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논쟁 해부
III. 이슬람 지역동향과 전망 1 - 중동 지역 이슬람주의 운동
서** 글/한반도 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 출처: 개척정보, 2010년 9월호, pp. 13-17
이슬람 테러리즘이 지구촌 세계에 위험한 변수가 된 것은 1900년대 근대 혹은 포스트모던 현상이다. 그것도 구체적으로 1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 시대가 막을 내리고 서구적 모델에 기초한 민족국가들이 독립하고 나서이다. 문제의 중심에는 1948년 이스라엘 독립국가 선포를 기점으로 한 주변 중동국가들과의 갈등과 전쟁이 놓여 있다. 표면적으로는 시온주의(탈종교적인 유대민족주의)와 아랍민족주의의 갈등이지만, 세계 에너지원을 둘러싼 강대국의 갈등이 아랍 세계에 투영된 것이다. 그래서 서방세계의 교두보로서 이스라엘 터키가 포진하고 사회주의 세력권의 시리아, 이라크, 이집트가 맞서면서 좌우 이데올로기적 성격의 중동정치가 형성되었다. 특히 이란은 영국과 미국의 교두보 역할을 하다가 반서구 이슬람주의 진영으로 일찍이 출구를 찾았고, 요르단, 예멘, 사우디 아라비아 등 기타 중동 국가들은 중간 지점에 위치하면서 제3세계 권위주의 국가 형태로 발전해 갔다.
그렇지만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에서 아랍 국가들이 참패하면서 미국에 대한 적대감과 아랍 민족주의에 대한 회의가 급부상하였다. 그리고 1970년대 이후로 오일쇼크 사태를 지나며 중동 국가의 석유 무기화가 본격화되면서 중동세계 전면에 종교 변수가 등장하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족주의, 민주주의와 같은 유럽적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결과가 종국적으로는 발전이나 진보를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시오니즘과 서구 제국주의 세력이 중동을 지배하기 위한 위장된 속임수였다는 인식이 설득력을 얻어갔다. 또한 독재와 빈부격차, 이슬람 사회의 변질과 같은 당면한 문제는 무함마드적 이슬람문명의 전통과 유산 속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의식이 엘리트를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게다가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과 1992년까지 이어온 아프가니스탄 반소련 지하드 국제 이슬람운동은 이슬람 세계 혁명을 위한 가능성과 주체세력 네트워크를 구축하기에 충분한 환경을 제공했다.
이러한 원리주의적 움직임을 이슬람주의라고 지칭한다. 이슬람주의는 원리주의이면서도 전통으로의 회귀를 추구하지는 않는다. 무함마드 이슬람 팽창운동 시절의 원역사/pro-history를 현대적 맥락/context에서 재해석함으로써 이슬람 세계의 미래를 놓고 이슬람 세계 혁명의 완성을 추구한다. 더욱이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문화간 거리가 좁아지고 소통이 활발해지면서 글로벌 환경이라는 공통의 경험 위에서 이슬람의 가치를 추구하는 신세대 이슬람주의자들이 지구촌의 새로운 변수로 등장하고 있다. 물론 이슬람주의 운동에 단일한 행동 강령이나 전략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분파는 적극적으로 이슬람 국가 내부에서 친이슬람주의 정치권력 장악과 테러리즘 형태의 반서구, 외세 배격 운동을 추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문화와 시민사회 영역에서 교육과 사회사업 등의 형태로 이슬람 가치의 저변화를 시도하면서 정치 영역에서는 현실주의적으로 선거참여만의 형태로 온건한 노선을 걷기도 한다. 본고에서는 중동 국가들 속의 이슬람주의가 어떤 형태로 발전해 오고 있는지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1. 알제리
