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진화를 믿도록 만들어버렸다는 데 그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1830년 라이엘(1797-1875)이라는 영국인은 허튼의 이론을 좀더 정리하여 '지질학의 원리'라는 책을 냈다. 그는 원래 법률학을 공부하던 사람이었는데 지질학에 흥미를 갖고 옥스포드 대학에서 지질학을 공부한 사람이었다. 그의 책은 대홍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비판을 받았으나 성경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
생물의 진화를 주장한 다윈도 실은 자기 책의 이론의 절반은 라이엘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고백하고 있다.
성경적 홍수 지질학은 이때부터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 의하여 진화론적 지질학으로 대체되기 시작한 것이다.
성경적 지질학이 갑자기 진화론적인 지질학으로 넘어가버린 데에는 당시 신학자들의 무분별한 성경 비판 경향과도 무관하지만은 않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5. 라마르크 진화론은 죽은 이론
"후천적 '획득형질' 유전되지 않는다" 입증
아직도 세련되게 포장, 교과서에 '버젓이'
지질학뿐만 아니라 다윈 이전에 이미 생물학계에서도 진화론을 인정하려는 분위기는 생겨나고 있었다. 퀴비에의 대격변론이나 종의 불변설에 생물학적으로 반기를 든 사람은 라마르크(1744 1829)였다. 그는 생물을 단순한 것으로부터 복잡한 종으로 나열하여 정리해 보기도 하는 등 종의 진화에 관하여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1802년 그는 진화에 관한 최초의 체계적 이론인 용불용설(用不用說)이라는 것을 발표하였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어떤 생물체가 살고있는 환경에서 무엇이 필요해지면 생물은 스스로 그가 필요한 새로운 기관을 만들거나 자신의 기관을 변형시키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해서 생긴 기관은 지속적으로 사용이 되면서 크기나 기능이 점점 증대되고, 반대로 사용하지 않는 기관은 퇴화하거나 결국은 소멸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겨난 기관을 생물학적 용어로는 [획득형질]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바로 자녀에게 전해져서 진화된다고 보았다.
진화가 일어난 원인에 대한 설명만 다를 뿐 이 이론의 골격은 오늘날의 진화를 설명하는 방법과 조금도 차이가 없다.
예를 들어 목이 긴 기린이 어떻게 해서 목이 길어졌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라마르크는 이렇게 주장하였다.
본래는 목이 짧았던 기린의 조상이 높은 곳에 위치한 나무의 열매를 따먹기 위해서 목을 길게 늘어뜨린다. 이런 행동이 점점 거듭되면서 마침내 목을 길게 만드는 유전형질이 새끼들에게 전달된다. 물론 목이 긴 만큼 적을 잘 발견하게 되어 도망가는 일도 보다 더 유리해진다. 이런 행동이 점점 더 반복됨에 따라 마침내 기린은 오늘날과 같이 목이 길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마치 테니스 선수나 야구의 투수가 거듭된 훈련에 의하여 길어진 한쪽 팔이 그들의 자녀에게도 전달된다고 주장하는 이론과 같다.
그렇다면 태어날 때 아직 목이 자라지 않은 어린 기린은 어떻게 높은 곳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어서 살아남을 수 있었으며 왜 다른 동물들은 목이 자라지 않았는데 기린만 그렇게 되었는가 하는 점과, 무슨 이유로 기린은 지상의 풀이나 열매는 그대로 두고 나무 위의 열매만 따먹으려고 애를 썼는지 설명하기가 어렵다. 또 목이 길다는 것은 적을 발견하기도 쉽지만 반대로 적에게 발견되기 쉬운 치명적인 결점도 된다.
그밖에도 라마르크는 동굴 속의 물고기는 그들의 조상이 어두운 환경 가운데서 여러 세대를 살았기 때문에 눈을 사용하지 않아 결국 퇴화되어서 눈이 멀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다시 말하면 주로 어두운 밤에 다니는 박쥐도 그렇게 해서 밝은 데서 적응하는 눈이 어두워져 버렸다는 해석이다. 그런데 실은 박쥐는 눈이 있어 밝은 곳에서도 먹이를 아주 잘 먹는다.
