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들어가는 말
땅만큼 창조주의 위엄과 피조물인 인간의 근본을 잘 알려주는 것은 없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3:19)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창3:23) 토지는 사람의 근본이다. 사람은 토지에서 왔고 토지에서 땀 흘려야 하며 결국 토지로 가는 존재이다. 따라서 사람에 대해서 알고 제대로 도우려면 땅에 대한 지식은 필수적이지 않겠는가? 단언하건데 땅을 모르면 인간의 근본도 모르는 것이다. 땅을 이해하는 것은 인간을 이해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왜 성경적 토지사상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다. 인간을 바로 돕는 것은 땅을 떠나 살 수 없는 인간을 이해할 때 시작한다.
우리는 땅에 대해서 여러 각도로 논할 수 있다. 정치적인 관점, 경제적인 관점, 사회학적인 관점, 지리적인 관점, 혹은 역사학적인 관점 등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적인 관점에서 논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토지사상은 무엇인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성경의 맨 처음부터 땅에 대해서 알려줌으로써 시작한다는 것은 흥미롭지 않은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과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기독교적 세계관의 근간을 이룬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또한 말씀으로 통치하신다. 하나님의 통치는 법으로 구체화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땅을 친히 다스리시는 어떤 원칙이나 법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토지법’이라고 부를 것이다. 우리가 땅에서 성공하고 땅에서 행복하게 살려면 이 토지법을 결코 무시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왜냐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법으로 자신의 피조물을 친히 다스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법을 배워야 하고 그 법에 순종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또한 그 법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가르치고 전파해야 할 것이다. 왜냐면 그것은 이 땅에서 성공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법을 따라 살면 번영을 누릴 것이고 그 법을 알게 모르게 어긴다면 재앙을 면치 못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 하나님의 토지법에 대해서 잘 배우게 된다면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대안을 제시하거나 세상의 경제학자들이 미처 예측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뜨여질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원리를 가지고 이 땅을 다스리시는지 알아야 한다. 그래서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피조물인 세상에 대해서 분명한 법도를 가르치지 못하는 무능함은 사라져야 할 것이다. 성경을 가르치고 전파하는 사람들이라면 마땅히 세상에 대해서 분명한 입을 가져야 할 것인데도 막상 경제문제와 땅 문제가 거론되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그저 영적인 문제만 이야기한다면 되겠는가? 땅을 떠나서 인간을 바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
경제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사람을 만드시고 가장 먼저 주신 명령이 경제명령이며, 실제로 경제활동은 인간의 활동 중에 제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런데 성경적 경제원리를 가르치는 신학교는 어디 있는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목사들은 경제원리에 대해서 이원론적인 경향을 보인다. 그것은 몰라도 되고 오직 복음만 전파해야 한다는 생각이나 혹은 그것에 대한 관심은 세속적이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과 구원은 전인적인 차원이 있음을 망각하지 말아야 하겠다. 선교사로 헌신한 자가 있는가? 단지 ‘복음’만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연약하고 무능한 것인지 잘 알 것이다. 선교는 복음으로 그 지역을 변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교사는 그 지역에 대해서 총체적인 관점에서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선교사가 성경적인 경제법을 확립하고서 복음을 전한다면 얼마나 바람직하겠는가? 이것은 선교사들만의 과제인가? 목회자는 지역을 영적으로 책임지는 자라는 인식이 옳다면 지역경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성경이 말하는 경제법의 원리를 가지고 비판하며 혹은 대안을 제시하며 혹은 다가올 경제의 위기를 경고하는 것은 목회자의 임무가 아닌가? 만일 그것이 세속적이라면 부도덕과 불의를 책망하고 다가올 재앙을 경고한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은 모두 세속적인 사람이었는가? 따라서 목회자들은 성경적 경제관을 확립해야 할 것을 강력히 요청하는 바이다. 사실 신학교에서 가장 취약한 과목이 바로 성경적 경제학이란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신학교치고 성경적 경제학에 대해서 분명한 의지를 가지고 가르치는 곳을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이 정작 세상에 나아가서는 ‘무능한 목회자’가 되는 원인이 아닌가? 세상에 만연한 부정과 불의에 대해서 분명한 일갈을 못하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 것은 성경적 경제법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소치가 아닐까? 지금도 늦지 않았다. 신학교에서는 당장 성경적 경제학을 개설하고 성경이 말하는 경제법을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 전인적인 복음 전파자로서 준비될 것이 아닌가?
경제에 대해서 지역교회가 접근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구제와 손길봉사’ 정도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경제법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나눔과 섬김만이 전부가 아니다. 가난한 자들을 양산해내는 구조적인 불의에 대해서서도 책망을 하며 분명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공의를 행하는 것과 인자를 사랑하는 것과 겸손히 우리 자신의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임을 잘 알면서도 정작 공의를 행하는 측면은 매우 약한 것이 사실이다. 사실 성경에 의하면 공의사역이 우선이고 그 다음이 자비사역이다. 공의사역으로 다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을 자비사역이 해결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공의사역이 우선임을 알고 있는가? 아니 적어도 구제사역과 동등하게라도 공의사역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무엇이 공의인지, 어떻게 공의를 행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무지한 것이 사실이지 않는가?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토지법은 성경적 공의사상의 핵심이자 근간이며 대안이라 할 수 있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하나님의 토지법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한계를 아우르는 대안으로서 통일한국의 경제체계임을 알아야 한다.
경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토지임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성경적인 토지법에 의해서 사회구조와 경제구조가 구축된다면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실업, 빈곤, 농촌문제, 도시문제, 환경문제, 그리고 통일문제까지도 상당부분 문제를 해결하게 될 것이다. 토지는 성경적 경제학에 있어서 핵심이며 공의사상에 있어서 분명한 기준이다. 우리가 복음을 전인격적인 문제로 접근하고 구원을 총체적이고 우주적인 문제까지 접근하려면 하나님의 토지법을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교회는 기본적으로 공의의 법을 가르치고 전파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공의의 법으로 빈곤과 같은 사회적인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바로 그럴 때 교회는 구제와 손길봉사와 같은 ‘인자를 사랑함’으로 해결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공의의 법이 첫째이고 둘째가 자비의 법이다. 그리고 자비의 행위가 자기 의가 되지 않기 위하여 교회는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영성의 법’에까지 연결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공의의 법에 대해서는 무지한 채 혹은 무시한 채 자비의 법에만 치우치거나 혹은 영성의 법에만 몰두하지는 않는가? 순서가 잘못되었다. 공의가 우선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적 경제학을 시급하게 정립해야 하겠다. 필자가 신학을 할 때에는 성경적 세계관 정립이 화두였다. 그러나 지금은 성경적 경제학을 정립해야 할 때다. 특히 하나님의 토지법을 알아야 한다. 성경적 경제학에 있어서 핵심은 공의의 근간인 토지법이다. 성경이 말하는 공의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토지법에 기초하고 있다. 토지법을 이해하지 못하면 공의 또한 이해할 수 없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토지법 준수의 여부를 가지고 당시의 불의를 판단하고 책망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토지법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개인과 사회에 올바로 적용하기 위해 반드시 확립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