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 폐지론과 존속론의 사이에서>
저는 보수 교단에서 드물게 십일조의 <신학적 폐지론>에 동조하면서 동시에 <실천적 존속론>을 주장하는 입장입니다. 즉, 신학적으로 폐지되었으나 실천적으로 존속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지금까지 저와 같은 입장을 가진 분은 단 한명도 보지 못했습니다.
십일조가 신학적으로 폐지되었다고 말하면, 우리 교단에서 문제가 될 수 있고, 많은 목사님들이 발끈하십니다. 그러나 저는 신학적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우선 교회 역사 속에서 이미 초대교회부터 십일조를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신약에서도 예수님의 복음서 언급 외에 전혀 십일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소수의 십일조 폐지론자들의 주장들을 보면, 명쾌하게 왜 신학적으로 폐지되었는지 의외로 제대로 풀어내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특히 바로 예수님이 "이것도 (십일조) 행하고 저것도 (십일조 정신)도 행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명쾌히 잘 설명 못합니다. 십일조 폐지론자인 오광만 (합신) 교수도 이 구절을 너무 복잡하게 해석합니다. 너무 쉬운 걸 뭐 그리 복잡하게 설명한지요.
십일조 존속론자들의 가장 강력한 근거가 바로 저 말씀입니다. 바로 예수님도 분명히 십일조를 하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 말씀의 유효성은 그분의 십자가 죽음 이전까지였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생전에 한번도 구약 율법 자체를 폐기한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죽음으로써 폐기하러 왔다고 말씀하시면서도 생전엔 율법을 준수했습니다.
예컨대, 문둥병자를 고친 뒤,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레위기 14장에 있는 법 그대로입니다. 제사장이 검사해서 확증해야 문둥병 치료가 인증됩니다.
다만, 자신이 율법의 완성자요 성전의 대체자, 그리고 안식일의 주인됨을 <선취적으로> 자주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막바지에 이른 율법의 기능을 본질을 끄집어 내어 강조하시면서 아직은 유효한 율법을 여전히 존중하셨습니다. 그래서 "이것도 저것도 행하라"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하신 바, 형식으로서의 그 십일조의 유효성은 그분의 죽음까지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죽음과 더불어 성전 휘장이 찢어지며 비로소 성전의 기능이 끝났고 동시에 제사장직과 십일조를 포함한 율법의 기능이 끝났다는 사실을 간과합니다. 즉, 십일조 뿐만 아니라 구약의 율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더불어 끝난 겁니다. 다만 그 정신과 본질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임 이후에는 신약 그 어디에도 십일조가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교회와 초대교회에서도 기록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십일조는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는가? 많은 폐지론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이 논리를 헌금 축소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데 사용합니다. 십일조 미만을 해도 이제 자유롭고 당당하다는 겁니다.
즉, 십일조 폐지론 주장하는 분들 대부분이 헌금 별로 안하면서 신학적 합리화에 급급합니다.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직시해야 합니다. 사실은 신약의 원리는 "십일조 이상"입니다. 바리새인의 의를 넘어서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의"는 바리새인이 간과한 율법의 본질을 말하기도 하지만, 물질을 바리새인보다 그 이상으로 하나님께 굴복시켜야 한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고후 8장에 나오듯 "자원하는 마음으로 힘에 지나도록 하는 것"이 신약의 원리입니다.
어떤 분은 고후 8-9장에 나온 바울의 가르침은 헌금의 개념이 아닌 <연보>의 개념이라고 말합니다. 즉, 일종의 사람간의 구제물이나 선물일 뿐이라는 겁니다. 뉴스엔조이에 그 기사가 메인에 뜬 적 있습니다. 제가 나중에 반박 기사 올릴 예정입니다.
바울은 연보를 가르칠 때 분명히 헌금의 개념으로 말합니다. 먼저 네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give, offer) 물질을 또한 그렇게 "드리라"고 합니다 (고후 8:5).
