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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29 07:30

이신칭의3-맺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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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맺는 말

 

16세기 개혁자 선배들이 외쳤던 ‘이유신칭의’(sola fide)는 그들만의 교리가 결코 아니며 성경 전체가 가르치는 기독교만의 독특한 메시지다. 이 메시지는 소수에게 열려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개념을 바르게 정립하는 것은 신학자들만의 점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분명 우리의 영원한 복락과 구원에 중차대한 영향을 끼치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이 교리를 모호하거나 그릇되게 가르치는 교사나 설교자들에는 엄청난 재앙이 임할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신칭의 교리는 성경이 명확하게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서 성경 전체에서뿐만 아니라, 기독교 구원의 메시지와 하나님과 인간의 바른 관계에 대한 “심장”과 같다. 물론 교리를 믿는 것과 교리의 주가 되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현실적으로 다를 수 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로마 카톨릭과의 협력을 지지하기 위해 패커 역시 이 논리를 사용한다.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칭의와 교회를 믿는다고 하는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을 믿는 믿음이다” 물론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어떤 진술을 믿는 것과 그리스도 자신을 믿는 것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에 계시된 대로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신칭의 교리를 실제로 듣지 않아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전적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가 부름 받고 신앙하는 그분은 성경에 계시된 분이다. 우리가 그분을 알고 난 후 즉 그분을 신앙하는 일에 그분을 믿는 것과 그분에 관한 진술을 엄밀히 구분하는 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은혜로 믿음을 받은 후에 믿음의 도를 위해 당연히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성경에 계시된 그리스도가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그리스도를 믿어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믿고 신앙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진술이 성경적이지 않아도 그것이 협력과 연합, 또는 전도를 위해서라면 괜찮다는 말인가? 전도와 선교를 위해서 복음의 본질을 훼손할 수 있단 말인가? 두 가지 복음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선지자들이 예고했고, 예수님과 바울이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이 있단 말인가? 우리는 모든 것을 용납하고 수용하려는 다원주의적 시도에 교묘한 함정이 있다는 것을 잘 인식해야 한다. 카톨릭도 이신칭의 교리를 수용한다고 말하지만 ‘이유신칭의’ 교리는 저주하고 배격하고 파문한다. 그들이 저주를 퍼붓고 파문을 선언한 이상 우리는 양자택일을 해야만 한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되는 것인지, 아니면 ‘행위’ 혹은 ‘믿음+행위’로 되는 것인지 말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분명히 죄인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믿음만으로 가능할 뿐이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의는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에 비하면 다 냄새나는 옷과 같으며, 더러운 걸레와도 같음을 인식한다. 그리고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신 하나님의 의만을 바라보며 자랑하며 사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는 선언을 받고, 칭의 이후에 우리는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 행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거룩케 하시는 성령의 은혜에 들어간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으며, 또한 오직 믿음으로 거룩한 삶을 살게 된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두려워 떨고 있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가? 죄인을 의롭다고 하시는 은혜가 어떻게 주어지는가? 이것에 대한 다음의 소식은 분명 좋은 소식이다. 자기 안에 도저히 하나님이 인정하실만한 ‘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절망한 자에게 ‘전혀 다른 의’ 곧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의다! 그것 말고는 참으로 하나님 법정에서 자신이 자랑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죄인을 의롭다고 하시는 이 은혜의 복음, 모든 죄인이 들어야 할 참되고 유일한 복음은 주도 하나이시오 그리스도도 하나이시듯이 오직 하나뿐이다. 다른 복음은 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믿음을 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무상으로 그에게 이전시키신다. 그리스도의 의를 얻는 방법은 ‘오직 믿음’(sola fide)뿐이며 이것에 다른 ‘의’를 첨가하려는 모든 시도는 그리스도의 의를 부정하는 이른바 ‘다른 복음’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의를 얻는 것만이 우리 삶의 전부가 아니라, 그것은 단지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시작으로서 칭의 하시는 하나님의 소망으로서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오직 그리스도의 의만을 믿도록’ 성령으로 부단히 이끄신다. 필연적으로 성화를 낳는 칭의의 복음처럼 죄인들에게 복된 교리는 없다 복음이 없으면 교회도 없다. 복음이 없으면 그리스도인도 없다. 만일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이 영광스런 교리를 위해 기꺼이 생명을 내어놓았다. 우리도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왜냐면 그것이 진리이며, 교회의 생명이자 자신의 생명을 위한 싸움이기 때문이다.