프랑스 식민지 아래에 있던 알제리는 사회주의와 세속주의를 표방하는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을 중심으로 한 민족 해방 전쟁을 통해 1962년 독립을 쟁취한 나라이다. 독립 후 28년간 FLN 단일 정당 지배에 놓여 있었지만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에 의해 복수 정당제가 인정되고 1990년 최초로 민주적인 선거가 치러졌다. 그런데 이슬람주의를 표방하는 이슬람구국전선(FIS)이 지방선거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를 거둔데 이어 1991년 12월에 전국 의회선거에서 이슬람구국전선이 확실한 승리를 얻게 된다. 또 1992년 1월 결선투표(과반수 득표자가 나오지 않으면 결선 투표제 시행)에서 절대 다수표를 얻는 것이 거의 확실해 지자 군부가 개입하여 선거가 무효화된다. 그렇게 정치권력을 재장악한 민족해방전선은 좌파적 성향을 버리고 시장경제를 확대하면서 중산층의 지지를 확보하고 아울러 이슬람주의 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색출한다. 여기에 선거 승리를 도둑 맞은 이슬람주의자들은 이슬람무장그룹(GIS)을 만들어 도시 빈민 청년 세력을 흡수하여 이슬람 테러조직으로 전환한다. 이슬람 무장그룹은 자국 내의 비무슬림들(사제, 수녀, 외교관, 지식인, 페미니스트, 의사, 사업가들)을 살해하고, 정부와 협력하는 사람들을 모두 불신자로 낙인 찍고 지하드를 자행한다. 그들의 논리는 바로 민주주의와 이슬람은 병행이 불가능하고, 투표용지를 지닌 사람은 이슬람의 반대자이기 때문에 죽여도 된다는 것이다. 1994년만 해도 30명의 교사와 교장들이 살해되었고, 538개 학교가 방화를 당했다. 그러면서 이슬람 테러조직은 국민들의 지지기반을 잃게 되었고, 2002년 무렵에는 국지적으로 테러행위를 벌이지만 현재 정치 대안 세력으로서의 가능성은 거의 잃게 되었다.
2. 이란
1921년 팔레비 국왕을 중심으로 입헌군주국으로 출발한 이란은 1950년대 이란 석유를 국유화하려던 이란의 국민 영웅 모사데크를 제거하면서 친미 국가로의 근대화 과정을 겪게 된다. 당시 이란 석유는 서방 세력의 손아귀에 완전히 장악되어 있었는데 모사테크와 같은 이란 민족주의 세력이 정치의 전면에 부상하면서 석유 주권을 부르짖었고,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 결국 국왕은 그를 총리로 임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이란에서의 석유 독점권을 상실한 영국은 이란 석유에 대한 보이코트를 통해 이란 경제를 벼랑 끝으로 밀고 갔고, 미국은 CIA를 통해 모사데크를 몰아내는 가짜 민주화 운동까지 하며 결국 이란 국왕의 든든한 후원자로 등장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팔레비 국왕은 석유 수입을 통해 급격한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이슬람 성직자, 시장 상인들, 도시 빈민층, 중산층 지식인들, 학생 세력의지지 기반을 상실했고, 1979년 반팔레비 반제국주의 노선으로 국민의 지지를 얻고 있던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을 맞기에 이른다.
한편, 호메이니의 이슬람 신정국가 이란은 미대사관 인질사건, 이란-이라크 전쟁(1980-1988) 등을 통해 국민들을 지속적으로 반서구 이슬람 혁명으로 이끌었지만, 호메이니가 죽은 뒤 이란은 극심한 경제난과 신정체제에 대한 도전과 민주주의 역풍을 피해갈 수 없었다. 특히 호메이니가 1989년 사망하기 직전까지 그의 공식 대리인이었으며 후계자로 지명된 몬타제리는 적극적으로 전제적인 이란 지배체제를 비판하는 등 혁명세력의 내부 분열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결국 이란 이슬람 정권은 1997년 이후 최고성직자인 하네니이의 신학적 자질에 의문을 제게했다는 이유로 몬타제리를 이란 시아파 성지 콤의 가택에 연금시켜 버렸다.
