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이후의 이슬람 세계의 사회변동과 전망
-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
출처: 서** 글/한반도 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 출처: 개척정보, 2009년 6월호, pp. 17-19
9.11 테러를 기점으로 하여 글로벌 이슬람 지하드 세력의 전략과 이에 대응하는 국가들과 국제 사회의 인식이 크게 변화되고 있다. 앞으로 지구촌은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확산과 그에 따른 경제위기와 빈부 격차의 문제, 환경 문제를 심각하게 겪게 될 것이며, 이러한 지구촌의 병폐에 대한 이슬람 세계의 극단적 대응이 불러올 파국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극단적 상황에서 이슬람 국제 지하드 운동의 중심 세력이 배양된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상황을 다시 점검해 보는 것은 향우 지구촌의 영적, 국제정치적 역학 구도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지침이 될 것이다.
I. 알카에다의 탈레반 장악 과정
1996년 아프가니스탄의 칸다하르로 복귀한 오사마 빈라덴은 아프가니스탄의 군벌들간의 분열을 극복하고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급부상하던 탈레반 세력과 결탁하여 '알카에다'라는 국제적 테러조직을 결성한다. 당시 탈레반 세력의 지도자인 오마르는 아프가니스탄 동부 지역의 훈련캠프를 알카에다에게 넘겨주는데, 오사마 빈라덴은 이것을 통해서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와 세계 이슬람 혁명 지하디스트를 꿈꾸던 극단주의세력을 장악했다. 오사마 빈라덴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로 오마르가 하고 싶었던 프로젝트(칸다하르 사원 건설과 주요 간선도로 건설)를 재정적으로 적극 지원하면서 그의 신임을 얻는다. 사실상 국제 테러조직인 알카에다가 오마르에게 접근하기 전까지는 미국을 비롯한 국제 사회가 탈레반을 자신들의 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은 미국의 석유회사 유노컬의 에너지 사업에 탈레반이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기를 기대했다. 당시 유노컬은 투르크메니스탄의 가스를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을 통해 수출하기 위한 대대적인 로비와 활동을 벌이고 있었고, 미국 정부 또한 이것을 위해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적 안정이 절대 필요했기에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 장악을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한편 반소련 지하드기간(1979년 - 1992년) 동안, 사우디아라비아의 이슬람 펀드에 기초한 마드라사(이슬람 학교) 교육 네트워크를 통하여 성장한 탈레반은 이슬람 신학의 기조에 따라 돈과 세상을 싫어하는 염세주의적인 경향을 띠었다. 또한 이들은 쿠란 암기를 중심으로 한 단순한 교육체계하에 있었기 때문에, 보다 쉽게 오사마 빈라덴의 클로벌 지하드의 이데올로기가 그들에게 주입될 수 있었다.
오사마 빈라덴은 칸다하르로 이주한 후 2년 만에 케냐와 탄자니아의 미 대사관 폭발 테러를 일으켜 224명의 사상자를 냈고, 당시 미국 클린턴 행정부는 아프가니스탄 동부의 훈련 캠프에 75개의 크루즈미사일을 날려보내는 것 외에는 달리 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당시 미국은 파키스탄과의 공조를 통한 탈레반과 알카에다의 결탁을 분열시키기 원했지만 탈레반과 긴밀히 유착되어 있는 파키스탄과 사우디아라비아를 압박하지 않는 한 이러한 정책은 실효성이 없었다.
결국 탈레반과 알카에다는 2000년에 이르러 국제 테러리즘 베이스를 확실히 구축하여 아랍, 북아프리카 전사들로 구성된 특수부대인 국제여단 555를 통해 탈레반이 아직 장악하지 못한 아프가니스탄 북부동맹과의 전쟁을 지원하게 된다. 게다가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테러조직과 체첸과 위구르의 이슬람 무장세력 등이 아프가니스탄에 거점을 둔 알카에다 조직에 합류하게 된다. 그래서 2000년 9월 당시, 탈레반이 탈레반 정규군에 대항하는 반군단체가 통치하던 아프가니스탄 북부의 요새를 장악할 때의 병력 15,000명 중 1/3 정도가 파키스탄, 아랍, 인도, 카쉬미르, 체첸, 중국, 필리핀 무슬림 등 비 아프가니스탄계 외국 전사들이었다.
