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행한 나쁜 일들은 어떠한가?
Jonathan Sarfati 글, 이종헌 역, Creation ex nihilo, Vol. 36(2014), No. 1, pp. 16-19
우리 Creation지는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창조를 포함하여 성경의 진리를 방어하는데 헌신하고 있다. 특히, CMI(Creation Ministries International)에서는 논리적으로 독립적인 다음의 두 가지 논제에 역점을 두고 다루고 있다:
1. 창조가 맞는가?
2. 왜 그것이 중요한가?
이번 기사는 주로 2번에 역점을 두고 있다. 과거에는, 이 논점에 대한 뒷받침으로 종종, 기독교가 역사에 좋은 방향으로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밝혔었다.
여기에는 자선, 교육, 노예 폐지, 과학 등의 동기를 유발했다는 것을 포함한다. 그 증거는 매우 강력해서 심지어 일부 고자세의 무신론자들도 성경적인 기독교가 구세군의 자선을 낳게 했다는 것을 인정하며, 심지어 어떤 사람은, “나는 무신론자로서, 진정으로 아프리카에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믿는다”라고 선언한다. 마찬가지로, ‘다윈의 불독’이라고 알려진 유명한 불가지론자 T. H. Huxley(1825-1895)는 도덕성이 크다는 것을 이유로 성경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자기 자녀들에게는 이것을 강요했다.
치명적인 차이
반기독교인이 나타낼 수 있는 유일한 반응으로는 교회의 역사가 항상 선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에 대한 답으로써 가장 중요한 논점은 이것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잔학행위는 성경에 드러나 있는 실제 기독교와 부합하지 않는다; 잔학행위가 무신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은 일리가 있다.
우리는 모든 무신론자들이 ‘악하다’거나 선한 일을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님을 주목하라. 그러나 무신론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제공하지 못한다.
진화론자 Jaron Lanier는 “세상에는 자기들이 인식하기로, 진화론은 도덕적인 진공상태로 인도하기 때문에 단순하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불편해 하는 거대한 집단의 사람들이 있다. 사실상 진화론 안에는 그들의 최선의 충동에 대한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문제를 드러냈다.
그에 대한 답으로, 무신론을 선도하는 진화론자 리차드 도킨스는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이 곤란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진리를 직면해야 한다”라고 확언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앞서가는 무신론자가 진화론은 도덕성에 대한 기준을 제공하지 못한다고 인정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 대신에 그와 그의 동료 무신론자들은 생명의 존엄과 자선에 대한 기독교의 개념을 빌려올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로, 유대인 자유주의 칼럼니스트인 Jeff Jacoby는 그 논점에 대해 명료하게 요약했다:
“우리에게 선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고서 사람들이 예의바르고 도덕적일 수 있을까? 그렇다. 친절하고 윤리적인 비기독교인은 항상 있어왔다. 그러나 그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들의 길이 친절과 윤리에 이른다고 판단할 수 있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기들이 자라난 사회의 도덕적인 기대를 단순하게 반영하고 있는가?”
“우리 문화에서는, 가장 열렬한 무신론자일지라도 서구 문명을 형성한 유대-기독교의 세계관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이 없는 세상에서는 선과 악 사이의 명백한 차이가 없다. ‘살인하지 말지니라’고 명령하시는 창조주가 없다면 살인이 나쁘다는 것을 입증할 방법이 없다. 분명히 추론만으로는 나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없다. 그 대신에, 레닌과 스탈린과 마오가 추론했듯이, 살인하는 것이 마르크스 주의의 주장을 진척시키는 것이라면 사람을 수백만명 죽이는 것이 전혀 나쁘지 않다고 추론할 수도 있다. 혹은 자연을 관찰함으로써 세상의 방식은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 것이라든지 혹은 덜 적합한 존재를 죽이는 것을 포함하여 필요한 무슨 방법을 사용하든 자연선택이 적자생존을 촉진한다고 추론할 수도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인간의 생명은 고귀하며 우리 중에 연악한 사람은 특별한 보호를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 분명한 것으로 여겨진다. 시내산의 계명 이전까지 가보면 도덕적 전통이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하겠는가? 고대의 전통에서는 아픈 아기는 죽여야 한다는 것이 분명한 것으로 여겨진다....”