 

여기 자신에게 전혀 ‘의’가 없음에 절망한 한 평범한 수도사가 복음 안에 나타난 전혀 새로운 다른 ‘의’를 발견한 기쁨을 발견한 경위를 소개하면서 마치고자 한다. 단순한 이 발견이 로마 카톨릭 전체에 큰 파장을 불러왔다는 사실이 오늘 우리에게 충분한 의미를 주고 있다.

 

“나는 바울의 로마서를 이해하기를 간절히 바랐으며 ”하나님의 의“라는 한 가지 표현 외에는 방해하는 것이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 구절을, 하나님은 의로우시므로 불의한 자를 처벌하실 때 의롭게 처리하신다는 뜻의 ‘의’라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나는 흠 없는 수사였지만 하나님 앞에서 양심으로 괴로워하는 죄인으로 서 있었고, 나의 공로로 하나님의 노여움을 달래리라는 확신이 전혀 없었던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의롭고 분노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분을 미워하고 그분께 불평했다. 하지만 나는 친애하는 바울에게 매달렸고 그의 말뜻을 알려고 간절히 열망했다. 밤이고 낮이고 나는 묵상했으며 급기야 하나님의 의와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는 표현의 연관성을 알았다. 그런 다음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이 은혜와 순전한 자비로 우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그 의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곧바로 거듭나고 낙원으로 열린 문에 들어갔음을 느꼈다. 성경 전체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으며, 이전에는 ‘하나님의 의’가 내게 미움으로 가득 차게 했지만, 이제는 훨씬 큰사랑으로 말할 수 없이 달콤하게 되었다. 바울의 이 구절이 내게는 하늘로 가는 문이 되었다...<24>”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라디아서 1:6~9)

 

