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지난 주 토요일이 추석이었는데, 이번엔 고향에 가지 않았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작은 아들이 고3이라는 것입니다. 신문의 어떤 칼럼에는 수험생이면 조상도 몰라보냐는 투의 글이 실렸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와 같은 입시제도에서 수능시험을 얼마 앞두고의 하루는 굉장히 중요한 시간입니다. 어떻든 이번에는 아무데도 가지 않기로 하고 휴일 내내 집에서 있었습니다.
한때는 고향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르던 때가 있었습니다. 충청남도 온양(溫陽-따뜻할 온, 볕 양)의 초사리(草沙里-풀 초, 모래 사). 동네 이름도 따뜻하고 시골스러운 곳이고, 실제로 6·25때도 인민군이 별로 오래 머무르지 않았던 깊은 산골, 전기가 들어간 것도 제가 고등학교 시절입니다. 그곳에서 태어나 유아기를 보낸 저는 그 오래 전 제가 지내던 모습들이 몇 가지는 지금도 눈앞에 보듯이 생생히 기억납니다. 밤이면 어머니가 인두로 할아버지의 옷을 다리는 모습하며, 단오절 때 농악놀이 하는 동네 아저씨들이 무서워서 방으로 숨어 들어갔던 기억들...
초등학교를 광주에서 다닐 때 방학마다 다녀가서 한달을 내내 머물며 지냈고, 중학교부터는 서울로 전학을 가서 살 때 가금씩 들러도 언제나 푸근한 고향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장을 하고 나서는 고향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줄어듭니다. 더군다나 내년쯤이면 저희 고향이 없어지고, 그 자리에 경찰학교가 들어섭니다. 결혼 이후로 이사를 다닌 것이 13번이고, 지금 멀리 대구에서 생활을 한지도 13년이 되어갑니다. 이전에는 고향이 가까운 사람들을 부러워한 적도 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일가친척과 친구, 동창이 한 명도 없는 이곳에서 살게 된 것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사실 고향에서 살았던 것은 4∼5년입니다. 그 이후 목포, 광주, 서울에 살다가, 결혼이후 살았던 도시도 많습니다. 부산, 서울, 수원, 대전, LA, 대구. 그러면서 자연히 저의 고향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고향을 더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나는요 이 세상에 정들 맘 없어요"라는 복음성가의 가사처럼 내 맘은 항상 하늘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근무하는 학교의 동료들말고 오직 아는 사람이라고는 교회에서 만난 사람들뿐입니다. 그러기에 더욱 교회에서의 사귐이 귀중한 것이 됩니다.(2002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