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현대적 적용 분야
그러면 이러한 토지법이 오늘날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새겨야 하겠다. 구약의 율법을 오늘날의 현대법에 적용하는 것을 무리라고 막연하게 생각하지 말자. 그것이 하나님이 제정하신 법이고,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기본적인 양심과 천부인권에 근거한 법임을 다시 한 번 새롭게 명심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율법의 기본 정신인 공의와 인자와 믿음을 버리지 않도록 조심하자. 성경의 토지법이 오늘날과 맞지 않는다거나 혹은 적용하기에 무리라고 생각한다면 어쩌면 율법을 경시여기는 것이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義)와 인(仁)과 신(信)은 버렸도다.”(마23:23) 우리는 예수님의 이 책망을 듣지 않도록 해야 하겠다. 율법의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면 율법에서 공의의 근간을 이루며 공의로운 사회의 초석이 되는 하나님의 토지법을 어찌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 이스라엘 사회나 현대 사회는 물론 다르다. 그러나 어느 사회 어느 시대에도 적용되어야 할 하나님의 법은 하나라는 것을 기억하자. 모든 시대 모든 사회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법은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러면 하나님의 토지법은 오늘날 교회와 사회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겠는가? 필자는 그 적용방향을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서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교회와 신자들 개개인에게 적용되어야 하고, 둘째, 교회가 현 사회에 제시할 비전과 대안으로 적용되어야 하고, 셋째, 교회가 미래의 통일한국을 위해 제시할 비전과 대안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A. 신약교회의 영성의 핵심: 희년과 제자도
하나님의 토지법이 사회의 구조적인 악을 물리치고 공의로운 사회구조를 실현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개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먼저 살펴보아야 하겠다. 우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메시아직의 취임을 희년의 성취로 보셨다는 점을 주목해보자.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고 메시아의 공적 사역에 취임하실 때 다음과 같은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셨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4:18,19) 여기서 우리는 분명 하나님의 토지법의 실행과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중요한 뼈대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아적인 사역을 희년의 성취로 보셨음은 분명하며 또한 자신의 몸인 교회를 통해서 계속 되기를 바라셨다. 교회는 그의 몸으로써 “그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계속 간구해야 함을 분명히 하셨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도 하나님의 토지법이 그들의 삶 속에 적용되기를 강력하게 요구하셨다. 하나님의 토지법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개인적으로 요구하는바(제자도)를 잘 나타내주는 말씀이 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눅14:33-35) 제자도의 핵심은 권리포기인데, 그 가운데 토지사유권이 포함된다.
신약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지상사역을 계승하기를 위해 부름 받은 모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와 같은 자의식과 사명의식을 자신에게 끊임없이 적용해야 한다.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희년운동을 하는 모임이라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교회는 성경적 의미에서 희년을 오늘날 사회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를 고민하고 연구하고 함께 나누며 함께 기도하고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는 모임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구약 레위기 25장의 희년법이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의 제자도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를 살펴보자. 필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희년법이란 단지 영적인 의미만 있는 것이나 혹은 종말론적인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매우 실제적이고 사회개혁적인 의미가 있으며,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데 있어서 매우 급진적인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먼저 희년사상의 변천을 말한 다음, 예수 그리스도에게 어떻게 선포되고 적용되고 있는가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먼저 희년의 의미부터 다시 점검해보자. 희년법은 레위기 25장에 분명히 나와 있다. 희년규례의 중요한 요소는 (1)땅의 휴경, (2)부채탕감, (3)노예해방, (4)기업의 회복, (5)주기적 회복이다. 먼저 희년이란 단어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보자. 구약학자들에 의하면, 희년이란 말은 ‘요벨’ 즉 ‘양의 뿔’이라는 히브리어에서 파생된 용어라고 본다. 희년을 맞이하는 해의 일곱 째 달의 10일째 되는 날이 대속죄일이다. 