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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칭의 교리의 의미와 적용

김 광 락 목사

 

본 小考는 2001년 세광교회(서울 은평구 갈현동) 청년부에서 추최한 종교개혁기념세미나에서 필자가 발제하기 위하여 작성한 원고임.

 

<순서>

I. 들어가는 말

 

II. 본론

     1. 칭의교리에 대한 복음적 프로테스탄트(개혁주의)의 견해

     2. 칭의교리에 대한 로마 카톨릭의 견해

     3. 칭의의 성경적 개념을 로마 카톨릭이 오해하게 된 원인

     4. 칭의교리에 대한 17,18세기 프로테스탄트의 입장변화

     5. 칭의교리에 대한 타협

     6. 칭의교리에 대한 현대 수정주의의 흐름

     7. 믿음과 행위의 관계

     8. 이신칭의 교리의 요약

     9. 이신칭의 교리의 현대적 의의

    10. 이신칭의와 그리스도인의 삶

 

III. 맺는 말

 

IV. 참고문헌

 

    부록: 로이드존스 목사의 로마 카톨릭 사상 평가

 

 

I. 들어가는 말

 

어떻게 죄인인 나를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받아주실 수 있는가? 자신의 불의함을 아는 자들의 마음에 일어나는 근본적이고 중요한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결정적인 교리가 바로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only by faith)이다<1>. 그러므로 이신칭의는 복음이 아닐 수 없다. 그것도 복음의 핵심중의 핵심이다. 이 시간 우리는 이신칭의 교리의 분명한 뜻을 밝히고자 한다. 그리고 이신칭의가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주는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우선 이 말의 의미를 분명히 하고 시작하자. 이신칭의란 말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뜻으로 엄밀히 말하면 ‘이유신칭의(以唯信稱義)’ 즉,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해야 한다<2>. 왜냐면 카톨릭도 ‘이신칭의’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루터가 “오직”이라는 말을 자신의 책에서 삭제했더라면 파문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 세미나에서는 이신칭의 교리<3>가 개혁교회가 목숨 걸고 붙잡고 또 가르치고 선포해야 할 복음의 진수임을 강조하고자 한다. 또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신칭의’ 교리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기 때문에 실천적 삶에 대해 간과하게 될 인간적 위험성<4>을 경고하면서 ‘이신칭의’ 교리가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이 이신칭의 교리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면 기독교와 천주교가 ‘오직 믿음’이란 이 단어를 사이에 두고 다시는 건너지 못할 강을 건너고 말았기 때문이다. 기독교와 카톨릭은 ‘이신칭의’에 있어서 결코 만나지 못할 평행선을 그리고 있다. 왜냐면 개혁자들의 신학이 파장을 일으키자 카톨릭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공식적으로 정죄했기 때문이다: “오직 믿음으로만 죄인이 의롭다 함을 받기 때문에 칭의의 은총을 얻는 일에 있어서 다른 어떤 것도 협력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거든 누구든지 파문케 하라” 그러므로 분명히 이 교리는 기독교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사안이 틀림없다<5>. 루터는 이신칭의 교리를 교회가 서고 넘어지는 일이 달린, 즉, 존립의 문제를 결정짓는 교리라고 했다. 루터는 1538년 시편130편 주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일 이 조항이 바르게 서 있다면 교회가 서는 것이고, 만일 그것이 타락한다면 교회 역시 타락하는 것이다” 칼빈 역시 “만일 이 교리의 순전성이 조금이라도 손상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가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 것이며 파멸의 벼랑으로 몰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으며 “이 교리의 지식이 사라지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소멸되며 종교는 폐지되고, 교회는 파멸에 이르며, 구원의 소망은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또한 “칭의 교리는 분명 기독교를 지지하는 주요 근거이다. 그래서 이 교리에 더욱 주의하고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 당신의 위치가 어디이며 하나님이 당신에게 내리시는 심판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면 당신의 구원을 떠받치거나 하나님을 향한 경건을 향상시킬 수 있는 토대를 전혀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한 바 있다. 1556년 영국 옥스퍼드에서 화형 당한 영국의 개혁자 크랜머(Cranmer)는 “칭의는 기독교회의 강력한 반석의 기초이다. 이는 고대 그리스도 교회의 모든 저자들이 인정한 교리였으며, 그리스도의 영광을 잘 나타내는 교리이며, 헛된 인간의 영광을 경멸하는 교리이며, 이 교리를 부인하는 자는 누구든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여기지 말아야 하며, 그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지도 못하고 오히려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 대적자가 되고 인간의 헛된 영광을 장식하는 자가 될 뿐이다”라고 말했다. 이외에도, 존 낙스와 같은 개혁자들이 복음이 위기에 처한 것은 칭의 교리와 관계되고 있다고 했다. 패커는 이신칭의 교리를 ‘거인 아틀라스’에 비유했다. 즉, 이신칭의는 구원의 은혜에 대한 전체 복음주의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어깨라는 것이다. 어깨가 무너지면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이 무너진다는 것이다. 이 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물론 이신칭의가 신자의 삶의 전부가 아니지만, 신자의 삶의 기초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우리는 16세기 교회사를 볼 때 종교개혁의 불씨는 다름 아니라 이신칭의 교리를 바르게 이해했을 때 비로소 번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오직 믿음”은 교회의 존립 여부를 결정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심판대 앞에서 우리를 일어서게 하거나 혹은 넘어지게 만들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이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어야 한다.

