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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 발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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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 발달사

History and Development of Concrete

글/ 강석화(동양메이저(주) R&D 본부장, 정란(단국대학교 건축공학과 교수)

출처 : 콘크리트학회지, 2009년 5월호, 제21권 3호 pp. 44-53

 

1. 개요

 

콘크리트는 기본적으로 골재와 골재를 결합재를 사용하여 한 덩어리로 만든 것이며, 콘크리트는 바로 이 결합재의 역사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시멘트라고 하는 이 결합재는 1820년경 영국에서 발명한 포틀랜드 시멘트를 의미하는데, 그 역사는 200년이 채 안되지만, 넓은 의미의 시멘트 역사는 매우 유구하여 석회와 석고를 혼합해 쌓아올린 피라미드나 석회와 화산재를 혼합하여 만든 그리스 로마 시대의 수경성 시멘트를 포함한다면 수천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본 고에서는 콘크리트의 발전과정을 기술하기 위하여 선사시대의 석회콘크리트부터 현재의 수경성 포틀랜드 시멘트 시대까지의 시멘트 및 콘크리트 역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2. 고대의 시멘트 발견

 

고대 인류가 아직 일정한 정착생활을 하지 않고 유목생활을 하던 시대에 거주지를 옮길 때마다 석회석에 굴을 파고 살아가면서 빗물에 의하여 석회석 표면이 녹아 내리는 현상을 일으키고,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경화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 시초가 되어 석회 및 석회모르타르 등이 점차 구조물에까지 사용되었다고 전해진다.

결합재로 가장 일찍이 만들어진 것은 소석고(燒石膏)일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것이 어디에서 언제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는지 정확히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집트 초기 왕조시대부터 다량으로 사용되고 있었으며, Gizeh의 피라미드와 Sakkara 분묘에서 사용된 사례가 확인되고 있다<사진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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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고는 석회석에 비하여 낮은 온도에서 소성할 수 있으므로 석회보다는 석고가 만저 제조되었으리라고 일반적으로 추측되고 있다. 석고는 석회석에 비해 낮은 온도에서 소성할 수가 있으며 특히 이 지역은 당시에도 연료로 사용할 목재가 부족하였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메소포타미아 초기 문명 시기의 수메르인들도 소석고를 사용하였다. 중근동지역에서 석고모르타르가 결합재로 사용된 것은 기원전 4000년 이전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는 그 후 점차 석회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이 사용한 석회모르타르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시대에 사용되었던 것과 거의 유사한 것이었다.

그 외에도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에서는 석회와 점토를 섞은 모르타르를 처음 사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페니키아인들은 기원전 700년 이전에 석회와 벽돌을 갈아 만든 가루를 섞어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그리스 시대에는 화산응회암을 산토린(Santorin) 섬에서 채취하여 사용하였다. 이것은 현대의 건축계에서도 잘 알려진 산토린석이라는 물질이다. 로마시대에 콘크리트가 출현한 시기는 대략 기원전 2세기 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로마인들은 이보다 좀 더 진한 색을 갖는 이와 비슷한 재료를 사용하였는데, 베소비우스 화산 근처에 있는 포졸리(Pozzuoli) 지역 인근에서 산출된 화산회를 첨가한 모르타르는 경화 속도가 빨라지는 기존의 석회모르타르와 달리 강도가 현저하게 증가하고 수경성을 갖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이 지방에서 산출된 자연산 화산재를 포졸라나(pozzolana) 또는 포졸란(pozzolan)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고대 로마시대에는 거대한 대성당이나 건물의 지하 기초, 그리고 콜로세움<사진 3> 건설 등에 콘크리트가 사용되었다.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구조물 중에 가장 주목할만한 구조물은 서기 126년에 완공된 로마의 판테온(Pantheon) 신전의 돔 구조물이다. 이 돔 구조물은 지간이 43m로 19세기까지만 해도 이 지간을 넘는 구조물이 없었으며, 아직도 이 돔의 안쪽에서는 부순돌을 골재로 사용하고 거푸집을 설치한 흔적을 볼 수 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의 콘크리트의 시초가 아닌가 추측된다<사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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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시대 때 대규모의 건설공사에 콘크리트를 사용한 것이 구조공학적인 측면보다는 주로 경제적인 측면 및 건설공사의 운영관리 측면을 고려한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다. 즉 재료의 입수가 용이하고, 건설노무자의 편성과 또한 공사기간의 단축 측면에서 비교적 유리하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로마시대에는 콘크리트를 타설할 경우 일반적으로 자갈이나 잡석 또는 벽돌파편 등 굵은 골재를 한 겹 깔아놓은 다음, 그 위에 모르타르를 부어 잘 다져 단단하게 한 후 다시 한 겹을 그 위에 추가해 가는 소위 층상 타설공법이 사용되었다. 특히 벽체는 양측 외면 벽중간을 비워놓고 벽돌 조적식으로 먼저 쌓은 다음, 비어있는 부분에 자갈이나 잡석, 벽돌파편 등으로 층상을 쌓아가면서 모르타르를 주입 충전하는 오푸스 테스타세움(opus testaceum)이라는 공법으로 많이 건설되었고, 이 방법은 기원전 1세기를 전후하여 공공 건축물의 벽체 건설에 널리 사용되었다.