이 대속죄일에 양각나팔이 울려 퍼지게 되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유가 선포되어서 기업이 원주인에게 회복된다. 다른 날이 아니라 대속죄일에 선포되는 희년은 단지 순수한 사회개혁법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속죄를 위한 희생제사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의 죄를 탕감해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면서 자발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탕감해주고 노예에서 해방시켜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희년의 실천은 인간의 의지와 결단을 촉구함으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놀라운 구속의 은혜를 깨닫는데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히브리어 ‘요벨’이란 단어를 라틴어 벌게이트 성경으로 번역될 때 ‘Jubilare’(rejoice)로 번역되었는데, 왜냐면 히브리어 요벨의 뜻과 용법을 보여주는 영어 단어가 원래 없기 때문에 영어 번역가들이 라틴어에 근거해서 ‘Jubilee’를 희년을 가리키는 용어라고 선택한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번역에서 구속의 은혜를 암시하는 의미가 생략되었다. 하나님의 토지법과 생명의 성령의 법이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3:17)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을 개인에게 확립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토지법을 자원하는 마음으로 실행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것은 초대교회가 보여준 공동체적 삶의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다.(행2) 따라서 하나님의 토지법은 그 실행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를 깨닫게 하시는 복된 사역을 간절히 요청하고 있다고 하겠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보혈로써 우리 죄를 탕감해주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안식년법과 희년법이야말로 이스라엘 사회를 항상 공의로운 사회로 지탱해줄 수 있는 하나님의 법이었고 장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회가 항상 공의로운 사회로 구축될 수 있도록 희년법이란 최소한의 장치를 선물로 주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러한 공의의 장치가 변질되고 왜곡되기 시작했는가? 왕정 시대가 되기 전 이스라엘 사회는 평등한 사회였다. 그 평등의 비결은 바로 안식년법과 희년법에 있었다. 그러나 왕정의 출현으로 납세의 부담이 커지고 전쟁을 자주 치러야 하는 일들이 발생하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계를 위해 높은 이자나 담보를 통한 빚 대출을 어쩔 수 없이 해야 했고, 결국 자신의 기업을 팔아야 하고, 결국 자신과 자신의 자녀들까지 생존을 위해 종살이를 해야만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즉, 왕정의 출현은 안식년법과 희년법의 실현을 가로막는 주범이자 장애물이 되었다. 역대 왕들과 귀족들은 이러한 공의의 법을 시행하는데 있어서 가장 꺼려하였던 것이다. 공의의 법이 온전히 시행되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이 바로 가진 자들과 권력자들 때문이라는 것이 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왕정이 들어서기 전에 희년의 원리를 온전하게 실천한 대표적인 경우가 룻기에 나오는 보아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왕정시대가 되면서 이러한 실천은 점점 희박해져갔다. 절대권력을 추구하는 왕들이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도전하였고, 백성들은 이를 본받았다.
이제 희년법이 약화되어지는 두 번째 계기는 포로이후에 찾아오게 된다. 왕정시대가 되면서 사실 안식년법과 희년법안은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가장 급진적인 사회법안들이다. 그런데 제 2 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이후 유대사회에서는 안식년과 희년법의 사회개혁적인 성격을 잃어버리고 점점 영화되어갔다. 실제적인 성격이 사라지고 영적인 성격만 강조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실제적인 성격을 상실하게 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기득권자들에 의해 성경해석이 독점되었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식민시대에 삶은 힘들었고, 타의 지배를 받는 가운데 빈익빈 부익부는 늘어만 갔다. 이것은 왕정시대로 말미암아 안식년법과 희년법의 시행이 불가능하게 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식민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양극단화 현상이다. 주전 586년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한 후 70년 만에 스룹바벨에 의해서 제 2의 성전이 건축된 후 유대나라는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의 마케도니아와 프톨레미 왕조, 그리고 로마의 통치를 받았다. 다시 말해서 식민통치기간이었다. 세계열강의 통치 아래 있었던 시기였다. 이 시기는 정치적으로 독립하지 않은 시기였고, 대제사장이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였고, 경제적으로 상업과 대농장제가 확대되어서 부유층들이 토지를 독점하게 되었다. 이러한 부의 독점과 대농장제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지파의 기업(유업) 개념을 붕괴시켰고, 정치 경제적 불평등 사회를 야기시켰다. 토지사유제와 삶의 곤경들은 민간에 종말론의 부흥을 가져왔다.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자들은 부의 독점을 하나님의 은총의 증거로써 인식하고 가르쳤다.