 

그런데 칭의가 분명 기독교의 정체성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교리임에도 불구하고 최근 기독교의 정체성이 외부에서가 아니라 내부에서부터 흔들리고 있다. 복음주의자들, 신학계, 그리고 교회와 개개인 그리스도인들에게조차 ‘무의미하고 건조하며 교조주의자들이나 추구하는 딱딱한 교리’ 정도로 인식되고 있으며 현대적인 흐름에 있어서 어쩌면 불필요한 것처럼 느끼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6>. 오늘날 복음주의 신학교와 교회 강단에서는 더 이상 이신칭의에 대한 가르침이나 설교는 희미해지고 있으며,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일고 있다. 앞으로 살펴보게 될 것이지만 현대의 다원주의와 초 교파적 교류의 흐름과 관련하여 더 이상 이런 예민한 사안들을 언급하는 것을 회피하거나 혹은 ‘화목’과 ‘통일’을 위해서 개혁자들의 노선을 스스로 수정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복음의 순수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이러한 흐름은 분명 사도 바울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던 그 저주를 스스로 자청하고 있는 심각한 사태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협력과 선교의 명분 아래 복음의 본질을 희석시키는 위험성에 대해서 경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왜냐면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가르치면 누구나 파문하기로 결정한 로마 카톨릭의 태도와 반응은 1546년 이후 지금까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변화는 복음주의 진영에서 퇴보하거나 양보하는 쪽으로 일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만약 이신칭의 교리가 복음의 핵심이고 본질이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바가 아니며, 복음의 본질이 아니라면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크게 잘못 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만일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핵심이며, 복음의 본질이라면 기독교회가 스스로 다른 복음과 타협하고 있으며 스스로 저주를 자청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위기<7>를 타개하기 위해서 우리가 취해야 할 가장 최선의 방법은 이 교리를 선명하게 설명하고 재천명하는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복음이 없으면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라 온갖 미신으로 가득 찬 종교 집단으로 전락한다<8>.

 

자, 어떻게 문제를 풀어나가야 하겠는가? 로마 카톨릭의 주장과 개혁자들의 주장이 서로 극명하게 대치되고 있는 민감한 부분에 대해서 서로의 주장을 비교하면서 어느 주장이 더 성경적인지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이신칭의 교리가 루터가 창작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바울이 전한 것이라면 모든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만일 이신칭의 교리가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본질적인 것으로 입증될 수 있다면 로마 카톨릭과 종교개혁 둘 중에 하나는 잘못 되었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본인은 그렇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문제의 핵심은 이신칭의 교리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신칭의 교리를 오해, 혹은 잘못 적용하거나, 혹은 인간적인 오용 가능성 때문에 수정한 자들에게 무지에 대한 책임을 돌려야 할 것이다. 본인은 논쟁을 피하는 것만이 점잖고 예의바른 것이라는 생각에 도전하고싶다. 진리를 수호하고 사수하기 위해서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정면 돌파해야 한다. 왜냐면 그것은 허울좋은 교리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구원과 복락을 위한 일이며, 또한 동시에 우리 후대를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 중대한 목적을 위해서 본인은 이신칭의의 쟁점을 명확히 소개한 다음, 개념을 정리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것이 현대 교회에 매우 필요한 이유를 밝힐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맺어야 할 삶을 요구하고 있는 복된 교리임을 주장하고자 한다.