한편 최근 조사에서 중국 서안시 교외에 있는 대지만 유적에서 고대 로마의 것과 비슷한 약 5000년전의 콘크리트가 원형을 거의 유지한 상태로 발굴되었다(1,2). 일반적으로 건설공사에 사용되는 콘크리트는 지하수에 장기간 노출되면 표면에서 칼슘 성분이 녹아 내리고 열화가 진행되기 때문에 구조물의 유지관리는 필수적이다. 그러나 중국에서 발굴된 콘크리트의 대부분은 탄산칼슘의 영향으로 표면이 대리석처럼 매끄럽게 되고, 물 등에 의해 내부 부식이 방지되고 있었다고 한다. 이 고대의 시멘트 원료인 대지만 산의 원석이 현재의 포틀랜드 시멘트 원료와 비슷한 조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3. 중세의 콘크리트 발전

 

3.1 로만 시멘트의 발명

콘크리트가 본격적으로 개발된 시기는 18세기 이후로 볼 수 있다. 개발 동기를 나름대로 추측해 보면 콘크리트의 개발은 시대적인 요구로 볼 수 있다. 현재의 포틀랜드 시멘트의 출발점이 된 것은 수경성시멘트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18세기에서 19세기 초에 걸쳐서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수경성시멘트의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서양의 역사를 살펴보면, 문명의 꽃을 피우기 시작한 르네상스 시대에 먼저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산업 시설의 확충과 사회기반 시설의 건설을 새로이 필요로 하게 되었고,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은 왕정이 붕괴되고 시민이 주도하는 사회로 변하게 됨에 따라 산업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은 유럽 전체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왕족과 귀족이 사회를 지배하던 시절에는 궁전, 교회, 성당을 짓는다거나 성을 쌓는 일과 같이 돌의 사용은 군사용이거나 지배계급층의 주거용, 종교시설로 제한되어 있었다.

또한 돌을 사용한 구조물의 축조는 장비가 발달되지 않은 시절에는 당연히 많은 인력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일반 시민들이 개인을 위하여 돌을 사용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큰 돌은 사람들이 혼자 다룰 수는 없었기 때문에 작은 돌을 뭉쳐서 사용하는 방법을 생각해 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거기에 필요한 것이 바로 돌을 서로 붙게 하는 풀이다. 이 풀이 시멘트라고 하는 것으로, 진흙과 석회석이 이 풀의 주원료가 된다.

1756년 영국의 Smeaton은 영국 콘월(Cornwall) 해안가에 Eddystone 등대의 재건축을 담당하는 기사였다. 그는 독일의 트래스(trass)라는 화산토를 잘 다룰 줄 알았으며, 시멘트 재료로 그 지역 석회석의 일종을 잘 다루기로 평판이 나 있었다. 그는 예전엔 단단한 석회석에서 얻은 석회가 가장 우수한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등대 재건축에 가장 적합한 석회는 비교적 단단한 석회석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순도가 떨어지는 부드러운 암석에서 얻은 석회가 최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분석결과를 토대로 그는 Eddystone 등대를 잘 보수하였고, 이 등대는 재보수가 필요하다고 진단이 내려지기까지 약 123년 동안 등대로서의 제 역할을 해왔다<사진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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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40년 후인 1796년 영국의 파커(Packer)는 점토질 석회석을 더 높은 온도로 소성하면 보다 좋은 시멘트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이 시멘트와 물을 5:2의 비율로 혼합하면 1시간 이내에 응결 경화하는 급결성 시멘트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점토를 분쇄한 후, 석회로에서 소성하여 클링커를 제조한 후 이를 다시 분쇄하여 시멘트를 제조하는 방법을 발명하였다. 이 시멘트는 당시에 파커 시멘트(parker cement)라고 불리웠으나, 그 색깔이 이태리 산의 포졸란과 비슷하여 나중에는 로만 시멘트(roman cement)라 부르게 되었다. 이 로만 시멘트는 수중용으로 수요가 증가되었고, 1825년 완공된 영국의 템즈강 터널공사<그림 1> 및 국회의사당 공사에 쓰이게 되어 유명하게 되었으며 1818년 이후 30년간은 로만 시멘트 시대라고 할 정도로 그 전성기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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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커가 발명한 로만 시멘트는 자연산으로 채취한 원료에 다른 재료를 섞지 않고 단순히 소성 연마하여 제조한 것이기 때문에 Natural Cement라고 불리기도 하였는데, 파커의 로만 시멘트가 출현한 1796년경부터 1850년경까지 시멘트라고 하면 바로 로만 시멘트(roman cement)를 지칭할 장도로 널리 보급되었으며, 시멘트 공업은 영국과 유럽 여러 곳으로 확산되어 갔고, 미국에서도, 1818년에 이러한 Natural Cement가 처음 생산되었고, 바야흐로 Natural Cement 공업의 일대 전성기를 초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근대적인 화학공정에 의하여 제조 생산되는 현재의 포틀랜드 시멘트가 1824년에 Aspdin에 의해 발명된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됨에 따라 로만 시멘트 시대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3.2 포틀랜드 시멘트의 발명

