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슬픔
어제는 도고에 있는 유스호스텔에서 창조과학 강연을 하고 왔습니다. 중고등부 연합수련회인데 2,000명 정도가 모였습니다. 커다란 강당에 방석 하나씩을 차지하고 앉았습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숫자가 있어서 그런지 모두가 집중할 때는 그 에너지가 대단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일부는 조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온양에 들렀습니다. 아버님이 집안에 일이 있어서 잠시 서울을 떠나 온양에 거주하고 계십니다. 내려가신 지 몇 주가 되도록 한번도 가 뵙지 못했는데 가까이 간 김에 들러서 저녁 식사를 같이 했습니다. 아버님을 모시고 나와 보신탕을 사드렸는데, 아주 기운이 있고 의욕도 있으셨습니다. 여러 가지 장래에 대한 계획도 있으시고. 몸이 불편하시니까 혼자 살림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반찬은 서울에서 내려올 때 가져오시고 밥은 혼자 해 드시는데, 방 청소나 설거지나 그런 것들은 대충 하고 계십니다. 그런 아버님을 시골집에 혼자 두고 밤늦게 차를 돌려 대구로 내려오는 것은 슬픔이었습니다. 고속도로를 내려오는 동안 내내 슬픔에 잠겼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온양에서 자랐습니다. 낮 시간에 어머니가 농사일을 하러 나가시면 주로 할머니와 지냈습니다. 잠잘 때도 할머니 옆에 꼭 붙어서 잤습니다. 몇 년을 하루도 빼지 않고 할머니와 같이 지내다가 어느 날은 할머니가 서울에 큰아버지에게 다녀오신다는 것입니다. 단 하루를 다녀오신다는데 저는 그 이별이 너무 슬펐습니다. 다음날 할머니가 돌아오실 때까지 날 버리고 떠난 할머니에 대해 배신감 같은 것을 느끼며 슬퍼했습니다.
초등학교는 광주에서 다녔는데, 방학 때마다 시골 온양에 와서 한 달을 지내다 갔습니다. 방학을 하면 처음에는 시골에 가서 할머니를 만난다는 생각에 너무나 즐거웠지만, 다시 광주로 돌아갈 때는 그 이별이 너무나 가슴아팠습니다. 동구밖을 지날 때까지 할머니는 계속 서서 손을 흔들고 계시며 나는 고개를 하나 넘을 때까지 계속 눈물을 흘렸습니다. 광주에 돌아가서도 몇 일은 서러움에 잠겨서 밤마다 혼자 이불을 덮고 흐느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몇 일이 지나면 그 슬픔의 농도가 옅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에게도 그런 슬픔의 역사가 있습니다. 바벨탑 사건 이후에 셈의 첫째 아들 엘람과 둘째 아들 앗수르가 아라랏산을 넘어 동쪽으로 동쪽으로 이동할 때, 세 명의 동생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을 남겨두고 떠나는 것은 살을 찢는 아픔이었습니다. 바이칼 호수를 지나 아사달에 정착하고 홍익인간의 뜻을 펼칠 때도 항상 서쪽에 두고 온 동생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보다 더한 슬픔이 있습니다. 한가지 명령만 지켰다면 영원히 살 수 있었는데 그 말씀을 무시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었다가 에덴동산을 쫓겨난 아담과 하와의 슬픔입니다. 고통과 슬픔과 아픔과 죽음이 없는 삶을 잃었다는 것은 다른 무엇과 비교되지 않는 슬픔입니다.
그러나 이별이 곧 죽음인 이별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떠나있는 이별입니다.(20020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