이에 미국은 국제사회를 동원하는 전략을 구사하여 유엔, 유엔안전보장이사회로부터 탈레반에 대한 국제적 감시를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명시한 결의안들을 얻어낸다. 하지만 탈레반은 유엔 감시단이 들어오면 공격하겠다고 응전하며, 세계문화유산인 아프가니스탄 버미안 계곡의 불상(1800년 된 불상)을 파괴해 버리고 국제원조기구를 불법화하는 등 유엔과의 결별의 수순을 밟는다. 이것은 알카에다의 탈레반 국제사회 고립 유도전략이었고, 이에 따라 탈레반은 더더욱 알카에다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것이 바로 9/11테러 발생 전의 아프가니스탄의 정황이었다.
II.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전후 처리 문제
미국이 이끄는 연합군은 아프가니스탄 전쟁 초반에 정밀 무기를 통한 폭격으로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2001년에 아프가니스탄 북부의 마자리샤리프를 점령하고, 그 해 11월에 수도 카불을 탈환하였다. 탈레반 세력은 마자리샤리프 동부 지역으로 퇴각했지만 카불에서 칸다하르에 이르는 아프가니스탄 남동부 지역은 탈레반의 주요 세력인 파쉬툰계 군벌들이 여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실상 아프가니스탄은 제2차 세계대전 이래 22년간 계속된 전쟁으로 인해 심각하게 파괴된 국가이다. 특히 1990년대에 발생한 내전으로 인해 도시의 기반시설들이 완전히 파괴되었는데, 탈레반은 국가 재건에는 전혀 관심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할 자금조차 없었다. 그들은 단지 몇몇 모스크와 석유공급 시설만 재건했을 뿐이었다. 또한 파키스탄과 이란에서 돌아오는 난민들은 증가했지만, 당시 오사마 빈라덴은 탈레반에게 아프가니스탄의 모든 서구 NGO 요원들을 축출하도록 했다.
한편,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후, 미국의 부시 행정부는 아프가니스탄 국가 재건이라는 임무를 놓고 딜레마에 직면한다. 미국은 국가 재건의 경험이 많았고, 학자들과 외교관들도 아프가니스탄 재건 계획을 제안했다. 특히 농업 분야에 자금을 투자했다면 대중의 지지를 얻을 뿐만 아니라 경제 활성화에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란, 파키스탄 등에서 귀환하는 십만명 정도의 난민들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 도시보다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농업은 해체된 무장세력에게 일거리를 제공하고, 아편과 같은 마약을 재배하던 농민들에게 대체 일거리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는 전후 복구와 같은 문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또 아프가니스탄 문제의 주도권을 가졌던 미국중앙정보부(CIA)는 미국에 의해 진행되는 모든 구호 프로그램이 아프가니스탄 국가 재건보다는 빈라덴을 검거하는데 기여할 것을 원했고, 그 목표를 위해 지방 군벌 세력을 강화시켰다. 사실 미국국제개벌처(USAID)에는 아프가니스탄이라는 국가를 아는 사람도, 언어를 말할 줄 아는 사람도 전무한 상태였다. 서구에서 교육받은 아프가니스탄인들을 귀환시키기는 했지만 아프가니스탄 정부와 연계된 프로젝트의 진행이 아닌 민간 차원의 산발적인 프로그램에 그쳤고, 전반적인 국가 재건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것은 지방 군벌들의 세력을 강화시키고, 미국중앙정보부(CIA)의 지원을 받고 있는 지도자들에게 도움되는 프로젝트로 전락하고 만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들 가운데서 탈레반 세력은 자신들의 힘을 오히려 다시 결집하게 되었다.
이처럼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후 정책은 국가재건이라기보다는 탈레반 응징에 가까웠고, 오히려 지방 군벌 세력을 키움으로써 아프가니스탄 중앙정부(카르자이 대통령)의 행정체제가 제대로 작동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아프가니스탄은 심각한 부족간, 군벌간 갈등에 의해 현재 동, 서, 남, 북 전역이 각기 다른 부족, 다른 군벌 세력에 의해 따로 관활 통치 되고 있다. 만일 미국이 법과 질서를 재건하려는 유엔의 본래 프로그램을 진행시키는데 주력했더라면 탈레반 세력의 재등장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탈레반은 법과 질서의 회복(이슬람 법 - 샤리아 - 에 의한 율법 통치)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재등장 하고 있다.