이렇게 바울은 성도의 연보를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헌금(offering)의 개념으로 말합니다. 마게도냐 교인들은 정기적으로 모였을 때, 그들은 그렇게 연보를 헌금으로 모은 것입니다. 그때 그들은 하나님께 먼저 자신을 드린다고 고백했습니다.
한편, "자원하는 마음으로"라는 헌금의 원리 때문에 교회는 목회자는 헌금을 절대 강요하면 안됩니다. 이건 목사님들의 잘못입니다. 결국 목사님들은 지나치게 헌금 강요하면 안됩니다. 바울도 억지로 내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힘에 지나도록"은 성도의 의무입니다. 목사가 말하지 않아도 성도가 자원해서 넉넉히 헌금해야 합니다. 신약의 모든 행간을 살펴볼 때, 신약의 원리를 뒤져볼 때, 성도는 십일조 이상을 해야합니다.
그런데 십일조 폐지론자들은 "힘에 지나도록"을 애써 외면 합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교회가, 또한 목사님들이 헌금을 잘 못 사용하니 못내겠다? 저도 소속교회에다 헌금해야만 헌금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건 지극히 성전 중심 사고, 즉 구약적 사고입니다. 무슨 용도든, 어디에 바치든, 성전의 대체자인 우리의 성전되신 예수님께 바치면 됩니다.
그러니 교회가 헌금 쓰는게 마음에 안드시면, 다른 선교 기관, 구제 기관에 헌금하시거나 스스로 그 돈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난한 이웃을 위해 쓰시기 바랍니다.
저는 우리가 가진 것 최소 10%는 나 자신을 위해 쓰지 않아도 된다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그 만큼 주셨으면, 타인을 위해 쓸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 사역과 목회자의 삶, 그리고 선교와 구제를 위해 쓰여야 합니다.
물론 먹고 살기 힘드니 쉽지 않습니다. 이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반떼 탈 때도 그러더니 소나타 탈 때도 "먹고 살기 힘들다"고 말합니다. 외제 차를 타도 그럴 겁니다.
언제나 우리보다 너무나도 힘든 삶을 살고 있는 지구상의 90%의 계층이 있다는 걸 아셨으면 합니다. 그런 점에서 10%를 아까워 한다면 우리는 너무 이기적인 겁니다.
결국 이런 이유로 십일조는 존속해야 합니다. 신학적으로는 폐지 되었으나, 실천적으로 존속해야 합니다. 성도의 최저의 헌신의 기준점으로 삼아 스스로 자원해서 내야 합니다. 이걸 못하면, 그는 부족한 기독교인입니다. 물론 때로 너무 물질적으로 힘든 분들은 적게 헌금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실 겁니다.
저는 십일조 폐지론자들의 물질적 헌신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더 이상 십일조 폐지론을 십일조보다 더 적게 헌금하면서 십일조 폐지론을 주장하는 모순된 주장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도 만일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다면, 우선 물질로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물질을 내시는 분들은 자연히 시간도 내시고 몸으로 헌신을 하시더군요.
기억하십시오, 마게도냐 교인들은 너무나 가난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 가난했던 다른 교회의 성도들을 위해, 바울의 선교를 위해 힘에 지나도록 헌금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기억하시어, 성경책에 영원히 그 헌신이 기록되었습니다.
여러분은 한국에서 좋은 차 몰며 불평을 입에 달고 사시나, 많은 선교사들이 어려움 가운데 헌신하고 있습니다. 많은 선교사들이 고물 차량에 차 수리비가 없거나 차량이 없어서 고생합니다. 저도 예외가 아닙니다.
또한 조국에도 많은 헌신된 분들이 이름 없이 빚도 없이 복음을 위해 삽니다. 헐벗고 굶주린 이웃들이 지천에 깔려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십일조 이상을 바쳐, 그 헌금이 이런 귀한 일들에 사용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