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1.07 00:17

장 앙리 파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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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앙리 파브르

곤충의 아버지 (1823-1915)

 

어린 시절 풀벌레와 함께 놀아

가난한 농부아들 ... 놀이감 '자연'

귀뚜라미 소리에 반해 저녁마다 찾아 나서

시골학교 스승 통해 믿음 싹터

 

  92년 하계올림픽이 개최된 스페인의 항구 도시 바르셀로나를 따라 프랑스 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리옹만이 나오고 남부 프랑스의 유명한 도시 마르세유가 그곳에 자리잡고 있다. 그 근처 작은 산마을 상레옹에서 '곤충학의 아버지', '벌레의 시인', '곤충의 아저씨'라 불리는 위대한 곤충학자 장 앙리 파브르가 태어났다.

  어느 여름날 저녁 무렵, 어린 앙리는 집 근처의 풀숲에서 이제까지 듣지 못하던 벌레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귀뚜라미 소리도 아닌데 무슨 벌레 소리가 이렇게 클까? 혹시 산새 둥우리가 근처에 있는 게 아닐까?"

  어린 앙리는 작은 산새의 새끼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반가움에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조심스럽게 풀숲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그 소리는 가까이 다가가자 그만 뚝 그쳐버렸다. 그는 쪼그리고 앉아서 다시 그 신기한 소리가 들려오기를 기다렸지만 다시는 그 시원스런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다음날도 앙리는 저녁을 먹기가 바쁘게 풀숲으로 나가 기다렸지만 이 아름다운 목소리의 임자를 찾는 데 실패하였다. 며칠이 지난 후에야 마침내 그는 그것을 붙잡는 데 성공했다. "이게 무얼까? 꼭 메뚜기처럼 생겼잖아. 그런데 어쩌면 그렇게 고운 목소리를 낼까?"

  끈질긴 관찰 끝에 찾아낸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여치와 비슷한 베짱이였다는 것을 안 것은 그가 좀더 자란 뒤의 일이었다.

  이 위대한 곤충학자의 자질은 이렇게 어린 시절 일찌감치 움트기 시작하였다.

  어린 시절을 매우 가난하게 자란 파브르는 고향인 상레옹에서 약 40km쯤 떨어진 마라바르 마을에 있는 외가에서 주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가난하기 때문에 집안에 가지고 놀만한 장난감 하나 없었지만 그가 자란 남프랑스는 여름에는 시원하며, 가을에는 비가 자주 내리고 따뜻하여 식물들이 잘 자라고 곤충들이 많았다.

  하나님이 주신 주위의 모든 것이 그에게는 신기하고 놀라운 놀이감이었다.

  참새와 가축, 새, 벌레 그리고 이름 모를 풀들에 이르기까지 호기심과 관찰의 대상이었다.

  일곱살이 된 파브르는 학교에 들어가야 했지만 외가 동네에는 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부모님이 계신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다.

  "우리 앙리만큼은 나처럼 무식한 농군으로 만들지는 말아야지"

  파브르의 부모는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상레옹에는 학교답지 않은 작은 분교 같은 글방이 있을 뿐이었다. 파브르는 이곳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마을 학교 선생님은 피에르 리카아르라는 이웃집 아저씨로 파브르의 이름도 그가 지어주었으며 믿음이 좋은 마을의 유일한 이발사이기도 하였다.

  교회 일에 열심이었던 피에르 선생은 학교의 일과 교회의 궂은 일을 돌보면서 어린 학생들에게 성경의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었다. 어린 파브르는 리카아르를 통해서 믿음이 생기기 시작하였으며 하나님께서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창조하셨다는 성경의 말씀을 깊이 간직하였다.

 

찌든 가난 ... 행상 . 막노동

독학으로 사범학교 수석합격

학업흥미 잃고 곤충채집 열중 ... '괴팍한 학생'

3년만에 졸업하는 능력발휘

 

  어렵고 찌든 가정 생활은 어린 파브르를 좋아하는 자연과 더불어 벌레만을 관찰하도록 놓아두지 않았다.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돈벌이가 될만한 일을 해야만 할 처지였다.

  {학교 안의 교회당 합창 단원이 되면 등록금을 면제하여 줌}

  어느날 학교에는 이런 공문이 나붙었다.

  "그래, 교회의 합창단원이 되자. 하나님께서 계속 공부할 기회를 주셨구나"

  파브르는 곧 교회 합창단에 들어갔다.

  그러나 로데에 온지 5년이 되었으나 집안의 살림은 조금도 가난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파브르의 가족은 또다시 이웃 마을인 툴루스로 이사갔다. 여기서도 파브르는 학비가 면제되는 종교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으며 마침내 졸업을 하게 되었다.

