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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임스 클럭 맥스웰(James Clerk Maxwell)

과학의 천재, 동정심 많은 기독교인(1831-1879)

 

  자기(磁氣)와 전기, 빛보다도 색다른 것이 있을까? 그러나, 19세기에 제임스 클럭 맥스웰은, 이들 현상은 똑 같은 기본 법칙이 다르게 나타난 것일 뿐이라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는 이 모든 것들뿐만 아니라 전파, 전파탐지기, 복사열 등을 우아한 하나의 연립방정식으로 표시하였다.

  제임스 클럭 맥스웰은 1831년 6월 13일에 스코틀랜드의 에딘버그에서 태어났다. 그는 에딘버그의 법률가인 존 클럭(John Clerk)의 독자였다. 제임스가 태어난 직후에 존 클럭과 그의 가족은 에딘버그 근처의 글렌레어에 있는 시골 사유지로 이사하였는데, 그곳은 맥스웰家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곳이었다. 그 당시에, 존 클럭은 맥스웰이라는 성(姓)을 추가로 채택했다. 그의 가족은 안락한 중류의 생활을 살았다.

  제임스는 헌신적인 기독교인인 그의 어머니로부터 초기 교육을 받았다. 거기에는 성경공부가 포함되었다. 제임스의 비상한 기억력은 그가 시편 119편을 모두 암기하던 그 당시에 두드러지게 되었다. 여덟살이 되었을 때 제임스는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이 재미없게 되었다. 그는 오히려 간단한 과학적 연구에 그의 큰 호기심을 발휘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예를 들면, 그는 주석 판을 이용하여 태양빛을 반사시키거나, 개구리의 생활 과정을 관찰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자연의 아름다움에서 하나님의 솜씨를 보라고 가르쳤다. 과학적인 연구와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가르침 사이에 완벽한 조화가 이루어진다는 이러한 신념은 제임스의 생애와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슬프게도 그의 어머니는 그가 아직 여덟살 밖에 안되었을 때 돌아가셨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는 자기 아들을 위하여 가정교사를 두었다.

  1841년에 제임스는 에딘버그 아카데미에서 정규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건강이 안좋아서 자주 결석하였지만, 그의 학업의 진보는 뛰어났다. 그가 15살 밖에 안되었을 때 첫번째 과학 논문 - 타원에 관한 수학적 해석 - 을 발표했다.

 

연구에 대한 수상

 

  1847년에 제임스는 에딘버그 대학에 들어갔으며, 곧바로 과학 논문 두개를 더 발표하였다. 1850년에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학하였으며, 4년 후에 졸업할 때에는 수학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그는 토성 주위의 고리의 안정성을 수학적으로 해석함으로써 독창적인 연구에 수여하는 유명한 상도 받았다. 맥스웰은 토성의 고리가 전적으로 고체 또는 액체일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것들은 작지만 각각 분리된 고체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판단했다 - 그 결론은 100년이 더 지난 후에 첫번째 보이저 우주 탐색선이 토성에 도달함으로써 확증되었다. 졸업 후에 맥스웰은 케임브리지 대학에 남아서, 광학과 유체정역학을 강의하고 이들 분야에 대해 연구를 수행하였다.

  1856년에 그는 케임브리지를 떠나 스코틀랜드에 돌아와서, 건강을 잃은 그의 아버지 곁에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제임스가 애버딘에 있는 마리쉘 대학에 물리학 교수로 새로이 지명되기 전에 돌아가셨다. 2년 후에, 맥스웰은 마리쉘 대학 학장의 딸인 캐더린 매리 듀어(Katherine Mary Dewar)와 결혼하였다. 제임스와 캐더린 맥스웰의 결혼은 행복하였지만 자녀가 없었다.

  마리쉘 대학이 케임브리지 대학의 애버딘 학사(學舍)와 병합되어 애버딘 대학으로 되었을 때, 맥스웰은 자리를 잃게 되었다. 그는 에딘버그 대학의 빈 자리에 지원을 했으나 실패했다. 그 자리에 들어간 사람은 펄시 구트리 타이트(Percy Guthrie Tait)인데, 그는 맥스웰의 학교 친구였었다. 타이트 역시 헌신적인 기독교인으로서, 수학과 물리학에서 상당히 성공을 거두었다.

  1860년에, 맥스웰은 케임브리지대학 런던 학사에서 물리학 및 천문학 교수가 되었다. 거기서 그는 1863년에, 영국 과학 진흥협회에서 전기 단위의 측정 및 표준화를 자문했다.

  1865년에, 런던을 떠나서, 그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스코틀랜드의 사유지로 이사했다. 거기서 그는 전기와 자기에 관한 연구 및 저작에 몰두했다.

