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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판의 모든 글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선교하시는 김광락 목사님의 글입니다.

2009.12.29 07:18

이신칭의2-본론(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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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이신칭의 교리의 현대적 의미

 

이신칭의 교리는 지금도 중요한가? 이 문제에 관해서 성공회 복음주의자 신학자인 앨리스터 맥그라스(Alister E. McGrath)가 쓴 [이신칭의의 현대적 의미]라는 책은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강조한 이신칭의 교리의 중요성을 지지하면서도 그것이 오늘날과 같은 현대상황에서는 적합하지 않으므로 새롭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이 교리의 중요성을 현대신학자들을 비롯하여 독자들과 청중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신학의 공룡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청중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하지 못한 신학자들의 책임이라고 규정하면서 저자 맥그라스는 16세기 언어가 아닌 현대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말하기를 “20세기 서구인들이 인간의 운명을 주로 ‘목적’ ‘실존’ 그리고 ‘의미’와 같은 개념으로 생각한다면 복음은 이런 술어로 구상화해야 한다”(p.13)라고 했다. 이것은 R. Bultmann이 ‘부활’과 같은 성경적 언어가 현대인들에게 적합하지 않으므로 ‘신화’로 취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과 다를 바 없지 않는가? 그러나 여기서 본인은 저자의 목적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현대인들과의 접촉점을 만들기 위해서 이신칭의 교리를 16세기 사고에만 국한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이다. 이신칭의 교리를 오늘날의 현대적 경험언어로 서술하는 것은 이신칭의 교리의 원래적 의미를 상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인은 현대적 사상과 언어가 어떠하든지 간에 성경은 그 본래적 의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현대적 언어로 성경을 각색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으며 오히려 성경언어가 현대적 언어를 지배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많은 현대신학자들이 복음의 상황화(contextualization)를 주장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복음의 적용이라고는 볼 수 없다. 참된 적용이란 복음이 세상의 흐름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체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길고 그 임무는 신학교수들에게 주어진 임무가 아니라 사실 모든 교사와 설교자에게 주어진 임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 교리가 중요하며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1)자기 의(self-righteousness)를 내세우려는 것은 모든 인간의 본성이므로 여전히 이 교리는 중요하다.

사람들은 자기 행위에 가치와 공로를 부여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종교적 교만과 위선과 자기 자랑으로 자신을 포장하려는 경향성이 있다. 그러한 경향을 부정하면 분노하고 공격한다. 그러나 칭의 교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우리를 세우기 때문에 우리를 진정으로 겸손하게 만든다. 물론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칭의교리와 칭의는 다르다는 점이다. 칭의교리에 대한 인식이 자동적으로 우리를 의롭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칭의교리와 칭의는 구별되어야하지 분리될 수 없다. 칭의는 칭의교리에 대한 지적 수납에 의해서가 분명 아니지만 칭의교리를 사수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분명 필수적이다. 칭의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발견하고 온전히 인격적으로 신뢰하는 믿음만으로 은혜로이 주어진다. 우리가 공을 세우지만 그것은 전혀 자랑할 것이 못되며 ‘구속 못할 죄인을 오직 예수님만이 홀로 속하신다’고 찬양하게 만들어준다. 언제나 심판주가 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세우기 때문에 또한 우리를 진정으로 경건하게 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게 만든다. 우리는 세리와 같이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대 앞에 서서 자신에 대해 절망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다. 우리는 스스로 할 수 없는 다른 의가 필요했고,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바를 그리스도 안에서 제공해주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고 믿음으로 신뢰할 때 하나님은 인자와 성실로써 완전한 의를 우리에게 전가해주신다. 우리는 앞으로도 완전한 그리스도의 의를 근거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된 것이다.

 

(2)신앙이 타성에 젖을 가능성(형식화의 위험) 때문에 이 교리는 여전히 중요하며 강조되어야 한다.

특히, 교회에 은밀하게 파고 들어오는 온갖 미신, 악습, 그리고 오류들에 이의를 제기하는 교리라는 점에서 이 교리는 지금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 연옥과 고해성사, 교황권, 면죄부, 성자숭배 등과 같은 오류의 진정한 뿌리가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무지라고 루터는 보았다. 칭의의 메시지를 교회가 버릴 때 교회는 온갖 미신과 오류투성이의 종교 기관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만든 예수와 기독교를 믿는 것은 결코 우리의 참 구원을 보장해주지 못할 것이다.

