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기독교인들이 성령충만에 대해서 오해를 하는 것 같다. 가령 성령충만하면, 혹은 성령의 은사나 능력을 경험하면 무슨 황홀경 같은데 빠져서 비이성 내지 반이성적인 상태에 빠지는 것으로 오해한다. 실제로 성령충만을 빙자해서 반공동체, 반사회, 반역사적인 행동을 자연스럽게 하거나 그것을 정당화시키거나, 나아가 그런 행위를 무슨 대단한 신앙적-영적 특권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런 현상은 실제로는 사교나 밀교 집단에서 자신들이 섬기고 추종하는 영과 접촉한 사람들에게서 주로 나타나는 현상이지, 성령과 연합하거나 혹은 성령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에게서 기대해서는 안 되는 현상이다.
오히려 성령충만하면, 즉 성령의 강력한 임재와 역사가 나타나면 지극히 인간적인 존재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의 인간적 존재란, 달리 말하면 인격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통상 우리 인격을 구성하는 요소를 말할 때, 지.정.의.몸. (사회적)관계 등을 꼽는다. 따라서 성령충만한 존재가 된다는 것은, 우리의 존재 내지 인격을 구성하고 있는 이런 요소들의 기능이 평상시의 자연적 상태보다 더 우수하고 활발하게 기능하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전혀 없던 새로운 능력이 외부에서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인간에게 부여되었으나 타락으로 인해 감소 내지 사장되었던 능력들이 다시 (선취적으로) 발현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자연적인 이성적 능력이 100인 사람이 성령충만해지면 그 능력이 가령 130, 150, 이런 식으로 향상된다.
감정이나 의지나 몸의 영역도 마찬가지고 나아가 관계의 영역에서도 동일한 현상이 일어난다.
그래서 성령충만하게 되면 부모에게 물려받고 또 자신이 경험과 학습을 통해서 취득한 자연적인 이성과 감정과 의지와 몸의 능력이 더 극대화된다. 그 결과 성령충만 해지면 이성의 기능이 더 활발해지고, 감정의 기능도 그렇고, 의지와 몸의 기능도 마찬가지다.
즉 성령충만하면 학습능력이나 분별, 판단능력이 향상된다. 감정의 폭과 깊이도 풍성해져서 작은 좋은 일에도 더 감사하고 기뻐하며 반대로 주변의 작은 아픔에도 더 민감하게 반응하며 함께 슬퍼하게 된다. 공감능력이 커지는 것이다. 의지의 영역도 마찬가지다. 평상시는 작심삼일도 못 채우던 나약한 의지력을 가진 사람이 성령충만 해지면 굳은 신념의 사람으로 변해간다. 때로는 신체적인 능력을 뛰어넘는 일도 가능해서, 몇날 며칠을 밤을 지새우며 일을 해도 피곤함을 모르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성령충만하다는 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인격적인 요소들을 무력화시키고 어떤 종교적 세계에 빠져서 황홀경 같은 신비한 체험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일상의 삶에서 더 인간적으로 그리고 더 인격적으로 바르고 선하고 참되게 살아갈 수 있는 힘과 능력과 재능을 공급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차원에서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가 에베소서 5장을 강해하면서, 성령충만하게 되면 책의 사람이 된다고 하면서 영국의 청교도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단순히 기도만 많이 하는 경건한 사람들이 아니라 대단히 뛰어난 신학적 안목과 학습, 저술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고 언급하는 대목은 눈여겨 볼만한 지점이 아닐 수 없다. 성령충만하면 이성적 감소하거나 무력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능력이 더 힘차고 알차게 작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들은 시간도 더 효율적으로 잘 사용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자원을 잘 배분하고 조합하여 인생을 전략적으로 살게 되며,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참된 우정과 선행을 행하게 된다.
그런데 상당수 한국 기독교인들은 이 원리를 정반대로 생각하는 것 같다. 특히나 성령충만하면,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비이성 내지 반이성적 상태에 빠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뒤집어서 이야기하면, 이들은 하나님의 진정한 역사는 인간의 보편적 상식과 통찰과 식별을 무시하고 그것과 대치되거나 혹은 상관없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더 성경적이라고 생각하고 또 실제로 그렇게 말하곤 한다. 즉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자신의 뜻과 계획을 드러내시고 또 그것을 이루어 가실 때, 인간의 자연적 능력을 더 선하고 합당한 방식으로 깊이 그리고 크게 드러내시고 계발해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인간의 자연적 능력은 악하고 무능하기 때문에 아예 그 싹 자체를 잘라버리고, 대신 이해할 수 없는 특이한 방식으로 행동하셔야만 그것이 진정 하나님다운 방식이라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하나님 이해나 성령 이해는, 사실상 삼위일체 하나님을 무슨 이상하게 생긴 우주괴물 같은 존재로 만드는 것이며, 그리고 이런 식의 생각이나 말을 자연스럽게 하는 것 자체가 첫째, 신학적 학습과 사유가 부족한 것과 둘째, 진정한 영적 경험이나 이해가 부족한 것과 셋째, 실상은 하나님의 섭리나 역사를 반이성내지 몰이성화 시키는 방식으로 코드화-암호화 해놓고 마치 자신(혹은 그들)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비밀을 깨닫고 전수받은 특별한 존재들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종교정치학적인 욕망이 꿈틀대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령충만이란 비이성적, 반이성적 깨달음도 아니고 인간 세상 일반의 원리와 질서를 무시하고 도피하는 종교적 통로도 아니다.