영국에서 로만 시멘트가 널리 이용되고 있을 당시, 프랑스에서는 Vicat, 독일에서는 Michaelis 등에 의하여 인공시멘트 제조 방법에 관한 연구가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18세기 중엽부터 영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기술과 학문적인 면에서 연구를 거듭하던 중 마침내 1824년 영국의 벽돌공 Aspdin이 Smeaton의 로만 시멘트의 영향을 받아 로만 시멘트에 물을 가해 반응시킨 후, 이것을 다시 섭씨 800도까지 소성을 하여 얻어진 클링커를 얻은 후, 이것을 분쇄하여 시멘트를 얻는 방법을 발명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시멘트가 로만 시멘트보다는 그 품질이 우수하였고, 이 기술은 '인조석 제조법의 개량(an improvement in the mode of producing an artificial stone)'이라는 명칭으로 1824년 10월 21일에 특허를 취득하였다. 이런 방법으로 제조된 시멘트가 경화한 후에는 색채가 마치 포틀랜드(Portland) 섬의 채석장 돌과 유사하다 하여 '포틀랜드 시멘트'라 불리어지게 되었다<그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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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만들어진 시멘트는 석회석을 소성하여 생석회를 만드는 1차 소성과정과 이를 다시 분말 상태의 소석회로 만들어 여기에 점토를 혼합하고 다시 석회로에서 2차 소성하여 클링커를 만드는 이중 소성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포틀랜드 시멘트와는 그 성분에 있어서 Aspdin의 시멘트와는 다소 다르다고 할 수가 있다.

포틀랜드 시멘트의 창시자인 Joseph Aspdin의 아들인 William Aspdin은 포틀랜드 시멘트 화사를 새로이 창업한 후, 더욱 시멘트의 제조법을 개량하여 보다 높은 온도에서 소성하여 C2S와 C3A, C4AF 등을 생성시켜 반용융상태로 소성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림 3>은 Northfleet에 있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시멘트 소성로로, 이 소성로에서 채취한 클링커를 관찰하면 C2S가 관찰되는 것으로 보아 섭씨 1,250도 이상의 온도에서 소성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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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포틀랜드 시멘트의 발명자임을 주장하는 또 한 사람으로 Johnson이 있다. 당시 Aspdin의 특허는 사용 석회석과 점토의 혼합 비율을 언급하고 있지 않았고 소성로의 온도보다는 그리 높은 수준은 아니었던 것 같다. Johnson에 의하면 Aspdin의 포틀랜드 시멘트는 석고가루보다는 치즈에 가까운 모양이었다고 한다. 1845년경 Johnson은 유리처럼 생긴, 질량 감량이 많아진 탈탄산 물질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 시료를 분석한 결과 더 좋은 강도와 색을 갖는 재료로 판명되었다. 계속된 실험으로 적정 배합비와 제조 온도를 정립하였으며, 이것이 현대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시멘트 산업의 기원이 된 것으로 추측된다.

여하튼 Aspdin과 Johnson은 각기 독립적으로 포틀랜드 시멘트를 발명하였고, 이들 두 시멘트에 대한 당시의 평가는 거의 비슷하였다.

그 후 1851년 런던 공업박람회에 출품하여 양자 공히 수상한 바 있고, 그 품질의 우수성이 널리 알려져 포틀랜드 시멘트의 제조 방법은 전세계로 전해지게 되었다. 특히 영국에서는 1850년 4개의 포틀랜드 시멘트 공장이 건설되었고, 1851년 런던 박람회에 출품하여 호평을 받았으며, 프랑스에서는 1848년 부우론 공장이 최초로 포틀랜드 시멘트를 생산하게 되어 프랑스에서도 포틀랜드 시멘트가 수요자의 호평을 받았다. 또한 독일에서는 1850년 로만 시멘트를 생산하던 북스지프데 공장에서 포틀랜드 시멘트를 제조생산하기 시작하였으며 1852년 쥘코브 공장에서 포틀랜드 시멘트를 전문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하는 등 포틀랜드 시멘트의 원료는 세계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산출될 수 있는 것이어서 포틀랜드 시멘트의 대량생산과 보급은 전 세계적으로 급속하게 확산되어 갔다.

 

3.3 혼합시멘트 및 특수 시멘트의 발명

한편 1824년 Aspdin에 의해 포틀랜드 시멘트가 발명된 이후, 1862년에 독일에서는 포틀랜드 시멘트에 고로슬래그를 혼합한 새로운 개념의 혼합시멘트가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혼합시멘트를 사용하게 된 것은 포틀랜드 시멘트의 생산 원가를 낮추고자 하는 이유가 있었고, 철강 산업의 부산물인 슬래그를 재활용함으로써 폐기물 재활용이라는 이점과 또한 포틀랜드 시멘트가 가지는 품질상의 약점 등을 보완해 주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그 이후에는 고로슬래그의 혼합비율을 조정한 Eisenportlandzement, Hochofenzement 등 다양한 종류의 혼합시멘트가 시판되었다.

1877년경 영국에서 Rotary Kiln의 개발 가능성이 최초로 검토되었고, 1885년 최초의 Rotary Kiln이 Ransome에 의해 창안되어 영국에 특허를 냈다. 이 Ransome Kiln은 시멘트 공업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고 Ransome Kiln의 개념을 바탕으로 미국에서는 1895년에 Atlas Cement 회사의 Hurry와 Seaman에 의해 Rotary Kiln이 최초 개발되어 생산을 시작했다.

이후 1907년경 프랑스와 미국에서 석회석과 보크사이트를 원료로 하는 알루미나 시멘트가 제조되었으며, 프랑스에서 1936년에 소위 팽창시멘트라는 특수 시멘트가 Lossier라는 사람에 의해서 개발되었다. 이 제품은 경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축량보다 많게 또는 같은 수준으로 팽창시키는 기능을 갖도록 한다. 이러한 팽창은 모르타르나 콘크리트에서 수축에 의해 생기는 응력을 중화시키게 된다. 즉, 이 효과는 조기의 팽창응력이 후속 경화 수축 과정에서 중화된다. 이와 같이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시멘트의 종류도 다양화되기 시작했다.