그러면 이 시기에 기록된 외경에는 희년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었는가? 이 시기에 많은 외경문헌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로마 카톨릭과 동방정교는 15개의 문헌을 인정하고 있지만 유대교와 기독교는 그러한 외경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 시기에 나온 외경들을 살펴보면 희년에 대한 그 당시의 사고방식을 잘 알 수 있다. 15권의 외경 중에서 [벤 시라의 지혜서], [제1마카비서], [제2마카비서], [제1에스드라서]에 희년에 관련된 구절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 구절들의 특징은 희년에 관련된 구절들이 사회적이고 실제적인 원리가 아닌 영적이고 종말론적으로 기록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희년을 이야기하지만 50년의 주기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실제적인 선행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고대 지혜문학이나 외경의 저자들은 대부분 왕실의 법정 종사자들이거나 사회지배계층이었기 때문이다. 주 독자나 청중들 역시 정치지도자들이나 지혜교사들이었다. 솔로몬 성전이후에는 왕실과 귀족들이, 스룹바벨 성전이후에는 성전 종사자들과 회당이 지혜문학과 저자들을 후원하였다. 즉, 외경은 사회의 상류층을 대변하기 위해 기록된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지배계층과 기득권층이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명예와 부를 유지하고 후원하며 옹호하는데 필요한 이론적 근거를 은연중에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외경에 토지를 원래 주인에게 주기적으로 돌려주거나 가난한 자에게 선을 베푸는 것을 기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희년은 가진 자들이 정기적으로 부의 재분배를 시행하라고 명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희년법을 현실에 적용하기보다는 그 개념을 영화하여서 피안의 세계에만 적용하려고 했고 아이러니칼하게도 이 작업에 종교지도자들과 지식인층이 크게 기여했다.
외경과 달리 당시 가경에는 희년사상이 어떻게 나타났는가? 가경이란 저자의 이름을 도용하여 마치 그 저자인양 기록한 책이다. 몇몇 가경 중에서도 희년규례가 나타나기도 한다. [희년서], [12족장서], [제1에녹서]에 희년사상이 나타난다. 특히 [희년서](the Book of Jubilee)에서는 창조부터 출애굽까지의 세계역사를 49년의 희년주기에 따라서 기록하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이 책에서는 역사를 49단위로 구분하고 있다. [제1에녹서]에서는 아담으로부터 유다 마카비(Judas Maccabeus)까지의 역사를 70단계로 나누고 있다. 이러한 역사구분은 [12족장서]에도 나타난다. 이들 가경의 문헌들의 배후에는 주전 5세기 느헤미야와 에스라의 개혁 이후 예루살렘의 주도적인 제사장 계열에 대항한 비주류 제사장 계열이었다고 하는 연구가 있다. 당시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개혁을 통해 주류를 형성하게 된 사독가문의 제사장들의 권위와 제사장직과 그 사상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비주류 계열의 제사장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러한 위경을 저술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모세나 에녹과 같은 이름을 빌어서 널리 유포하려고 했다. 그들은 율법이나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그들의 사상적 특징은 이원론, 종말론, 결정론이었다. 희년이 주기적인 회복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데 반해서 그들이 기록한 묵시문학, 혹은 지혜서(가경)들은 최후의 심판을 통한 회복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안식년의 7년 주기보다는 희년의 49년 주기를 더 선호한 것은 종말론적인 의미를 잘 담고 있기 때문에 안식년이란 단어보다 희년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쿰란문서에는 희년사상이 어떻게 나타났는가? 당시 주류계열인 사독계열과 달리 자칭 에녹계열의 비주류 제사장직의 한 분파가 쿰란공동체가 되었는데 1947년 사해북서쪽 유대광야 동굴에서 그들의 문서가 발굴되었다. 쿰란 문서들에서도 역식 희년이란 단어가 나타나고 있지만 가경에서 나타난 희년사상과 마찬가지로 사회적이고 실제적인 개혁법으로써보다는 종말론적이고 미래적인 심판과 구원으로써 그려지고 있다. 최후의 심판 때에 악한 자들이 심판을 받고 의인들이 기업을 회복하게 될 것이란 희망을 담고 있다. 쿰란 공동체의 기원에 대해서는 다음의 학설이 유력하다. 쿰란 에세네파 공동체는 주류인 사독 쥬다이즘에 반발하는 에녹 쥬다이즘(에노키언 쥬다이즘)의 한 분파로서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개혁이후 주도권을 상실했을 때 ‘핍박’을 피해서 광야로 가서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건설했는데 그들이 바로 쿰란공동체이다. 성전과 예루살렘 권력의 중심권에 들지 못한 에녹 공동체에 대한 핍박이 가해졌을 때 두 그룹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는데 급진적인 분파가 광야로 가서 공동체를 건설한 것이다. 요컨대 그들에게 희년은 사회적인 개혁과 실제적인 변화를 상실한 채 단지 미래적이고 종말론적인 구원을 바라보면서 역사를 나누게 되는 단위로 사용된 것이다.