 

(3)죄인의 비참한 현실 및 하나님의 진노하심이라는 엄연한 현실 때문에 이 교리는 매우 중요하며 전파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소환된 죄인의 비참한 현실--두 눈을 부릅뜨고서 이 현실을 직시하는 것은 모든 정직한 자가 걸어야 할 정로(正路)다.  이신칭의 교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에 전부는 아닐지라도 우리의 신분과 위치에 관한 한 이 교리는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4)무엇보다 성경에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가 구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복음의 선언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중요하며 가르쳐져야 한다.

이것은 비단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만 강조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과 구원사역에서도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더 나아가서 이신칭의의 교리는 신약성경만이 아니라 모든 성경을 관통하고 있는 주제임을 얼마든지 증명할 수 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성취에 관한 모든 역사의 핵심이 바로 칭의교리가 쥐고 있는 것이다. (예; 아브라함을 의롭다하심-창15:6)

 

(5)기독교회의 정체성 위기라는 최근의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이신칭의 교리는 매우 중요하며 주의 깊게 가르쳐져야 한다.

기독교의 위기는 바로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고 있으며 이신칭의 교리는 교회가 얼마나 복음에 충실한 가를 분별하고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이 우리의 확신이다.

 

(6)구원의 확실한 보증을 위해 이신칭의는 매우 중요하다.

칭의는 헛된 모든 소망과 참된 복음의 소망을 구별시켜 준다. 또한 이신칭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신자들에게 참된 자족, 참된 평안, 참된 소망을 약속해준다. 이것은 도덕폐기론으로 이어질 위험성이 다분히 있지만 그러나 그러한 경향은 칭의의 참된 의미를 깨달은 신자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참으로 칭의의 의미를 깨달은 신자라면 더욱더 의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왜냐면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신 하나님께서 칭의의 보증으로 성령을 주셔서 의의 열매로서의 삶을 적극적으로 살게 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해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행위를 위하여 구원을 받았다.(엡2:8-10, 딛2:11-14) 만약 카톨릭의 가르침과 같이 그리스도의 공로만으로는 우리의 구원이 충분하지 못하다면 우리는 늘 두려움 속에서 떨면서 지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대 앞에 누가 감히 설 수 있겠는가? 이 두려움을 온전히 제거하기 위해서 이신칭의는 매우 중요한 교리이다. 두려움은 사람으로 하여금 미신과 오류와 위선과 자기 자랑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자신의 행위가 아닌 그리스도의 완벽한 의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받아들여진 것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온전히 자유하여 하나님을 새로운 심령으로 섬길 수 있게 된다. 종교개혁은 교황주의, 미신, 마리아 숭배, 성인숭배, 면죄부 등과 같은 현실적인 문제만을 다룬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을 낳게 만든 참 원인, 즉, 복음의 참된 의미에 대한 로마 카톨릭의 혼동에 의의를 제기했다. 싸움의 중심은 ‘오직 믿음이냐 아니냐’에 달려 있었다. 사실 지금 우리의 싸움의 본질도 ‘오직 믿음’이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

 

(7)지체들 간의 신실한 교제를 위해서도 이신칭의는 매우 중요하다.

이신칭의는 성도간의 교제를 진실하게 해 준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해서 진정으로 깨닫고 고백하게 되는 것은 성도들 간의 생명력 있는 교제를 위해서 필수적이다. 이신칭의 교리가 무시되고 타협되는 가운데서 참된 교제는 있을 수 없다.

 

(8)이신칭의는 신자의 삶의 근거이자 토대로서 매우 중요하다.

그리스도인다운 삶이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을 위해서 이신칭의는 매우 필요하다. 즉, 진정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 이 교리는 중요하다. 왜냐면 ‘이신칭의’ 교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만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이신칭의 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서 어떻게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할 수 있겠는가?

 

(9)이신칭의는 우리를 오류에 빠질 위험에서 보호한다.

청년의 혈기와 열성이 방종(도덕폐기론적 경향)이나 갈라디안식의 율법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도 이신칭의 교리는 제대로 가르쳐져야 한다. 청년의 심리적 특성상 자기 의(self-righteousness)를 내세우고 싶고, 안정을 확보하려는 욕구와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강하다고 볼 수 있다. 공동체 안에서 무엇인가 열심히 하면서 자신의 존재 가치와 삶의 의미를 확인하려는 정체성의 위기에 처해 있는 오늘의 청년들에게 개혁자들이, 아니 성경이 분명히 말하고 있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바르게 선포되어질 필요가 있다.