 

4. 철근콘크리트의 등장

 

일반적으로 철근콘크리트 개념을 처음 고안해 낸 사람으로서는 1855년 파리세계박람회에 철망을 사용한 콘크리트 배를 제작했던 사례를 들어 흔히 프랑스의 램보트(Lambot)를 그 효시로 삼는 통설이 있지만, 19세기를 통해서 실질적인 철근콘크리트 구조공법을 실용화하는데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한 사례가 그 외에도 많이 있었다<그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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램보트가 콘크리트 배를 만들었던 1850년 이후 약 25년 동안은 철근콘크리트 구조에 대한 이론적 연구나 설계와 시공기법에 노하우도 아직 미미하였고 발전 속도 또한 부진한 편이었다. 램보트의 배는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 전시됨으로써 그 존재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같은 시기에 프랑스의 Coignet는 1853년 스팬 6m의 철근콘크리트 지붕을 건조하였고, 1861년에는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원리를 발표하기도 하였다.(4).

철근콘크리트 구조에 관한 다양한 노하우가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온 시기는 1870년대에서 1910년경에 이르는 기간이었다. 당시에 개발된 각종 설계기법, 구조상세, 시공방법들 중에는 생소하고 기이한 방법도 많이 있었지만 그 중 상당한 부분이 현재 보편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방법의 원조라고 할 수가 있다.

흔히 철근콘크리트의 발명자로 그 명성이 알려진 파리의 정원사 모니에(Monier)는 자신이 고안한 배근방법을 이용하여 철망으로 보강시킨 콘크리트 화분을 제조 보급하였다<그림 5>. 그는 1865년 모니에식 격자배근법의 특허를 취득하였는데, 이것은 평행으로 배치한 주근에 직각방향으로 배력근을 배치하여 격자를 구성하는 배근방식으로 그 용어도 현재 통용되는 것과 아주 유사한 것이었다. 그러나 모니에 자신은 아직 철근콘크리트의 보강철근이 부재단면의 인장측 가까이에 배치되어야 한다는 기본원리를 인식할 수 있는 수준에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를 철근콘크리트의 발명가로 추대하기에는 다소 미흡한 편이다. 다행하게도 독일인 엔지니어 Wayss와 Bauschinger가 독일 및 미국지역에 대한 모니에 특허사용권을 매입하게 되어 구조 원리에 부합되는 합리적 배근방법으로 개선 보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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램보트와 모니에가 실제로 사용한 재료는 모르타르였다. 따라서 그들이 만들어낸 것은 엄정하게 평가할 때에 정통적인 철근콘크리트 구조라기보다는 현재 훼로시멘트(ferro cement)로 통용되고 있는 것의 원조격으로 볼 수가 있다. 정통적인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창시자로서의 명예는 영국 Newceslle 출신의 Wilkinson에게 귀속되어야 한다. 그는 1855년 자신이 고안한 철근콘크리트 구조방식에 대한 특허를 취득하였다. 한편 미국 최초의 사례로는 1875년 뉴욕의 Portchester에 Ward가 건조한 철근콘크리트 가옥을 들 수가 있다. 그러나 철근배근 방법 등은 구조계산에 의한 정통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그 자신의 판단에 의한 방식이었다.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초창기 발전과정에서 지대한 공헌을 이룩한 사람으로서는 프랑스의 Hennebique를 들 수가 있다. 그는 최초로 스터럽을 사용하였으며, 1898년에는 철근콘크리트 보의 배근법에 관한 특허를 취득하였다. 그의 배근법은 보의 주철근에 스터럽을 배치하고 또한 절곡철근(bent-up bar)을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Hennebique의 배근법은 그 후 표준적인 철근콘크리트 공법으로 널리 수용 보급되었으며, 결국 그는 철근콘크리트 구조분야의 선두주자로서 큰 공헌을 남기게 되었다. 1979년 경까지 앙네비크의 회사가 수주하였던 계약 실적이 무려 3만 5천 건을 초과한 것으로 미루어 그가 고안한 철근콘크리트 공법의 보급실태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그림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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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근콘크리트 구조에 대한 단면산정 이론은 19세기에서 20세기 중반에 이르는 기간을 경과하면서 확립되었다. 철근콘크리트 휨부재에 대한 단면 산정식을 처음으로 만든 사람은 독일의 Koenen이다. Koenen은 철근콘크리트 슬래브, 아치 및 철근 등에 대한 일련의 시험을 통해 철근콘크리트 구조부재의 거동과 특성을 직접 체험하게 되었으며,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철근콘크리트 구조 이론을 체계화하기에 이르렀고, 1886년 모니에식 철근콘크리트 공법에 관한 쾨넨식 구조계산법을 저서로 발표하였다.

그 당시의 Koenen은 아직 변형률의 적합조건을 고려할 수 있는 수준에까지 도달하지는 못하였으며, 또한 중립축의 위치가 휨부재 높이의 1/2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Wayss와 Koenen은 각기 사업가와 엔지니어의 입장에서 서로 밀접하게 협동하여 본격적인 공개시험을 통해 사회적인 신용을 획득할 수 있게 되었다. 이리하여 철근콘크리트 구조가 공학의 연구영역으로 편입되는 단서가 열리게 되었으며 이들의 사업은 유럽 각지로 확대되면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1890년 Neumann은 콘크리트의 인장력도 유효한 것으로 가정하고, 콘크리트와 철근에 대한 변형률 적합조건으로부터 탄성계수비 n = Es/Ec를 처음으로 도입한 철근콘크리트 단면산정법을 발표하였다. 1894년에는 프랑스의 Coignet와 Tedesco에 의해 직선이론이 발표되었다. 휨부재 단면에 대한 이 이론은 종래의 Koenen의 평면유지 이론에 변형률 적합조건을 추가시킨 것으로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탄성이론으로는 완전한 것이었다. 이 탄성이론은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허용응력설계법이 극한강도설계법으로 교체되는 상황이 전개되기까지 철근콘크리트 구조 설계법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최근까지도 사용된 바 있는 국내에서의 허용응력설계법에 의한 휨부재 단면산정법도 역시 Coignet-Tedesco 이론에 준한 것이다.