가령 우리 사회에 경제위기가 도래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성령께서는 진정으로 기도하는 사람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주실까? "사랑하는 얘야, 조만간 큰 경제위기가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너는 아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단다. 내가 너를 특별히 사랑하기 때문에, 큰 경제 위기 가운데서도 너와 네 가족만은 아무런 손해를 보지 않도록 내가 너를 지켜줄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 너는 큰 돈을 벌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실까?
아니면 "사랑하는 나의 사람아, 조만간 큰 경제위기가 시작될 것이다. 이 경제위기는 상당한 고통과 손해를 수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너희들의 탐욕과 이기심과 무지가 초래한 것이다. 내가 그 분야의 전문가들을 통해서 여러 차례에 걸쳐서 경제적 위기에 대해서 경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너희 악하고 무능한 정부와 그것에 부화뇌동한 언론과 그리고 탐욕에 젖은 국민들 모두가 혼연일체가 되어 그것을 애써 무시하다가 결국 이 지경까지가 오게 된 것이란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더 늦기 전에 그 길에서 돌이키고,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경제위기에 효과적으로 대비할 수 있는 지혜와 방안들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너희들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돌이키면 내가 이 고통과 어려움을 좀더 빨리 넘어갈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실까?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이집트의 총리가 된 요셉의 이야기를 보자면,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앞으로 이집트에 큰 흉년이 닥칠 것인데 그 와중에서도 너는 굉장한 부자가 되는 기회를 잡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대신에 앞으로 닥칠 흉년은 그 범위와 기간이 엄청나서 가만히 있다가는 나라 전체가 망할 수도 있는 무시무시한 사건이기 때문에, 요셉, 너는 내가 너에게 준 지혜를 총 동원해서 그 위기를 효과적으로 대비하고 견딜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실제로 요셉은 그렇게 했고, 그 결과 요셉 한 사람으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입었다.
하지만, 한국 기독교 안에서 이른바 성령사역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의 일반적 성향이나 강조점은 어디에 있는가? 성경의 원리나 혹은 하나님이 인간 일반에게 주신 건전한 상식과는 정반대의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는가?
이 점은 최근 들어 기승을 부리고 있는 이른바 12월 전쟁설이나 그것의 중요 근거라고 할 수 있는 땅굴의 존재여부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내가 페북에서 수차례에 걸쳐서 12월 전쟁설은 한반도를 둘러싼 여러 정황상의 증거들을 볼 때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면, 전쟁을 확신하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냐면, 김요한의 주장은 극히 이성적인 판단에서 하는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자기들은 기도하면서 그런 메시지를 받았다고 하면서 계속 전쟁설을 확신하고 유포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이들이 하는 말들은 너무도 비이성-반이성적인 말들 투성이다. 그런데 오히려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말이 얼마나 반이성적 주장이라는 것 자체를 인지를 못할 뿐더러, 나아가 어떤 이들은 자기들이 하는 말이 반이성적이기 때문에 더 신빙성이 있는 성령의 참된 메시지라는 것이다.
참 안타깝고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식의 잘못된 신앙을 주도하고 있는 사람들도 문제고, 또 그들에게 쉽게 영혼을 내주고 현혹되고 있는 수많은 기독교인들도 문제다.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런 사람들 때문에, 성경에 나오는 진실하고 참된 하나님이 무슨 전쟁이나 일으켜서 사람을 죽이고 삶을 파괴하는 우주적인 폭군처럼 간주되고 오해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땅에 떨어지고, 하나님의 이름이 멸시를 받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사람들은 자기들이 지금 무슨 짓거리들을 하는 지도 모르고서, 되려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배당에 모여서 찬양을 하고 기도를 하며 아멘을 남발한다. 정신병자들을 강단에 세워놓고 전쟁과 땅굴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멘을 하는 것이다.
나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성령충만의 개념을 바로 이해했으면 좋겠다. 진정으로 성령충만해지면 성경을 더 사랑할 뿐더러 더 올바로 깊이 이해하게 되고, 자신의 전공분야에서 탁월해지며, 바른 역사의식을 갖추며, 사회 현상에 대해서 피상적이지 않고 분석적으로 접근하게 되며, 타인의 고통과 상처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며,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 의지가 강해지며, 삶을 효과적이고 전략적으로 설계하게 되며, 잘못된 습관과 중독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지키는 등등,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귀한 삶의 자원과 은사들을 선하고 아름답게 쓰는 것, 그것이 성령충만한 모습이고 신자의 삶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제발 성령충만을 빙자해서, 반공동체-반사회적 병리적 의식에 찌들어 있는 인간들이 설치고 다니지 않았으면 좋겠다.(2014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