-----<각주>-----

<24>본인은 인터넷에서 루터가 이 깨달음을 얻게 된 경위에 대해 어떤 이가 쓴 글에서 루터를 보다 잘 이해하게 되었기에 이에 발췌하고자 한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을까? 행위로써는 인간이 아무리 노력하여도 하나님 앞에 완벽하게 설 수 없다는 강박관념이 루터를 괴롭혔다. 중세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을 받기 위한 통로로써 일곱 가지 성례전을 체계화시키고 있었다. 특별히 고해성사는 죄인들에게 위안이 되는 성례였다. 죄인으로써 받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성례는 고해성사뿐이었다. 따라서 죄인들은 모든 죄과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여야 했다. 루터는 혼신의 노력을 다하여 죄과를 고백하려고 하였다. 그는 할 수만 있으면 자주 심지어는 매일 고해하다시피 하였다. 한 때는 여섯 시간까지 죄과를 고해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루터에게는 크고 작은 죄가 문제가 아니라, 과연 하나라도 빼놓은 것 없이 모두 고백했느냐에 있었다. 인간의 기억력이 허락지 않은 한 반드시 고백하지 못한 죄가 있기 마련이며, 고백하지 못한 죄는 용서받지 못하며, 용서받지 못한 죄가 있는 한 구원받지 못한다는 논리가 루터에게는 더없이 고통이었다. 수도승들로써는 이러한 루터의 발버둥이 여간 성가신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수도원 원장이었던 스타우피츠(Staupitz)는 루터에게, 정말 그리스도께서 그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를 기대한다면, 사소한 일로 찾아오지 말고, 살인이나, 간음 또는 신성모독과 같은 중한 일로 찾아오도록 충고하였다고 한다. 한편 스타우피츠는 루터가 너무 어렵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음을 보여 주려고 노력했다. 그는 루터에게 필요한 단 한 가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루터는 진노의 불꽃이신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 라는 강한 의구심을 떨쳐 버리지 못하였다. 또 다른 루터의 고민은 설사 모든 율법의 요구 조건들을 다 지켰다고 해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에 족한 내적 변화가 일어나겠는가 라는 문제였다. 성화케 하는 은혜를 소유한 사람은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뉘우치며,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온전한 회개(total contrition)를 할 수 있다고 중세교회는 주장하였고, 어렵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원하셔서 사랑하시는 것과 같이 우리도 상당한 정도는 마음에서 우러나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루터는 자신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가르침 속에서는 그의 행위로나 태도로 볼 때, 구원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가 없었다. 노력을 하면 할수록 오히려 실망과 좌절을 체험하게 되었고,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 진노의 하나님으로 비추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루터를 돕기 위해서 스타우피츠 원장은 루터로 하여금 계속해서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얻도록 하였고, 교수로써, 설교가로서, 상담가로서 병든 심령들을 치료토록 하였다. 스타우피츠는 루터가 남의 심령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고민도 해결하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한편 루터는 1508년 비텐베르그(Wittenberg) 대학으로 전근하여 철학을 강의하던 중 신학을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피터 롬바드의 경구집(Sentences of Peter the Rombard)을 강의하기 위해서 에어푸르트(Erfurt)에 다시 전근된다. 피터 롬바드의 경구집은 중세기 신학의 근간을 형성하는 성경, 교부들, 그리고 스콜라철학자들의 경구들을 주제별로 수집한 책이었다. 그는 다시 1511년 비텐베르그(Wittenberg)대학으로 전근되어 그곳에서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 그리고 1513-1515년에 시편을 강의하게 되고, 1515-1516년에 로마서, 1516-1517년에 갈라디아서, 1518년에 다시 시편을 강의하게 된다. 이러한 연구와 강의를 통해서 루터는 1513-1519년에 거쳐 복음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 시대의 그의 깨달음을 "탑 속 경험"(tower experience)이라고 하는 데, 비텐베르그의 어거스틴 수도원에 있는 탑 속에서 복음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으로 인한 루터의 공헌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성경적 의미의 재발견이다. 일반적으로 중세교회는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정의 즉 반드시 죄인과 불의한 자를 처벌하시는 정의로 그 뜻을 풀고 있었다. 때문에 루터는 하나님의 의를 미워하였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얻는 하나님의 선물로 발견하였을 때, 그는 하나님의 의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루터는 하나님의 의를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자비로써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극적인 깨달음은 세 가지 단계로 설명될 수 있다. 중세교회가 하나님의 의를 반드시 불의한 자들과 죄인들을 처벌하시는 정의로써 풀이할 때, 문제는 어떻게 인간이 그와 같은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겠는가였다. 중세교회는 물론 자기 자신의 의로써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다고 믿지는 않았다. 오히려 인간은 진지한 의도와 성화케 하는 은혜를 받는 합일치 공덕과 인간의 출생부터 죽음까지 관련을 맺고 있는 성례의 실재들의 병합의 덕택으로 하나님의 의로움 앞에 서기를 바랐다. 이것이 첫째 단계인 중세교회의 상황이었다. 둘째 단계는 이해의 단계이다. 시편강의나 로마서 강의를 통해서 깨달은 바는 하나님의 의는 더 이상 불의한 자를 벌하시고 징계하시는 엄격한 심판의 의가 아니었다. 오히려 믿음을 통해서 우리를 의롭다고 칭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요, 변화시키는 은혜요, 거저 주시는 선물이었다. 하나님의 의는 율법의 요구가 충족되어야 하는 그래서 죗값에 대한 처벌이 선행되어야 하는 거래행위가 더 이상 아니었다. 따라서 인간의 행위는 인간의 운명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오직 은혜만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하게 한다. 물론 중세시대에도 어거스틴의 전통을 대표하는 인물들에 의해서 이러한 견해는 어느 정도 공유되었다. 그러나 루터에 의해서, 이 견해는 좀더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교리로 재천명되었다. 셋째 단계에서 루터는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은혜를 완전히 동일시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는 더 이상 인간을 의롭게 만드는 성화케 하는 은혜가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의는 인간이 어떠한 상태에 있든지 간에 그 인간을 의롭다고 취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인간이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이 가능하다. 은혜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이 종교개혁을 탄생시켰으며, 중세교회의 성례전들이 도전을 받기에 이르렀다. 인간과 의로우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행위나 실질적인 의의 유입에 의존하는 따위의 견해는 사라지게 되었으며, 그 대신 오직 은혜만이 우뚝 서게 되었다...”

 

 

IV. 참고문헌

 

[오직 믿음으로] R.C. 스프롤, 생명의 말씀사

[솔라 피데] 존 맥아더 외, 생명의 말씀사

[칭의론 논쟁] 필립 입슨, 기독교문서선교회

[이신칭의의 현대적 의미], 앨리스터 맥그라스, 생명의 말씀사

[그리스도인의 삶과 구원] 도날드 G. 블러쉬, 한국장로교출판사

[기독교 신앙개요], 앨런 존슨 & 로버트 웨버, 고려서원

[청교도 사상], 제임스 패커, 기독교문서선교회

[벌코프 조직신학](下), 루이스 벌코프, 크리스챤다이제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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