 

-----<각주>-----

<1>기독교 구원론은 주로 세 가지 분야를 다룬다: 첫째, 인간의 본성이 무엇이며, 어떻게 타락했으며, 타락한 결과 비참함은 어떠한가? 둘째,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를 회복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무슨 일을 행하셨는가? 셋째, 그리스도의 사역이 타락한 죄인들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 오늘 다루는 문제는 세 번째 구원의 적용 분야가 되겠다.

<2>단어에 대한 정의는 앞으로 논지를 진행해 가는데 필수적인 과정이므로 아래와 같이 정리하고자 한다.

①의(디카이오시스, 명사):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설 수 있는 법적 신분과 하나님의 요구와 일치하는 것을 가리킨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의’라고 할 때 그것은 언약 안에서 지시하신 스스로의 약속과 저주의 말씀에 대한 자신의 신실하신 성품과 신실하신 행위를 가리킨다. 즉, ‘하나님의 의’라고 할 때 그 의미는 죄인(경건치 못한 자)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와 관계되어 있다. 이 행위에 의해서 부여되는 신분을 가리켜서 ‘디카이오수네’라고 일컫는다.

②칭의(디카이오오, 동사): ‘어떤 사람을 의롭다고 선언하다’는 뜻으로서, 헬라어에서 ‘칭의’(성경에서 ‘의롭다 하심’으로 번역됨)는 ‘변호’와 ‘사면’의 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칭의는 정죄와 대립되는 문맥 속에서 항상 사용되고 있으며 법적인 개념으로 보는 것이 성경 전체 문맥상 가장 타당하다. 이 칭의는 하나님 앞에서 사죄 및 무죄에 대한 평결,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신분에 대한 선언이다. 근본적으로 ‘칭의’는 법정 용어로서, 법정에서 무죄방면과 새로운 신분으로서의 변호를 가리킨다.

③공의: 위의 ‘의’가 사람(사회)에게 적용될 때 윤리, 혹은 분배의 공평, 혹은 소송의 공평이란 뜻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이 ‘의’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지 못하며 부정하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사64:6)라고 고백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의’를 소유한 인생이 옳은 일을 추구하는 것을 반대하거나 소홀히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더욱 더 자극하는 촉매제가 된다.

④‘의로운’(디카이오스, 형용사): ‘의’는 하나님의 본질에 속한 것으로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 하나님에 대한 바른 태도를 가진 ‘경건한’ 사람을 가리킬 때 사용되기도 한다. 의로운 사람은 하나님을 마음으로 인정할 줄 알며, 또 두려워 할 줄 아는 ‘경건한’ 사람이다. 즉, 의롭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서술되는 것이며 사람 스스로의 도덕적 행위만을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다. 헬라어 디카이오스는 사물 자체가 이상에 부응한다는 개념의 ‘아가토스’와 달리, 그것의 원래 의도된 용도(목적)에 부합한 상태를 가리킨다. 성경에서 ‘의로운 사람’이라고 할 때는 선한 사람이라는 개념보다는 하나님과의 법적 관계에서 언급하고 있다고 하겠다.

<3>앞으로 본인은 ‘이유신칭의’라는 뜻으로 ‘이신칭의’라는 단어를 쓸 것이다.

<4>‘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음’이란 교리가 분명히 성경적이지만 그것이 충분히 이해되지 않은 상태에서 ‘모든 선행’을 부인하거나 평가절하 해버리는 경향이 있는 것은 교리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 교리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죄성에 문제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5>존 맥아더 목사는 “복음주의자들을 이신칭의 교리를 믿는 자들로 정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6>사람이 기본적으로 선하다는 자아관과 하나님은 스스로 노력하는 자를 구원하신다고 하는 구원관을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조지 바너가 조사한 바로는 복음주의자의 77%와 87%가 그러한 이해를 가지고 있다는 통계는 우리가 자성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7>복음주의가 위기에 처한 전반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다가오는 복음주의의 위기](존 암스트롱 외, 생명의 말씀사)와 [복음주의의 회복과 고백](제임스 보이스 외, 생명의 말씀사)을 참조하기 바란다.

<8>종교개혁자들은 로마 카톨릭이 1546년 트렌트 종교회의에서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교리를 공식적으로 거부하고 정죄했을 때 실제로 자신들 스스로를 정죄한 것이며, 그들은 더 이상 참된 교회가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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