“추론은 충분하지 않다. 살인을 금하는 하나님이 존재할 때에만 살인이 결정적으로 악한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잘못 적용한 것을 바로잡는 길은 무신론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성경적) 적용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위와 같은 추론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진 잔학행위는 정도를 벗어난 것이지만 무신론적 추론으로 무신론자들이 행한 기괴한 잔학행위보다는 옅은 것이라는 사실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몇가지 잘 알려진 특별한 범주들을 언급한다.
기독교인의 잔학행위?
종교재판
종교재판은 분명히 맹점이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성경적 기독교는 위협에 의해 그리스도를 고백하라고 강요하지 않고, 그리스도께 값없이 나오라고 말한다. 그러나 종교재판도 넓은 견지에서, 그 회수와 그 당시의 문화를 비교해 보아야 한다. 스페인의 종교재판(1478-1834): Henry Kamen과 같은 역사가는 스페인의 전체 인구 6백 내지 천만 명 중에서 1,500명 내지 4,000명이 이교도라는 이유로 처형을 당한 것으로 추정한다. 따라서 기껏해야 스페인 인구의 0.05%가 죽었다. 이 정도로도 통탄할 일이기는 하지만 종교재판으로 처형당한 사람의 비율은 오늘날 텍사스 주에서 살해당한 사람의 비율보다 낮으며, 한편 무신론자인 스탈린은 (소위 말해서) 아침 먹기 전에 그만큼을 죽이곤 했다. 더욱이, 기독교의 종교재판은 반대편의 세속 재판보다 더 공정했고 더 관대했다. 사실상, 일부 범죄자는 자기가 이교도라고 정확히 발언했기 때문에 종교재판 법정으로 이관되었다.
세일럼 마녀 재판
1692년 2월에서 1693년 5월 사이에 식민지 메사츄세스에서 있었던 망상증과 대중 히스테리의 변장이었다. 어떻든 그들은 25명 이하의 사람을 죽였는데, 그것은 반기독교인인 고 칼 세이건(1934-1996)이 주장하는 “아마도 수십만 혹은 수백만”이라는 숫자에 훨씬 못미친다. 더욱이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그것은 정의가 변장된 불공정한 재판이며 성경에서 말하는 증인의 기준을 범하는 것이라고 저항하자 멈추었다. 심지어 재판의 지지자인 청교도 목사 Increase Mather(1639-1723)는 성경에서 요구하는 복수의 증인 대신에(신명기 17:6, 19:15; 마태복음 18:16; 고린도후서 13:1), 꿈과 환상에서 기인한 ‘유령의 증거’를 반대했다. 또한 그는 요즈음 서구의 정의에 중요한 부분이 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한명의 무고한 사람이 유죄판결을 받는 것보다 차라리 10명의 마녀 용의자를 빠져나가게 하는 것이 더 낫다.”
십자군
많은 사람들이 십자군을 이유로 기독교를 공격하고 있기는 하지만, 기독교 세계의 삼분의 이를 정복한 이슬람의 공격에 대해 4세기나 늦게 반응한 것으로 여기는 역사가들이 점점 늘고 있다. 십자군이 일어나기 훨씬 전에 무슬림은 이베리아 반도(지금의 스페인과 포르투갈)를 재빨리 정복했다. 샤를마뉴의 할아버지인 프랑크왕국의 왕 샤를 마르텔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분명 유럽을 전부 정복했을 것이다. 투어의 전투(AD 732)에서 마르텔의 보병은 무슬림 기병에 맞서 굳게 맞서서 그들의 반복적인 공격을 격퇴하면서 많은 수의 사상자를 내게 했다. 무슬림의 지도자 Abder Rahman이 죽자, 박살나서 남았던 군대가 피레네를 넘어 퇴각했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또한, 예루살렘,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및 나머지 북아프리카 등 기독교의 역사적 중심을 생각해 보더라도, 그 도시들이 칼의 위협 앞에 전향당하여 지금 무슬림 땅이 되었다. 그리고 십자군 이후에 무슬림 투르크는 사도 바울의 출생지이며, 그의 여러 차례 선교여행의 장소이고, 요한계시록의 일곱교회의 고장인 고대의 소아시아 땅을 정복했다. 더욱이,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이 세워진지 약 800이 지난 1453년에 그들이 그곳을 점령한 후, 그 당시 가장 큰 기독교 교회였고 동방정교의 중심이었던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거룩한 지혜’)를 모스크로 바꿔버렸다.