 

(10) ‘솔라 피데’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풍성하게 해주기 때문에 교회에 참된 개혁과 부흥을 가져다준다.

교회사에 나타났던 참된 부흥, 참된 영적 대각성의 시대를 살펴보면 오직 그리스도의 의와 그분의 영광이 탁월하고도 놀랍게 선포되었다는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신비한 체험이나 기적은 교회에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을 지 모르나 복음의 핵심을 파악하고 그리스도의 온전하고도 풍성한 영광을 인식함으로 누리는 축복에 비하면 사실 아무 것도 아니다. 참된 부흥은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을 주목하는  데서 일어나는 것이다. ‘내가 성공하고 행복하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카톨릭적 탐구에서 ‘내가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감히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가?’라는 절규로 옮겨가지 않으면 참된 부흥을 경험하기 어렵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복음주의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데 열심을 내었고 많은 복음전도사업을 벌였지만 진지하게 복음의 본질을 추구하는 일에는 게을러왔다. 그것이 부흥을 위해 목소리를 높여왔지만 사실 진정한 부흥을 누리지 못한 참 원인이다. 현대교회는 이 점에서 각성하도록 도전 받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강조되고 높아지는 곳에 그리스도의 영이 화답하신다. 이것이 우리가 누려야 할 부흥이다. 이 부흥을 위해 우리는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을 진지하게 추구해야 한다. 교회의 각성과 부흥은 그리스도의 영광이 풍성해지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은 ‘오직 믿음’만이다.

 

 

10. 칭의와 그리스도인의 삶

 

그러면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이신칭의 교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이다. 우리는 ‘오직 믿음’이야말로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오직 은혜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삶을 위한 견고한 토대임을 확신한다. ‘오직 믿음’이 삶의 전부가 아니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임을 믿는다. 현대를 살아가는 청년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의 ‘칭의’교리는 어떤 삶을 요구하고 있는가? 삶의 근거로서 ‘칭의’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1) 칭의의 목적은 성화이다.

칭의만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은혜로운 행위의 전부가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로우신 행위는 그리스도의 전 삶에 걸쳐 임한다. 칭의는 다만 시작일 뿐이다.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 ‘오직 믿음’이 카톨릭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지적 동의’나 ‘개념 인식’이 전부가 아닌 것처럼 칭의 역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죄인의 믿음을 보고 의롭다고 선언하시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칭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시작되는 출발점이다. 하나님께서는 성화를 목적으로 칭의하시는 것이다. 거룩한 삶을 살도록 죄인을 칭의 하신다. (여기서 카톨릭은 거룩하게 만든 다음에 칭의하신다고 주장한다) 성화의 삶은 칭의의 진정한 목적이다. 그러므로 칭의 교리를 진정으로 깨닫는다면 성화의 삶을 향한 부담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을 의롭다고 간주하시는 그 은혜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그 은혜를 육체의 기회로 삼을 수 있단 말인가? 결코 그렇지가 않다. 카톨릭이 우려하는 칭의의 위험성, 즉, 칭의 교리가 사람들로 하여금 거룩한 삶과 선행의 삶을 무시하게 만들 것이라는 경고는 카톨릭이 생각하는 것처럼 칭의 교리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칭의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그것을 방종과 부도덕한 삶을 정당화하려고 이용하려는 몇몇 무지한 사람들 때문이다. 우리는 칭의의 은혜를 진정으로 깨달아야 한다. 거기서부터 우리의 삶은 시작된다. 하나님은 ‘경건치 않은 자’와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를 오직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이 은혜를 주시는 목적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왜 칭의의 은혜를 주시는가? 칭의의 목적은 바로 성화이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

 

(2) 칭의 교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더욱 조심해야 할 부분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을 뿐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이’ 거룩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행하는 삶’을 늘 강조하되, 항상 행함의 원동력이 되는 ‘오직 믿음’을 동일하게 강조해야 한다. 롬 1:5절과 16:26에서 “믿어 순종케” 한다는 말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우리의 순종은 역시 ‘오직 믿음’으로 가능케 된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당연히 살아야 할 삶, 혹은 맺어야 할 성령의 열매 역시 사람의 노력이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 역시 오직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놓쳐버려서는 안 된다. 거룩하게 되는 것이나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내 의지와 노력으로 해낸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처럼 은혜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려고 하는 함정에 빠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오직 믿음으로’ 선한 일을 하며,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가? 그것은 ‘칭의를 주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뿐이다. 왜냐면 선행 혹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오직 능력의 하나님께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루터가 발견한 ‘하나님의 의’를 진정으로 깨닫고 신뢰하는 것이다. 죄인을 의롭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소유한 인생만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고,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나은 의를 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더 나은 의’를 행한다고 자랑하거나 공로로 내세울 수 없다. 왜냐면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줄 아는 데서 그러한 선행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본인이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칭의 교리는 단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시작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진정한 능력이 된다.