  이후 파브르의 가족은 몽페리에라는 도시로 또 한번 이사를 하였으나 오히려 가족의 찌든 생활은 점점 더 심해지기만 하였으며, 끝내는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주시리라}

  어린 파브르에게 의지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 뿐이었다. 열네살이 되어 부모를 떠난 파브르가 맨 처음 한 일은 레몬 행상이었다. 잠은 그저 공원의 벤치나 나무 밑에서 쪼그려 자기도 하고, 한때 철로변의 공사장 인부로 일하기도 하였다. 그러는 동안 호리호리한 그의 몸매는 더욱 야위어졌으며 일거리가 없는 날은 물만 마시며 보낸 날이 많았다고 그는 훗날 고백하곤 했다.

  "이렇게 일생을 보낼 수는 없어. 나라에서 학비를 보태주는 사범학교에 들어가자"

  그는 굳은 결심을 했다. 이를 악물고 독학으로 공부에 정진한 그는 어렵다는 아비뇽 사범학교에 놀랍게도 수석으로 합격하게 되었다. 이제 그에게 잠자리나 먹을 걱정만큼은 사라진 것이다. 그는 참으로 어린시절부터 공부하고 싶던, 하나님이 창조하신 지극히 작은 생물인 곤충에 대하여 공부할 기회가 생긴 것에 기뻐하였다.

  그렇지만 그 당시 프랑스의 사범학교는 국어와 기하학들을 중요하게 다룰 뿐 파브르가 좋아하는 동물이나 식물에 대한 학과는 전혀 없었다.

  파브르는 자연히 학업에 흥미를 잃고 곤충을 잡아 관찰하거나 산 위에 올라가 시를 짓는 등 선생님들이 보기에 엉뚱한 일에 열중하였다. 마침내 선생님들의 그에 대한 평가는 '게으름뱅이 열등생'이었다.

  "학교에 곤충의 날개, 다리, 껍데기까지 가져오지 않나 산 속 동굴에 들어가 밤을 새지 않나. 모범생이었던 파브르가 아주 괴팍한 문제 학생이 되어 버렸어"

  선생님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얼마나 어렵게 이 학교에 들어왔던가. 언젠가는 선생님들도 이해할 날이 오겠지"

  선생님들의 이런 평가에 자극을 받아 그는 또 한번 끈질긴 인내력을 발휘하여 마침내 4년간 다녀야 할 사범학교를 3년만에 마치는 놀라운 능력을 보였다. 이때 그의 동생도 사범학교에 입학시험을 치러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그의 가정에 오랜만에 웃음꽃이 핀 것이다.

 

'곤충기' 발간 ... 과학자들 찬사 연발

수십 종 등장 ... '추적 40년' 결실

과학강의 교인들 반발로 중단 ... 집필가 변신

파스퇴르와 믿음 형제로 친교

 

  졸업 후 카르팡트라스 공립학교의 선생님이 된 파브르의 당시 나이는 19세였다.

  이제 그는 아이들을 가르치며 그렇게도 원하던 곤충을 관찰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많이 갖게 되었다. 이때 파브르는 같은 학교에 근무하던 마리 비야르 선생과 마을 교회에서 결혼도 하게 되었다. 1884년 그의 나이 21세 때였다.

  안정된 생활 속에서 곤충들과 함께 하며 연구와 관찰에 정성을 쏟은 파브르는 마침내 비단벌레에 관한 연구로 프랑스 학사원에서 주는 '실험 생리학상'을 수상하였다.

  이때 유명한 세균학자 파스퇴르가 그를 찾아왔다.

  "제가 요즈음 누에의 병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파브르 선생의 도움이 많이 필요합니다"

  "파스퇴르 선생의 위대한 업적은 잘 알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선생의 훌륭하신 믿음을 존경합니다. 누에에 대하여는 제가 도와드릴 만한 일이 없지만 우리 믿음의 형제로서 교제를 나눕시다"

  어쩌면 이때 이미 파브르는 창조과학 강의를 시작한 셈이다.

  파스퇴르와 파브르는 모두 하나님의 창조 사실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종류대로 모든 생물을 창조하셨음을 믿고 진화론을 배격한 사람들이었다.

  파브르는 교회의 도움을 받아 이 당시 꼭두서니라는 나무의 뿌리에서 옷감의 염색에 쓰이는 알리자린이라는 빨간 색소를 순수하게 뽑아낼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는 데도 성공하였다.

  파브르에게 이제 시련은 멀리 간 것 같았다. 그러나 시련은 다른 곳으로부터 왔다. 과학에 대한 교회에서의 공개 강좌를 사람들이 오해하고 질투하여 비난하기 시작한 것이다.

  "신성한 교회에서 과학 강의를 하다니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행위이다."

  파브르는 교회의 강의를 할 수 없게 되었으며 학교에서도 나오게 되었다.

