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묵상
예수님의 고난주간 묵상(종려주일에서 부활주일까지 8일간의 여정)
(1) 종려주일
옆집에 멋진 Palm tree가 있습니다. 이 나무는 중근동과 아프리카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나무입니다. 나뭇가지는 시원시원하게 뻗어 있어서 승리victory의 뜻을 잘 전달하고 있고요. 그래서 옛날부터 개선식이나 환영식에 자주 사용되었다 합니다. 종려주일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종려가지를 들고 나와 예수님을 맞이하였지요. 자기들의 원수를 무찔러서 자기들을 구원해줄 것으로 기대하였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와 달리 원수에게 화평을 전하기 위해 입성하는 것임을, 그들의 멋진 왕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초라한 종이 되기 위해 입성하는 것임을, 그들 위에 군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위해 고난을 받고 생명을 주고 섬기기 위해 입성하는 것임을, 400여년 전에 예고하신 아버지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임을 분명하게 하시려고(슥 9:9,10) 어린 나귀colt를 타신 예수님은 오늘 우리가 사랑하고 자랑하는 왕이십니다.-막 11:1-11
(2) 고난주간 월요일
제 옆집에 fig treee가 있는데 찍어보았습니다. 잎사귀는 무성한데요. 열매가 달렸는지 멀리서는 잘 알 수 없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역시나 열매는 없고 잎사귀뿐이네요. 무화과는 꽃이 안보이는 열매란 뜻으로 여름열매이지요. 북반구인 한국같으면 6월 정도에 열리지요. 아무튼 예수님께서 시장하셨고hungry 잎사귀 무성한 fig tree에 열매를 기대하여 다가가셨습니다. 열매 맺는 철이 아님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저주를 내리셨습니다. 무화과 이야기 사이에(Mk. 11:12-14; 20-25) 성전에서의 이해 못할 활동이 끼여있지요(15-19). 성전에서 매매하고 돈을 바꾸는 행위는 먼 곳에서 예배드리러 온 이들을 위해 율법에서도 허용된 '합법적인' 것이었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분주한 활동만 무성하고 실제 성전에서 드려지는 예배의 본질인 '기도'라는 열매는 전혀 없는 모습에 대해 크게 분노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는 곧 성전시대의 종말을 행위적으로 선언하신 것입니다.
fig tree를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겨봅니다. 예수님이 시장하셨고, 그래서 열매를 기대하여 다가갔지만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장hungry하신 것은 단지 육신의 배고픔만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인가를 간절히 기대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를 선언하신 예수님은 성전에서 행동으로 보여주시는데, 예수님의 일갈을 통해 예수님이 그토록 간절히 기대hungry하신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십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기도의 특권을 만민이 아닌 유대인 자신에게만 국한시킴으로 결국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대하신 열매가 '기도'에 관한 것임을 이튿날(화) 아침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Mk. 11:22-25)에도 잘 나타나고 있지요. 오늘 우리 삶과 교회를 바라보면서 잎사귀(종교활동)만 무성하고, 열매(기도)는 맺지 못하는 모습은 아닌지요...
fig tree를 가까이 관찰해보면 참 재미있는 것을 많이 발견합니다. 예전 제가 살던 집에는 감나무도 있었고 무화과나무도 있었는데요. 감나무에는 벌레를 잡아주어야만 했는데 희한하게도 무과과나무에는 벌레가 없었습니다. 그만큼 생명력이 강하고 단단하단 뜻이겠지요. 그런데 열매는 당도가 높아서 새들이나 개미들에겐 밥이었습니다. 창세기3장을 보면 아담 하와가 범죄한 직후 '무화과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지요. 무화과 잎이 꼭 사람 손 모양처럼 생겼답니다.ㅎㅎ 선지서들을 보면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나무로 등장하고. 예수님의 제자 중 나다나엘은 무화나무아래서 은밀히 기도하기도 했는데 무화과나무 아래 기도하는 행위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기원하는 바리새인들의 열망을 나타내기도 했지요. 열매와 잎사귀가 색이 비슷해서 멀리서는 잘 구분이 안 가는 특이한 나무에요. 그래서 멀리서는 열매가 달렸는지 잘 알 수 없답니다. 교회도 그렇지요. 멀리서 보면 참 활동적이고 살아있는 것 같은데 가까이 다가가서 들여다보면 실속도 없고 사데교회같은 유명무실한 교회도 많습니다. 분주함이 충성이 아니고, 많은 활동, 이벤트와 행사들이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는 아니지요.
(3) 고난주간 화요일
화요일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은 주로 가르치시는 일이었습니다. 마태복음을 가지고 보면 21장 18절부터 26장 5절까지 이어집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 가르치신 전체 말씀의 분량 중에서 이날 차지하는 말씀의 분량은 실로 엄청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 전 최선을 다해 말씀을 전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 내일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 오늘 가르치는 말씀이 달라질 것입니다. 제가 신대원 다닐 때 누군가 그렇게 말씀한 것을 기억합니다. 자신은 이번 설교가 자기 인생의 마지막 기회라고 여기고 설교한다고. 예수님에게 있어서 이 날은 성전에서 가르치는 마지막 기회였기 때문에 있는 힘을 다하여 말씀을 전하신 날입니다. 모든 교사와 목사와 설교자들에게 이날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은 많은 가르침 그 이상의 삶이었습니다.