후천적인 획득형질이 유전된다는 이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은 19세기 말엽까지는 대체적으로 학자들이 인정한 이론이었다. 그런데 19세기 말 독일 과학자 아우구스트 바이스만은 교미하기 이전의 생쥐 꼬리를 계속 잘라줌으로써 꼬리 없는 생쥐를 만들고자 20세대에 걸쳐 이 실험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마지막 세대까지 그들의 조상과 똑같은 길이의 꼬리를 가진 생쥐가 태어날 뿐 꼬리 없는 생쥐는 전혀 생겨나지를 않았다.
오히려 이 실험은 후천적인 획득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는 최초의 증명이 되어버렸다. 오늘날에는 이렇게 얻어진 획득형질은 절대로 진화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명확히 밝혀짐으로써 라마르크의 이론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런데 오늘날도 이 이론은 마치 진화에 관한 대단한 이론인 것처럼 교과서에 소개되고 있다. 그 이유는 단지 이것이 증명된 사실이라기보다 생물학적 진화에 관한 최초의 이론이라는 단 한가지 이유 때문이다.
아무런 과학적 근거도 없어 폐기처분된 이론을 그토록 교과서가 지속적으로 친절하게 소개하고 있는 이유가 참으로 아리송하기만 하다. 라마르크의 이론의 골격이 오늘날의 진화론에서 주장하는 이론과 과연 무엇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라마르크 당시보다 좀더 과학적으로 세련되게 포장되었다는 것이 다를 뿐 진화론의 그 기본적 입장은 오늘날도 전혀 아무런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
16. 살아남은 것일 뿐 진화가 아니다
다윈의 주장은 명백히 입증 안된 억측에 불과
환경적응 문제 ... 본 모습은 변할 수 없어
진화론을 주장한 찰스 다윈은 용불용설을 주장한 라마르크가 한참 활동하던 1809년 영국의 슈루즈베리의 의사 로버트 다윈의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에라스무스 다윈은 의사요, 시인이요, 물리학자였다. 그는 1794년 '주노미아'라는 동물생리학에 관한 책을 썼는데, 이 책은 환경에 대한 동물의 능동적 반응에 관하여 다룬 책으로 훗날 적자생존을 주장한 찰스 다윈의 이론과 일부 유사한 면이 있었다.
찰스 다윈이 할아버지로부터 진화에 관해 어떤 착상을 얻게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전혀 무관하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는 아버지의 권유로 에딘버러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였지만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해양동물을 수집하거나 조개를 줍고 새에게 관심을 갖는 등 조금은 별난 취미를 갖고 있었다. 더욱이 어려서부터 그는 허무맹랑한 거짓말을 꾸며내거나 백일몽에 빠지는 경향이 있었다고 브리태니카 백과사전은 쓰고 있다.
이런 다윈이 진화론을 주장하게된 직접적인 동기는 1831년 12월 비글호를 타고 세계를 일주할 기회가 생기면서 시작된다. 영국을 출발하여 남아메리카, 호주를 거쳐서 아프리카 남부를 돌아오는 이 배의 항해 목적은 각 대륙의 해양을 측량하고 몇몇 지역에 계시(計時) 측정소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모두 76명이 승선하였던 이 배에 다윈은 어떤 자격으로 승선할 수 있었는지 아직도 명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당시 그가 영국 해군이 항해시에 공식적으로 승선시키도록 되어있는 공식적인 박물학자의 자격이었다고 지적하지만 유명한 진화론자인 하버드 대학의 굴드 교수는 당시의 모든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비글호의 공식 박물학자는 그 배의 군의관이었던 매코맥이었음이 틀림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당시 정규 박물학 과정을 이수한 사람이었고 당시의 해군 관례상 의사와 박물학자는 겸임하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는 남극탐험까지 참가한 적이 있던 경험 있는 박물학자였다.
그렇다면 도대체 다윈은 무엇 때문에 그 배에 승선한 것이었을까?
당시 선장 피츠로이는 26세였는데 22세의 다윈은 그의 말동무로 발탁된 것이 분명한 것 같다. 1830년대 영국 해군은 규율이 엄격하여 선장은 공식적인 업무 이외에는 장교와의 대화도 금지되어 있었으며 식사도 별도로 해야만 되었다. 항해 자체가 얼마나 고독과의 치열한 투쟁인지는 배를 오래 타본 사람만이 알 수 있었다 한다.