이제 다시 한 번 적용하고 넘어가 보도록 하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회정의 회복을 위해 ‘안식년’과 ‘희년법’을 주셨다. 안식년은 신분의 회복을 위한 법이고, 희년법은 토지의 회복을 위한 법이다. 안식년법과 희년법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 신분이 회복되어도 돌아갈 기업이 없다면 형식상 자유인이어도 실제적으론 품삯을 구걸하고 살아야 하므로 노예나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스룹바벨 성전이후 점점 실제적인 사회개혁적인 의미는 사라지고 그 의미는 점점 영성화, 종말론적으로 되어갔다. 그러한 종말론과 영성론이 중간기 시대의 외경과 가경에 ‘희년’이란 단어로서 나타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사용하는 희년은 당시 사회적인 개혁으로서의 가치는 상실하고 가진 자들의 이권을 옹호하는 개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한 “개념타락”의 주체는 재물을 축적하여 가진 자가 되었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율법 교사들과 같은 지식인층이었다. 그들 자신에게 구약의 선지자들이 이해한 대로 희년법과 토지법을 현실에 문자적으로 적용하기란 제살 깎기였을 것이다. 소유하고 있는 기득권을 포기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오늘 우리도 조심해야 한다. 복음에는 급진성(철저성)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복음을 가진 자들을 위한 이데올로기로 전락하는 위험에 대처해야 한다. 우리 안에 퇴색과 변질의 가능성이 항상 존재함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토모에서 강조하는 [지대조세제]의 개념이야말로 희년법을 단순히 영적이고 종말론적으로 치우침으로써 그 본래의 사회개혁적 취지를 은폐하려는 교묘한 경향에 대해 미혹을 받지 않게 해주고 있다고 본다. 희년법은 단지 영적이고 상징적이며 종말론적인 의미가 아니라, 오늘 우리 사회에 실제적으로 적용될 수 있고 개혁의 핵심원리가 된다는 확신이야말로 결코 타협되어서는 안 되는 진리라고 본다. 그러한 개념의 변질과 타협은 가진 자들과 기득권자들이 주도하고 있다는 것 또한 우리는 항상 주시해야 한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희년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치고 선포하셨는가? 예수님은 ‘희년법의 구약적 적용’이 아니라 ‘희년법에 대한 신약적 적용’을 가르치셨다. 그리고 그 적용은 보다 철저하고 완전했다고 할 수 있다. 구약의 희년법은 하나님 나라 그 자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오심으로써 보다 급진적이며 철저하게 적용되어야 했다. 구약은 오실 메시아의 그림자요 신약은 그 실체를 다루기 때문이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요구한 말씀에서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희년법을 어떻게 적용하셨는가?
첫째, 죄와 사탄으로부터의 해방이다. 희년법의 적용에는 분명 영적인 원리가 강조되는 것이 사실이다. 죄를 용서하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에서 희년의 원리가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특히 예수님은 귀신을 내어쫓은 후에 ‘가족’으로 돌려보내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상태에서 해방시키신 후에, 안식일에 노예를 자유하게 할 것과(신5:15,출20:10), 6년간 일한 히브리 노예를 해방할 것과(출21:2,신15:12), 희년에 히브리 품꾼과 그 가족을 고향으로 돌려보낼 것과(레25:39-42) 이방인에게 팔린 히브리 노예가 해방되도록 명하셨다(레25:47). 이러한 노예해방은 신약에서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귀신 쫓는 사역으로 증거 되는 사탄으로부터의 해방(눅4:21,행26:18,골1:13)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제2의 출애굽을 맞이한 새 하나님의 백성은 역시 노예를 해방하는 하나님의 뜻을 실행해야 하는데, 그것은 복음전파와 귀신 쫓는 사역을 통한 영적인 노예 해방과 함께, 내가 마치 형제의 종인 것처럼 그에게 종노릇함으로써 형제를 나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는 새로운 인간관계의 형성이다. 내가 그의 종이 되어 섬기지 않으면, 그가 나의 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노예제도 뿐 아니라, 권력추구 성향까지 문제삼으시고, 섬김의 원리를 도입하신다(요13:14).