화요일 오전에는 무화과나무가 예수님의 저주로 마른 것을 두고 제자들에게 '믿음의 기도'에 가르치시는 것으로 시작됩니다.(마 21:18-22) 산을 옮기는 믿음의 기도야 말로 예수님께서 그토록 간절히 찾으셨던 '성전의 열매'였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셔서 가르치는 일을 하려 하시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무슨 권위로 이 일을 하는지'에 대해 묻습니다. 예수님의 절묘한 대답은 그들이 잘못된 권위자들임을 드러나게 하십니다. 두 가지 적용을 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나는 하나님의 권위로 일을 하는가? 아니면 사람의 권위로 일을 하는가? 둘째, 나는 하나님께 받은 권위를 잘 사용하고 있는가? 혹시 진리를 가로막는데 사용하고 있지는 않는가?
이에 예수님은 여러가지 비유의 말씀으로 권위자들의 불순종에 대해 말씀하십니다.(마 21:28-32; 33-46; 22:1-14) 그리고 세금문제로 바리새인들과 논쟁하시고(22:15-22), 사두개인들과 부활에 대해 논쟁하십니다(22:23-33). 그리고 가장 큰 계명에 대해(22:34-40), 다윗의 자손이시며 동시에 다윗의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에 대해(33:41-46)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잘못된 권위주의의식에 대해 분노를 쏟으시며 무섭게 책망하십니다(마 23). 예수님은 모두 7번의 '재앙'을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십니다(23:37-39) 여기서 깊이 생각해볼 것은 권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위를 잘못 사용할 때 오는 결과는 재앙이란 사실입니다. 교회나 사회나 국가에 권위주의자들이 많아지는 것은 재앙의 징조입니다. 지도자의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지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면서 재난의 징조들, 대환란 등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마지막 때, 종말의 때가 시작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종말의 때는 어떤 모습인지, 어떤 특징이 있는지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씀해주십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종말의 때입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확실성의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미혹을 받지 말 것을 당부하시면서 세 가지 비유를 통해 우리가 종말의 때에 갖추어야 할 중요한 성품들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마 25장) 열 처녀 비유를 통해 지혜의 성품을, 달란트 비유를 통해 충성의 성품을, 그리고 양과 염소의 심판비유를 통해 사랑의 성품을 갖출 것을 말씀하여 주십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것을 세번째로 예고하십니다(마 26:1-5) 여기까지가 화요일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날은 주로 가르치심에 집중하신 날이었습니다. 성전에서 마지막으로 가르치시는 것이고, 죽으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가르치시는 것이라 최선을 다하여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아프리카에서 강의사역을 하는 저에게 고난주간 둘째날 예수님의 모습은 큰 도전과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4) 고난주간 수요일
예수님의 수요일 행적을 정확히 말하기는 조금 어렵습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14장 3절에서 11절까지 내용을 시간적인 흐름상 수요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도 정확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본문은 베다니 마리아가 예수님의 머리에 값비싼 향유를 부은 그 유명한 일화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화요일에 일어난 일일 수도 있고 아니면 월요일에 일어난 일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주간 행적을 보다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요한복음에 의하면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님께서 베다니 마리아의 집에 이르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까지 6일간 머무신 곳은 베다니 나사로의 집이었습니다. 나사로의 두 여동생은 마르다와 마리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곳에 머무시면서 2km 떨어진 성전에 방문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매일 밤 베다니에서 주무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성전에서 집중적으로 말씀을 가르치시는 동안에는 가까운 감람원에서 야영을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눅 21:37-"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그리고 예수님이 이곳에 머무시는 날 저녁에 잔치가 벌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사건은 예수님이 베다니에 도착하신 날 저녁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유월절 6일 전이라고 했으니 종려주일 전 날이었을 수 있습니다. 혹은 성전에서의 가르침을 마치시고 수요일 저녁에 다시 베다니에 들렀을 것이고 그때 향유옥합 사건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참고로 요한복음은 종려주일 직전에 향유를 부어드린 것으로 나오지만, 다른 복음서에는 종려주일 이후에 부어드린 것으로 나옵니다만 저자의 강조점에 따라 저술된 것이므로 이 문제는 그리 큰 문제는 아니라고 보입니다. 그저 '묵상'을 돕기 위해 편의상 '수요일에 향유를 부어드린 일이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시각에서는 예수님의 고난이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향유사건을 먼저 기록하는 것이 신학적이고 논리적인 순서라고 판단했을 것이고,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동일하게 유월절 이틀전 유대지도자들의 모의 이후에 향유사건을 기록함으로써 역사적인 사건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무튼 예수님이 6일간 나사로의 집에 머문 것은 사실이고, 마르다와 마리아가 음식 봉사를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드린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매우 값진 향유라고 했는데 그 가치는 사람들이 적어도 "300 데나리온"은 될 것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아 매우 값비싼 것이었습니다. (당시 노동자의 일당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었으니 오늘날로 치면 매우 값비싼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노동자의 일당 수당이 10만원이라면 3천만원이나 되니까요) 아무튼 이 옥합은 아마도 마리아가 자신의 결혼을 위해 준비한 예물이 아닌가 추측을 해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마리아는 왜, 무엇 때문에 그토록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쏟아부어드렸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보여준 반응은 지극히 상식적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막 14:4)" 허비하는 것처럼 보인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입니다. 주변 사람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분노하고 있습니다.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분노하고 책망하는 주체는 아마도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의 분노와 책망은 그들의 가진 '자기의'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가난한 자들의 편에서 일한다는 자부심이 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이 가난한 자들을 위한 '메시아'임을 믿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그들을 실망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녀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막 14:6)" 오직 예수님만이 베다니 마리아의 심중을 꿰뚫어보고 계셨습니다. 주변 사람들, 특히 제자들이 분노하고 그녀를 책망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리아는 더욱 슬픔에 잠겼습니다.