  맥스웰이 태어나던 해(1831)에, 영국의 유명한 물리학자인 미쉘 패러데이(Michael Faraday)가 전기 발전기를 발명하였는데, 그것은 움직이는 자석을 이용하여 전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전류가 자기를 생성시킨다는 것도 밝혔다. 패러데이는 이들 전자기력이 전도체 주위의 공간으로 확산된다는 것을 확신했지만, 이 분야에 대한 그의 연구를 완성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주변 공간에 있는 력장(力場)에 관한 패러데이의 개념은 넓게 일반화되어 장(場)이론(field theory)이라 알려져 있다.

 

 

뉴톤과 비견되다

 

  전기와 자기에 관한 맥스웰의 연구의 주요 목적은 패러데이의 실험적 결과와 장이론에 관한 그의 개념에 깔려있는 수학적 기틀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맥스웰이 만들어 낸 네개의 수학 식은 아이작 뉴톤(Isaac Newton) 경의 운동법칙 및 앨버트 아인쉬타인(Albert Einstein)의 상대성이론과 함께 물리학에 가장 근본적으로 기여한 것으로 비견된다.

  맥스웰이 전자기파의 속도를 계산했을 때, 그는 그것들의 속도가 실질적으로는 빛의 속도와 같음을 발견하였다. 그는 빛이 다른 형태의 전자기파라고 결론지었다. 맥스웰은 다른 파장을 갖는 전자기파도 역시 존재한다고 제안하였다. 독일의 물리학자 하인리히 헤르쯔(Heinrich Hertz)가 1887년(맥스웰이 죽은지 8년 후)에 최초로 인공 전파를 만들어 냈을 때, 맥스웰의 전자기 이론이 완전히 확인되었다. (전파는 가시광선보다 더 긴 파장을 갖는다.)

  후에 발견된 X레이는 맥스웰의 예측을 또 한번 확인시켰다. (X레이는 극초단 파장을 갖는 전자기 방사선의 형태이다.) 20세기의 통신 기술은 대부분 맥스웰의 연구에 근거한다. 라디오, 텔레비전, 레이다 및 위성통신 등 모두는 그의 전자기 이론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1850년대 동안에, 저명한 수학적 물리학자인 윌리엄 톰슨(William Thomson)은 열, 기계적 운동, 유체(기체 혹은 액체) 운동, 전기와 자기 등과 같은 다양한 영역의 물리학에 있어서 실험적 결과에 깔려있는 공통의 수학적 기틀을 제시하였다. 이것은 이전의 과학자들이 수행한 연구를 이론적으로 상당히 확장시켜 주는 것이었다. 전자기를 빛과 연결시켰으며 후에는 전파와도 연결시켜주었던 맥스웰의 전자기이론은 물리학의 이론적 기틀에 깔려있는 이런 과정에 크게 기여를 했다.

켈빈 경은 맥스웰에게 귀중한 도움을 주었다.

  맥스웰은 그의 스승이었던 톰슨의 은혜에 깊이 감사를 드렸다. (톰슨은 후에 켈빈 경으로 알려졌다.)

  자신들의 연구가 20세기의 물리학자들에게 크게 영향을 미쳤던 19세기의 과학자들은 맥스웰에게 널리 감사하고 있다. 그의 전자기 이론과 그에 관련된 장 방정식(field equation)은, 질량과 에너지의 등가를 나타내 주는 아인쉬타인의 특별상대성이론을 위한 길을 포장해 주었다. 맥스웰의 개념은 20세기 물리학의 또다른 주요 혁신인 양자이론을 인도하였다.

  1840년에 영국의 물리학자 제임스 주울(James Joule)은 열과 기계적 운동 사이의 관계식을 수립했었다. 이 원리는 열동력학이라는 과학적 분야를 낳게 하였는데, 여기에는 기체 분자의 운동에 관한 연구가 포함된다.

제임스 주울의 연구를 맥스웰이 계승했다.

 

급속한 발견들

 

  1848년에 과학자 주울은 최초로 기체 분자의 속력(속도)을 산정하였다. 그러나, 주울은 모든 분자들이 같은 속력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간주했었다. 실제에 있어서, 분자들의 속도는 같지 않다. 그것들은 다른 분자들과의 충돌로 인하여 현저히 변화한다. 맥스웰은 확률 및 통계적 방법을 적용함으로써, 분자 속력의 최적 확률 분포를 산출하였다. 이 분포는 오늘날 '맥스웰의 속력 분포'로 알려져 있다.

  그가 통계를 적용함으로써, 열동력학은 통계학적 열동력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로 확장되었다. 맥스웰이 확률의 개념을 물리학에 도입한 것은, 전자기에 관한 그의 연구를 제외하면, 그가 물리학에 가장 큰 기여를 한 분야일 것이다.

