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5. 천상예배
본문 (계 4:1-1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2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3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4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6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 7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8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 9 그 생물들이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릴 때에 10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지난주에는 찬양으로 드리는 예배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찬양예배를 다른 교회에서도 하니까 우리도 하자는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이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찬양예배의 성경적 원리에 대해서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못할 때 어려움이 생길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꼭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권위에 대한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찬양과 예배에 대해 분명한 권위가 있어서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한 성막에 대한 설계는 모세가 직접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지만 실제로 성막에 들어가는 기구를 만드는 것은 브살렐과 같은 기름부음 받은 사람들이 담당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직접 노래도 하고 찬양도 만들기도 했지만 왕국이 안정되었을 때 다윗은 예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아삽과 같은 사람은 찬양에 대한 책임을 졌던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날 교회들을 보면 예배 전체를 주관하는 사람과 찬양만 주관하는 사람이 따로 세워져서 사역하는 것을 봅니다. 담임목사님이 사회를 보면서 예배 전반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기도로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아삽과 같이 음악에 기름부음 받은 분들이 성가대를 연습시키고 또 교인들에게 찬양을 가르치기도 합니다. 이 두 분은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면서 서로 협력하고 기도하는 관계로 나아갈 때 교회의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은혜로운 예배가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대부분 교회의 청년부에서 드려지는 찬양예배를 보면 찬양인도자가 곧 예배인도자인 것을 봅니다. 찬양사역자가 이것에 대해 배우지 않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찬양을 인도하면서 멘트를 많이 하게 됩니다. 예배를 인도해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지요. 찬양인도자는 찬양팀을 연습시키고 실제로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집중해야 하는데 예배를 인도해야 한다는 부담까지 있으니까 찬양 인도하는 중에 멘트를 많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회중이 하나님께 찬양함으로 반응하기 시작할 때 흐름이 끊어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찬양인도자가 예배 중에 하나님께 찬양하는데 집중하도록 예배인도자를 따로 세워야 합니다. 예배인도자는 예배 전반에 대한 영적 부담을 안고 예배의 시작을 열고, 끝을 맺어야 합니다. 그리고 찬양인도자는 찬양으로만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성경적인 원리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권위가 나뉘어져 있지 않게 되면 예배는 어수선해지고 흐름도 잘 끊어지게 되는 일이 발생합니다. 어른들이 찬양예배에 은혜를 받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이것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집중하려고 하는데 중간 중간에 흐름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부분 교회의 찬양예배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는 앞으로 우리 3부 예배에 예배인도자를 따로 세우는 일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아니, 그래야만 합니다. 그래야 찬양인도자는 예배인도에 대한 부담을 떨쳐버리고 하나님께 찬양하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하나이시듯, 교회의 예배 역시 예배인도자와 찬양인도자, 그리고 말씀 선포자가 한 마음으로 움직여야 그 예배가 기름 부으심이 넘치는 예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배인도자가 감사함으로 예배를 시작하자고 마음을 나누고 기도를 하게 했는데 찬양인도자가 회개에 대한 찬양으로 첫 곡을 시작했다고 가정해보세요. 그리고 말씀선포자가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서 말씀을 선포하는데 예배인도자가 기쁨으로 멘트를 했다고 가정해보십시오. 서로 마음이 맞지 않고 예배에 일치된 주제나 흐름이 없는데 회중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예배에 3중 권위를 기억하기 바랍니다. 예배인도자, 찬양인도자, 그리고 말씀 선포자 이 세 권위가 서로 연합하고 서로 중보하며 서로 섬기며 한 하나님께 반응하는 그런 예배가 바로 주님의 영광을 경험할 수 있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권위가 없거나, 권위가 무너진 예배는 혼란스럽고 질서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어려움의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찬양으로 드리는 예배는 힘이 있고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노래의 힘과 영향력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한 가지 또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음악성이 중요하지만 음악성에 집중한 나머지 찬양의 정신을 놓쳐버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얘기를 꼭 하고 싶습니다. 영적으로 볼 때 농아들의 찬양이 더욱 감동적인 이유와 같은 이치입니다. 장애우들의 율동이 더욱 큰 영적인 파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찬양예배의 파워를 어떤 악기나 음악적 전문성에만 찾으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악기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은사와 재능을 받으신 분들은 더욱 연습하고 연습해서 공교함으로 찬양해야 합니다. 사람을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이 악기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연습부족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사용할 말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악기연주자는 공교함을 위해 기도하면서 계속 연습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함께 알아야 할 것은 찬양할 수 없는 중에 찬양하는 것이 정말 찬양을 찬양되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세요.