 

(3) 칭의 교리는 개혁적인 삶을 가능하게 한다.

개혁적인 삶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진정한 개혁인가? 잠시 루터의 삶을 살펴보자. 1517년 10월 31일, 대사면을 받기 위해 순례자들이 몰려오는 절기인 할로윈(All Saint's Day)전야에, 마틴 루터가 저 유명한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 교회 정문에 붙인 것은 자신의 지적 탁월함을 자랑하거나 교회를 분열시키거나 혹은 교회에 대한 소란을 피우기 위해서가 결코 아니었다. 루터 자신이 95개조 반박문을 민중언어인 독일어가 아니라 신학언어인 라틴어로 기록했다는 데서 루터의 의도는 분명해진다. 루터가 생각한 개혁은 ‘온건한 개혁’으로서 조직이나 구조나 관행을 송두리째 뒤엎자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러한 잘못된 관행을 용인하게 만든 진정한 원인이 바로 칭의 교리에 대한 오해 또는 무지에서 비롯된 것임을 파악했기 때문에 신학적인 토론을 제의한 것이었다. 루터는 바른 교리를 정립할 때 비로소 잘못된 관행과 미신들이 타파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특히 루터는 로마 교회가 안고 있는 모든 도덕적 미신적 관행과 부패가 칭의 교리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임을 확신했다. 그래서 교리를 바로잡으면 그러한 것들을 타파할 줄 알았다. 그러나 상황은 루터의 의도와 다르게 돌아갔다. 몇 가지 사회적인 이유<20>로 인하여 루터의 반박문은 큰 파장을 일으키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진정한 개혁이란 구조나 관행 자체를 향해 도전하는 시위라기보다는 그러한 것의 배후에 놓여있는 비복음적인 사상들을 성경적인 교리로 대체함으로써 봄눈 녹듯이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다가서는 사상 전쟁이요, 교리전쟁이라고 볼 수 있다. 분명히 구조적인 악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외적인 구조나 잘못된 관습에 대해 시위적 행동으로 옮기는 것만이 개혁의 전부가 아니다<21>. 개혁은 본질을 건드리는 것이다. 본질에서 시작하도록 하는 것이다. 잘못된 관습의 철폐는 자발적이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개혁을 위한 시위적 행동이 정치적으로 역이용 당하지 않기 위해서 무엇보다 우리는 복음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본질을 모른 채 비본질을 향해 개혁의 소리를 외칠 수는 있으나 그것은 치우치거나 정치적 논리로 매도당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오늘날 개혁자로 자처하는 사람은 많으나 복음의 본질을 제대로 인식하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추구하는 신학자는 드물다. 참된 개혁은 구조와 미신과 잘못된 관습 타파를 그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아야 하지만 사상과 세계관과 교리를 바꾸는 데서 성공하지 못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을 사는 청년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원리에 강해야 하고, 복음사상으로 무장해야 하며, 복음의 본질을 정확하게 인식해야 하며, ‘다른 복음’을 분별하여 교리적으로 싸울 수 있도록 말씀으로 무장해야 한다. 교회를 ‘다른 복음’으로부터 보호하려는 파수군의 심장으로 살아야 한다<22>.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빌1:27,28)

 

(4) 교리와 삶이 분리되지 않아야 한다. 오히려 교리가 삶의 근거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신앙고백적 삶’(confessional life)을 권면하고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만으로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한 고백이 우리 삶으로 증거되어야 하며 삶으로 고백해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골2:6) 이신칭의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으로 끝나지 않도록 하자. 이신칭의에 대한 발견은 우리 모든 삶의 영역에서 삶의 활력소가 되게 해야 한다. 삶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설명은 이신칭의 교리를 극단적으로 받아들이는 두 가지 함정을 피할 수 있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오직 칭의 사역에만 국한시킴으로써 도덕폐기론에 빠지는 것과, 둘째,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지 않고 대신 섞어버림으로써 구원의 과정에서 신자의 의로운 행위가 구원의 과정에서 본질이 되어버리는 것이다<23>. 그러나 칭의를 성화를 위한 근거이자 견고한 토대로 설정한다면 그 두 위험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건물로 비유하자면 칭의는 기초요, 성화는 그 위에 세워진 건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직 믿음으로 칭의가 주어지는 것처럼 역시 오직 믿음으로 성화의 삶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고(합2:4),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롬1:170고 했다.