  맥스웰은 또한 광학과 색시(色視: colour vision) 분야에 상당한 진보를 이룩했다. 그는 색맹에 관한 연구를 인정받아 런던의 영국학사원(Royal Societly)으로부터 럼포드 메달(Rumford Medal)을 수여 받았다. 맥스웰은 천연색 사진을 제시한 최초의 과학자 중의 하나이다. 그는 또한 탄성체와 순수 기하에 관련된 연구를 시도했다.

  맥스웰은 전자기에 관한 그의 초기 연구의 결과로써, 1861년에 명성있는 과학자 협회인 영국학사원으로 선출되었다. 1871년에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실험물리학의 교수가 되었다. 거기서 그는 캐빈디쉬(Cavendish) 연구소의 계획 및 시공을 자문해 주었는데, 그 연구소는 물리학에 지대한 발전을 가져온 것으로 유명하게 되었다.

 

진화론적 사고를 논박하다

 

  맥스웰은 그 당시에 널리 유행하던 다윈의 진화론을 강력히 반대했다. 그는 진화론적 사고에 관련된 고찰이 과학적 증거와 모순된다고 믿었다. 1873년에 영국 과학진흥협회에 보낸 논문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진화론을 필연적으로 연속적인 변화를 의미하기 때문에 진화론으로는 분자의 유사성을 설명할 수 없다. … 같은 종류끼리는 모두 각 분자가 정확히 같다는 것이 나타내는 것은 … 제조된 물건의 근본적인 특징이며, 그리고 그것은 그것이 영원하다는 것과 스스로 존재한다는 개념을 배제한다."

  맥스웰은 진화론적 사고를 다른 중요한 방식으로 논박할 수 있었다. 그는 1796년에 프랑스의 무신론자 라플라스(Laplace)가 제안한 성운설을 수학적으로 반증했다. 라플라스는 태양계가 기체의 구름으로 시작되어 수백만년에 걸쳐 수축됨으로써 혹성 등을 생성시켰다고 제시했다. 라플라스는, 따라서 창조주가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 초기에 이 철학은 기독교의 반대자들에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맥스웰은 라플라스의 이론에서 두개의 중요한 결점을 지적했으며, 그러한 과정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하였다. 라플라스의 이론은 점차로 사라져 갔다.

  맥스웰은, 과학적인 연구와 성경의 가르침이 일치할 뿐만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확신했다. 그의 노트에서 발견된 기도문에 이것이 반영되어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 당신은 당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셨으며, 그가 생령이 되게 하여 당신을 찾게 하시고, 당신의 창조물을 다스리게 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솜씨를 연구하게 하여 땅을 우리의 쓸모대로 다스리게 하시며, 당신께 예배드릴 충분한 이유를 갖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축복의 말씀을 받아들이게 하셔서, 당신이 보내신 그 분이 구원의 소식을 전하며 우리 죄를 사하심을 우리가 믿습니다. 모든 것을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창세기와 복음에 대한 믿음

 

  이 기도에서 맥스웰은 창세기에서 발견한 가르침 -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그분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드셨고, 그에게 동물을 다스리고 지키게 하셨다는 그의 믿음을 확언했다. 그 기도의 두번째 부분에는 복음의 메시지, 즉,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맥스웰은 성경에 대해 깊은 지식을 갖고 있었으며, 그가 자기 고향 글렌레어 근처에 설립을 도왔던 교회의 장로였다. 그의 기독교적인 헌신 또한 매우 실질적인 것이었다. 그는 시간과 물질 모두를 풍족히 바쳤다. 그는 병자와 집에서 못나오는 사람들을 자주 방문했으며, 그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그들과 함께 기도했다. 그는 또한 겸손하였으며 절대 무흠을 드러냈다.

  그의 연민과 자기희생적 자세는 분명했으며, 이는 J. G. Crowther가 쓴 맥스웰의 자서전에 잘 나와 있다: "그의 인생의 말년에 부인이 병들었었다. 그는 매우 꾸준한 관심을 가지고 부인을 개인적으로 간호했다.     자기 자신에게 불치의 병에 대한 초기 징후가 분명하게 나타났을 때, 그는 오랜 기간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병이 더 악화되고 고통이 심해졌을 때에도 불평을 하지 않았으며, 단지 자기의 병든 아내를 계속 간호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했다."

  맥스웰은 복부의 암으로 케임브리지에서 1879년 11월 5일에 48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는 그를 알고 있던 모든 사람 및 같이 연구했던 사람들에게 매우 존경을 받았다. 그와 가까이 했던 동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학에서 그의 동료였던 우리는, 그의 높은 정신력과 위대한 능력 및 독창적 관점이, 하나님 앞에서의 깊은 겸손 및 그분의 뜻에 대한 공손한 복종, 그리고 질병과 고통을 가진 자에게 위로를 주시며 친히 그것들을 감당하신 거룩한 구원자의 사랑과 대속하심에 대한 건전한 믿음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발견하였다.(Ann Lamont, Creation ex nihilo Vol. 15 No.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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