아무튼 다윈은 빈둥거리며 살면서도 남의 식탁동무가 되어 세상을 떠돌아다닐 수 있을 만큼 특권을 지닌 상류층의 자제였다.
본래 호기심 많고 탐험과 채집을 좋아하던 그는 마침내 이 항해를 통하여 진화론을 구상하게 되었다.
비글호가 에콰도르 해안으로부터 약 6백마일 떨어진 갈라파고스 군도에 도착했을 때 다윈은 아주 중요한 관찰을 하게 되었다.
갈라파고스 군도는 섬마다 세계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핀치새가 서식하고 있었음을 알아냈다.
부리가 커다란 종류가 많이 사는 섬과 작은 부리를 지닌 핀치새가 모여있는 섬이 있는가 하면 식물의 새싹이나 열매, 곤충들을 먹기 좋게 앵무새 부리처럼 생긴 새도 있었다.
갈라파고스 섬에 있는 핀치새들은 가까운 본토에 서식하고 있는 핀치새를 많이 닮아 있었다. 다윈은 이것이 본토에 있던 일부 핀치새가 섬으로 이동하여 무리를 이루는 과정에서 다양한 핀치류로 진화되었을 것이라고 가정하였다. 이것이 그가 '종의 기원'이라는 유명한 진화론에 관한 책을 쓰게 된 동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들 핀치새가 오늘날 다른 새로 진화하였다는 흔적은 전혀 없다.
섬마다 핀치새의 모습이 조금씩 달랐다는 것은 진화로 설명하기보다 단순히 격리된 섬에서의 적응에 실패한 부리를 가진 새들이 멸종하였거나 본래 그곳에는 그들 핀치새 종류만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오늘날 포유류 중 낙타만이 사막에 살아남았다고 낙타만이 사막에 알맞게 진화한 것이 아니다. 낙타가 그 어느 동물보다도 사막의 기후에 견디는 힘이 강할 뿐이다.
성경의 구약에 보면 과거 중동지방에는 사자가 많이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은 중동지방에서 사자를 볼 수 없다. 이것은 중동지방이 사막화하면서 이들 동물은 그곳의 환경적응에 실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낙타는 그 독특한 모습 그대로 본래부터 낙타일 뿐 사막에서 낙타로 진화되어 온 어떠한 화석도 발견되지 않는다.
17. 다윈의 이론은 꿰어 맞추기식
비둘기 교배실험 통해 변종 가능성 주장
종(種) 안에서의 변이를 진화로 '침소봉대'
1836년 영국으로 돌아온 다윈은 자신의 이론을 세우기 위하여 자료를 정리하며 여러 학자들을 만나게 된다.
특히 그는 야생의 비둘기를 선택하여 인위적으로 교배시켜 공작비둘기, 집비둘기, 전서구(傳書鳩), 공중제비비둘기 등 1백여가지의 서로 다른 형태의 비둘기들을 아주 짧은 기간에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만일 오랜 시간이 경과한다면 이들 비둘기들에게는 더욱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서 새로운 종이 생겨날 수도 있을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그러나 오늘날 그렇게 변이가 잘되는 비둘기라도 다른 새로 진화했거나 진화과정중의 비둘기가 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사람들은 다윈과 거의 동시대에 살았던 멘델(1882-1884)이 발견한 유전법칙이 진화의 증거가 된다고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지만, 오히려 멘델의 법칙은 종(種) 안에서의 변이만 가능하다는 변이의 한계를 뚜렷이 규정한 법칙이었다.
1859년 다윈이 진화론을 설명한 '종의 기원'을 발간한지 7년 후인 1866년 멘델이 발표한 실험 결과를 만일 다윈이 알았다면 다윈은 그의 이론을 수정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멘델의 유전법칙은 종 내에서의 변이를 말하는 소진화에 잘 적용이 되는 법칙이다. 그러나 이것이 대진화의 증거도 된다고 말하는 진화론자들의 의견은 전혀 그 증거가 없다.
