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게시판의 모든 글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선교하시는 김광락 목사님의 글입니다.

2014.02.25 23:30

굴욕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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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굴욕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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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굴한 삶에 관하여

 

비굴함meanness에 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다윗의 삶에 가장 비굴한 순간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살아가면서 때론 생애 가운데 가장 비굴한 순간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럴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 생각해보았습니다.

 

 

비굴한 삶 vs. 비굴한 척 하는 삶

 

사람은 누구나 자존심이 있어서 남들에게 무시를 당하거나 놀림을 받는 것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자존심이란 나름대로 자신의 가치를 매기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이 자신에 대해 매긴 가치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거나 혹은 낮은 가치를 매길 때 그 속에서 분노하는 것입니다. 그 분노의 불길은 다른 사람에게로 향하거나 혹은 그 자신에게로 향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속상하다고 느끼는 것은 자신을 향해 분노의 화살을 쏟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해 자신이 매긴 가치가 아니라 나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이 매기신 가치를 바로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예를 들어볼까요? 나는 나 자신의 가치를 100으로 매겼는데 다른 사람이 나를 80으로 매긴다면 분명 속상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의 가치를 10000 혹은 그 이상으로 매기셨다는 것을 진정 안다면 어떻게 될까요? 다른 사람이 나의 가치를 80으로 매긴다면 속상할까요? 결코 그런 일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피식 웃어넘기고 말 것입니다. 사람들은 비굴해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비굴한 삶을 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진짜 비굴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시는가를 잊어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시는가를 바로 알게 된다면 우리는 적극적으로 더 나아가 일부러 비굴한 삶을 자발적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들 앞에서 그의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 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삼상21:13)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목숨을 구걸하기 위하여 블레셋 왕 아기스에게로 간 것은 다윗에게는 큰 굴욕이었습니다. 왜냐면 다윗은 블레셋 군대를 무찌른 용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이 블레셋이 두려워하는 용사임을 잊어버린 채 그저 사울을 피해 작은 피난처를 얻기 위해 블레셋 왕에게로 나아간 것입니다. 그러나 블레셋 백성들이 그러한 다윗에게 다윗 자신이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던 자신의 정체성identity을 다시 일깨워주었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이 말을 듣고 비로소 다윗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다윗은 자신을 미워하고 두려워하는 적들로부터 자신이 누구인가를 배우게 된 것입니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깨닫게 된 다윗은 자신을 두려워하는 적들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급히 숨겨야만 했습니다. 다윗은 적들이 보는 앞에서 광인의 연기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광인의 연기를 해야만 했던 다윗의 마음에는 자신의 정체를 발견한 기쁨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면 자발적으로 비굴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비굴해지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진짜 비굴한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리고 자신이 정복해야 할 적들에게 도움을 청하러 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비굴한 삶이란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한 사람은 적극적으로 비굴해지는 삶을 살면서도 마음에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 수 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34:8)

 

블레셋 왕에게 피하려고 했던 다윗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한 다윗은 자신이 피해야 할 곳은 블레셋 왕이 아니라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시편 34편은 블레셋 왕 앞에서 비굴하게도 광인의 연기를 해야만 했던 다윗이 블레셋으로부터 쫓겨난 후에 지은 시편입니다. 이 시편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피하는 자가 받을 복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8)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9)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0) “...그에게 피하는 자는 다 벌을 받지 아니하리로다.”(22) 블레셋 왕에게 피하러 갔던 다윗은 블레셋 앞에서 자신이 피해야 할 곳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 그 어느 누구도 진정한 피난처가 되지 못함을 알게 될 때 다윗은 기꺼이 블레셋 왕과 신하들 앞에서 광인의 연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34:2)

 

블레셋 왕 앞에서 침을 질질 흘리며 미친 척 하며 그 자리를 빠져나올 때 다윗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블레셋 왕의 신하들뿐만 아니라 다윗의 신하들도 그러한 다윗의 모습을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자신을 지켜보는 사람들 앞에서 광인의 연기를 해야만 했던 순간의 다윗은 수치와 당황스러움으로 가득했을까요? 그 자리를 빠져나온 직후 쓴 시편인 34편을 묵상해보면 그 순간 다윗의 마음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시편은 당시 다윗의 마음에 수치심이 아니라 기쁨과 확신으로 가득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첫째는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해 다시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는 기쁨이고, 둘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지 않으시고 함께 하심을 아는 즐거움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자리를 빠져나오면서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할 것이라고,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게 될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굴한 삶 vs. 비굴한 척 하는 삶

 

진짜 비굴한 것은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잊어버린 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시는지 알지 못한 채 그저 자신이 자신에 대해 매긴 가치기준을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 가운데서 사소한 일로 속상하고 작은 일로 분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정체성이 제대로 확립되고 난 다음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비굴한 삶을 연기하며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며 손가락질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마음속에는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찬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삶 같지만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비굴한 삶 같지만 기쁜 마음으로 그러한 삶을 환영하고 그러한 삶을 끌어안는 것입니다. 적들 앞에서, 그리고 자신의 부하들 보는 앞에서 침을 질질 흘리며 광인의 연기를 했던 다윗은 어쩔 수 없이 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그러한 행동을 보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비굴한 삶에 대한 이해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8-10)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3-27)”

 