또 1990년대가 되면서 국민 대다수가 30대 이하가 되면서 호메이니 혁명의 열기가 식었고, 이들은 멀리 떨어진 미국이라는 거대한 악마가 아니라 자국 성직자들의 주제 넘는 권력 남용과 경제 파탄의 책임을 공격하고 있다.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개혁파 출신인 하타미가 대통령에 선출될 정도로 이란의 보수파들이 수세에 몰리기도 했지만 아직도 변화를 원하는 개혁파와 혁명의 수호자로 자처하는 보수세력간의 물밑 투쟁이 계속되고 있다. 보수파가 사용하는 전형적인 수법이 외부의 적을 상정하여 내부 반대세력을 억제하는 것이었기에, 현 이란 정권은 핵무기 개발과 반제국주의의 선전, 국내 기독교 세력과 서방 세력의 공작설, 선교사 추방 등을 통해 민주주의 운동에 족쇄를 채우려 하고 있다.
3. 요르단
요르단 국완은 이스라엘 건국으로 인한 제1차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과 비밀 협약을 맺고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에 대한 보호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 그 반대급부로 요단강 서안 지역을 획득했다. 1970년에는 팔레스타인 난민 게릴라를 소탕하는 '검은 9월단 사건'에서 보인 것처럼 아랍민족주의는 경계하는 반면 온건한 이슬람주의자들을 허용하는 입장을 보여왔다. 그래서 이슬람주의자들은 요르단에서 병원, 학교, 신문사, 기업 등 사회사업에 활발하게 진출하기에 이르렀다. 요르단은 세습 군주국가이지만 이슬람주의 핵심조직인 무슬림 형제단은 정권을 전복하기보다 국왕 정권과 유착관계를 지속함으로써 현실적인 이익을 잃지 않으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한편 1928년 이집트 사회의 이슬람화를 외치고 출범한 이슬람 형제단은 자국의 탄압을 피해 급속도로 팔레스타인, 요르단, 사우디 아라비아 등으로 글로벌 네트워크를 형성했는데 요르단에 뿌리를 내린 무슬림 형제단은 이슬람 국가 수립을 이상적으로 바라보지만 이를 실현하는 방법으로는 무장투쟁보다 개혁과 종교 교육과 같은 시민사회의 이슬람화를 선택했다. 그러나 2000년 9월 팔레스타인에서 인티파다(민중봉기)가 일어나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 때문에 국민들의 반미 감정이 고조되자 요르단 국왕은 민주적 자유를 다시 제한하기 시작했고, 서구 국가들은 이런 요르단 정치권력의 독재성에 대해서 간섭하지 않는다. 결국 요르단에 삶의 터전을 구축한 팔레스타인 난민들과 요르단 왕정 반대 세력을 중심으로 이슬람주의 운동의 연대가 갈수록 강화될 것이다.
4. 시리아
아랍 사회주의 부흥당이라는 이름을 가진 바트당이 1960년대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뒤로 시리아는 일당 독제국가이다. 주로 농민과 종교적 소수파인 알레위파가 바트당 혁명을 지지했고, 다마스커스, 알레포, 하마 등에 거주하는 중산층 도시민들은 바트당에 의한 시리아 경제의 국유화 조치를 빈이슬람적인 것으로 보고 강력하게 저항했다. 특히 의사, 상인, 법률가, 약사 등으로 구성된 중산층 시민들은 무슬림 형제단을 지지하고 바트당의 세속적 민족주의를 거부하면서 바트당 지도자들을 신앙이 없는 무슬림이라고 비난했다. 이러한 시리아 이슬람주의자들의 저항은 1970년대에 들어와 점점 폭력적으로 변모해 갔고, 반바트당 지하드 투쟁으로 번져갔다. 결국 1982년에는 다마스커스와 알레포 사이에 있는 도시 하마에서 정부군과 이슬람 혁명가들이 충돌하여 유혈 사태가 발생하기에 이른다. 정부군은 무슬림 형제단 운동의 중심지인 이 도시를 완전히 봉쇄하고, 중화기와 비행기를 동원하여 하루 종일 폭탄을 퍼부었다. 이때 1만에서 3만명 사이로 추정되는 시민들이 죽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슬람주의자들의 저항은 기세를 잃어버렸다. 오늘날에도 시리아에서는 무슬림 형제단 일원임이 드러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할 정도이다.