둘째, 물질의 나눔(코이노니아)과 베품(디아코니아)이다. 구약의 빚 탕감법이 신약에서 거저 줌을 원리로 하는 코이노니아로 발전하고, 구약의 노예해방법이 신약에서 종노릇 또는 섬김(디아코니아)으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희년법 계열의 법인 안식년의 빚 탕감법과 희년의 노예해방법과 함께 희년법의 기본 원리인 기업 회복은 신약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빚을 갚기 위해 팔았던 토지를 되찾는 원리는 하나님께 죄의 빚을 진자가 그 빚을 탕감 받고,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는 것으로(눅6:20), 영적인 성취를 보며, 이제 이 하나님 나라 복음을 위하여 전토를 포함한 소유를 포기하는 것으로 육적으로 철저화 된다(막10:29-30,눅14:33). 이러한 전토의 포기는 이제 매년 매년이 희년이므로 매년마다 토지를 돌려주는 행위인데, 자신의 기업인 기본 소유까지 포기하는 것으로 완전하게 되는 것이다. 초대교회는 이러한 전토의 포기를 실천하였다(행4:34-35). 희년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현재화되었다. 이제는 49년마다 오는 것이 아니라 매년이 희년이다.
토지의 포기는 소유의 포기를 통한 거저 줌의 원리의 실천의 일부로서 코이노니아이므로, 토지를 원주인에게 돌려주는 희년법은 코이노니아로 발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노예해방이 섬김으로 발전한 것과 함께 토지를 되찾는 것이 토지를 포기하는 것으로 발전한 것은 역설적인 철저화이다. 그러나 그 기본정신은 이웃을 노예상태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동일한 정신이며, 다만 이웃을 나보다 사랑하는 새 계명의 원리에 따라 희년법을 철저화한 것뿐이다. 이렇게 희년법은 코이노니아와 디아코니아로 발전하는데, 코이노니아와 디아코니아가 서로 유사함은 그 기본정신인 노예해방 뿐 아니라 디아코니아 개념에 코이노니아를 행하는 활동을 포함시키는 데서도 볼 수 있다. 한편 복음을 전하는 것도 코이노니아 활동으로 묘사될 뿐 아니라 디아코니아 활동으로도 묘사되는 것을 우리는 위에서 관찰했다. 물질과 복음의 코이노니아와 디아코니아, 그것은 희년법의 완성이요, 새 계명의 구체적 성취 원리로서 신약 윤리의 두 기둥이다. (역사를 보면 교회가 나누지 않을 때 항상 빼앗겼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마19:21) 이 말씀에 정직하게 반응한 사람들 많이 있어 왔다. 예를 들어, 안토니우스란 사람은 207에이커의 땅과 가진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사막에서 수도생활을 했다고 한다. 오늘 우리는 철저한 제자도에 온전한 순종으로 응답하는 급진적 복음이 다른 사람에게만 적용되고 정작 나에게는 실제성은 사라지고 단지 종말론적인 의미, 상징적인 의미, 영적인 의미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희년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철저하고 급진적으로 성취되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희년법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심화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는 안식년과 희년에 그 일을 했지만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로는 매년 그 일을 해야만 한다. 왜냐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성도 안에서 이미 영광스러운 기업을 허락하여 주셨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기업의 실체를 이미 허락받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기업을 다시 뺏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항상 희년법을 실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신약의 희년법 사상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철저한 순종을 요구하신다. 다시 말해서, 희년법에 대한 철저하고도 완전하고도 충만한 적용을 요구하신다. 그리고 성령은 그러한 적용을 도우신다. 코이노니아와 디아코니아 즉 나눔과 섬김은 예수님의 새 계명을 구체적으로 성취하는 원리로서 교회와 사회 속에 적용되어야 한다. 우리들 한사람, 한사람이 물질을 나누고 복음을 전하며, 서로 섬길 뿐 아니라, 교회는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가 되어 기아에 허덕이는 자에게 빵을 보내며, 사탄의 노예된 자에게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 교회의 예산과 활동은 이 일에 우선적으로 집중되어야 한다. 