한편, 탈레반은 이슬람의 가르침을 위배하면서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대한하기 위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아편 재배를 보호하고 있다. 탈레반의 재기, 알카에다의 재조직화, 국제 테러리스트 양성 캠프 운영은 마약 재배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탈레반의 입장은 "아편은 아프가니스탄인이 아닌, 비무슬림들 - 서구인들에 의해 소비되기 때문에 재배해도 된다. 하지만 해시시(대마잎으로 만든 마취제)는 아프가니스탄인들과 무슬림을 위한 것이다"라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국가 재건이 실패한 이유는 마약 관련 이슈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편 재배는 1980년대 CIA와 파키스탄 정보국(ISI)의 묵인 하에서 활성화되었고,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한 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 양귀비 재배금지를 요구하면서 아편 재배는 아프가니스탄으로 이동했다. 또 지방 군벌들은 1990년대 아프가니스탄 내전 당시 아편 재배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군인들을 모집했는데, 현재는 탈레반이 그런 전략을 취하고 있다.
III. 파키스탄 내의 알카에다와 탈레반 세력
미군과 NATO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탈레반은 알카에다와 파키스탄 극단주의자들로부터의 지원을 받으며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국경 지역에 폭탄제조시설을 건설하고, 또한 이슬람법 - 샤리아 - 로 운영되는 대안정부를 구성하면서 저항하고 있다.
한편, 9/11 당시 전후로 파키스탄에는 주요 이슬람 정당과 연결된 40개 이상의 극우주의 그룹이 존재했는데, 알카에다는 그들에게 클로벌 지하드를 전파하였고, 대다수 극단주의 세력들은 알카에다를 위해 싸우는 것이 진정한 소명이라고 여기고 있다. 파키스탄은 9/11 이후 파키스탄의 부족 벨트인 산악지대로 아프가니스탄인이 아닌 알카에다 전사들 수백명이 이주하도록 했고, 알카에다의 지도자들은 파키스탄 정부군의 협력을 얻을 수 있는 안전지역인 펀잡에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탈레반의 공격이 강화되던 2003년, 미국과 영국은 파키스탄 정보국이 탈레반에 대해 원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미국과 NATO 역시 이들의 체계적이고 만연해 있는 탈레반과의 결탁에 대한 증거를 확보했다. 즉 파키스탄 정보국 ISI가 파키스탄 - 아프가니스탄 국경지인 발루치스탄 주(州)가 순수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양성소라는 것과 몇몇 아랍 국가들로부터 자금과 무기를 공급받는 것 등이 발각된 것이다.
이에 아프가니스탄 카르자이 대통령은 파키스탄에서 탈레반이 활동할 수 있도록 방조하는 미국 고위 관료들에게 불평을 토로하였다. 또한 2003년 파키스탄의 이슬라마바드 방문 당시 퀘타에 거주하고 있던 탈레반 지도자들의 명단을 무샤라프에게 건넸으나, 무샤라프 대통령은 본노하며 그러한 사실을 부정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가운데 파키스탄의 알카에다는 파키스탄 북서국경지를 베이스 삼아 다양한 그룹들과 접촉하며 진행하고 있으며, 사회의 모든 세력들을 분석함으로써 작전 역량을 향상시키고 있다. 그리고 탈레반은 파키스탄과 무슬림 네트워크를 통해 자금을 확보하고 있다.
나가며
아프가니스탄은 부족주의, 파벌주의, 부패가 만연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정부가 이루어져야 한다. 무엇보다도 마약 문제 해결 노력이 절실하다. 한편 아프가니스탄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중앙아시아는 알카에다의 확장을 위한 새로운 변방(new frontier)이며 그곳에는 그들을 저지할만한 세력이 부재하다. 탈레반과 알카에다 국제 지하드 조직이 발생한 것은 이들 지역이 국제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주변부 국가들로서의 빈곤의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탈레반과 알카에다, 파키스탄, 타지키스탄과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탄 사이의 반서구, 국제 지하드 조직들 간의 연계가 확대되어 갈수록 커지고 있다. 비록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을 중심으로 글로벌 이슬람 지하드 조직이 성장하고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가 배후에 있었지만, 소련 붕괴 후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은 인접한 중앙아시아를 통해 전 유라시아로 확대될 가능성이 있고,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 국면이 시작되면 인류 문명의 거대한 파국을 불러올 주요 세력으로 부상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