5. 터키
터키가 다른 중동 국가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터키 건국의 아버지 무스타파 케말 아타투르크가 1920년대부터 추구해온 철저한 정치 세속화이다. 공적 영역에서는 최대한 이슬람 종교의 영향을 억제하고 터키 내의 소수민족인 쿠르드 민족 등을 포함해 모두가 동등한 터키 시민의 헌법적 질서에 기초한 공화국 질서를 고수해 왔다. 특히 터키 군부가 세속주의의 수호자로 나서면서 1960년대에서 1980년대 사이에만도 세 번의 쿠데타를 통해 세속주의 체제를 유지시키는 등, 터키는 건국 세력 이념을 굳건히 지켜왔다. 케말주의 혁명을 이해할 수 있는 슬로건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또 다른 혁명이란 없다. 문명이란 유럽 문명을 말하는 것이며, 그들의 장미를 들여온다면 가시까지 함께 들여와야 한다." 터키에서 이러한 케말주의에 대한 반대는 신성모독의 범죄로 여겨진다. 그러나 케말주의 혁명은 이스탄불, 앙카라, 이즈미르 같은 대도시에 일어났고, 농촌 지역의 대다수 국민은 여전히 전통적인 신앙에 머물러 있다.
1946년 터키가 복수 정당제를 도입하자 농촌 지역의 지지를 얻은 이슬람 세력이 정치세력으로 등장하면서 몇몇 이슬람교도의 공적 활동 제한 규정이 폐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1967년 이스라엘을 상대로 펼친 6일 전쟁에서 아랍이 패배하고 1970년대에 접어들자 터키에서도 이슬람주의자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이슬람주의 국민질서당이 창당되기도 했다. 그러나 헌법 위반 판정을 받고 해산되자 곧 이어 국민행복당으로 재창당하고 그마저도 금지당하자 다시 복지당을 만들었다. 결국 친이슬람계 복지당은 1960년대 이후로 가난을 피해 도시로 유입된 농촌 출신의 보수적 국민을 대변하면서 1995년 정부구성권을 장악한다. 이에 군부는 복지당의 보수파 에르바칸 수상을 불신했고 집권한 지 몇 달이 안되어 그가 물러나도록 강요한다. 그렇지만 복지당 내부에도 1993년 이스탄불 시장으로 당선된 에르도간 같은 인물이 증장하면서 개혁파 그룹이 성장하고, 이들의 실용주의와 원리주의를 절충하는 제3세력이 급부상 하는데 이들이 다시 힘을 규합하여 정의발전당(AK)을 창당한다. 결국 2002년 의회선거에서 정의발전당이 압도적 승리를 거둔다. 그리고 2007년 선거에서 정의발전당의 압둘라 굴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비록 그가 세속주의 원칙을 수호하겠다고 거듭 약속하지만 터키 군부와 야권은 압둘라 굴이 터키 세속주의를 훼손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이슬람주의의 미래
중동 국가들 대부분은 아직도 정치와 종교를 분리한 세속적 정치모델을 유지하고 있지만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난 양극화 현상, 도시와 농촌의 불균등 발전, 전통적 이슬람 가치의 붕괴로 인한 공동체 위기, 서구제국의 친이스라엘 정책과 자국 내 독재권위주의 지지 정책에 따른 분노 등으로 이슬람주의 세력이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슬람주의 세력은 현실 정치를 감안하여 다양한 전략과 방법을 구사하고 있으며, 국민 의식을 이슬람주의적 영성과 아젠다로 장악해가고 있다. 만일 서구적 모델의 경제에 위기가 오거나 지구적 재앙이 닥친다면 현 국제질서는 급격히 반체제 운동으로 바뀔 것이며 그 중심에는 이슬람주의가 포진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