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맞고 빌립보 감옥에 갇혔던 바울과 실라가 찬송할 수 없는 감정과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고 찬양하게 되었을 때 일어난 놀라운 일들을 기억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잘 아시는 말씀 시편 50편 23절,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감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감사의 조건을 가지고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도무지 감사할 수 없는 그런 상황에서 감사하는 바로 그 감사야말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향기로운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제사는 희생이 아닙니까? 따라서 감사로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을 깨뜨리면서 감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감사의 제사는 감사할 조건을 가지고 감사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감사의 조건이 도무지 없는 가운데서 감사하는 그것이 바로 감사의 제사입니다. 찬양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찬양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에서 찬양 드리는 것보다 찬양할 수 없는 그런 상황에서 찬양 드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임을 믿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의 노래보다 더 감동적인 찬양은 없습니다! 마음이 슬픈 자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힘을 다해 찬양하는 것보다 더욱 힘 있는 찬양은 없습니다! 제대로 말할 수 없는 사람이 그리고 제대로 손발을 쓸 수 없는 사람이 온 몸을 다해 하나님을 찬양한다면 이보다 더 감동적인 찬양은 없습니다. 광야에 있을 때 다윗은 이렇게 노래한 적이 있습니다.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시69:29-31). 다윗은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큰 연단을 당하여 온 몸과 마음이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불같은 연단을 받는 다윗을 향해 주변 사람들은 다 조롱하고 멸시하며 비웃고 놀려댔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조차 다윗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너 왜 그렇게 사냐?” “꼭 그렇게 살아야 하냐?”라고 다윗을 격려하기보다는 다윗을 낙담시키는 말들을 하였던 것입니다. 다윗은 감사할 조건이 없었습니다. 다윗은 황소로 하나님께 제사 드리고 싶었지만 자신의 삶은 그런 형편이 못되었습니다. 다윗은 도무지 찬양할 기분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결정합니다. 왜냐면 바로 그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노래로 하나님을 높이는 것, 하나님께서 광대하시다고 선포하는 것은 황소를 드림보다 더욱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것이 예배를 가장 예배답게 하는 진정한 요소임을 알아야 합니다. 충분히 조건이 되고 이유가 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황소를 드려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싶으나 그럴 수 없는 형편이지만, 그러한 자신의 형편을 원수들이 그리고 세상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눈빛으로 쳐다볼지라도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하나님의 성품을 찬송하며 감사하는 것은 황소를 드림보다 더욱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찬양예배의 진정한 정신입니다!
또 찬양으로 예배드리는 데 모델이 필요하고 했습니다. 이 모델은 힐송이나 온누리가 아닙니다. 모든 교회는 찬양예배의 모델을 오늘 읽은 본문에서 찾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것이 바로 천상예배입니다. 하늘에서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으며, 밤낮으로 계속되는 이 천상의 예배야말로 지상교회가 찬양으로 예배드릴 때 항상 바라보아야 하는 모델입니다. 예배인도자나 찬양인도자는 언제나 이 모델을 마음에 품고 있어야 합니다. 천상예배는 어떤 예배인가? 첫째,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천상예배는 항상 드려지고 있습니다! 지상에는 온갖 어려움과 시련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상에는 영광스러운 예배가 드려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찬양예배의 정신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상황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우리는 찬양함으로써 이 영광스러운 천상예배에 믿음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계속 읽어가다 보면 지상에 무섭고 끔찍한 재앙들이 일어날수록 천상에는 더욱 예배가 뜨거워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삶이 환난과 고난의 연속이라면 바로 그때야말로 천상예배를 경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놀라운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둘째, 천상예배는 보좌를 중심으로 드려지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하늘에 열린 문을 통과해서 처음 보게 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보좌였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이것은 모든 찬양사역자들과 찬양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마음에 새겨야할 단어입니다.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라고 했습니다. 성령께서 운행하시는 예배는 하나님의 보좌를 인식하게 됩니다. 찬양예배는 바로 하나님의 보좌를 인식하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좌는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며,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며, 하나님께서 통치하심을 인식하면서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해야 합니다. 그리고 보좌에 앉으신 이가 어떤 분인지를 생각하면서 예배드려야 합니다.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고 했습니다(3절).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 하나님의 성품과 위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벽옥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홍보석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지개는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와 신실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찬양함으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간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성품들과 위엄들을 기억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인식이 없다면 우리의 찬양은 단지 유희와 자기 즐거움만의 캐롤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예배에 중심이 없이 이리저리 표류하는 까닭은 이러한 중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배에는 중심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인도자나 말씀선포자나 혹은 예배에 참여하는 회중이나 모두 하나님의 보좌를 인식하는 데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인식하지 않는 예배는 아무리 화려한 음악과 반주와 성가대가 있을지라도 그것은 중심을 잃은 예배일뿐입니다.
