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하나님의 침묵
7.1 문제 제기
◆인간이 갖는 근본적인 의문 = 왜 의로운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가?
* 사랑의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는 왜 침묵하시는가?
* 죄 때문이라면 하나님은 왜 처음부터 죄가 세상에 들어오는 것을 막지 않으셨는가?
* 하나님은 왜 처음부터 모든 것을 완벽하게 만들어서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도록 하지 않으시는가?
* (욥기의 주제 : 왜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사람이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욥 23:3-5)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 4 어찌하면 그 앞에서 내가 호소하며 변론할 말을 내 입에 채우고 5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며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랴” → 욥은 하나님이 내리는 벌에 대한 이유를 찾으려 애썼지만 아무런 해답을 얻지 못했다. (인간이 당하는 고통은 죄 문제와 따로 떼어서 설명할 수 없다.)
* (과학) 인간의 문제를 하나도 해결하지 못한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인 죽음을 해결할 수 없다. 과학이 밝혀낸 사실 = 인간은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다. 과학이 해결한 것 = 돈 있는 사람들을 조금 편하게 해 준 것.
◆문제에 대한 관점
* 사회주의자 ⇒ “자! 모두 함께 이 세상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자. 민주주의의 천국을 만들자.” 그들은 교육과 과학이 이 땅을 고칠 수 있다고 믿는다. (하나님을 빼놓고…)
* 이신론자 ⇒ 하나님은 선하시기는 하지만 인간 삶의 세부적인 것까지 돌볼 시간이 없다. 하나님은 인간 삶의 일상사를 관망만 하신다.
* 유신론적 진화론자 ⇒ 신은 우주의 반대편 끝에 존재하는 에너지장으로서, 사물들을 세상에 던져 보낸 뒤 그것들이 알아서 돌아가도록 내버려두신다.
* 유물론자 ⇒ 세상은 인격적인 신의 존재 없이 우연의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 우리의 운명은 우연에 달려 있다.
* 실존주의자 ⇒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만이 중요하다.(상황윤리) 인간은 자기의 앞일을 예측할 수 없다. 과거와 현재, 미래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시간이 상대적이고, 거리도 상대적이며, 따라서 진리도 상대적이다.
7.2 인간이 제시한 부정적인 대답
1. 하나님은 무관심하시다.
* 하나님이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는 구절 : (마 27: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이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분의 진노를 예수 그리스도 위에 쏟아 부으셨다.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 53:10)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2. 하나님은 주목하지 않으신다.
*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목하여 보시지 않기 때문에 침묵하신다고 말한다.
* 그러나 하나님은 전지하시다.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보시며, 모든 것을 통찰하신다. (잠 15:3)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3. 하나님은 사랑하지 않으신다.
*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침묵하신다는 말은 틀린다. 자식을 참으로 사랑하는 부모는 때때로 아이를 혼내기도 한다. (히 12:5-6)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4.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관여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 사실은 그 반대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동에 관심을 가지신다. (벧후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겔 33:11)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7.3 성경적인 답
1. 상식적인 답변
* 대부분의 어려움은 우리들의 고의적인 죄 때문이다. (갈 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2. 성경적 관점
* 나의 생각은 유한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무한하시다. (사 55:8-9)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는 슬픔과 고통, 시험과 아픔이 들어있을 것이다. 나만이 여기서 예외일 수 없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보내신 유일하게 죄없는 인간인 예수님도 슬픔의 사람, 질고를 지신 분이다. (사 53: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 그런데도 어떻게 내가 고난에서 제외될 수 있겠는가?
3. 철학적 관점
* 인간의 자유의지는 일련의 행동을 수반한다. 인간은 자신이 행사한 자유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된다.
*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사랑하신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일 4:10) “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
* 그리고 당연히 성도들로부터의 사랑을 기대하신다. (마 22:37-3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백성에게 고통과 재난을 허락하셔서 그들이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도록 하신다.
◆인간의 고통과 하나님의 침묵
* 일시적인 관점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질문) “왜 하나님께서는 무언가 하시지 않는가?” (답) “그분은 곧 무언가 하실 것이다.” (문) “언제?” (답) “그들이 원하지 않는 시간에 그들의 짐작보다 빨리.” (암 5:18)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냐 그 날은 어둠이요 빛이 아니라” (전 8:11)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 이 세상에서 우리들은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시련을 겪게 된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 왜 우리에게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는 영광의 집에 다다라서야 알게 될 것이다.
*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큰 비극은 이 세상을 가난과 질병과 고통과 시련 속에서 살다가 예수님 없이 죽어서 불못에 던져지는 일
* (한편) 우리의 죄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복이 되기 위해서 고통당할 수도 있다. (요 9:2-3)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우리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처럼 슬픔과 어려움을 당한 사람에게 위로가 되기 위해서 고통당할 수 있다.
* 천국을 더욱 실제로 느끼게 우리의 관심이 땅의 것이 아닌 위의 것으로 돌리기 위해 어려움을 당하는 것일 수도 있다.
* 의롭고 선한 사람으로서 고통당할 수도 있다.
* 우리에게 시험과 시련과 환란을 겪게 하시는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참되다는 것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족하다는 것, 또 시련을 통해서 그의 거룩함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기 위해서이다.
◆요약
* 성경에는 경건한 자의 고난을 말하는 부분이 종종 등장한다. 사도 바울의 경우에는 “자고하지 않도록,” 즉 교만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육체에 한 가시를 허락하셨으나(고후 12:7) 욥은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고후 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성도들이 하늘에 있는 것을 더 사모하라고 고난을 허락하시기도 하고,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라고 고난을 하락하시기도 하지만 이것들 역시 욥의 경우와 다르다. (골 3:1-3)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고후 1:1-4)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 욥은 온전하고 정직했으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피하는 사람이었으나 고난을 받았다. 왜 그런 것일까? 그 답은 간단하다. 사탄이 그를 키질한 것이다.(욥 1,2장) 욥의 고난은 사탄으로부터 왔으며, 따라서 사탄의 역사가 제거되기 전에는 결코 없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문제의 본질은 마귀를 물리치는 것이었다.
* (결론)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당할 때, 그것은 자기의 죄나 부주의 때문일 수도 있고, 마귀의 공격일 수도 있다. 어떤 성도들은 자기의 잘못으로 인해 고난을 당하는데도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지만, 반면 마귀의 공격인데도 계속 자기의 죄만 찾는 사람들이 있다. 대부분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자기의 죄를 살피기 마련이다. 그러나 죄가 전혀 없는 성도가 어디 있으랴? 그래서 많은 성도들은 자기의 “숨은 죄”를 찾으려고 노력하고, 그것 때문에 징계가 왔다고 생각하여 고난에 고난을 더하고 있다. 아무리 살펴도 이러한 고난 받을 죄가 없다면, 마귀의 세력을 제거하여 이 고난에서 빨리 구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욥처럼 자기의 의로운 행위들만을 주장해서도 안된다. 문제의 핵심은 마귀의 방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