 

그러면 어떻게 입술만의 신앙고백만으로 그치지 않고 삶으로서의 신앙고백이 되게 할 수 있을까?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분명히 답해주고 있다.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마찬가지로 빌립보서2:27에는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우리의 노력과 의지나 행위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받은 복음의 진리의 말씀으로 가능하다고 말씀한다. 그러면, 우리가 받은 복음진리(교훈)가 무엇인가?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가?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행위나 공로를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는 산 믿음이다. 이 믿음에 대해서 바울은 골2:8-23까지 부연설명하고 있다. 이 믿음이란 그리스도의 의를 추구하는 적극적 믿음(9-15절)이자 동시에 그리스도의 의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다른 복음’을 허용하지 않는 소극적 믿음(16-23절)이다. 우리는 참 본질 되신 그리스도의 의를 주목하는 일에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지 않을 때 우리는 자칫 다른 의(이를테면, 형식주의, 체험주의, 율법주의, 도덕주의, 등)를 추구하는 함정에 빠지기 쉽다. 그리고 다른 의를 제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해야만 한다.

 

본인은 골2:7에 근거하여 우리의 삶이 신앙고백적 삶이 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구체적인 삶의 방식을 제안한다.

첫째, 교회는 교리공부에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교리의 회복)

둘째, 교회는 복음의 본질에 대해 정기적으로 자주 점검해야 한다.(복음의 회복)

셋째, 교회는 복음 진리가 우리 삶의 다양한 국면들에 근거가 되고 이유가 되도록 삶 속에서 묵상한다.(묵상의 회복)

넷째, 교회는 복음 진리를 알게 해주신 하나님께 넘치게 감사드린다.(감사의 회복)

다섯째, 교회는 복음의 본질이 아닌 것들을 늘 경계하기 위해서 서로 권면함으로 서로를 세워준다.(교제의 회복)

 

 

-----<각주>-----

<20>루터 이전에도 수많은 개혁자들이 로마 카톨릭의 미신에 대해, 복음의 본질이 아닌 요소들에 대해 개혁의 목소리를 높였으나 왜 하필 루터에게서 개혁의 불씨가 점화되어 전 유럽으로 확산될 수 있었는가? 이에 대해 가장 먼저 하나님의 섭리로 볼 수 있겠으나 종교개혁의 역사적 배경을 사회적 맥락으로 다룰 때 5가지 정도의 이유를 찾아 볼 수 있다.

첫째, 경제적 이유: 15세기까지는 십자군전쟁, 백년 전쟁, 기근, 전염병 등으로 인구가 많이 감소했었으나, 16세기에 이르러서는 인구가 급증하기 시작하였다. 인구급증은 노동력 풍부를 가져왔고, 그것은 귀족들로 하여금 농민들을 억압하고 착취하게 만들었다. 더구나, 조선술과 해양기술이 발전하여 1492년 콜롬부스의 신대륙 발견 등으로 인하여 무역량이 증가하면서 노예무역이 성행하였고, 노동력이 도시로 흘러 들어오자, 넓은 토지를 가진 영주들은 노동력의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기계화를 추진하였는데 그 결과 산업혁명이 일어났고, 산업혁명이 일어나자 은행, 지폐 등과 같은 새로운 형태의 재정구조가 등장하게 되었고, 그것은 자본주의의 길로 들어서게 만들었다. 이것은 물가상승이라는 경제구조와 사회구조의 불안을 낳게 되었다. 물가상승 등으로 인해 식량폭동이 일어나는 등 사회 불안을 야기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개혁을 불가피하게 만든 요소가 되었다.