철근콘크리트 구조는 원래 일체식 연속구조물, 즉 고차의 부정정구조물을 구성하는 것이 상례이다. 그리하여 철근콘크리트 구조가 점차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20세기 초부터 부정정구조에 대한 해석방법이 각국에서 연구되었다. 부정정구조물에 대한 이론적 연구는 1874년 Maxwell-Mohr의 부정정구조 일반해법으로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 일반해법은 난해한 이론을 바탕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학술적으로는 매우 유용한 것이었으나 철근콘크리트 구조 설계실무에 적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구조해석법이 아니었다. 따라서 보다 실용적인 구조해석방법을 개발하는 데에 많은 연구가 집중되었다. 사실상 1900년경을 전후한 당시의 철근콘크리트 구조 분야의 사정은 특정한 철근콘크리트 공법에 따라, 가령 Hennebique식에서는 자체 개발한 경험적인 모멘트계수를 구조설계에 적용하는 방식 등이 관행적으로 통용되었다.

1914년 Bendixen은 절점회전각을 미지수로 하여 단부모멘트를 표시하는 요각법을 발표하였다. 이 요각법은 1915년 Gehler에 의해, 뒤이어 1921년에는 다시 Wilson에 의해 보다 실용적인 부정정구조 해석법으로 개선되어 현재의 요각법으로 발전되었다. 실용구조해석법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모멘트분배법은 1932년 미국의 Hardy Cross에 의해 발표되었다. 모멘트분배법은 특히 수직하중을 받는 모멘트 골조의 실용해석법으로 현재까지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철근콘크리트에 대한 실험적 연구는 20세기에 접어든 이후에도 활발하게 시행되었다. 독일에서는 슈트트가르트 공과대학의 Bach와 Graf가 와이스-프라이타크 회사의 지원위촉을 받아 대규모의 실험연구 사업을 시행하였으며, 1914년경에는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거동과 특성에 관한 주요한 결론을 도출하였다.

미국에서는 일리노이 대학의 Talbot가 1904년경 이후 철근콘크리트보, 슬래브, 기둥, 기초 등에 대한 각종 시험을 실시하였다. 한편 1899년 Considere가 고안한 바 있는 나선기둥의 설계방법을 확립하기 위한 대규모의 연구사업이 ACI 주최로 1929년에서 1933년까지 미국의 일리노이 대학과 리하이 대학에서 시행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시험결과에서 제시되는 철근콘크리트 부재의 극한파괴강도를 Coignet-Tedesco의 직선이론으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 후 1931년 Emperger의 극한강도 이론을 선두로 하여 각종 소성설계 이론이 유럽과 미국에서 제안되었다. 1940년 Broek는 부정정 골조의 파괴하중을 구하는 극한설계방법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극한해석이론은 1951년 Greenberg와 Prager에 의하여 완성을 보게 되었다.

한편 콘크리트의 기술 발전 및 사용량 증대에 지대한 역할을 한 것은 레미콘의 제조 발상이었다. 독일의 Harald Steibichler 박사에 의하면 세계에서 최초로 레미콘이 탄생한 것은 1903년 독일의 Starnberg에서 건설업자 Magens에 의해 레미콘 플랜트가 건설되어 레미콘 제조의 특허를 받은 때라고 서술하고 있다(5).

그러나 독일에서는 약 50년간 레미콘 기업이 성장하지를 못하였다. 그 이유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제1차 세계대전과 그 후의 세계적인 경제 불황, 그리고 미숙한 기술 때문에 기업으로 성립하지 못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독일에서 레미콘 기업의 부활은 제2차 세계대전 종료 후의 1954년이었다.

미국에서는 독일보다 늦은 1913년, 메릴랜드 주의 볼티모어 시에 최초 레미콘 플랜트가 건설되었다. 당초에는 센트럴믹스(Central Mix) 방식으로 플랜트에서 반죽되어 덤프트럭으로 운반되었기 때문에 품질불량으로 평판이 나빴고, 10년간은 거의 사용자로부터 인식되지 못하였다. 그 후 1926년에 트럭믹서의 발명으로 품질문제가 해결됨에 따라 급속한 발전을 보기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다.

미국에서는 창업 당시부터 골재업자가 골재판매의 일환으로 소규모 기업의 형태로 시작된 곳이 많았으며, 공급지역이 광대하였기 때문에 거의가 트럭믹서 방식이 채택되었다. 그 후 대기업의 참여에 의해 대도시에서는 센트럴믹스 방식도 나타나게 되었다. 1950년에는 전미 1,320개 도시에 1,700개의 플랜트가 건설되었으며, 연간 생산량은 3,800만 입방미터에 달하게 되었다.