그것은 증거가 있어서라기보다 소진화가 쌓이면 대진화도 가능할 거라는 믿음일 뿐이다. 과학자들은 어떤 면에서는 누구보다도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나 고집을 꺾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멘델의 법칙도 당시에는 아무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의 이론이 인정받게 된 것은 그의 사후인 1900년 유명한 식물학자 드프리스와 코멘스, 체르막 세사람에 의해서였다.
아무튼 그리스 시대부터 시작하여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쳐 2천년 후인 19세기 중반, 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진화론은 결국 다윈의 제안에 의하여 과학의 영역으로 흡수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다윈의 진화론이 그냥 그대로 과학적 사실로 인정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 과학자들은 그의 견해를 극렬히 비판하였다. 유명한 생물학자였던 리처드 오웬(1804-1892)은 그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그가 자세히 분류한 파충류의 화석은 오늘날도 통용이 될 정도로 매우 뛰어난 생물학자였다. 그는 1840년에는 공룡의 화석을 '무시무시한 도마뱀'이라는 의미를 가진 '공룡'이라고 처음으로 명명하여 세상에 알린 유명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그는 다윈의 진화론을 가장 극렬히 비판한 생물학자였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종은 불변한다는 믿음과 과학자로서의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또한 고생물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퀴비에의 영향을 많이 받은 과학자로도 유명하다. 결국 그는 창조과학자의 전통을 계승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미국에서는 하버드 대학의 유명한 어류학자였던 아가시(1807-1873)가 다윈의 이론을 비판하고 있다.
다윈은 우리가 앞에서 다루었던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을 부인하고 범생설이라는 것을 주장하였다. 이 이론에 따르면 생물체의 모든 부위는 어떤 작은 입자를 만들고 이것은 혈액을 통하여 생식기관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이것이 쌓이다 보면 배우자와의 결합에 의하여 유전이 가능해진다고 설명하였다.
그런데 이 이론도 결국은 획득형질이 유전된다는 라마르크의 이론과 다를 바 없는 이론인 셈이다. 다윈은 자신이 부정한 라마르크설에 자신도 모르게 되돌아가 버린 것이다. 오늘날의 진화론도 결국은 자세히 검토해 보면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맴돌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진화의 메커니즘은 아직도 규명되지 않고 있다. 진화가 정말로 이루어졌다면 우연한 세상에서 우연히 이루어진 그 일을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아직도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니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중간단계의 화석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과 진화의 메커니즘을 아직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 진화론이 해마다 푯대 없이 변하고 있다는 것은 그 이론이 바로 허구라는 강력한 반론이 되지 않을까?
그렇지만 이미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는 과학자들이 주도하기 시작한 기원에 대한 연구는 어느 틈엔가 진화는 당연한 것으로 몰고가기 시작했다.
진화의 증거나 그 메커니즘을 알 수 없더라도 진화는 당연한 것이라고 믿어버렸기에 과학자들은 생명이 어떻게 우연히 탄생할 수 있었는지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생명의 기원 논쟁에서도 진화론의 시행착오는 계속된다.
18. '철마다 옷갈아 입는' 자연발생설
실험결과 다를 때마다 '진리'도 갈팡질팡
과학의 변덕, 변함없는 성경말씀과 대조
다윈 이전에도 생물의 자연발생에 관하여는 여러 이론이 있어 왔다.
기원전 그리스 이오니아 학파의 자연철학자들은 생물은 열과 공기와 태양에 의하여 진흙에서 우연히 발생하였다고 하였으며, 아리스토텔레스(BC384-322)도 생명의 자연발생론을 주장하였다. 흥미 있는 것은 진흙에 의한 자연발생설이 최근에 과학자들에 의하여 또다시 각광받는 이론이 되어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기원전 그리스의 학자들은 그저 단순히 우연하게 발생하였다고 생각하였으나 최근의 과학자들은 흙 속에서 아주 오랜 기간이 지나다 보니 우연히 생물이 자연발생하였다고 수정하여 가정하고 있는 것이 다르다고 하겠다.
반면에 어떻게 발생하였건 간에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어 왔다. 어거스틴으로부터 시작하여 혈액의 순환을 발견한 윌리엄 하비(1578-1657)나, 현미경을 만든 레벤후크(1632-1723) 등이 그러한 경우였다.