마리아의 마음은 사랑하는 구세주를 떠나보내야 하는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분을 떠나보낼 때 슬픔이 어떤 것인지는 경험해본 사람만이 공감할 수 있습니다. 지금 마리아가 하는 행동은 그녀가 예수님의 죽음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녀는 예수님이 곧 죽으실 것이고 자신의 곁을 떠나가실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으실 때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것이란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보면 실제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베다니 마리아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는데, 아마 그 이유로 예수님이 체포당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데리고 멀리 피신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그녀뿐이었습니다. 마리아의 심정에서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안그래도 속상하고 슬픈데 예수님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저렇게 분노하고 자신을 책망하는 제자들을 보니 더욱 속상한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어찌하여 그녀를 괴롭게 하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한 행동을 "내게 옳은 일을 하였다"고 평가하십니다. 좋은 일이 아니라 옳은 일입니다. 마리아로서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녀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막 14:8)" 장례준비는 마땅한 일이요, '옳은 일'입니다. 마리아는 장례준비를 해 드린 것입니다. 그러나 주변의 어느 사람도, 예수님과 3년간 동고동락했던 제자들 중에 아무도 예수님의 죽으심을 알지 못했고, 마리아의 의도를 알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의 마음은 들떠 있었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에 분노하며 책망하는 것을 보면 제자들의 마음이 흥분으로 들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가 곧 완성될 것으로 믿었고, 자신들이 대업을 이루는데 일등공신이라는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제자들을 실망시켰습니다. 오히려 마리아를 두둔하고 칭찬까지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찬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막 14:9)"
마리아는 예수님의 칭찬을 들을 만 했습니다. 왜냐면 예수님이 죽으실 것을,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오신 것임을 가장 먼저 깨달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사건'이 핵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마리아의 행동을 언급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예수님이 마리아를 칭찬하심으로 많은 사람들은 실망했습니다. 특히 가룟 유다를 실망케 하셨습니다. 12제자 중 가룟 유다는 가장 정의에 불타는 제자였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해 돈궤를 열어 허락도 없이 가져가는 것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사실 가룟 유다는 돈궤를 맡은 제자였습니다. 가룟 유다는 돈궤를 맡아서 음식을 사는 일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는 일을 책임지는 제자였습니다(요 13:29절). 요한복음을 보면 흥미로운 것은 마리아를 책망한 이가 다름 아니라 가룟 유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요 12:4,5)"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마리아의 행동에 의아해하고 속으로 화를 내었지만 그 중에서 가룟 유다가 제일 적극적으로 마리아를 향해 분노하고 책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요한복음의 평가는 냉정합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요 12:6)" 가룟 유다를 도둑이라고 한 것은 아마도 돈궤를 맡으면서 그가 임의대로 꺼내어서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쓴다는 명목으로 유용한 것을 두고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께서 그를 실망시켰다는 것이고, 그것 때문에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려는 결심을 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요 13:27). 가룟 유다의 마음에 사단이 들어갔고, 가룟 유다는 분한 마음으로 "예수를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갔던 것입니다(막 14:10) 저는 오늘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베다니 마리아(찬송가 211장에 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 막달라 마리아 본받아서... 라는 찬송을 부를 때마다 속이 불편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아닌데... 베다니 마리아인데... 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는 여러 마리아가 나옵니다. 막달라 마리아, 베다니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도 마리아...한국에 김씨가 많은 것처럼 마리아도 많았습니다. 예수님의 머리에 값비싼 향유를 부어드린 여인은 막달라 마리아가 아니라 베다니 마리아였습니다.) 마리아의 행동보다는 가룟 유다의 행동에 더 큰 충격을 받습니다. 나름대로 가난한 자들을 위한다는 자부심도 있었고, 허락도 없이 돈궤를 열어 유용하면서까지 선행을 하였고,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의협심도 있었고, 불의에 대한 나름대로의 저항정신도 있었지만, 어째서 한순간에 예수님을 팔아버릴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감정이 이렇게도 급변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스승을 향한 존경과 사랑이 어느 한 순간에 실망과 절망 분노와 배신감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이처럼 감정적입니다.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매우 감정적이고 매우 불안하고 매우 악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나를 위해 죽으러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3년간 동고동락하면서 따랐던 가룟 유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며 권능도 경험했던 가룟 유다. 예수님의 말씀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듣고 지켜보았던 가룟 유다가 이렇게 일순간에 예수님을 향한 분노와 적개심으로 돌아서버린 사건에 대해 깊이 묵상해보면서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저는 여기서 '자기 의에 사로잡힌 사람보다 더 무서운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베다니 마리아의 행동에 그 어느 누구보다 분노하며 그 어느 누구보다 맹렬하게 그녀를 책망하던 그의 마음 속에는 '자기 의'가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자를 위하여 헌신하며 살아가는 자신을 '자기 의'로 포장한 것입니다.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내 안에 '자기 의'가 있지 않는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나의 분노, 나의 책망, 나의 자랑 속에 나만의 의가 꽈리를 틀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룟 유다처럼 언제든 자신을 파멸시키고 사랑하는 이들을 파멸시킬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아무리 정당하고, 필요하고, 떳떳하며, 의로워보일지라도 나는 구세주의 속죄가 필요한 죄인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절실한 가련한 인생일 뿐입니다. 가룟 유다의 배반과 유대인들의 불순종에는 모두 '자기 의'라는 무서운 독소가 그 원인입니다. 바울 사도가 말했습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 고난주간 이날에 내가 할 일은 내 안에 '자기 의' '나만의 의my own righteousness를 조사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으로 허락하신 '하나님의 의'를 붙잡는 일입니다.