셋째, 천상예배는 하나님의 위엄과 행하신 일이 원동력입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중심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또 보좌에 둘려 이십 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 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4절). 24장로들이 누군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습니다. 이들은 택함 받은 자들의 대표로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주관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구약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하늘의 예배를 경험한 후에 성가대 조직을 24반차로 조직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또,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 첫째 생물을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을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을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라고 했습니다(5-7절). 번개와 음성과 뇌성은 하나님의 위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리고 일곱 등불은 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수정과 같은 유리바다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보좌 주위에 앞뒤로 눈이 가득한 그룹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피조물들 중에 으뜸입니다. 그들은 각기, 위엄과 능력과 지혜와 권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앞뒤로 눈이 가득하다는 것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것과 하나님이 지으시고 행하시는 것을 전심으로 연구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것들을 인식하는 것이 바로 찬양으로 예배드리는 가운데 필요한 것들입니다. 우리가 찬양할 때 하나님의 이러한 성품들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냥 캐롤송을 부르는 것과 같은 것이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의 보좌를 인식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러한 위엄과 탁월한 성품들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온전한 예배입니다.
넷째, 천상예배는 끊임없는 찬양으로 드려지고 있습니다. 8절을 보세요.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 천상예배는 설교자도 없습니다. 그리고 천상예배는 성시낭송이나 특송 같은 것도 없습니다. 오로지 찬양으로 반응하는 것만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예배를 반응이라고 정의한 것입니다. 천상예배는 오직 찬양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반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천상예배는 하나님의 거룩함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가장 탁월한 네 천사들은 하나님의 보좌를 수행하는 그룹입니다. 그들은 단지 하나님의 보좌를 수행하는 일만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보좌 주변에서 끊임없이 찬송하고 있습니다. 밤낮 찬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찬송은 매우 단순합니다. 무엇입니까?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하나님의 탁월함을 쉬지 않고 선포하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탁월한 음악성과 화려한 연주와 안무가 있더라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하나님의 영광과 탁월하심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면 앙꼬 빠진 찐빵과 같은 것입니다!
다섯째, 천상예배는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릴 때에 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고 했습니다(9-11절). 보좌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선포될 때 찬양을 주관하는 24장로들, 다시 말해서 모든 택함 받은 백성들이 함께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립니다. 그리고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자신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집니다. 그리고 화답합니다. “우리 주 하나님!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당연히 받으실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최고의 경배를 받으시는 것이 당연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예배에는 바로 이러한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 주님은 나에게서 최고의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당연하십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보좌 앞에 엎드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복종과 항복을 믿음으로 선언하는 것이 우리의 예배 중에 일어나야 합니다.
이제 5장으로 넘어가면 천상예배가 하나님의 어린양을 중심으로 또 한 번 드려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4장에서는 보좌에 앉으신 이를 중심으로 예배가 드려졌다면 5장에서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중심으로 예배가 드려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세세토록 살아계시는 하나님께 찬양과 엎드림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예배는 또한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신 하나님의 어린양께 동일하게 찬양함으로 반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상예배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예배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계시록 4장과 5장의 천상예배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께 모든 천사들과 택함 받은 백성들과 피조물들이 찬양함으로 반응한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반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천상예배를 경험하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알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맺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 놀라운 예배, 이 영광스러운 예배, 바로 천상예배를 항상 바라봅시다. 우리가 찬양함으로 하나님 보좌 앞에 나아갈 때 언제나 이 말씀을 기억합시다. 우리는 우리의 만족과 유익을 위해 찬양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기분 내기 위해 찬양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 세세토록 사시는 하나님, 지금도 보좌에 앉으사 다스리시며 통치하시는 주권과 위엄과 영광의 하나님께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성품과 위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 앞에 감히 나아갈 수 없는 우리들을 위해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기꺼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우리 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심으로,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당당하게 달려갈 수 있도록 친히 죽임을 당하시고 피를 흘려주신 어린양께 기쁨과 감사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의 감정과 상황과 아무런 상관없이 여러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여, 그 흘리신 보혈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보좌 앞에 지금도 담대하게, 당당하게 나아가서 그 앞에 서서 네 생물들과 24장로들이 반응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반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바로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가 어떤 환란을 당하고 어려움을 겪더라도 그리고 어떤 마음의 부담감을 가지고 있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천상예배를 경험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려움 속에서 믿음으로 찬양할 때 천상예배가 됩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인식하며 하나님의 거룩, 위엄, 그 행하신 일들을 높일 때 천상예배가 됩니다. 우리가 경험하기를 갈망하는 예배는 하나님의 보좌와 위엄을 인식하고 반응하는 것입니다. 자기만족을 위한 예배로 끝나는 것을 경계합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좌를 인식하며, 하나님의 영광, 주권, 성품, 위엄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죽임 당하신 어린양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보좌에 계신 이와 어린양 앞에 찬양함으로 반응합시다! 그리하여 천상의 예배를 이 땅에서 경험해봅시다! 이러한 예배의 영광이 우리 안에 회복되도록 함께 간절히 은혜를 구합시다!
우리 보좌 앞에 모였네. 함께 주를 찬양하며 하나님의 사랑 그 아들 주셨네.
그의 피로 우리 구원받았네. 십자가에서 쏟으신 그 사랑 강같이 온 땅에 흘러
각 나라와 족속 백성 방언에서 구원 받고 주 경배 드리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도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