한편, 우리는 교회에서 섬김을 받으려는 자세를 버리고, 모든 직분이 섬김의 직분임을 깨달아 교회와 성도를 섬기는 겸손한 자세를 가지고, 칭호마저도 서로 형제자매라 불리기를 기뻐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오직 예수님께서 우리의 선생님이신 섬김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며, 우리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노예라 소개하기를 기뻐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시대의 노예들인 저임금 근로소득자,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의 주민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베푸는 일에 참여할 뿐 아니라, 그런 일이 발생하게 하는 원인으로부터 사회를 치유하는 일에 힘닿는 대로 참여해야 한다. 불의한 사회에 하나님의 의로운 법의 강물을 흐르게 하여야 한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으로 세우신 교회는 어떤 곳인가? 교회는 희년의 공동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교회는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이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바른 교회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나눔과 섬김이 구체적으로 실행될 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튼튼하게 세상을 이기는 공동체로서 세상의 빛이 되어 세상을 뒤바꾸며, 온 세상을 충만케 하며, 정의롭고, 평화롭게 할 것이다. 교회가 거룩한 공동체, 즉 세상과 구별된 대조사회로서 세상 한 가운데 존재하는 그 ‘다름’은 바로 나눔과 섬김이다. 하나님은 이 ‘다름’을 통해서 세상 가운데 빛을 비추시기 원하시며(출19:5-6),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원하신다. 이 거룩함을 이루는 나눔은 성령으로부터 나오며(고후13:13), 섬김도 성령의 열매인 사랑으로부터 일어난다(갈5:13,22).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의 공동체이다. 교회의 성패는 오직 성령님의 역사에 달려 있다. 성령님께 의존하는 교회는 승리한다. 성령님께 의존하는 교회만 승리한다. 성령은 하늘의 기업을 계시하여 주심으로 교회의 나눔과 섬김을 가능하게 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토지법을 단지 사회적인 차원에서만 해석하지 않아야 하겠다. 하나님의 토지법은 사회의 구조적인 개혁에 적용되기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 개개인에게 먼저 적용되어야 한다고 본다. 흔히 희년운동이라고 하면 요즘 지나치게 영적으로 이해되어서 교회의 부흥 정도로만 인식되든지 혹은 사회개혁운동 정도로 인식되는 극단적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앞서 살펴본 대로 희년을 영적이고 종말론적으로만 이해하는 차원에 갇혀 있지 않도록 해야 하면서 동시에 지대조세제를 관철시켜야 하는 정치경제운동의 분파정도로만 인식되지 않도록 해야 하겠다. 하나님의 토지법은 먼저 제자도로서 삶에 적용되어야 한다. 희년법을 사회 개혁의 원리로서 연구되어져야 하고 전파되어져야 하는 사회복음의 핵심이다. 그러나 남은 구원하면서 자신이 구원받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희년법은 사회 개혁의 원리뿐만 아니라 개인이 따라야 하는 제자도의 원리가 된다. 다시 말해서 희년법은 사회복음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가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일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원리가 된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소유권을 모두 다 포기하는 것이다. 모든 소유에 대한 포기는 구약의 희년법보다 더욱 급진적인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는 구약의 희년법을 준행하는 것보다 더욱 철저한 데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토지법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요컨대 은혜에 근거한 철저한 사유재산포기가 신약의 제자도의 핵심이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소유에 대한 포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소금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맛을 잃은 소금과 같아서 버림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까지 더하셨다. 이것은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신자들과 교회들에게 매우 큰 경종을 울리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이 말씀에 정직하게 반응해야 한다. 하나님의 토지법을 지나치게 영화 혹은 우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또 다른 극단으로서 지대조세제를 관철시키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최우선적인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되는 것이다. 진정한 개혁은 개인에서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