이와 같이 그들은 무하마드 자신의 본보기를 따랐다. 복음전도자 Lowell Lundstrom(1939-2012)은 이렇게 논평했다. “무하마드가 메디나에 있는 10년 동안 그는 65개의 군사 전쟁과 습격을 계획했으며, 개인적으로 27개를 인솔했다.” 수라 66:9에서 코란은 이렇게 확언한다. “오 선지자여! 불신자와 위선자들에 맞서 투쟁하고 그들을 엄격히 대하라. 지옥이 그들의 집이 될 것이며 불운한 여행의 종착지가 될 것이다.” 역사가 Strven Runciman 경은 이렇게 주석했다. “결코 성취되지 않는 평화를 설교했던 기독교와는 달리, 이슬람은 뻔뻔스럽게 칼을 가지고 왔다.”
심지어 리차드 도킨스도 최근에 이렇게 시인했다:
“내가 아는 한 건물을 폭파해버리는 기독교인은 없다. 기독교 자살 폭탄에 대해서도 들어본 바가 없다. 내가 알기로 기독교의 어떤 주요 분파도 배교에 대한 벌이 죽음이라고 믿는 곳은 없다. 기독교는 뭔가 나쁜 일에 대한 보루가 될진대, 기독교가 쇠퇴하는 것에 대해 나는 혼란스런 감정을 가지고 있다.”
이 기사의 주요 가르침에 대한 유사한 각주로써, 십자군 전쟁 중에서와 같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진 잔학행위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살인하지 말지니라”와 같은)과 일치하지는 않지만, 무슬림들이 행한 잔학행위는 무하마드의 가르침과 행동에 일치한다.
종교전쟁?
대부분의 거대한 전쟁, 예를 들면, 르완다에서의 Hutu와 Tutsi 종족 사이의 전쟁, 포크랜드 전쟁, 베트남전쟁과 한국전쟁, 세계2차대전, 세계1차대전, 남아메리카에서의 Gran Chaco 전쟁, 러일전쟁, 스페인과 미국 전쟁, 미국 시민 전쟁, 나폴레옹 전쟁, 장미전쟁, 몽골전쟁, 갈리아 전쟁, 포에니 전쟁, 펠로폰네소스 전쟁, 앗시리아 전쟁 등들은 종교와 아무 관련이 없음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독교인 테러리스트?
이슬람 혹은 무신론자들의 잔학행위가 보도될 때면 세속의 미디어는 거의 변함없이 기독교인 테러리스트도 있다고 하면서 그것과 도덕적으로 마찬가지라고 하며 내용을 희석시키려고 한다. 그런 것들 몇가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IRA(Irish Republican Army/아일랜드 공화국군, 반영 지하조직)와 관련하여 호주의 인문학 아카데미의 특별회원인 Dr. Mark Durie 목사는 진실을 지적했다:
“매우 자주 기독교인 테러리스트로 인용되었던 IRA의 예는 기독교인의 입장을 설명해 준다. 왜냐하면 IRA의 이데올로기는 마르크스주의와 무신론이 유력한 것이다. IRA 테러리스트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아무런 영감도 찾지 않는다.”
오클라호마 시 폭탄 사건으로 168명을 죽게 하고 680명 이상을 부상 입힌 Timothy McVeigh는 종종 “기독교인 테러리스트”라고 불렸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불가지론자였다. 사실상 그가 마지막으로 실행 이전에 공개적으로 진술한 것은 인빅터스(Invictus)(1875)라는 매우 인본주의적인 시였다. 그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신들이 무엇이든 간에 내 혼을 정복할 수 없다는 것을 감사한다.” 그리고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나는 내 운명의 주인이다: 나는 내 혼의 대장이다.” 그렇게 도전적으로 그의 창조주를 거부한다는 것은 사람이 선하든 선하지 않든 기독교인의 표식이라고 말하기 힘들다.