한편 일본에서 최초의 레미콘 공장이 설립됐던 것은 1949년 1월 당시 반성(磐城)시멘트(주)에 의해 레미콘 기업으로 동경콘크리트공업(주)가 설립되어 동경의 업평교(業平橋)에 레미콘 매매를 목적으로 하는 제1호 공장이 건설되었다. 창업 당시의 레미콘은 트럭믹스가 없어 운반에는 덤프트럭을 사용하였으나 운반 도중 콘크리트 재료분리가 큰 애로사항이었다. 그 때문에 슬럼프 50m 이하의 포장용이 주를 이루었고 건축용은 거의 없었다. 그 후 AE콘크리트가 도입되어 콘크리트의 재료분리 방지에 도움을 주었고, 덤프트럭에 교반용 에지테이터를 장착하거나 수평형 드럼 에지테이터가 채용되는 등의 운반차의 개선에 의해 품질문제가 해결되어 수요자의 납득을 얻기에 이르렀다.

 

5. 한국의 시멘트 및 콘크리트 발달사

 

5.1 초창기의 시멘트 및 콘크리트 사용

시멘트와 관련한 우리나라 과거의 기록을 살펴보면, 세종실록지리지에 소성석회의 제조법이 설명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시멘트와 유사한 재료가 사용된 역사는 오래되었지만, 포졸라나가 우리나라에 처음 알려진 것은 18세기말 영, 정조시대의 실학자 박제가(1750-1805)에 의하여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도합 3회에 걸쳐 연행사신(燕行使臣)의 수행원으로 청나라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이때 청나라 학자들과 교류하여 얻은 지식과 또한 발전된 청나라 문물을 여러 방면에서 직접 관찰하여 얻은 새로운 지식을 정리하여 '북학의'를 저술하였다. 모르타르 및 석회콘크리트 그리고 포졸라나에 관한 내용은 '북학의내편(北學議內編)' 중의 벽돌에 대한 항목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한편 본격적으로 포틀랜드 시멘트 제조기술이 우리나라에 도입된 것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개척할 때부터이다. 일본은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포틀랜드 시멘트 제조기술을 받아들여 1872년에 세멘트 공장을 건설하였고, 그로부터 10년 뒤인 1881년 민간인이 운영하는 오노다시멘트가 처음 출현하게 되었다. 당시에 일본은 대륙으로 진출하는 데 있어서 우리나라가 전진기지로 이용될 수밖에 없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경인철도 공사와 더불어 근대의 토목기술이 우리나라에 도입되었고, 교량, 항만 접안시설 등에 콘크리트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일본에서 생산된 포틀랜드 시멘트가 국내에 수입되어 처음 사용하게 된 시기는 1899년에 개통된 경인철도상의 교량 하부구조, 즉 교각과 기초의 건설에 사용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며, 정확한 수입연도와 수량 및 금액 등을 밝혀주는 자료로는 일본통감부가 발행한 통감부 통계연표가 남아 있다.

당시에는 철근콘크리트의 개념도 정립이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무근콘크리트로 타설이 되었고, 이후 철근콘크리트 개념이 도입되어 1910년경부터 국도가 신설되면서 철근콘크리트 슬래브교, T형교, 아치교가 도로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중 아직도 국도 교량의 일부에는 이 시기에 지어진 콘크리트 교량이 남아 있다. 현재 남아있는 기록에 의하면(6), 전국에 사용 중인 도로 위에 설치된 교량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전남 나주 영강의 안영교(12.5m)와 안창교(7m), 금남의 금성교(19m)이며, 지난 1910년 각각 건설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사진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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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가장 오래된 철근콘크리트 라멘교는 1923년에 경남 창원에 건설된 외동교(교장 6.4m)이고, 철근콘크리트 박스거더교는 1932년에 경북 영양에 건설된 방전교(교장 6m)이다. 또한 철근콘크리트 아치교로는 1924년에 전남 화순에 건설된 연덕교(교장 5.8m)가 최초의 교량이다.

교량을 중심으로 토목 구조물의 건설에 쓰이기 시작한 콘크리트는 1920년대로 접어들면서 공공건축물을 중심으로 한 철근콘크리트 구조에도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현재는 해체 철거된 조선총독부 건물과 서울역 등이 그 당시에 지어진 대표적인 철근콘크리트 구조라 할 수 있겠다. 1930년대에 이르러 철근콘크리트 구조가 건축구조의 주류로 자리잡게 되면서 업무용 빌딩, 백화점, 학교 등 주요 건축물에 철근콘크리트 구조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일제 치하에서 설계와 시공이 대부분 일본인에 의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에 한국인이 맡은 역할은 기능공 정도로 극히 미비하였다. <표 1>에서는 우리나라 초창기 주요 철근콘크리트 건축구조물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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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 의하면, 1928년 말까지 영구 구조물로 1,546개, 반영구 구조물로 358개, 임시 구조물로 2,142개의 교량이 도로상에 건설된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외국과 비교할 때 비록 일본 기술진에 의해서 건설되기는 하였지만 한반도에는 일찍 콘크리트 교량이 건설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당시에 콘크리트 제조에 사용된 시멘트는 초기에 일본에서 생산된 것을 수입하여 사용하였으며, 기록상으로는 1904년에 시멘트와 석회를 8,104톤 수입한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이후 우리나라에도 소규모 공장이 세워져 시멘트를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시멘트가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1919년 12월로 당시 일본 최대의 시멘트 회사였던 오노다시멘트 회사가 만주 및 중국시장으로의 진출을 목표로 평양 동부에 위치한 승호리에 연간 6만톤의 생산능력 습식 킬른 1기를 갖춘 공장을 설립한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시멘트 공장이다. 이 공장은 1917년 5월에 착공하여 1919년 12월에 완공되었으며, 이후 1921년 2월 연산 14만톤으로 확장되었고, 1928년 2월에는 다시 22만톤으로 증설하여 킬른 4기에 연산 30만톤 규모의 생산능력을 보유하였다. 이후 한국전쟁 때 파괴되었다가 일부를 복구하고 또 설비증설을 통해 현재는 북한에서 습식 킬른 5기의 연산 95만톤 생산설비를 갖춘 공장으로 가동 중에 있다.