(5) 고난주간 목요일
목요일에 묵상해야 할 굵직한 사건들은 성찬, 세족, 베드로의 부인할 것을 예고하심, 최후설교, 겟세마네에서의 최후기도입니다. 요한복음은 이날 하루를 두고 무려 5장이나 할애를 했습니다.(요 13~17장) 내용이 많지만 예수님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은혜가 있지요. 십자가를 지기 전 날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자신을 배반하고 도망갈 제자들에 대한 아쉬움과 실망과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을까요? 십자가 고통을 생각하며 걱정 근심으로 가득 차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고난을 이겨낼 힘으로 충만하셨습니다. 사랑은 모든 고난을 견뎌내는 궁극의 힘입니다. 이날 하루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잘 보여주는 한 절 말씀이 있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문제보다는 자기 사람들에 대한 염려와 걱정으로 가득 차 있으셨던 예수님.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 사랑의 궁극까지 다다르신 예수님의 모습을 오늘 뵈올 수 있습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 13:2) 예수님의 마음은 제자들을 향한 궁극의 사랑으로 충만하셨지만 한 사람 가룟 유다의 마음에는 예수님을 향한 미움과 분노와 실망과 적개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마귀가 우리 마음 속에 집어넣어주는 '생각'이란 '미움'과 '실망'과 '분노'입니다. 반면 성령께서 우리 마음 속에 불어넣어주시는 '생각'이란 '오래 참음' '자비' '긍휼'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배신과 도망감을 생각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시 돌아와서 충성된 증인으로 온 세상에 두루 다닐 증인의 모습을 바라보며 참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현재 상태를 보시지 않고 가까운 미래 변화될 증인의 모습을 바라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제자들의 모습에 낙심하거나 분노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이해하고 계시며 그들을 긍휼히 여기고 계십니다. 요한복음은 다른 공관복음서와 달리 성찬에 대한 묘사보다는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는 모습을 부각시키고 있는데 그 이유도 제자들을 향한 연민과 긍휼 때문이었습니다.
발을 씻기는 행위는 먼 곳에서 귀한 손님이 방문하였을 때 종이 하는 행위입니다. 발을 씻기는 행위는 중동지방의 '손님대접'hospitality의 정신을 잘 보여주는 행위입니다. 손님의 발을 씻어줌으로써 지치고 곤한 몸과 마음이 편히 쉴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손님대접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행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염려와 근심에 쌓여 있다는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평안과 안식을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대할 때 이렇게 귀한 손님을 맞이하듯이 하면 교회와 이 세상은 얼마나 밝아질까요? 같은 믿음의 형제임에도 서로를 경계하고 서로 경쟁하는 모습이 우리를 더욱 지치게 하고 쉬지 못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아프리카 교회에서도, 한국교회에서도, 미국교회에서도, 서로 경계하고 서로 경쟁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김으로써 제자들이 서로 경계하고 경쟁하는 모습을 내려놓고 서로 용납하고 서로 환대함으로써 쉼을 누리는 관계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5)" 믿음의 형제들을 대할 때 '귀한 손님' 대하듯이, 귀한 손님 대접하듯이 서로 영접하기를 원하시는 우리 예수님의 마음을 엿보게 됩니다(요 13:20).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드시고(장소는 마가다락방이었는데 2달이 채 안 되어 성령이 강림하실 장소이고, 예루살렘 교회의 처소가 될 장소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리고 괴로운 심정으로 가룟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십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요 13:21)" 예수님은 또한 베드로가 부인할 것도 예고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요 13:38)" 가룟 유다의 배반에 대해서 예수님은 마음이 괴로우셨지만, 이상하게도 베드로의 세 번 부인할 것에 대해서는 예수님은 매우 담담한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왜냐면 가룟 유다는 훗날 뉘우치긴 하여도 자살할 길을 선택할 것이고, 베드로는 뉘우치되 회개의 길을 선택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회개할 것을 아시는 한 예수님은 베드로가 부인할 것에 대해서 베드로를 그렇게 원망하거나 낙심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시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아무리 악한 죄인이라도 회개할 길을 선택하는 이상 예수님은 괴로워하시지 않으십니다. 회개하는 한 언제든지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의 배반과 베드로의 배교를 예고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최후의 설교를 하십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제자들을 미리 말씀으로 무장하여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흩어지지 않고 다시 모일 수 있게 하기 위함인 것으로 보입니다. 나중에 알겠지만 제자들이 십자가 사건으로 흩어진 것이 아니라 문을 닫은 채 은밀하게 숨어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이 최후설교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최후설교를 하신 의도는 요한복음 14장 1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예수님의 마음은 제자들을 안심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다가오는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오늘날 목회자들의 설교와 가르침이 나아갈 방향을 보게 됩니다. 가련한 양떼들은 세상에서 두려워하며, 근심하며,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내일 일에 대해 염려하며, 세상의 악한 세력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양떼들에게 평안을 주시고 확신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설교자로서, 목회자로서, 교사로서 우리는 맡겨진 양떼들에게 이러한 믿음과 확신을 주어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게 처신할 수 있도록 말씀으로 무장시켜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최후설교는 고난과 죽음이 임박한 가운데서도 자신을 돌보지 않고 제자들을 향한 사랑과 염려로 가득 찬 사랑의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내가 지금 고난을 겪고 있다면, 내가 지금 불안에 떨고 있다면, 서로 경계하고 경쟁하는 시대 속에서 초조해 하고 있다면 예수님의 최후설교는 곧 내게 주시는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최후설교는 요한복음 16장까지 계속 이어집니다. 