  21년 동안 정들었던  학교를 떠난 파브르는 오래 전부터 구상해오던, 어린이들을 위한 쉽고도 재미있는 책들을 펴내기 시작하였다. 9년에 걸쳐 그는 '과학 이야기', '전원의 과학', '식물의 생활', '우리를 돕는 동물' 들과 같은 귀중한 책들을 잇달아 펴냈다.

  48세가 되던 1871년 파브르는 오랑즈라는 곳으로 이사하였는데 이 책들은 모두 이곳에서 출판되었다. 그러나 그가 가장 사랑하던 아들 주을을 잃은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다시 세리낭이란 곳으로 이사한 파브르는 그 유명한 [곤충기]를 집필하기 시작한다. 오늘날까지도 전세계 어린이들에게 가장 사랑 받는 과학 서적 가운데 하나인 이 책은 발간될 당시에도 이미 프랑스 뿐 아니라 전세계 과학자들의 찬사를 받았었다.

  딱정벌레에 관한 관찰만 1백70 종류에 달했으며 1백30 가지의 벌들이 세밀히 연구되었다.

  이것은 모두 파브르 자신이 몸소 보고 관찰하여 판단한 것이므로 더욱 값진 것이었다. 특히 쇠똥구리에 관한 연구는 40년 동안에 걸친 인내의 결실이었다.

  이 일로 파리에서 '문화훈장'을 받은 파브르는 국왕 아들의 가정교사가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러나 그런 일을 기뻐할 리 없는 파브르는 정중히 사양하고 세리낭으로 돌아왔다.

 

'파브르의 날' 선포 ... 프랑스 국민 "흥분"

대통령 등 유명인 잇달아 "문안"

"작은 것에 충성" 성경대로 어린이 . 벌레 사랑

"예수님 없으면 암흑" ... 92세에 소천

 

  파브르가 진실로 사랑하고 관심을 가진 것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지극히 큰 것에도 불의하다}고 하신 성경 말씀처럼 하나님이 창조하신 작은 벌레들과 어린이들이었다.

  그가 여든 일곱 되던 해, 사람들은 '파브르의 날'을 선포했으며, 스웨덴 과학원에서는 영예로운 린네의 메달을 보내왔다. 그러나 그는 이런 일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프랑스 정부가 이 일에 축하 전보 한장 보내지 않자 파브르는 아무런 반응이 없는데도 프랑스 국민들이 먼저 흥분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의 작가 에드몽은 정부에 항의하여 신문에 다음과 같은 유명한 글을 실었다.

  "프랑스여! / 그대의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 / 이제 무너지려 하는데 아직도 스웨덴의 도움에만 / 기대려고 하는가! / 프랑스여! / 그대는 파브르가 이제 늙어 / 지쳐있는 것을 모르지 않으리라 /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 모르지 않으리라"

  당황한 프랑스 정부는 마침내 파브르에게 2천프랑의 연금을 주겠다고 공표하였다. 그리고 온 프랑스 사람들도 나서서 그에게 선물과 헌금을 하였다. 물론 이것은 모두 프랑스가 낳은 위대한 생물학자 파브르에 대한 프랑스 국민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이었다.

  그러나 정말로 당황한 사람은 파브르 자신이었다. 1912년 8월 4일 파브르는 이렇게 신문에 호소하였다.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저에게 이제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런 일들은 늙은 나에게 아무 소용이 없으니 사양합니다"

  그리고는 선물과 헌금을 보내온 사람들에게 다시 되돌려 주었으며 주소가 불분명하거나 돌려보낼 수 없는 곳에서 온 물건들은 세리낭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 후에도 프랑스 대통령과 유명한 영화배우 등 여러 사람들이 그에게 인사하러 찾아왔었으나 90세가 넘은 파브르의 진정한 관심은 세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분이 없으면 모든 것은 암흑뿐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나의 믿음을 빼앗는 일은 얼마나 쉬운지요"

  그의 진정한 관심은 그에게 작은 것들을 사랑하고 벌레를 사랑하게 해주신 그분, 바로 하나님의 곁으로 가는 일이었다.

  "젊었을 때에는 누구든지 고향을 뛰쳐나가는 것을 예사롭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고향은 그리워지게 마련입니다."

  이렇게 말한 파브르는 비록 가난 때문이기는 하였지만 누구보다도 일찍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과 벌레들에 대한 호기심을 키웠던 자신의 아름다운 고향을 떠나 여러 곳을 전전하였기에 고향의 그리움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연과 벌레들을 사랑하던 그의 영원한 고향은 바로 그 아름다운 창조 세계를 만드신 하나님의 품이었다. 교회 성직자의 손을 잡으며 이 위대한 시인이며 곤충학자였던 파브르가 92세의 긴 여정을 마감하며 평온히 눈을 감았던 날은 1915년 10월 11일이었다.

  그가 즐겨 다니던 고향 산 아래의 들판에 그의 시신이 내려졌을 때 그 관 위에는 작은 한마리의 벌레가 유난히도 반짝였다고 함께 했던 사람들은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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