또한 오노다시멘트(주)는 1928년에 함경남도 천내리에 연산 13만톤 규모의 공장을 설립하였으며, 이후 설비증설을 통해 연산 80만톤의 생산설비를 갖추고 현재에도 북한에서는 그대로 시멘트를 생산하고 있으며, 천내리시멘트라는 상호로 판매되고 있다. 그밖에도 1936년에 우베시멘트(주)는 해주에 연산 36만톤 규모의 조선시멘트(주)를 설립하였고, 오노다시멘트(주)는 함경북도 부령에 조선 오노다시멘트(주)를 설립하고 연산 34만톤 규모의 길무산 공장을 설립하였다.

일제 시대에는 주로 시멘트 공장이 북한지역에 편중이 되어 건설이 되었고, 남한지역에는 전혀 시멘트 공장이 건설되지 않았는데, 조선 오노다시멘트(주)는 한국 내에서의 지위강화 및 사업영역 확장을 위하여 강원도 일대의 석회석 광산을 확보하고 삼척에 시멘트 공장 건설을 결정하였다. 이렇게 하여 건설된 것이 오노다시멘트(주) 삼척공장이다. 이 공장건설은 1937년 3월 착공하여 1942년 7월에 연산 8만 4천톤의 공장을 준공하였다. 이것이 바로 현재 동양시멘트(주) 삼척공장의 전신이었다<사진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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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남한에는 삼척의 시멘트 공장 하나밖에 없었고, 이후 1957년에 문경에 시멘트 공장이 건설되기 이전에는 국내에서의 시멘트 생산은 삼척의 시멘트 공장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5.2 해방 이후의 시멘트 및 콘크리트 발달

일제시대에 시행된 전시통제정책은 1940년대 한국 건축활동의 휴식기를 가져오게 되며, 남북 분단과 6.25 사변 등의 해방 직후 일어나는 극심한 혼란 상황을 거쳐 1950년대 중반부터 한국형 철근콘크리트 구조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전쟁의 폐허를 복구하기 위하여 상가건물, 교육시설, 관공서 건물 등의 건설산업이 영세한 규모로 추진되었다. 특히 철근콘크리트 구조는 공공 건축물이나 교육시설 등 대규모 건축물의 건축구조방식으로 사용되었다. 반면 소규모 민간 건축의 경우 벽돌조와 철근콘크리트골조가 혼용된 방식이나 시멘트 벽돌조에 철근콘크리트 슬래브를 사용한 방식 등이 사용되었다.

1950년대 막바지에는 아파트가 처음 등장하게 되는데, 그 선두주자는 중앙산업에서 시공한 종암 아파트(4층)와 한미 재단이 서대문구 행촌동의 시범주택단지에 건설한 연립주택(2층)과 아프트(3층)이었다. 이들은 모두 보강콘크리트 블록 내력벽 구조이며 이후 잠시 보강콘크리트 블록구조가 유행하였다. 이들 구조물에 적용한 설계기준은 모두 조선총독부가 1934년 제정한 조선시가지계획령 시행규칙과 일본 건축학회의 철근콘크리트 구조계산규준이었다.

월남전 파병과 해외건설 진출이 시작된 1965년 이후 건축물의 구조방식은 철근콘크리트 골조가 주류를 이루게 된다. 이 시기에 업무용 빌딩, 호텔 등 비교적 대규모의 고층건축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일부이기는 하지만 1970년경을 전후하여 해방 이후 사용한 일본식 구조방식에서 벗어나 미국식 구조방식이 도입되게 되었다.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대단위 아파트 단지 건설과 신도시 건설을 중심으로 철근콘크리트 내력벽 구조방식의 아파트 건축물이 등장하기 시작하였고, 강북도심지역에 롯데호텔, 동방생명사옥 등 대형 초고층 건물이 건립되었다. 참고로 1970년 이전의 대규모 철근콘크리트 건축물로는 국립의료원, 대연각 빌딩, 타워호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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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국내에 레미콘 산업이 시작된 것은 1965년 7월에 준공된 대한양회공업(주) 서빙고 공장이다<사진 8>. 이 공장은 후에 쌍용양회공업(주)로 합병되었지만, 생산능력은 500 입방미터/일(년산 18만 입방미터/년)이었으며, 운반장비는 일본에서 수입한 Hi-Lo Type의 트럭믹서 15대이었다. 이 공장의 계량방식으로는 Pull Wire System을 채택하였고 믹서는 Tilting Type으로 56절 용량의 2기였으며, 1965년에 3,896 입방미터의 레미콘을 생산한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1967년 11월에는 레미콘에 대한 한국공업규격(KS F 4009)이 제정되었으며, 1975년 4월 KS 표시허가 심사기준이 제정되어 1976년 1월 쌍용양회공업(주) 서빙고공장 및 성수동 공장이 국내 최초로 KS 표시허가를 취득하였다. 또한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기본전략인 사회간접자본의 전향적 확대와 시멘트 유통시설의 시책에 힘입어 1969년에 쌍용양회공업(주)의 원효로 공장이 가동되게 되었고, 1973년에 들어서는 삼표산업(주) 성수동 공장, 한국포장건설 염창동 공장, 진성레미콘 교문리 공장이 가동되기 시작하여 본격적인 성장궤도에 진입하게 되었다.