현미경이 발명되기 전까지는 미생물의 존재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기에 생물의 발생에 관한 논쟁을 오늘날 뒤돌아보면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경우도 많았다.
벨기에의 헬몬트(1577-1644) 같은 과학자는 심지어 쥐처럼 큰 동물도 우연히 발생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젖은 셔츠와 밀알을 항아리 속에다 넣어 두었더니 셔츠에서 생기는 습기 때문에 밀에서 쥐가 생겨났다. 작은 생물들도 조건만 된다면 자연적으로 우연히 생겨날 수 있다"
밀을 먹으려고 항아리 속으로 쥐가 들어가서 발생한 일이었지만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이론이었다.
생물의 발생에 관한 당시의 이론은 과학적 실험결과가 뒷받침 된 것이 아니었기에 이처럼 원점에서 맴돌곤 했다.
이 문제를 처음으로 과학적으로 실험해보려고 시도한 사람은 이탈리아의 레디(1626-1697)라는 과학자였다.
당시 사람들은 고기가 부패하면 그곳에는 자연적으로 구더기가 발생하게 된다고 믿어 왔다. 그런데 그는 4개의 플라스크에 고기를 넣어 밀봉을 하고, 다른 4개의 플라스크에는 고기를 넣은 다음 마개를 막지 않은 채 그대로 방치해 두었다.
그랬더니 밀봉한 플라스크에는 구더기가 생기지 않았는데, 마개를 하지 않은 플라스크 안의 고기들은 구더기가 생기고 파리들이 드나드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는 간단한 실험을 통하여 미생물들이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최초로 실험적으로 밝혔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동물과 식물들은 하나님께서 종류대로 만드셨으며, 그러기에 종은 새로 생겨나거나 다른 종류로 변화되어가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1600년대말, 마침내 현미경이 발견되면서 생물의 자연발생설은 조금씩 후퇴하게 되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다시 한번 자연발생설은 고개를 들게 된다. 여기에는 일부 종교지도자들이 합세하기도 했는데 스코틀랜드의 신부이며 자연박물학자였던 존 니덤(1713-1781)은 그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염소 고기를 삶은 즙을 플라스크에 넣고 공기 중에 있는 미생물들이 못 들어가게 마개를 막았다. 그리고 숯불로 가열한 후 며칠을 두니 플라스크 안에 온통 미생물이 번식하였다. 생물은 분명히 자연발생한다"
1745년 발표된 이 논문은 많은 소동을 일으켰다.
이탈리아의 생물학자였던 스팔란차니(1729-1799)는 존 니덤의 실험을 조심스럽게 재현해 보았는데 동물이나 식물의 즙을 좀더 오래 끓인 후에 뜨거운 상태에서 잘 밀봉하였더니 현미경으로 관찰해 보아도 별다른 미생물의 번식이 눈에 뛰지 않았으며, 병의 뚜껑을 열어 공기 중에 노출시킨 후에야 미생물이 신속히 번식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실험은 상당히 정확한 결과를 얻어낸 실험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멘델이 자신의 유전법칙을 발표한지 35년 후인 그의 사후에야 이론을 인정받을 수 있었듯이 당시의 학계 분위기는 그것이 아니었다.
이 문제로 니덤과 스팔란차니는 치열한 논쟁을 벌이게 되었는데 기체반응의 법칙을 발견한 프랑스의 유명한 물리화학자였던 게이뤼삭(1778-1850)이나 우리가 다룬바 있는 용불용설의 라마르크 같은 당대의 유명한 학자들은 오히려 대부분 니덤의 편이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은 우습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당시의 상황으로는 그것이 과학적 실험의 결과였고 진실이었다. 이들 교훈을 통하여 우리들은 오늘날의 과학적 결론이라는 것도 훗날에는 언제든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버릴 수도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수천년 동안 많은 사람들의 비난과 공격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흔들림 없이 인류에게 전해져온 성경의 말씀과 오늘날 그토록 사람들이 신봉하려고 드는 과학의 이런 모습은 극명하게 비교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진화론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도 이제는 과학자들이 무조건 믿으려 들지 말고 좀더 냉철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 생명의 근원 아무도 못 밝혀
"창조냐, 진화냐" 결국 선택의 문제로 귀착
우주만물의 오묘한 질서 성경논리는 명쾌
생명이 과연 무엇이고 어떻게 그것이 이 지구라고 하는 곳에 탄생하게 되었는지 사실 오늘날의 과학자들이 아는 것은 별로 없다.