예수님의 설교에서 두드러지는 요점 중에 하나는 오실 보혜사 성령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에 대한 메시지(요 15장)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겼다는 선언을 하십니다. 이 모든 설교의 의도는 제자들로 하여금 환난이 닥쳐도 흔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이렇게 최후 설교를 마무리하신 후에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시며 기도하십니다. 요한복음 17장은 그 유명한 '대제사장 되신 그리스도의 기도'입니다. 이제 몇 시간 후면 당할 끔찍한 고난과 고통과 죽음의 형벌을 당하실 예수님은 자신의 문제에 집중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오로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제자들의 일치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제자들과 오는 교회를 위해 중보의 기도를 드리실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마음에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문제나 시련을 만났을 때 너무나 쉽게 우리의 문제에 사로잡혀 염려와 근심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하게 되는 것은 우리 속에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3시간 동안, 같은 기도를 세 번 씩 간절히 기도하신 것은 자신의 문제에 사로잡힌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최후기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요 17:1-8), 제자들의 연합(요 17:9-19), 교회의 일치(요 17:20-26)를 위한 중보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제자들과 교회가 큰 환난을 당하여 흩어져서 소멸되어 역사의 기억 건너편으로 사라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있은 지 사흘 만에 제자들은 다시 결집하기 시작했고, 십자가 사건이 있은 지 두 달도 채 되기도 전에 교회는 수 천 수 만의 교회로 모이기 시작했고, 두려워 떨던 그들이 이제는 죽음도 불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들이 된 것은 모두 예수님의 중보기도 덕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아니었더면 제자들의 모임은 역사에 사라져서 기억에 남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도 전 세계 가운데 핍박과 환난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왕성하게 커져가는 것도 예수님의 중보기도 때문입니다. 물론 어떤 교회는 간판을 내리고 사라질 수 있고, 건물을 닫고 교인들은 흩어져 버릴 것이고, 어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도 받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낙심하지 않는 까닭은 하나님의 교회는 지금도 계속 전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서 믿는 자들을 위하여 끊임없이 중보의 기도를 드리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주간 목요일에 '중보기도'의 힘과 중요성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6) 고난주간 금요일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폭도들에게 붙잡히신 것은 자정 즈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가장 먼저 가야바의 장인인 대제사장 안나스에게로 끌려가서 기습 심문을 받습니다. 안나스는 다시 예수님을 사위인 가야바에게로 보냅니다.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요 18:24)" 이 과정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게 됩니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모든 사람들이 잠든 이른 새벽에 기습 재판을 엽니다. 그 이유는 백성들을 의식해서 백성들이 깨어나기 전에 판결을 결정지으려는 속셈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몰아 정죄한 다음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고발하는데 그때의 죄목은 신성모독이 아니라 로마에 대한 반역죄로 둔갑합니다.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눅 23:2) 여기서 법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됩니다. 법은 집행하는 자의 의지에 따라 선하게 쓰일 수도 있고, 반대로 악하게 쓰여질 수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빌라도는 직감적으로 예수님이 죄가 없이 무고히 모함을 받고 있는 것을 직감하고 무죄를 선언하지만 반발을 의식하여 헤롯에게로 보냅니다. 문제가 될 만한 것은 책임지지 않으려는 정치인들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좀 더 역사적인 사실을 추구하는 누가복음에서는 헤롯에 의한 재판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눅 23:8-12) 헤롯은 예수님을 희롱한 후에 다시 빌라도에게 넘겨줍니다.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가운데 예수님은 이리저리 끌려 다니시면서 고통을 당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빌라도의 재판정에 서시기 전에 가룟 유다가 뉘우치지만 결국 자살의 길을 선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마 27:3-10)