또한, 뉴스 미디어는 노르웨이의 대량 학살자 Anders Breivik를 재빨리 기독교인으로 분류했다. 그러나 Breivik은 하나님이나 그리스도 같은 것은 전혀 염두에 없다고 하며 자기가 종교적인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특별하게 부정했다: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면 당신은 종교적인 기독교인입니다. 나 자신 및 나와 같은 많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를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정체성으로 그리고 도덕적인 기준으로 믿고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교회 내의 위선자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위선에 대해 강하게 비판을 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그들이 공개적으로 표현했던 의는 결코 비난하지 않으셨다. 마태복음 23:1-3은 이렇게 써 있다: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이와 같이 위선이라는 비난은 그들이 설교한 도덕성의 공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을 위선이라고 비난하는 것이다. 그분은 실제로 그의 제자들에게 심지어 바리새인보다 더 의로워야 한다고 말하셨다(마태복음 5:20).
우리가 위선 때문에 화가 나는 정확한 이유는 무언가 본질적으로 선한 것이 평가절하 된다는 것을 우리가 인식하고, 위선자들은 자기들이 주장한 바로 그 기준을 달성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실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격언이 있다: “위선이란 악이 미덕에게 지불하는 칭찬이다.”
이 무신론자의 비평은 결국 우리가 옳은 것을 말하고서 그대로 행하지 않고 잘못된 것을 행하는 것보다 잘못된 것을 말하고 그대로 행하는 것을 더 선호한다는 것이 된다.
무신론자 잔학행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진 잔학행위는 단지 지난 세기에 무신론 정권이 죽인 수천만이라는 기록돌파의 숫자에 비하면 희박한 것이다. 하와이 대학 정치학과의 명예교수인 Rudolph Rummel(1932 출생)이 철저히 기록으로 남겼는데, 그는 ‘백성의 정부가 그들을 살인’한다는 의미의 데모사이드(democide)라는 용어를 만든 사람이다. 그에 의하면, 공산 중국 하에서 7천7백만, 소련 굴락 주에서 6천2백만이 죽었고, 나찌에 의해 전쟁 이외에 죽은 사람이 2천백만(유럽의 모든 유대인의 1/3에 해당하는 6백만명의 유대인을 포함하여), 크메르 루즈 킬링필드에서는 2백만이 살해당했다. 이것은 인류의 모든 역사 동안에 ‘종교’ 전쟁으로 죽은 수보다 상당히 많은 것이며, 이 숫자는 단지 20세기에 대한 것일 뿐임에도 그렇다!
이전에 우리는 유대인 대학살에 대한 진화론적 근거를 기록한 적이 있다. 여기에는 우생학이 포함되는데, 이것은 너무나 다윈주의적이어서 창조과학자가 아닌 Denis Sewell이 이런 기록을 남겼다: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우생학 운동은 다윈 가계의 사업처럼 보였다. ... 다윈의 아들 Leonard는 1911년에 그의 사촌 Galton을 전국 우생학 협회의 의장으로 앉혔다. 같은 해에 그 협회의 지부가 캠브리지에 설립되었다. 이를 선도하는 회원 중에는 찰스 다윈의 세 명의 아들, Horace, Francis, George가 더 있었다.”
요약
잔학행위를 했다고 고백하는 기독교인은 기독교의 가르침에 부합하지 않은 행동을 한 것이다. 역으로, 잔학행위를 한 진화론자는 진화론과 부합하는 행동을 한 것이다.
‘잔학행위’라는 용어는 오직 유대-기독교 세계관 하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진화론 철학에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20세기에만 일어난 무신론자들의 잔학행위에 의한 공포에 비하면 모든 세기에 일어난 ‘기독교인의’ 잔학행위는 다 합쳐도 비교가 안될 정도로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