실제로 최근에 나온 외국의 생명과학 관련 서적을 보아도 생명은 과연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굳이 정의를 내려본다면 생명은 '무엇이냐'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무엇을 행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하였다. 즉 생명은 그것을 구성하는 물질에 의해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을 행하고 있는가에 의해서 정의된다는 것이다.
생명은 스스로 복제하고 자체번식을 하며 성장도 한다. 단지 이런 현상에 의하여 정의될 뿐 생명은 왜, 무엇 때문에 이곳에 존재하게 되었는지 과학자들 뿐 아니라 우리 모두는 대답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데 진화론자들은 우주에 우연히 물질이 있었으며 이것이 오랜 시간 지나다 보니까 오늘날의 사람으로까지 진화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우주의 물질과 시간과 공간을 직접 창조하셨으며(창 1:1), 생명체들은 종류대로 만드셨음을 강조하고 계시며(창세기 1장, 고전 15:38-40), 또 창조의 사실을 알 수 있도록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하셨고(롬 1:20), 그것을 만드신 이유는 그것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요(시 19:1-3, 시 148:5), 또한 그것들을 과연 누가 만들었는지 알아 보라(사 40:26)고 하셨다. 사실 다윗은 시편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에 못지 않게 하나님의 창조 솜씨에 대하여 거듭 찬양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화론자들은 우주는 우연히 생겨난 것이며 진화된 것도 당연하다는 주장을 편다. 이것은 과학의 문제라기 보다 어쩌면 선택의 영역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그것은 바로 앞에서 이야기하였듯 우주와 생명이 왜, 무엇 때문에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우리 인류는 명확히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 기독교인들은 당연히 창조를 선택하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가 창조주로 믿는 성경의 하나님께서 이 우주를 창조하셨으며 그것을 창조의 세계 안에 나타내셨기에 과학적 논리로 보더라도 전혀 모순 없이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과학이 하나님께서 우주의 조화와 운행을 위하여 허락하신 약속된 질서라면 분명히 창조와 성경의 말씀과 모순이 되지 않음이 당연한 것이다.
이것을 다시 설명한다면 성경은 관심의 방향이 다른 책이므로 과학책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진정한 과학은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럼 생명의 최소 단위인 세포를 통하여 이 문제를 한번 알아보자.
하나의 세포를 전자현미경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구조가 살아있는 대도시처럼 매우 복잡하고 정교한데 놀라게 된다. 그런데 세포를 단순히 그 구조 안에 존재하는 미토콘드리아나 리보좀, 핵, 원형질, 세포막 등을 가지고 이해하려고 든다면 우리들은 그 본질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세포는 정교한 화학공장과도 같은데 그 안에 핵산이라고 하는 유전인자가 들어있어 종류만 하여도 10만가지에 달하는 단백질들을 유전인자의 지시에 따라 수초의 간격으로 스스로 만들어 낸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인체는 약 60조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들 중 약 2%에 해당하는 1조2천억개의 세포가 매일 몸 안에서 새로 만들어지고 오래된 것은 분해돼 몸밖으로 배출되어 버린다.
과학자들은 이 세포가 우연히 생성되었다고 말하는데 오늘날 어떠한 과학자도 세포의 한개나마 실험실 안에서 만들어 내지를 못한다. 여러 사람이 오랜 기간 무수한 지혜를 짜내어 만든 컴퓨터는 사람이 작동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고 쓰다보면 낡아빠져 고장이 나게 된다. 그런데 그보다 수억배 정교한 세포는 아무도 손을 쓰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신진대사를 하며 우리 몸의 혈액을 포함하여 근육 단백질과 1백40억에 이르는 뇌단백질까지 약 4개월만 지나면 모든 세포가 완전히 새것으로 바뀌어 버리게 된다. 도대체 누가 모든 역사 이래의 인류와 모든 생물들의 세포를 손 한번 쓰지 않고 이렇게 바꾸어 가면서 살아가도록 하는 것일까.