결국 빌라도의 법정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백성들의 함성에 못이긴 빌라도의 결정에 따라 십자가형에 처하게 됩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이때의 시각이 육시라고 하였고(요 19:14), 마가복음에는 제 삼시라고 했는데(막 15:25), 이것은 유대인의 시간계산과 로마의 시간계산이 차이가 있기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사복음서 저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묘사할 때 이처럼 세부적으로 약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얼마나 역사적인 사건이었는지를 오히려 반증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가상인물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도 날조된 이야기라면 오히려 이런 차이점에 대해서 설명할 수 없게 될테니까요. 어쨌든 예수님께서는 심한 채찍과 희롱을 당하십니다. 예수님이 고통을 겪으시는 장면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이 그나마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묘사하였습니다.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 주니라. 군인들이 예수를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경례하여 이르기를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희롱을 당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막 15:15-20)" 나의 구세주께서 이런 고통과 희롱을 받으셨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황송하기 그지없습니다. 바로 나 때문에 아무 죄 없으신 분이 고난을 겪으셨기 때문입니다. 나의 죄가 예수님께 그런 고통을 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가복음과 특히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채찍질 맞으시며 희롱 당하시는 장면이 거의 묘사되지 않고 있습니다. 성경의 저자들이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을 묘사할 때는 최대한 절제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우리는 이 부분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서 저자들이 최대한 절제하는 것을 우리가 과도하게 상상하며 '얼마나 아프셨을까' 하며 육체적 고통을 상상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묵상을 육신의 고통을 상상하면서 묵상하는 것이 특징이지만 그러나 복음서 저자들은 그런 의도가 없었습니다. (이점에 대해서는 제가 올린 The Passion of Christ 영화평과 서평에서 자세하게 썼습니다.) 복음서 저자들의 의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거룩한 제사행위'로 묘사하려는 것이기에 '제물을 때려잡는 극적인 묘사' '재물이 당하는 육체적인 고통'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는데 매우 중요한 지침과 방향을 결정짓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는 것도 사람중심(육체적 고통을 상상하며 공감하려 함)이 있고, 하나님 중심이 있습니다. 카톨릭 국가인 필리핀에는 고난주간이 되면 가시관을 쓰며 채찍에 맞으며 심지어 십자가에 못 박히는 등 자해하는 일이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저도 어릴 적에는 예수님의 고난을 육체적 고통에 집중해서 묵상한 적이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그런 식의 묵상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하나님 중심으로 묵상한다는 것은 육체의 고통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나의 구세주 예수님께서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이 침묵하셨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뜻에 집중하셨기 때문입니다. 멜 깁슨의 ‘더 패션 오브 더 크라이스트’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고통에 못이겨 비명을 지르고 고통에 절규하시는 그런 예수님의 모습이 아니라 성경이 묘사하는 예수님의 고난은 도살당하면서도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어린양의 모습입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제가 확신하건대 멜 깁슨의 영화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묘사하는 많은 다른 영화에서 묘사되는, 채찍을 맞으시며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비명을 지르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예수님은 극심한 육체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결코 입을 열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채찍을 맞으실 때에도, 굵은 못이 뼈를 부숴뜨리고, 혈관을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순간에도 입을 열어 한 마디도 내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이야말로 성경이 그려주는 참 모습이고, 더욱 감동을 주는 모습입니다. 제가 예수님이 채찍을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찍는 영화감독이라면 예수님 역을 맡은 배우에게 입을 꾹 다물라고 주문할 것입니다. 그것이 더 성경적이고, 그것이 어쩌면 진짜 사실이니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나가시다가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예수님을 따르게 하지요. 이 구레네 시몬의 아내가 훗날 사도 바울이 '자신의 영적인 어머니'라고 불렀던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자랑하지 않기로, 알지 않기로 결심했던 사도 바울에게 결정적인 영향력을 끼친 여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참 놀랍습니다.(막 15:21, 롬 16:13참조) 억지로 십자가를 졌던 사람이지만 그와 그의 가정은 훗날 세계 복음화에 크게 쓰임 받은 사도 바울을 사도 바울이 되게 한 사람이 됩니다. 내가 당하는 억울한 시련과 고난이 하나님의 은혜가 흐르는 통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부터 예수님께서 운명하실 때까지 모두 일곱 마디의 말씀을 하셨는데 이것이 유명한 '가상칠언'입니다. 제가 사역하는 남아프리카에서는 부활절 기간(이스터 할러데이라고 부릅니다.)이 되면 교회들이 종종 연합하여 집회를 여는데 빠지지 않는 단골 설교가 예수님의 가상칠언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메시지가 제가 기대하는 만큼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나름 가상칠언에 대해 관심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하실 때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말씀하셨고, 어머니와 제자 요한을 향해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하셨습니다(요 19:26,27) 그리고 다른 한 편 강도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고 하셨습니다. 낮 12시가 되어서 캄캄함이 온 땅을 덮기 시작하여 오후 3시 운명하실 때까지 계속 어두웠는데 3시간 동안 어둠이 땅을 덮을 때 예수님은 잠잠하셨는데, 오후 3시경 운명하시기 직전에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 27:46)"라고 외치신 다음 작은 소리로 두 번 "내가 목마르다(요 19:28)" 그리고 "다 이루었다(요 19:30)" 하시고, 다시 큰 소리로 "아버지 내 영혼을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외치신 후에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운명하실 때부터(오후 3시) 무덤에 장사되시기(오후 5시경)까지 일어난 사건은 대략 10가지 정도인데 다음과 같습니다.