둘째, 종교적 이유: 흑사병의 만연, 터어키인들의 위협, 등은 중세인들로 하여금 더욱 더 미신적인 신앙으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그래서 고행주의, 성지순례의 공로적 가치부여, 기도문작성, 촛불예배, 묵주, 임종시의 결단에 대한 두려움, 성자숭배, 수호신사상, 마리아숭배, 성물숭배, 면죄부, 등이 생겨나게 되었다.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내건 비텐베르그 성안에만도 5,005개의 성물이 있었다. 이러한 미신은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고, 루터와 칼빈은 바로 이 미신적인 신앙을 비판하면서 그러한 미신적 신앙의 토대가 되는 복음에 대한 무지를 타파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셋째, 사회적 이유: 무엇보다도 로마천주교의 재정적 타락은 심각했다. 땅의 매입, 성직매매, 등의 방법을 통하여 교회는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교회의 재정적 부패는 자연스럽게 성직자의 성적 타락으로 이어졌다. 교황 알렉산더 6세(1492-1503)의 경우 교황이 되기 전에 4명의 자녀가 있었고, 교황이 된 후에도 첩을 두어 1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리고 자기의 7살 난 아들을 추기경에 임명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프란시시, 베네딕트 수도원, 도미니크 수도원, 시토 수도원 등은 한결같이 ‘청빈’을 최고의 규범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인쇄술이 널리 보급되어 인문주의자들의 활동과 더불어 성경원문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고, 대중들의 의식이 점차 크게 깨어지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특히, 인쇄술은 개혁자들의 개혁의지의 보급에 크게 기여하였다. 루터가 내건 반박문이 2주만에 전 유럽에 보급될 정도였다.

넷째, 신학적 이유: 에라스무스와 같은 인문주의자들에 의하여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고대 교부들의 글이 신학자들에게 많이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고대 교부들의 글이 신학자들에게 많이 소개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어거스틴의 신학이 다시 부흥하기 시작하였다. 원래 중세 카톨릭 교회의 신학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자연신학이었다. 그것은 자연은총을 상대적으로 강조하였는데, 그래서 성례신학이 발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아퀴나스의 신학사상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지금까지 로마 카톨릭의 신학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토미즘에 반발하여 은혜를 강조하는 어거스틴 신학이 다시 부흥하게 되었고, 특히 철학보다는 성경본문 자체를 강조하면서 영적 각성이 쉽게 일어날 수 있었다. 어거스틴의 신학과 더불어, ‘원어성경’ 및 자국어 성경의 활발한 번역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좀더 쉽게 말씀에 가까이 접할 수 있게 되자 기존의 카톨릭의 가르침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으로 만들었다.

다섯째, 정치적 이유: 십자군 전쟁 이후, 장원제도가 몰락하게 됨에 따라, 봉건군주제가 와해되고, 산업혁명으로 치부한 상인들이 자연히 절대군주의 왕권강화에 기여하게 되었다. 영국, 독일, 프랑스, 스페인 등에서 절대왕권이 일어나게 되었고, 절대군주들은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해 자금의 해외유출을 막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런데, 당시 로마 교황청은 유럽의 3분의 1을 소유하면서 소작인들로부터 물질을 긁어모으고 있었다. 독일의 경우 국민 총수입의 40%가 로마로 유출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군주들에게 있어서 로마는 눈의 가시가 아닐 수 없었다. 이때 루터의 ‘새로운 사상’은 귀족들과 군주들로 하여금 새로운 탈출구를 제시하는 근거가 되기에 충분했다. 귀족들은 의도적으로 루터의 사상을 자기들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명분으로 삼으려고 그를 보호하기 시작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자연스럽게 군주들의 지원과 보호를 받게 된 이유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군주들의 지원과 보호 없이 루터의 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겠는가? 루터와 칼빈이 만약 100년만 일찍 태어났더라도 개혁은 아마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실례로 1217년 프랑스 리용의 피터 왈도라는 사람은 자신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성경을 번역하여 널리 보급하자 당시 교권주의자들이 1229년 발렌시아 회의를 열어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그의 추종자 100만여명을 학살하는 끔찍한 사건이 있었다. 이후에 중세인들은 성경을 가지는 것은 마치 불온서적을 가지는 것처럼 인식되었고,  사람들은 점차 미신적인 신앙으로 기울기 시작했던 것이다.