우리 몸의 심장은 평생을 살아가면서 부품(?)을 한번도 갈지 않고 평균 25억번을 실수하지 않고 뛴다. 만일 진화론이 사실이라면 수억년 동안 진화되어 오는 도중에 심장의 고장이 잦거나 갑자기 멈추어버리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여 지구상의 모든 생물들은 진화의 첫단계에서 일찌감치 멸망하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날까지 생물들이 이렇게 수백만종이 존재하고 지금까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과연 우연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20. 과학은 복음을 전하는 좋은 도구
창조세계의 오묘한 질서 규명 '값진 책무'
올바른 지식은 성숙한 신앙생활 길잡이
창조과학회가 '과학과 복음'과 연관하여 전하고 있는 전도지를 짤막하게 소개해 보고자 한다.
이것은 7가지의 사실로 복음을 전하는 전도지인데 먼저 이 우주만물은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음을 성경(창 1:1)과 과학을 통하여 전한다. 과학의 기본 이치는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는 인과율(因果律)인데 성경은 우주의 최초 원인은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알려준다.
그 다음 모든 생물은 우연히 진화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설계에 의하여 각각 그 종류대로 창조되었음(창 1:24,25, 고전 15:38-40)을 성경과 과학적 사실을 근거로 설명해 준다. 오늘날 1백50만종에 달하는 생물들이 진화론에 의하면 수억년을 거치는 동안 조금씩 진화되어 왔다고 주장되고 있으나, 그 중간 형태의 화석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하나님께서 모든 생물들을 종류대로 만드셨음이 분명함을 깨닫게 해준다.
셋째로 사람도 원숭이로부터 진화된 단순한 고등동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고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영적인 생명체로 특별하게 만드셨음(창 1:27, 2:7)을 전한다. 아무런 생각 없이 진화론을 과학적 사실이라고 무심코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들도 원숭이가 우리의 친척이 된다거나 우리 인류의 조상이라고 하면 거부감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으므로 이때 창조과학적인 지식을 활용하여 인류진화론의 모순점을 간단하게 알려준다.
넷째로 사람은 하나님이 지으신 우주만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분명히 알 수 있음을 선포(롬 1:20, 시 19:1)하고 과학적 사실을 통하여 우주는 설계자 되시는 하나님이 계실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한다. 우주의 조화와 질서.대칭, 생명체의 정교함, 생명에 대한 수학확률적인 고찰 등을 통하여 간단히 전할 수 있다.
다섯째로 사람이 하나님을 부인하고 불순종한 죄 때문에 우주와 생명을 만드신 하나님과 분리되어 죽을 수밖에 없음(롬 1:21,25, 6:23)을 설명하고 죄사함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은 과연 무엇인지 질문한다.
여섯번째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고 하나님과 화해시킬 수 있는 유일한 분(롬 5:8, 요 14:6)이심을 소개한다.
마음의 문이 열려 이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죄사함 받고 구원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음(요 1:12, 고후 5:17)을 전하면서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시키는 기도를 권유한다.
이렇게 모든 것을 전하고 나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믿음이 더욱 자라게 하고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교제를 위하여 복음을 전한 전도자가 나가는 교회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는 가까운 교회로 나가도록 권하고 필요하다면 잘 아는 목사님이나 성도들에게 연결시켜 믿음이 더욱 성장하도록 권유한다.
사실 복음을 전하는 방법은 다양하며 그러므로 각 개인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는 경우도 다양하기 마련이다. 다만 오늘날 진화론과 과학을 절대시하려는 경향이 있는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하게 되면서 과학이 과연 성경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으며 그것을 복음과는 어떻게 연결하면 좋을지 모르는 분들이 상당수 있기에 그 기본이 되는 전도방법을 소개한 것이다.
아무튼 과학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도구가 절대 아니다.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데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과학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오직 창조세계를 다루는 학문인 과학을 우리들에게 허락하신 참 하나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요 1:1:12)를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데 본 '창조과학 이야기'들을 통하여 얻게 된 과학적 지식과 사실들이 많은 성도들에 의하여 거듭거듭 쓰여질 수 있기를 기도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