(1)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짐(마태27:51)
(2) 곁에 지키고 서있던 백부장이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라고 고백하며(막 15:39),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눅 23:47)
(3)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게 됨(마 27:52)
(4) 무리들이 가슴을 치며 돌아감 (눅 23:48)
(5) 군인들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름(요 19:31-37)
(6) 갈릴리부터 따라온 많은 여인들이 지켜보고 있었음(마 27:55,56);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세베대의 아들들(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인 살로메 등
(7)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요구함,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을 옮겨 놓음
(8) 요한복음 3장에서 밤중에 예수님께 찾아왔던 니고데모가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약 50근쯤(32700그램) 가지고 아리마대 사람 요셉에게로 옴(요 19:39) 둘이 힘을 합쳐 예수님의 시신을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안장하고 돌을 굴려 막은 후에 감(마 27:57-60)
(9) 니고데모와 아리마대인 요셉 두 사람이 예수님의 시신을 세마포로 싸서 무덤에 안장함(요 19:40)
(10)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아 있음(마 27:61)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은 왜 죄가 없으셨는데도 죽으셔야 했을까요? 서신서, 특히 히브리서는 이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4복음서는 그 이유를 명확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당하신 육체적 고통을 느껴보라고 멜 깁슨이 만든 영화 ‘더 패션 오브 더 크라이스트’처럼 묘사하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겪은 불의한 폭력과 육체적 고통을 공감하는 것도 사복음서 저자들의 의도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사복음서 저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소개하며 저술하는 의도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쏟아내신 말씀들이 그 의미를 담고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사람은 임종을 맞이하여 마지막으로 하는 말 속에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이 다 요약되고 있지요. 자신이 죽을 때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이 자신이 살았던 삶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남기신 일곱 마디 말씀은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고, 무엇 때문에 고난을 받으시고 무고히 모함을 받아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용서, 사랑, 위탁, 아버지 하나님, 유기, 고통, 성취... 나도 언젠가 임종의 날을 맞이할텐데 나는 어떤 말을 남길 것인지! 나의 마지막 말은 어떤 말일지! 그것은 지금 내가 어떻게 살며,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에 따라 결정되겠지요. 간절히 바라는 것은 나도 죽을 때 주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들과 같은 말을 남기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아버지, 저는 다 이루었습니다." "아버지, 저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합니다."라고 말입니다.
(7) 고난주간 토요일
잘 아는 대로 토요일은 유대인의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오래 전에 이스라엘을 여행할 일이 있었는데 안식일이 되면 엘리베이터 단추를 누르는 것도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고, 창문 밖으로 손을 내밀어 물건을 받는 것도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라고 하는 말을 듣고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도 안식일을 지키는 데는 열심이었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쉬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한 가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이 운명하시고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자신을 위해 준비해놓은 새 돌무덤에 안장되는 것을 본 여인들이 예수님의 시신에 바르기 위해 향품을 준비했다고 하는데 이 향품을 준비한 시점이 정확하진 않습니다. 역사에 충실한 누가복음을 보면 "이 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더라.(눅 23:54-24:1)"는 기록에 의하면 향품 준비를 안식일 전에 마친 것으로 나옵니다만, 마가복음 본문에는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막 16:1,2)"라고 된 기록에는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향품을 구입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안식일(토요일) 시작되기 직전 혹은 끝나자마자 여인들이 예수님의 시신에 바를 향품을 구입한 것 같습니다.
안식일은 모든 노동이 금지되는 날입니다. 그러나 이 날에 쉬지 못하고 열심히 일하는 한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쉴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대책회의를 하느라 바빴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평안이 없었고 안식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깊은 우려와 염려와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떼를 이루어 빌라도를 찾아가는 '수고'와 '노동'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빌라도에게 우루루 찾아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거늘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마 27:63-66)"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입니까? 안식일을 범한다고 그래서 신성모독이라고 예수님을 비난하고 정죄했던 그들이 쉬지 않고 회의를 합니다. 그리고 빌라도를 직접 찾아갑니다. 그리고 경비병들과 함께 무덤에 갑니다. 그리고 돌을 인봉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경비병을 두어 굳게 지키게 일을 시킵니다. 안식일을 강조하던 그들은 결코 안식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쉬어야 한다고 가르치던 그들은 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일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던 그들은 바쁘게 다니며 손수 인봉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주의에 사로잡힌 인생들의 삶에는 안식도 쉼도 없습니다.