레미콘은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았고, 제품의 품질에 대한 신뢰도 부족으로 수요가 크지 못하였으나 1970년대 중반 이후 완전 내수용 업종인 레미콘 산업은 레미콘 제품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향상과 더불어 그 수요가 급증하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 후기에 들어서는 시멘트, 골재, 건설업계에서 원자재의 자가소비수단 및 판로 확대를 목적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여 성장기에 진입하게 되었다. 특히 1979년은 내수시멘트의 레미콘 전환율이 최초로 두자리 수를 기록하면서 서서히 도입기에서 성장기로 넘어서게 되었고, 1983년에는 총 수요가 1천만 입방미터를 돌파하면서 본격적인 성장을 예고하였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해외 건설경기의 퇴조에 따른 국내 건설 경기의 활성화에 힘입어 주로 시멘트 2차 가공업체를 비롯한 중.소업체의 참여가 지방 중.소도시를 중심으로 본격화되기 시작하여 매년 20-30여개의 공장이 신.증설되었다. 특히 1980년대 후반 이후로는 신규업체의 참여가 가속화되어 연간 100여개의 공장이 신.증설되어 현재는 레미콘 공장 수가 800개를 넘어서 오히려 공급 과잉의 문제가 대두되고 있는 상태에 와 있다.

 

6. 향후의 국내 시멘트 및 콘크리트의 발전 방향

 

최근 국내의 건설환경의 변화를 보면,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대규모 주택건설, 급격한 교통량의 증가로 인한 도로, 항만, 철도, 거대 교량, 해상 공항 등의 하부구조의 정비, 3D 기피현상으로 인한 현장 인력 부족, 주거 문화의 고급화, 특수 공사의 증가, 그리고 감리 강화 등의 건설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또한 도시집중화에 따른 인구 과밀화와 시설의 집중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중 건설 분야에 뚜렷이 나타나는 현상은 구조물의 초고층화, 대형화 그리고 특수화 되어가는 경향이며 이에 상응하는 재료성능향상, 구조 및 설계기술개발 및 시공능력 향상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인 요구에 부응하여 21세기에도 시멘트계 재료가 핵심 건설소재로써 계속적으로 자리매김 하기 위해서는 시멘트 및 콘크리트 측면에서 각각 다음과 같이 기존 제품보다 더욱 다양한 기능과 더 우수한 성능을 가진 새로운 종류의 제품 개발이 요구된다.

시멘트 측면에서 요구되는 성능 개선 사항은 다음과 같다.

(1) 보통포틀랜드 시멘트는 사용자 측면에서 안정적인 품질의 제품을 사용할 수 있도록 공정, 환경, 원료, 품질과의 면밀한 상관관계를 규명하려는 노력이 계속 필요하다.

(2) 클링커 재료 자체를 조성하거나 특수 클링커로 대체하거나 고기능화 할 수 있는 혼합제, 혼화재, 폴리머 등을 이용하여 시멘트계 재료의 고기능화를 주구할 필요가 있다.

(3) 현행의 시멘트계 재료에 자기진단, 자기조절, 자기치유 등의 지능형 기능을 갖는 물질을 시멘트와 혼합 또는 화합물화 하여 지능형 시멘트를 만들 필요가 있다.

또한 마찬가지로 콘크리트 측면에서 본다면 21세기에는 고령화 인구의 증가, 청장년 노동인구의 감소 및 중노동 기피현상 등의 사회적 문제가 심하게 대두되어 건설산업 현장에서 만성적인 노동력 부족 사태가 발생하리라 생각된다. 따라서 고강도, 고내구성, 고유동성 콘크리트 등의 종합적인 목표를 설정하여 콘크리트의 제조, 타설, 다짐 등이 간소화되고, 자기충전성이 크고 재료분리 저항성 및 유동성이 큰 콘크리트를 배합.시공하는 기술을 개발해야 하리라 판단된다.

외국의 경우를 보면 프랑스에서는 Civeaux에 내구성, 강도, 수밀성 등을 향상시킬 목적으로 고성능콘크리트가 사용되었고, 일본의 경우 LNG 탱크 공사에 다짐이 곤란하여 초유동 콘크리트로 시공하였으며, 이외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여러 기능을 향상시킨 고성능콘크리트는 특수한 콘크리트 구조물에 적용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고성능콘크리트가 국내에 소개된 것이 불과 몇 년 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개념 및 연구동향 등에 대해서는 정립되지 않은 상태이다. 현장에 시험 적용한 몇몇 사례를 제외하면 아직 실용화에 도달하지 못한 실정이다. 특히 고강도콘크리트의 고강도화 및 고내구성화는 어느 정도 달성한 것으로 생각되나 현장 실용화를 위한 고유동 개념의 도입이 필요한 실정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현장적용과 그에 따른 구조성능 및 안전성 검토와 고성능콘크리트의 기본이 되는 재료 선정 및 배합설계의 연구가 수행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8).

그 외에도 고인성 콘크리트, 초조강 콘크리트, 폴리머 콘크리트, 섬유보강 콘크리트 등에 관한 더욱 향상된 기술개발에 많은 연구노력이 필요하리라 생각되며, 극심한 환경하에서의 시공 및 복잡다양한 콘크리트 구조물의 시공도 가능하도록 건설 로봇(robot) 등에 의한 무인화 시공기술도 필요하리라 예상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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