사도 바울의 삶은 분명 주변에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굴욕적인 삶그 자체였습니다. 로마시민권자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은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었지만 바울은 기꺼이 다른 사람의 눈에 비굴한 삶을 살기로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삶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보시는 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면 기꺼이 굴욕적인 삶을 환영하는 삶을 살 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고후1:6)

 

저는 어릴적 자존심이 무척 강한 아이였습니다. 다른 친구가 나보다 더 공부를 잘 하는 것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지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예수님이 내 삶 속에 들어오셨을 때부터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다른 친구들에게 지는 것이 제게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제게 중요한 것은 주님을 섬기는 것이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이기기 위해 공부하거나 지기 싫어서 공부를 했다면 주님을 알고 난 다음에는 주님을 섬기기 위해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남이 나보다 더 잘 하는 것에 대해 그렇게 속상하지 않았고 남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가는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20여 년 간 사역했던 목회를 내려놓고 선교지에서 내 삶을 드리기로 결심했을 때 또 다른 시험test이 찾아왔습니다. 목사로 있었을 때 그렇게 우러러보다가도 선교사로 헌신했을 때 돌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은 선교사의 헌신이 목사의 헌신보다 더 깊은 차원의 것임을 알고는 긍휼히 여기고 축복해주었지만 저를 우습게 여기고 내려다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분들 앞에서 제 자신이 비참함을 느끼게 되었을 때 속이 상하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속상하여 서러운 눈물로 베개를 적실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선교사 혹은 선교사역을 우습게 보는 시각이 교회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시각에 의하면 선교사는 목회자보다 "낮은 급"의 사람입니다. 재정이나 여러모로 도움을 받아야 하는 불쌍한 처지 그래서 어떤 시각에서는 후원을 구걸해야만 하는 걸인과도 같은 사람입니다. 교회 목사나 장로 중에서 그런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이런 시각으로 대접을 받으면서까지 선교사역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제 마음에 비추인 한 줄기 진리의 빛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나같은 사람에게 복음을 부탁하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감히 복음을 부탁받은 사람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 저는 오랜 세월 그런 푸대접을 받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라고 자부하며 살아왔지만 기꺼이 그런 푸대접을 받아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굴하게 살 것인가, 비굴한 척 하며 살 것인가

 

자존심을 붙들고 살 것인가, 아니면 정체성을 붙들고 살 것인가. 이것은 매일 겪는 갈등입니다. 선교지에 나와서도 계속 같은 전투가 내면서 벌어졌습니다. 처음 정착하는 과정에서는 어쩔 수 없이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들에게 신세를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럴 때 제가 섬겼던 서울의 어느 교회 목사님께서 늘 하시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지금 신세를 기쁘게 져봐야 나중에 갚으며 살게 된다고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어디를 여행해도 항상 계획하고 준비하던 사람이었는데 기꺼이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서 신세를 지고 싶다고 그래도 되는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거절당할 것도 각오했습니다. 도움을 구하는 것은 도움을 거절할 수 있는 자유마저도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도움을 받을 줄 알아야 나중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선교지에서 첫 일 년을 정착하는 과정에서 여러 선교사들에게 신세를 졌습니다. 사랑의 빚을 졌습니다. 주님은 마지못해서, 혹은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적극적으로, 기꺼이 굴욕적인 삶을 살라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부탁받은 복음의 영광을 생각하면 도움을 청하는 행위가 예전에는 굴욕적인 삶이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다윗의 시편과 같이 하나님이 나의 피난처가 되시는 기쁨을 알게 해줍니다.

 

 

도움을 주기 위해 도움을 받을 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후1:4)

 

우리가 남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삶을 살려면 먼저 위로받고 격려받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고난을 부끄러워하고 피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결코 고난 중에 있는 다른 형제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로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기 전에 사랑받는 법을 배워야 하고, 섬기기 전에 섬김을 받는 법을 알아야 하며, 베풀기 전에 베풂을 경험해보아야 합니다. 자신이 남에게 잘 베푸는데 남이 자신에게 베푸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면 자신이 남에게 베푸는 것도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은혜를 받아보지 못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자기의, 자기자랑이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충분히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또한 다른 사람도 충분히 사랑할 수 없습니다.

 

 

비굴하게 살 것인가, 아니면 적극적으로 비굴하게 살 것인가..

 

우리는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올바른 정체성을 갖고 있다면 기쁜 마음으로 비굴하게 살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복된 사명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면 다윗이 블레셋 왕 앞에서 광인의 연기를 했던 것처럼 우리도 미친 척 하면서도,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비웃음을 사면서도 하나님 한 분만을 자랑하겠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자존심을 붙들고 살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안에서의 올바른 정체성을 붙들고 살겠습니까? 세상에서 비굴하게 살 것입니까? 아니면 기꺼이 광인이란 비아냥 소리를 들으며 살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기꺼이 어리석은 자가 되고(고후11:17), 즐거이 미친 사람’(고후5:13)이 되는 것. 그리스도를 위하여 미친 사람이라고 한번 쯤 내 생애 속에서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아보는 것. 그리스도를 위해 기꺼이 비굴해지는 것. 한번쯤 선택해봄직한 삶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비굴한 삶을 선택하려는 모든 형제 그리스도인들에게.

 

South Africa,

김광락 선교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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