빌라도는 로마군병을 내어달라는 유대지도자들의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에게 파숫군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하라” 빌라도는 자신의 예비대를 움직이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대신 유대지도자들이 운용하는 파수대를 활용하라고 했습니다. 유대지도자들이 운용하는 부대는 오직 성전을 지키기 위해 허락받은 경비병들이었습니다. 아마 예수님을 체포할 때도 이 부대를 사용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성전파수대를 체포의 목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불법이었습니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한밤중이었기 때문에 유대지도자들은 성전 파수병을 동원하여 예수님을 체포하도록 했을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한번 더 성전 경비대를 동원하여 살아있는 예수님을 체포한 것처럼 예수님의 무덤을 지켜 아무도 시신을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일을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지도자들은 빌라도의 예비대를 활용할 수는 없었지만 자기들이 운용하고 있던 성전 수비대를 활용하여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도록 지시를 내렸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다룬 많은 영화에서 무덤을 지키는 군병들의 모습은 로마 군병들입니다. 그러나 실제 성경에서는 로마 군병들이 아닌 성전 경비병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예수님의 무덤을 철저하게 지켰는지 짐작하게 하는 것은 “저희가 파숫군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하니라”는 말씀에 잘 나타납니다. 유대지도자들은 성전수비대를 예수님의 무덤에 배치시키면서 무덤에 인봉하는 노동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에 말입니다. 인봉을 한 것은 아무나 무덤을 열지 못하도록 단단히 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돌문은 상당히 컸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두려워서인지 인봉까지 해두었습니다. 그리고 수비대에게 지시했을 것입니다: “혹시 예수의 제자들이 밤에 기습할지 모르니 철저하게 수비를 강화하도록 하라”
그러나 매우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한 행동은 나중에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는 증거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1절에서 15절까지 보면 재미있는 구절이 나옵니다. "여자들이 갈 때 경비병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알리니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하니 군인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로마 군법에 의하면 경비에 실패하면 즉시 처형하는 것이 관례였다고 합니다.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는 약속은 경비실패에 따른 처형에 대한 두려움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군병이 자신의 경비실패를 자랑하고 다닙니다. 경비병들이 행동이 스스로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셈입니다. 또한 경비병들의 말도 거짓말이라고 자랑하고 있는 셈인데요. "우리가 잘 때에 제자들이 와서 시신을 훔쳐 도망갔다"고 하는 말이 모순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경비병들이 자고 있었다면 모든 것을 알 수 없었을 텐데 제자들이 왔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경비병들이 하는 말 자체가 스스로 거짓말이라는 것을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경비병들이 두루 다니며 이 말을 하고 다니는 것 자체도 스스로 거짓말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경비에 실패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자랑하고 다닌다는 것은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셈이니까요. 그러나 이 말에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거짓말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나중에 사울이 기독교회를 심각하게 미워하고 핍박하게 된 이유도 이 거짓말을 믿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메섹에서 회심하기 이전의 사울은 기독교인들을 보면 미움과 증오심으로 충만했던 것도 이 거짓말을 그대로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진리를 믿느냐, 아니면 거짓말을 믿느냐 하는 것은 내 감정에도 영향을 주고, 내 삶에도 영향을 끼치며, 내 운명까지도 결정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를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진정한 영적전쟁은 진리와 거짓의 전쟁이고, 하나님 나라 세계관과 사단의 세계관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맞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사람들이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까닭은 진리가 아니라 거짓을 믿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도 쉬지 못하고 근심하며 수고하며 일하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봅니다. 그들은 거짓을 철썩같이 믿고 있었기 때문에 안식일에 마음 편히 쉬지 못했던 것입니다. 고난주간 토요일입니다. 예수님의 몸이 무덤에 갇혀 있던 날입니다. 예수님의 몸이 사흘 동안 무덤에 갇히신 이유는 거짓이란 이름의 옥에 갇혀 사는 이들을 풀어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거짓을 굳게 믿고 살아가는 인생들, 그래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안식일에도 쉬지 못하던 인생들을 풀어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거짓을 믿음으로 스스로 종노릇하고, 묶여 살아가던 인생들에게 참 자유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옥에 갇혀 있던 나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스스로 옥에 들어가신 예수님을 고난주간 토요일에 만나게 됩니다.
어둠의 세력은 거짓을 굳게 믿고 있는 세력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권력을 손에 쥐고 있습니다. 그들은 온갖 힘을 다해 진리를 인봉하려 합니다. 진리는 완전히 패배한 것처럼 보입니다. 진리는 이제 완전히 끝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인봉하던 것은 훗날 진리를 더욱 뒷받침하는 강력한 증거로 돌변합니다. 진리를 굳게 가두었던 크고 무거운 돌문 역시 진리의 든든한 증인이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진리는 패배하는 듯하고 이제 완전히 끝나는 듯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극적인 방법으로 반전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입니다. 내가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데 오히려 찾아오는 고난과 시련은 훗날 영광의 면류관으로 돌변하게 될 것입니다. 진리로 가득 찬 내 마음을 억누르고 짓누르며 협박하던 그 모든 인봉과 돌문은 훗날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찬송하는 증인으로 바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러했을 겁니다. 이날은 눈을 부릅뜨고 서 있는 파수병들, 인봉, 크고 무거운 돌문을 볼 때마다 제자들이 가슴 답답했을 그런 날입니다. 답답한 가슴을 두드리며 한 숨 짓던 그런 날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제자들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를 것이지만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제자들에게 크고 강한 확신과 넘치는 기쁨을 전달해주는 매개체가 될 것입니다. 두루 다니면서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고 떠벌리는 파수병들을 볼 때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이름으로 해놓았던 인봉을 볼 때마다, 크고 단단한 돌문을 볼 때마다 제자들의 기쁨은 배가되고, 제자들의 확신은 더욱 견고해졌을 것입니다. 진리를 따르며 겪는 온갖 장애물들은 잠시 우리 마음을 답답하게 하고 짓누를 것이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들을 큰 기쁨과 확신을 주는 증거들로, 간증의 필수적인 요소들로 바꾸어 놓으실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 곧 나의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감사드립니다. 아멘!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