<21>개혁과 구조의 문제를 생각하는 것은 본 주제발표와 거리가 있다고 보여지기에 다음과 같이 따로 생각해보기로 한다. 구조(structure)란 기존의 전통이 지배하는 질서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구조와의 관계에 있어서 ‘급진개혁’과 ‘온전개혁’으로 나눌 수 있겠다. 즉, 구조 내에서의 개혁을 온건개혁이라 할 수 있고, 구조 밖에서의 개혁을 급진개혁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는 마틴 루터, 후자는 토마스 뮌쳐 등이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종교개혁 내에서도 다양한 목소리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때로는 서로 간에 마찰과 갈등이 심한 경우도 많았다. 예를 들어, 귀족들의 후원을 등에 업고 있던 마틴 루터는 농민운동을 주도하던 토마스 뮌쳐를 ‘마귀두목’이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이신칭의’에 대한 신앙고백은 거의 같은데도 이런 차이점이 발생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당시 이러한 구조와의 관계문제에 대한 제각기 다른 견해 때문에 개혁자들 사이에서도 서로 핍박하며, 죽고 죽이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투어 갈라선 것을 보라.(행15:39) 이 구조의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예수님은 율법의 성취자로 오셨지만 예수님 자신은 구약의 전통을 전적으로 부인하지 않으셨다. 그럼에도 예수님 자신은 “이 성전을 헐라”고 강하게 도전하셨다. 마틴 루터가 카톨릭 교회의 구조를 벗어난 것이(그로서는 전혀 그런 의도가 없었지만) 당시로서는 불가항력적인 일이었지만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카톨릭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급진적인’ 입장이었으며 그래서 그를 파문하기로 결정함으로서 구조 밖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22>그러나 우리는 개혁의 동기문제를 다룰 때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막스주의자들과 같은 사회주의자들은 16세기 종교개혁을 사회적 분위기에 ‘어쩔 수 없었던’ 개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의 개혁의 동기를 순수하게 보아야 한다. 그들의 동기를 정치적으로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이 문제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개혁을 시도하려는 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즉, 개혁의 동기가 ‘어쩔 수 없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또, ‘정치적 목적’이 있는 이기적인 동기여도 안 된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의 참된 동기가 되어야 하는가? 갈1:7-10을 보자. 사도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제시하는 개혁의 동기가 무엇인가? 그것은 참된 복음을 사수하려는 열정이다.  다른 복음은 저주를 부르는 엄연한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다. 교회가 계속 개혁되어야 하는 이유는 교회 스스로의 안전과 보전을 위한 것이다. 사도가 전한 복음을 수수하게 보전하려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개혁의 진정한 동기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사도의 복음은 무엇이며, 다른 복음은 무엇인가? 이 문제는 주경적인 문제이지만 간략히 말하면, 율법(할례)과 은혜(연합)의 대조에서 비롯되는 종의 복음과 아들의 복음의 문제이다. 갈라디아서에서는 우리(사도)가 전한 복음과 다른 복음과의 분별 문제가 중요 이슈이다. 다른 복음은 저주가 뒤따르기 때문에 개혁은 불가피하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피의 언약’이므로 복음을 변질시키는 자는 피의 복수를 당할 것이다. 이것은 구약의 언약적 전통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두려우신 진노를 인식하기 때문에 우리는 살을 도려내는 아픔으로 개혁(회개)를 감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은 결코 멋 자랑이 아니다. 개혁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이요 참된 삶의 방식이다. 우리는 복음의 본질을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다른 복음’을 보고서 분개할 줄 알아야 한다. 다른 복음이 무엇인가? 갈2:4을 보라. “가만히 들어온 다른 형제”들이 있었다. 그들의 의도는 사도들의 의도와 사뭇 달랐다. 그들은 그리스도인과 가르치는 교사임을 자처하지만 실제로 그들의 가르침은 교회로 하여금 복음의 순수성을 잃게 하려는 마귀의 의도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들의 말과 달리 그들 스스로도 미처 생각지 못하는 ‘숨은 의도’는 그리스도인들의 자유를 빼앗고, ‘종’으로 삼고자 함이다. 우리는 분명 기억해야 한다. 종교개혁의 신학적 당위성은 종으로서의 삶을 탈피하고 아들로서의 삶을 선택해야 한다는 ‘위기감’을 복음의 본질을 깨닫는데서 얻었기 때문이다.

<23>칭의 교리가 중요하지만 칭의 교리만이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전부인 양 강조한다면 신자의 삶을 무절제와 방종으로 치닫는 길로 안내할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하든 구원에 있어 행위의 가치를 인정하기 시작하면 ‘오직 믿음’으로가 무너지면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는 데서 자기 자신의 행위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즉, 믿음이 행위에 의해서 퇴색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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